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위대한 명연설
에드워드 험프리 지음, 홍선영 옮김 / 베이직북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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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역사에 어떤 새로운 흐름, 또는 전환을 만들어 낼 정도의 연설, 그것은 대중의 마음을 자신의 신념이나 이기적 목적의 실현을 위해 설득하는‘말(語)’일지언정 분명 무언가 인간의 감성을 꿰뚫는 통찰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이를 조금 비딱하게 말하자면 사람, 군중의 심리를 선동할 줄 아는 기술에 능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고, 반대로 우호적으로 표현하자면 자기희생, 겸허와 같은 진심으로 느껴지는 감동이 담겨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연설집에는 17세기 영국여왕‘엘리자베스 1세’의 오늘의 시선으로 읽자면 오만방자한 의회연설부터 21세기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인‘버락 오바마’의 취임연설까지 영미권(英美圈)을 대표하는 40여 명연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에는 시대의 간극 탓으로 명문이라 할 수도, 또는 감동이나 공감을 가질 수도 없는 것들, 서구중심이라거나 자국중심의 이해관계에 얽혀있어 반감을 일으키는 것들도 있다. 그럼에도 여러 의미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부정하기는 쉽지 않은데, 근현대사의 생생한 현장을 볼 수 있다는 것과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명문들을 포함하고 있는 연설의 전체와 맥락을 접할 수 있다는 유익함 등이라 하겠다.

특히 부수적으로 획득하게 되는 유익성이 어떤 측면에서는 명연설의 구성적 측면을 넘어선다 할 수 있다. 미국의 대 영국 식민지 독립투쟁, 인디언 원주민에 대한 백인의 악행, 흑백 인종차별의 지난한 역사, 양차대전 당사국의 현황과 입장, 구미 열강과 소비에트 러시아 및 국제 공산주의와의 팽창주의 대결, 식민지배에 대한 영미의 관점, 여성 참정권을 비롯한 민주주의 실현의 과정, 하물며 지구 생태계보존, 사형제도, 인종간의 화합을 향한 진정의 목소리까지 정의와 도덕적 가치에 이르는 폭넓은 식견들을 목격 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위대한 명연설』이라는 이 저술의 가치는 단순한 연설집의 의미를 뛰어넘어 근대 역사와 사상의 향연이랄 수도 있다.
한 인디언 종족의 추장인‘테쿰세’의 만족 할 줄 모르는 백인들의 탐욕에 대한 적극적 저항의 외침이나, 오늘의 흑인 대통령 탄생의 밑거름이 된 노예해방전쟁기의‘프레더릭 더글러스’가 외치는 백인들의 이중적인 도덕성의 잣대와 위선에 대한 주장, 여성 참정권의 당위성에 대한 투쟁의 연설에서 뿌리깊은 인종과 성적차별, 제국주의적 본성을 보면서, 오늘의 서구사회가 역사에 대한 반성은커녕 잃어버린 19세기의 제국주의적 자신들의 힘의 회복을 부르짖는 가증스러움도 확인하게 된다.

1918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주창한 ‘평화조약 14개 원칙’을 포함하는 유명한 연설은 당시 식민지 상태였던 한국으로서는 중차대한 의미를 지니는데, “타인에게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도 정의는 실현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뚜렷이 확인하였다.”고 짐짓 평화와 정의를 말하지만 식민지 주권문제는 지배국가의 뜻에 맡긴다는 터무니없는 내용을 담고 있음에서 단지 자국의 이익을 위한 평화전략이상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는 것과 같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아전인수식의 연설들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것인데, 그들, 영국이나 미국 등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자국민에게는 더없이 열정과 희망을 자극하는 것이었겠으나 그들과 반대쪽에 서있는 아시아인, 동양인으로서는 입맛이 쓸 수밖에 없다. ‘윈스턴 처칠’에 대한 영미국가들의 존경을 모를 바는 아니나, 그의 연설에서 나는 한 마디로 전쟁광의 모습과, 패권주의자의 야심만을 읽게 된다. 그의 연설은 ‘평화의 핏줄’이라는 별명까지 붙어 다니는 모양이지만 “미영 양국의 공동기지는 전 세계 수많은 섬에 퍼져있다. 우리군의 군사기지가 될 것”이라는 한껏 들뜬 팽창주의적 야심이나 “물질적 풍요에 이의를 다는 것은 국가의 자유를 저지하는 인간 이하의 범죄다”와 같은 근시안적 가치관에서 사실 좌절감이 더 깊어지기만 할 뿐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윌슨이나 처칠같은 서구 제국주의 지도자들의 모순된 내용에 대한 서구인들의 열광만이 있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미국의 대통령‘프랭클린 루스벨트’나 영국 수상 ‘해럴드 맥밀런’ 같은 이들의 서로의 차이에 대한 이해,  그러면서 차이를 넘어 먼 미래의 앞날까지 내다보고자 노력하는 다원성과 자유와 관용의 모습이나, “물질적 부가 성공의 기준이 아니어야 한다.”면서, “도덕적인 자극이 더 이상 맛없는 이윤에 대한 맹목적인 추구 때문에 가려져선 안 된다.”는 윤리적 변화와 행동의 실천에 대한 반성과 요구는 그야말로 보편적 진리를 내재하는 명연설의 귀감으로 새겨지기도 하는 것이다. 

