아홉 번째 고독
박형숙 지음 / 실천문학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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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환상의 틈바구니, 그 욕망의 지대

 

어쩌면 나는 소위 안정된 가족생활, 즉 공고한 일부일처의 관계만을 유일한 이상으로 보는 관념의 거부에 막연한 동의를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현실과 환상의 좁은 틈바구니에서 겨우 존재하느라 힘들었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쓴 이 작품집에 대한 '작가의 말'속에서 그 거부의 실체를 보고자하는 충동이 일었다고해야겠다. 누군가는 이 관념의 거부를 넓게 정의하여  '불륜(不倫)'이라는 한 단어에 가두어 두려하고  "불륜 소설은 쓰레기다."라고 그 통속성을 비난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것은  "인간 본성의 문제를 회피하는 위선"이라고 대응하는 식의 진부한 사회적 시선을 반복하고 싶지도 않으며,  또한 불륜도 사랑인가? 간통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어떠한 것인가? 라는 식의 관음증적 연민, 혹은 도덕적 잣대를 들이밀거나, 서로의 몸에 자신을 기록하기 위한 정사(情事)라는 식의 언어의 향연과 같은 수 많은 되풀이에도 관심을 둘 여유가 없다.

 

오직 "좁은 틈바구니"라는  이 경계지대, 소위 '불륜(不倫:Infidelity)'이라고 푹넓게 정의되는 상황의 영역,  상대자에 대한 신의를 가진 정인(情人)을 배반하는 행위, 보다 좁게 정의하자면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성적 관계' 를 맺는 사람들이 거니는 그곳에서  '겨우 존재'하는, 이 욕망의 지대에서 존재하려고 발버둥치는 인간들의 내적 풍경, 그 인간적인 진실을 이야기하려는 작가의 의지에 매력을 느꼈다고하는 것이 솔직한 심경이겠다. 그래서 이 소설집은 내게 좁은, 즉 현실과 환상의 틈바구니라는 존재지역, 그곳의 정서를 탐색하는 여정이 된다.

 

작품집의 모두에 있는 [풀 스토리]에서 그 환상의 첫 이미지를 엿볼 수 있다.  자신의 친구'태환'과 관계를 맺은 아내 '미령'에게 남편 '영수'는 왜 그랬어라고 묻는다. 그녀의 대답은 그야말로 환상 그 자체에 가 닿아있다. "그냥 궁금 했어, 내가 얼마나 자유로울수 있는지" .  궁금해서 새롭거나 모르는 것에 대해 알고자 하는 호기심의 발동이었다것이다. 이 소설의 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위선을 걷어낸 진실의 마주함이랄까? 

 

두번 째 수록작인 [한 낯의 꿈]에 이르면, '처음", "미지의 가능성"과  같은 신비감에 대한 현혹, 그 환상의 목소리가 있다. 그것을 유부녀인 '미희'라는 여성은 "가정보다 더 소중한 것", 그것은 "내 안에 있는 욕망"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상대자인 남성은 "성욕"에 불과한 것이라고 조롱하지만 말이다. 작품 [아홉번 째 고독]에서는 현실과 소설 속 허구의 인물을 왕래하며, 그 경계에서 혼란스러워 하는 세무사의 아내가 등장하여 '아홉번째 고독(9th-solitude)'이라는 허영끼 가득한 아이디를 사용하는 소설가의 미궁에서 진실을 묻는다. "사랑인가요?", 그러나 묻는 순간 대상은 사라지고 만다. 현실에 발을 지탱하지 않은 그 허구, 아니 환상의 부질없음과 공허함이 잔뜩 묻어난다.

 

소설 속  환상의 실체 유형 몇가지를 말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현실은 결혼제도 내에 있는 남녀이고, 환상은 욕망의 진실에 족쇄를 채운 금기와 금지의 실체이다.  여기서 오늘의 성(性) 이데올로기로서의 섹슈얼리티(sexuality)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작품 [한 낯의 꿈에서], 유부녀 '미희'는 "죄의식이란 한낱 불투명한 의식의 그림자"라고 자신과 유부남과의 성적 만남, 즉 불륜이라는 금지의 언어를 한 방에 돌파해낸다. 게다가 [칠월의 풀밭]이란 단편에서는 "이별만이 사랑을 아름답게 해주죠. 이별 없는 사랑은 부패"라고 하면서 늘 돌아설 준비를 하는 그런 관계, 어쩌면 성적 쾌락이라는 이익만을 향유려는 듯한 성 심리의 한 단면을 그려내기도 한다.

이처럼 이 틈바니구니에 서있는 사람들의 정서는 불투명한 의식의 그림자라는 죄의식, 전적으로 소유하지 못하는 불안감, 의심, 이별의 준비와 같은 현실성과 자유, 아름다움, 도취, 위안, 최상의 기쁨 등의 환상, 혹은 감정과 윤리 사이의 숨막히는 갈등 속에 놓여있다.

