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오타르, 왜 철학을 하는가?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지음, 코린 에노도 해제, 이세진 옮김, 이성근 감수 / 북노마드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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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타르는 '철학이란 무엇인가?' 라고 묻지 않는다. 이처럼 원점에서 철학을 찾으려는 것은 스스로 침잠하는 그 본질을 망각한 실착행위(실수)라고 비판한다.  그래서 '왜 철학하는가'라고 묻는다. 사실 우리들은 일상적 삶 속에서 '철학'을 말할 기회는 거의 없으며, 현실의 실제와는 동떨어진 형이상학적 세계의 한가한 사유정도로 여기기까지 한다. 그런데 과연 철학이 이렇게 삶의 실제와는 이격된 존재일까? 만일 그렇다면 인간의 삶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는 철학은 이미 세상에서 사라져야하지 않았을까?

'왜' 하느냐는 물음은 이러한 의미에서 이미 우리의 삶속에 실제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전제이며, 또한 "의문시 되는 대상의 실제적 현존과 가능적 부재"가 함께하고 있음을 함축하고 있다.

 

이제 리오타르는 급진적인 전개에 착수하는 듯하다. 바로 이 물음 자체가 '욕망'의 본질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욕망이란 자신에게 없는 것(부재)을 향해서 나아가듯 대상에게로 향하는 움직임이지 않은가? 현존하는 것이 자기에 대해서 부재하든가 부재가 존재하는 한에서 욕망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존의 모든 관계는 부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라고 썼던 '라캉'의 이 당연한 말에서 욕망이야말로 우리 존재의 주인임을 확인하게 된다. 철학은 왜 하는가? 라는 물음의 답은 바로 인간은 '왜 욕망하는가?' 로 답변된다. 그래서 이 책은 '욕망' ,  본질상 자신의 결합속에 존재와 부재를 품고 있는, 그러면서 한데 뒤섞지 않고 함께 지탱하는 그 힘을 찾아가는 여정이 된다.

 

'플라톤'의 [향연]中 '소크라테스'를 유혹하는 '알키비아데스'와의 대화를 통해 철학과 욕망의 관계를 흥미롭게 풀어나간다.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의 매혹적인 아름다움, 자신의 몸을 대가로 소크라테스의 지식을 얻고 싶어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가 요구하는 대가인 지식을 내놓을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다고 알키비아데스의 거래제안에 모호하게 답한다. 아테네의 최고 스타인 알키비아데스는 이렇게 철학자를 정복하려 했으나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더욱 몸이 달아 안달이나고 되레 종국에는 소크라테스의 노예가 되고만다. 소크라테스가 짐짓 위선을 떤 것일까?  "지혜란 결코 자신을 믿지 않기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진실을 말했을 뿐이다.  "항상 상실되고 새롭게 부재의 현존을 찾아나서는 것이 지혜"이니 소크라테스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반응을 보인것이다. 물론 알키비아데스의 거래가 실착행위인것만은 아니다. 결국 자신을 내어주는 방법으로 소크라테스에 안겼으니 어찌보면 리오타르의 해석처럼 알키비아데스는  "정념의 멋진 게임"을 한것이며, '헤겔'의 말처럼 "노예는 주인의 주인"이니 말이다.

 

이 재미있는 일화에서 알키비아데스는 '지혜'를 찾는대신에 '자신이 왜 찾는가를 찾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철학한다는 것은 바로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는 것"이라는 기막힌 답변이 된다. 플라톤은 이 일화에서 이처럼 철학을 얘기하는 것으로 만족했을까? 여기에는 이미 사물화할 수 없는 것을 '사물화'시키는 인간들의 논리에 반성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가 있다. 지혜를 마치 소유가 가능한 사물처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논리를 중단시키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철학은 현실의 삶 깊숙이, 인간의 일상적 삶 자체이다. 이렇게 리오타르와 얘기하다보면 철학은 어떤 주제에 대한 사색이 아니라 모든 세상의 정념들이 있으며, 스스로에게 말하는 담론을 통해서 자신을 파악하는 한 순간 한순간이 된다는 것을 절로 깨우치게 된다.

 

리오타르는 이 욕망과 철학의 관계성을 통해 왜 철학을 하는지 더욱 밀고나간다. '철학의 기원'에서는 일자(一者)의 상실, 의미의 죽음, 다시말해서 인류가 일자, 통일성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그로인해 상실감과 분열속에 살아가는 인간이 '의미'를 탐색하는 것처럼 당연한 행위가 없다고 주장하며, '철학과 말'에 대해서라는 강의를 통해서는 "사유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사유를 표현하는 것이 말"이라는, 사유를 사물처럼 여기는 생각에 딴죽을 걸며 사물화적인 발상을 비판하고, 생각도 이미 말이며, 생각하는 바를 명명할 수 없다면 아직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절대 명제를 선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4편의 소르본 대학 예비교양과정 강의)은 4편인 '철학과 행동에 대해서'라는 강의에서 방점(傍點)을 찍는다. "사유가 현실에 이르는 것 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현실이 사유에 이르러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철학은 자기 시대의 현실적인 문제의식에 호응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또한 이데올로기는 형이상학의 세계, 비인간적 세계, 내세 따위를 말함으로써 문제의식에 대한 화답이나 실제 사람들을 일깨우고 확립하는 방식 자체가 현실세계에서 벗어나 실제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철학이야말로 현실에서 체험되는 '결핍'에서 비롯되기에 다른 것에 대한 욕망, 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다른 관계 조직에 대한 욕망이 낡은 사회적 형식들을 뛰어넘지 못하는 데서 현실성이 나오는 것이라고, 철학이야말로 현실의 삶이며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리오타르는 그야말로 걸출한 철학의 정의를 내린다. "욕망이 있기 때문에, 현존속에 부재가 있기 때문에, ~ (중략) ~ 또한 권력이 아닌 우리의 권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얻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소외되고 상실됨으로써 사태와 행위, 말해진 것과 말하기의 사이가 벌어지고 말았기 때문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말을 통하여 결핍의 현존을 증명하지 않을수 없기 때문에" 어떻게 철학을 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너와 나, 우리들, 우리사회에는 철학이 실종된 듯하다. 자기 욕망의 부정, 자기의 현존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들끓는 사회, 즉 반성이 없는 우리 사회를 되돌아보게 된다. 철학하는 사회, 그 진솔하고 사유와 풍부한 욕망이 넘실되는 사회를 그려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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