한편 잘 알지 못하던 오스트레일리아(호주)의 수상, ‘케빈 러드’가 호주원주민에 대한 이주민인 백인들이 수백 년간 자행한 야만적 폭력과 차별을 진심으로 사죄하는 2008년 국회연설은 진정 진한 감동을 안겨준다. “타들어가는 괴로움이 종이를 뚫고 나올 듯이 고함을 내지릅니다. 그들에게 가해졌을 상처와 모욕, 멸시, 어머니와 자녀를 물리적으로 갈라놓는 그 터무니없는 잔인함이 우리의 감각을, 인류애를 깊숙이 찌릅니다.”라는 절절한 이해와 속죄의 표현, 더구나 “이렇게 사죄드리지만 겪은 고통을 없앨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말은 그리 강력하지도 않고 슬픔은 지극히 개인적인 까닭에...”하는 구절에서는 감동으로 눈물이 다 나올 정도이다. 이러한 진심의 사죄를 더욱 빛나는 하는 것은 세 번 거듭되는 사죄의 말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총리로서 사과드립니다.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를 대신해 사과드립니다.  오스트레일리아 의회를 대신해 사과드립니다. ” 그는 이렇게 'I am sorry'를 세 번이나 말했다. 어느 누가 그를, 백인들을 용서치 않겠는가! 이것이야말로  21세기 최고의 명연설이 아닐까?

‘마하트마 간디’의‘비폭력, 비협력 운동(사티하그라하(satyagraha))’의 의지를 그대로 드러낸 재판정 연설, 사랑을 위해 왕위를 내던진 시대의 로맨티스트로 기억되는 영국 왕‘에드워드8세(윈저공)’의 퇴임사, ‘워터게이트’라는 파렴치 행위로 중도 사임하게 된 ‘닉슨’의 몰염치하고 졸렬한 자기변명에 급급하는 연설, 영미권 국가들의 소위 20세기 4대 명연설이라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취임연설, 윈스턴처칠의 나치침략 전쟁 독려사, 존F.케네디의 취임연설, 마르틴 루터 킹의 워싱턴 평화행진 연설, 신자유주의를 주창하는 마거릿 대처의 공기업 민영화, 공공지출의 감축, 노동조합의 규제, 나아가 패권주의 부활의 외침같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연설까지 다양한 역사적 사건을 포함하는 진귀한 자료들은 이 연설집의 또 다른 기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열정과 감명을 불러일으키는 이들 명연설 테크닉을 배우는 참고로서는 물론 역사적 사실과 인류의 보편적 진실로서의 도덕성과 정의에 대한 성찰까지 실로 일거양득, 일석삼조의 저작으로서 면모를 갖추고 있다. 한 권 쯤 읽어보고 지닐 만한 도서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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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째 이름 모중석 스릴러 클럽 27
루스 뉴먼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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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집어 들었다면 에필로그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책장을 덮을 때까지 결코 내려놓을 수 없다. 명문 케임브리지대, 젊은 대학생 무리들, 반사회적 성격장애자, 성적 학대, 살인사건과 같은 소재도 흥미로운 요소이지만 끊임없이 현혹되는 사건의 장치들에 기만당하고 그 전복이 거듭되는 함정에 빠지게 되는 의식의 향연, 그리고 '에어리얼(Ariel)'칼리지라는 케임브리지 29개 칼리지에는 없는 허구의 배경과 함께 억압받는 여성의 고통을 섬뜩하고 처절하게 그려내곤 했던 시인(詩人) '실비아 플라스(Sylvis Plath)'의 자살과 그녀의 정신병원 경험, 소외와 자기파괴라는 음침함이 고스란히 스며있는 유고시집 『에어리얼(ariel)』이 연결되어 기묘한 환상을 키운다.