 

그러나 단편[비행]에서 아내 일탈의 추억을 상징하는 재즈의 선율을 담담히 수용하는 남자, [한 낮의 꿈]에서 아내가 출근 한 후 자신의 집에서 유부녀와 정사를 나눈 후 문득 "아내의 잔소리가 귓가에 살아나기 시작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라는 남자가 있는가하면, [칠월의 풀밭]속 여성 '성하' 처럼 세상의 모든 남자를 자신의 안에 담으며, 또한 남편을 사랑하는 여자, 또 다른 육체를 꿈꾸는 욕망을 말하는 여자가 있다. 남자와 여자의 성적 쾌락의 궁극이 어디에 있는지 극명한 대비를 느끼게한다. 이 대비는 자신의 친구와 성관계를 맺은 아내 미령이 "아주 작고 보잘 것 없이 느껴졌다."고, 또한 소설 [비행]에서 남편 '나'는 결혼의 이유를 "위생적이고 뒤탈 없고, 돈 안 드는 섹스"라고 주장하고, 단편[린의 수치]에서 전임강사 '나'는 여(女)제자로부터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육체적 관계를 맺은 여자의 심리적 도달점은 수치심"이란 것을 비로소 이해하는 것처럼, 성기 위주의 남성의 섹슈얼리티, 그리고 여성의 에로스적 본능, 즉 성과 사랑의 교호()로 진화한 여성의 섹슈얼리티, 나아가서 여성의 결혼에 대한 기대는 지금 오늘 우리의 결혼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남녀간 간극의 심연을 보여준다.

 

이러한 오늘날 여성의 성적 태도, 오랜동안 성적지위를 향상시켜온 여성들의 성 관념이 여전히 가부장적 태도에 머물러있는 남성의 그것과 괴리를 일으키고, 그 파열음은 더욱 커지기만 하는듯 하다. 소설 속 남자들은 오직 유혹 또는 정복의 테크닉이라는 방면에서만 사랑의 전문가가 되는 경향이 있으며, 자신들의 직업이나 일에서 자기정체성을 찾으려 하지만, 여주인공들은 처음, 새로움, 우발성과 같은 낭만적 사랑의 에로틱한 효력이 성적인 만족과 행복을 보장할것이라는 환상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바로 이 '새로움'이라는 환상의 공통성이 보이며, 이는  미래의 시간을 향해 유대를 공유하며, 자신의 욕구를 드러내고 서로에게 민감해질 준비가 되어있음이라는 의미를 내재하고 있는 것 같다. 성(性)이란 단어 만큼 억압된 언어도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문자 그대로 윤리적이지 않다는 불륜(不倫)이라는 광의의 단어로 남녀의 성을 포괄적으로 금기시하고 있다. 이 금기의 부조화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부정의 언어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이 환상의 공통성에서 우리는 보다 공고한 결혼관계, 부부관계, 연인관계를 진전시킬 수 있지 않을까하는 것이다.  '앤서니 기든스'가 말한 '합류적 사랑'의 정의처럼 남녀 "두 사람의 정체성이 각기 달랐음을 인정한 위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협상해가는 그러한 사랑", 그리고 "관능의 기술을 결혼 관계의 핵심에 도입" 한 그런 사랑의 관계로, 바로 에로티시즘은 신체의 감각을 통해 표현되는 감정을 의사소통이라는 맥락에서 가꾸어가는 것, 곧 쾌락을 주고 받는 기술임을 이해하는 것이지 않을까?  이러한 측면에서 나는 감히 이 소설집을 성적 쾌락의 상호적 성취를 결혼과의 유지 또는 해소를 좌우하는 핵심요소로 그려낸 수작(秀作)이라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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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5-11-03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을 읽지 않아 필리아(비의식) 님의 논리만 가지고 여쭈어 보겠습니다. 결국 필리아(비의식) 님의 결론은 (부부 사이의) 사랑은 “쾌락을 주고 받는 기술임을 이해하는 것이지 않을까?” 하는 것일 텐데요. 이 결론에 이르는 과정은 역시 사랑이 아닌 ‘배신 혹은 불륜(不倫)’이라는 계기였습니다. 필리아(비의식) 님의 논리 전개에 그렇게 나타나 있죠. (혹은 박형숙 소설의 이면에요.) 그렇다면 사랑은 사랑 그 자체만을 통해서는 인식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제가 저런 물음 묻고 보니까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까닭은 사랑과 쾌락에 대한 개념적 착종을 일으킨 것 같아서요. 무슨 말씀이냐면, 사랑이란 개념에는 정신적/추상적 가치가 더 강하게 내재된 것 같고, 쾌락이란 개념에는 물질적/물리적/감각적 요소가 핵심적인 것 같다는 것이죠. 문학이라는 것을 논리에 치중해 분석하는 것은 그야말로 너무 건조한 것일 텐데요. 그렇더라도 소설가나 소설비평가는 개념적 착종에 너무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위험한(?) 편견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필리아 2015-11-04 06:50   좋아요 0 | URL
네, 쾌락을 주고 받는 기술이지요, 그런데 님의 말씀은 쾌락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의 문제같군요. 결혼이라는 남녀의 결합과 유지에 대해서 님의 지적처럼 감각을 경시해서는 않된다는 것이구요, 소위 관념적이고 정신이기도 한 사랑과의 융합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합류적 사랑`이지요. 편견이라 비판하셔도 할 말은 없습니다. 일천한 감상평에 성심의 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