단지 살해사건의 용의자 추적이라는 궤적이 주는 흔한 스릴이나 범죄수사과정의 추리에 머물지 않는다. 피로 낭자한 살인 현장에 온 몸에 피를 뒤집어 쓴 채 텅 빈 눈을 하고 자아를 잃어버린 것 같은 여학생 ‘올리비아’, 피살자의 흘러내린 내장을 안으로 밀어 넣는 남학생‘닉 하드캐슬’처럼 눈에 보이는 사실은 있으나, 살인자는 그야말로 오리무중이라는 아이러니가 맨 먼저 호기심을 이끈다. 그리고 시간을 거슬러 발생한 살인 사건과 세 명의 피살자, 동료 학생들의 관계성이 암시와 복선을 내재하고 인간들의 복잡한 심리와 행동, 그 갈등들을 매혹적으로 그려낸다. 게다가 이성에 대한 유혹과 소유욕, 질투와 배신이라는 젊은 남녀들이 발산하는 본능의 무대창치로서 캠퍼스 생활은 감각적 재미를 더하고, 소설의 중심 플롯이 되는 정신분석과 심리치료의 장면들에서 펼쳐지는 지적 게임과 그 곳에서 드러나는 아동의 성적 유린과 인간의 가학성을 보게 되는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독자의 의식을 지배한다.

한편 이번 한글 번역본의 제목인‘일곱 번째 이름’은 한 인간의 내면에 여러 교대인격을 지닌, 세칭 다중인격자를 상징하고, 소설 내에서도 반복되어 설명되고 있지만 원제목인‘twisted wing', 즉 ’비틀린 날개‘라는 기생곤충을 통해 “뒤틀린 내면을 지랄 맞게 잘 숨기는 몸”을 비유함으로써 반사회적 성격 장애자의 성향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제목에서부터 시작된 이러한 소설적 장치들은 반전요소의 시발점이 되고 있는데, 이는 몇 차례의 거듭되는 반전에도 실마리를 잡을 수 없는 눈가리개이기도 하다. 범인에 대한 심증이 굳어지는가하면, 이윽고 형사 판결조차도, 수사지휘자, 용의자의 심리분석자까지도 반전을 회피하지 못할 정도이니 작가의 교묘한 구성에 그만 혀를 내두르게 된다.

작품 초반부에 범인의 프로파일링에서 추정하는 내용들, 즉 추상적이고 막연하며 도식적인 일상적 표현들이 얼마나 정교한 단서들이었는지를 책을 마치고 나서야 깨닫게 되니 싱겁고 겸연쩍은 웃음이 절로 나오기도 한다. “오랫동안 공상하던 놈의 짓 같거든. 이렇게 극단적인 시나리오에 대한 환상을 키우려면 세월이 필요한 법이다.”라는 문장의 구체성을 어떻게 흩어진 내용들에서 독자가 꿰어 맞추느냐의 능력이라고 할 수 도 있을 것이다.

사실 주제의식에 대한 이해보다 이 소설은 심리상담 장면, 목격자의 진술, 피해자 동료 학생들의 진술과 같은 단서와 작품의 호흡을 끊을 수 없도록 마력을 가하는 작가의 교활할 정도의 심리 지배력이 훨씬 매력적이겠지만, 구태여 주제성을 부각한다면, 평생을 가족과 기성사회로부터 고문 받고 학대받고 경멸 받은 사람이 성장하여 사회에서 어떤 인간으로 살아 갈 수 있겠는가하는 연민이기도 하며, 혹은 그 증오와 분노의 실체에 대한 성찰을 통해 우리 사회의 건강성에 대한 회의와 반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인간의 행위나 본성을 심판하는 일에 있어서 인간사회와 그 제도가 보이는 한계를 찾을 수도 있고, 해리성 정체성 장애의 과학적 판단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나 반사회성이 지니는 정신분석학적 연민에 대한 반대 가설의 입증이기도 하다.

상대방을 짓밟는 법을 잘 아는 사람들, 누군가의 행복에 독을 한 방울 떨어트리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들, 지나치게 타인의 상처와 고통에 연민을 보내는 사람들이 피살자들의 성향이다. 타인에게 적절히 섞여들어“숙주의 몸을 의태(擬態)”할 줄 아는 인간들은 이러한 인간들의 목숨을 빼앗는다. 특히 순종을 가장하고 수동적이며 헌신적인 연인이 그럴듯하게 의태하고 나타날 줄 어떻게 알겠는가? 궁극적 목적이 난도질 그자체인 연쇄 살인자가 대반전을 알리는 달콤한 목소리,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아~절묘하게 잘 쓴 소설이다! 아마 재미의 지존, 반전의 종결자! 라 하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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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의 휴머니즘 - 진정한 휴머니즘을 향한 푸코의 사유와 실천의 여정 철학 스케치 2
디디에 오타비아니 지음, 심세광 옮김, 이자벨 브와노 삽화 / 열린책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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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의 비판적(?) 방법론 또는 사유방식을‘지식의 고고학’이라고 한다. 고고학이란 본래 땅 속에 묻힌 역사적인 것의 기원을 통해 그 시대의 삶의 방식을 연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알려져 있지 않거나 알지 못하는 지식의 층위에 드러나지 않은 어떤 관계성을 탐색하는 것이 바로 지식의 고고학이라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 저작은 이처럼 푸코가 천착한 사유의 거대한 틀을 기반으로 인간 사회가 내재하고 있는 경향들에 대항해 그가 일관되게 말하고자 했던 저항의 담론을 생성해 낼 수 있는 도구들을 깔끔하게 정리하여 전달해주고 있다 하겠다.

푸코의 고고학적 방법론이란 특정 시대의 담론들은 그것들이 지니는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결합규칙과 상호관계를 이해하게 되면 그 시대를 지배하는 공통의 토대를 노출시키는 복잡한 관계들을 밝혀낼 수 있다는 관점이다. 그래서 그는 시대의 서로 다른 언표(言表)들과 문서고들이 외부성과 연결되어 만들어 낸, 그 어떤 한 시기를 총합하는 인식론적 형상들이나 형식화된 체계들을 발생시키는 관계를 이해해 보려고 시도한다.  그의 저술 중 『광기의 역사』에서 등장하는 대감호나 정신병원과 같은 공간이 인간의 정의, 즉 광인(狂人)이나 사회적 일탈자들이 어떻게 취급되는지를 해독해 내는 것과 같은 예라 할 수 있다. 대감호라는 격리시설은 광인들, 걸인, 빈자, 방탕자들과 같이 사회질서를 동요시킬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이성적인 동물’로 규정된 인간의 범주에서 배제하여 이성(理性)의 도식 밖에 있는 공간으로 내모는 장치이다. 바로 이러한 사회적 실천행위는 당대의 가치관이나 사상적 토대가 된 어떤 담론들의 형상화이며, 이를 통해 그 사회의 도덕성, 정치적 선택 등의 관계성을 이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같은 언표인 광인이라도 르네상스시대에 그들은 “은밀한 진실, 이성이 모르는 지식을 소유한 자”라하여 사회에서 배제되거나 격리되지 않았다. 그러나 고전시대에 들어서면 소위 데카르트의‘생각하는 나’와 같은 코기토(cogito)의 이성 중심의 사고관이나, 광기를 착각, 오류, 합리적 길을 벗어난 부도덕한 도덕적 주체로 취급하여 이성의 장으로부터 완전히 격리시키듯이 특정시기의 언표들과 실천들의 관계를 분석하면 그 시기가 의도하는 담론적 질서들을 통일 할 수 있는 관계들의 총체를 알 수 있게 된다. 이처럼 담론간에 존재하는 관계인 언표들 총체의 공통 토대를 푸코는 '에피스테메(episteme)'라 부르는데, 이것은 어떤 사회의 잠정적 형식화된 체계들을 발생시키는 지배적 담론들을 추정하고 분석, 비판, 저항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담론과 광인, 이성, 대감호, 정신병원과 같은 이질적 언표들에서 푸코가 읽어낸 ‘규율사회’와 ‘권력’과 같은 인간사회의 특징적 인식이 어떻게 사람들을 예속시키고 통제하며 조작하는지, 그 작용의 현상들을 발견하게 된다. 대감호라는 일방감시체계는 보여 질 수 있고 또 처벌받을 수 있다는 개인의 공포감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장치이다. 이는 바로 인간의 정신을 붙잡고 일탈을 예방하게 하여 규율에 맞는 동질화 된 인간, 온순하게 순종하는 신체를 만드는 일종의 기술인 것이다. 그래서 지식에 통합된 권력은 “인간을 복잡하고 규율화하는 복잡한 생산구조 내에서 기능하는 신체 상태로 환원시켜 개인을 모두 유사하거나 혹은 적어도 비교 가능하고 양립 가능한 존재”로 바꾼다. 즉 권력은 규율을 금기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을 최적화하려는 사회구조를 창조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담론이 형성하는 지배적 질서요 권력의 심급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자기 자신들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들 발화한 담론의 질서에 예속된다. 일시적 사건에 대한 허용과 금지의 이분법으로 심판하는 법과는 달리 규율은 일군의 규범들로 사람을 항시적으로 평가하고 압박한다. 그리고 이는 조사에서 점검으로 그 방법론을 진화시켜왔으며, 보이지 않는 눈들, 잠재적 통제의 임무와 같은‘내치’의 기술을 가다듬어 왔다. 사실 우리는 무한히 작은 정치권력이 포위한 환경 속, 촘촘히 들어찬 감시의 망 속에 살고 있다는 의미이다. 비근한 예로  우리는 자신들이 내면화한 규범체계에 부합하지 않는 타인에 대해,‘정상이 아니야’라고 무심히 말하지만, 이 언표에는 단지 자각하지 못했을 뿐 이미 무수한 외부의 담론적 질서에 학습되고 노출된 무의식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즉 동일한 인간으로 변형시키려는 규율사회의 권력에 침식되어 차이를 제거하고, 일탈을 금지하여 시민을 ‘온순한 신체’를 가진 부품화 하는데 저항 없이 동조하는 것인데, 그러나 정상과 비정상이란 그 본질을 보면 사실 어이없는 다양성의 배제, 차이의 제거와 같은 전체주의적 권력의 도사림을 볼 수 있다. 이처럼 동일화시키려는 규율체계에 종속된 사회체계가 다양성으로 풍부한 낯선 세계와 마주할 때에도 지속적인 존재가 가능할까?

그래서 푸코가 말하는‘주체’를 발견하는,‘주체화’에 대한 이해는 예속을 선택한 오늘의 사회를 극복하고 참된 인간관계, 다양한 사유와 행동, 문화를 존중하고 함께 살아가는 인류를 위해 절대적인 과정이 된다. 내가 말하는 것들, 마치 나의 언표나 담론이라 생각하는 것이 자신의 의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접근 할 수 없었던 숨겨진 토대, 즉 무의식의 차원에서 발화되는 것인데, 발화하는 대다수의 담론들은 우리들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속한 사회와 제도의 산물임을 깨닫는 것이다. 결국“내 자신을 구성하게 될 이 일련의 담론, 규칙, 그리고 규범과 직면해 나는 여전히 주체일 수 있는가?”하는 의문이 당연히 터져 나온다. 이의 대답은 일견 단순하다 할 수 있는데,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예속의 절차를 깨닫고, 그리고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푸코는‘자기 배려’를 강조한다. 이는 자기 연민과 같은 자기에 대한 핥고 빨기나, 카르페 디엠(carpe diem; 지금의 매순간에 충실하라)류의 하루하루 사는 삶의 권유가 아니라, '멜레테 타나토(melete thanatou)', 즉 막 죽으려 할 때처럼 내 자신의 행동을 사유해 보려고 목표하는 것, 그럼으로써 “내 자신으로의 회귀, 내가 영위한 영원한 삶으로의 회귀, 죽음의 척도에 비추어 내가 실현하고자 하는 행동의 가치로 회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 자신을 주체화할 때 비로소 자기로의 회귀, 예속되지 않은 진정 인간다운 삶, 곧 휴머니즘을 회복할 수 있게 된다.

이 짧은 저술이 과연 푸코에 대해 얼마나 얘기해 줄 수 있을까하고 의심의 눈초리를 가졌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의 죽음’을 선언한 푸코, 안티-휴머니스트로 인식된 푸코야말로 진짜배기 휴머니스트라고 말하는 이 저술이 채택한 푸코 읽기와 해독은 그 설명과 주제의 뛰어난 연결성을 확보한 유연함과 명료한 해석으로 엄청난 지성의 광휘를 보여준다. 아마 푸코가 일관되게 제시하려 한 저항의 담론을 생산해 낼 수 있게 해주는, 사유의‘연장통 같은’개념적 도구들을 이처럼 체계적이고도 수월하게 제공한 저작은 감히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셸 푸코’의 저술들을 읽었던 사람에게는 그의 사상에 대한 완벽한 정리가 되어주고, 앞으로 읽으려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기막힌 길잡이가 되어줄 저작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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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버지를 죽였다
마리오 사비누 지음, 임두빈 옮김 / 문학수첩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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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제목의 선정성, 패륜성이 시사하는 부도덕성에서 이를 변호하려는 논리의 기만성을 보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존속살해(尊屬殺害), 아비를 죽이는 아들의 행위에는 대체 어떤 이유를 거론 할 수 있을까? 하는 이성적 거부로 인한 비난의 시선을 작가는 어떻게 설명하려는가에 대한 엿보기의 심리라 하여야 할까? 아무튼 이러한 독자로서의 심리를 꿰뚫듯이 “숨 쉬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아버지를 죽였다.”고 하는 문장에 휘말려 그만 내쳐 읽을 수밖에 없게 된다.

3장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2장은 살해자가 쓴 소설사이의 소설인「미래」라는 미완성 소설이 놓여있다. 살해자가 심리 상담자에게 진술하던 중 자신의 심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읽기라고 제안된 이야기이다. 이는 아버지를 살해하기 이전의 시기에 소위 “지적인 야망을 즐기고 그것들이 우리들 삶에서 점점 더 멀리 떨어뜨린다는 사실을 안 사람이 수확한 결실”이라는 반(反)지성주의와 원죄를 찬양하는, 즉 “악도 성스러운 구도의 통합체의 일부일 뿐 아니라 신의 본질가운데 일부를 차지”한다는 자신의 초월자로서의 깨달음, 살인의 당위적 결론을 위한 배경이라 할 수 있다.

진술은 아동기부터 시작해서 살인을 한 당일까지의 기억과 사실로 이어지는데, 엄마에 대한 절대적 애정과 이 애정의 경쟁자로서 아버지와 자신의 갈등이 얘기되고 있다. 이러한 계기가 된 사건으로 바다에 빠진 자신을 아버지가 구해준 것은 바로 자신의 최초의 굴욕이라는 것인데, 경쟁자에 대한 수치심, 이 사건으로 인한 엄마와 아버지의 공고해진 결합으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이러한 심리적 현상을‘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간단하게 해석할 수 있지만, 화자는 그러한 얕은 틀의 정신분석으로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사춘기가 오기 전 엄마의 암으로의 사망은 금융자본가로 사회적 성공을 거두고 있는 부자인 아버지와의 관계를 극단적으로 벌려놓는다. 자본주의적 성취는 분주함을 요구하고 그런 아버지는 아들과의 친밀감을 만들지 못하는데, 화자에게는 이 무관심이야말로 곧 적대감의 표현으로 수용되고 부자의 감성적 간극은 더욱 벌어지기만 한다.

이 소설은 이처럼 이야기 구조를 따라 감으로써 화자가 왜 존속살해라는 사회적 터부(taboo)를 실행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이유들을 작품 전체의 구석구석에서 찾아내고 마침내 사실의 행위로서 직접적 동기를 접할 수도 있지만, 화려하달 정도로 선과 악, 삶의 본질, 의식과 감각, 이성과 본능에 대해 뿜어내는 인간정신의 성찰을 위해 끌어대는 철학적 사유의 빈정거림과 패러독스에서 획득하는 보다 큰 그림으로부터의 진실의 발견도 꽤나 즐거운 작업이 된다. 일례로 소설 속 소설에 등장하는 지적 삶의 대척에 있는 표층문화만으로 지혜롭게 또 다른 정신의 삶을 사는 친구의“이성에 대한 본능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고안된 장소”로서의 레스토랑 장면에서‘바타이유’가 현현하고, ‘이반 카라마조프’의 존속살해를 고안한‘도스토엡스키’를 통해 악이 도덕성을 어떻게 초월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식이다. 또한 단지‘질투’라는 감정적 현상을 말하는데 조차‘나와 너’라는 주체와 타자성이란 말장난을 일삼는 현대철학의 허위성을 꼬집는 데에서는 헛웃음이 나오기조차 한다.

그리고 소설의 또 하나의 재미는 도처에 흩뿌려 놓은 살해자의 살해 동기나 심리적 본성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심리상담자를 마주하는 피상담자의 자세가 거의 기만적이고 우월적, 자기도취적 위치에 있다는 것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데, 그래서 독자는 읽어나가면서 계속 본질에 접근하는 증거들을 줍게 만드는 것이다. “심리분석가가 내 속을 속속들이 들여다 봐주기를 원하는 최고의 나르시시스트”라고 자신의 정신적 일면을 진단한다든가, 심리상담자에게 읽게 한 자신의 미완성 소설에 심리적 해석을 통해 자기 정신의 초월성을 확정하는 것들이랄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소설적 도구들은 살해의 동기가 신으로서의 행위, 즉 초월자로서의 행위였음을 강변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의 소설 속 소설에 등장하는 악의 화신인‘파르파렐로 신부’의 ‘정신적 인간’이 지니지 못한 도덕성까지 내재하는 새로운 신적 본질의 깨달음, 악과 선은 무한대에서 만나며 그 무한대가 곧 신이라는 그만의 진실에 이르는 것이다.

자기 삶의 장애자로서 고통스러운 존재인 아버지를 극복하는 새로운 삶의 길은, “신의 성스러운 계획에 필수적인 그 더러운 역할을 맡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산물로서 신에 의해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수행”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나아가 선악의 통합체를 완성하는 것, 곧 신으로, 초월자로 완성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정신적으로 존속살해에 대한 명백한 교리를 획득한 자는 이를 실행하면 되는 것이다. 화자의 말을 빌면 아버지를 살해한 동기로서, “나는 유전 인자와 심리학적 사회적 격발 요소들 이외의 것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초월적인 것, 악을 처단함으로서 신적 합일에 이르는 성스런 행위인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지옥으로 만들어버린 한 비정상을 제거하는 것이며, 그(아버지)를 “악마성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고 포용하는 것과 다름없으며”, 그럼으로써 “한 명의 아버지로 축복받을 수” 있게 해주는 사랑의 행위였다는 것이다. 더구나 아버지의 가학성을 죽음으로 돌려준 것은 바로 ‘도덕적 동종요법’이라고 주장한다. 아마 독자들이 이러한 사이비 종교식 궤변에 현혹될 리는 없겠지만, 인간 심리에 도사린 나르시시즘의 이러한 탐색에는 머리를 끄덕 일 수 있을 것이다.

어지간한 자극에는 감흥이 없는 무감각증으로 인한 현대인의 권태로움이 얼마나 많은 악을 낳고 있는지 우리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또한 성취일변만을 지향하는 인식구조는 가정마저 파편화시키는 지경에 이르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 그 자녀들에게 부지불식간에 누적되는 분노가 바로 악을 창조한다. 이와 같은 형이상학적 이유를 반전시키는 살해의 직접적 동기가 읊어지는 데에 이르면 그 처벌이 진정 도덕성을 잃지 않았다는 판단에 이르게 된다. 이는 어떤 의미에선 작가에게 실컷 조롱당한 기분까지 느끼게 되는데, 그야말로 오늘의 표층문화의 얄팍한 실용주의와 종교적, 철학적 허영심과 위선에 대한 기막힌 역설의 한 마당이었다는 당혹감 때문일 것이다. 아마“문학이란 이미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의 불행을 확인시켜주는 예술이며, 인간의 행복이 얼마나 유한한가를 보여주는 예술이다!”하는 화자의 진술은 이 작품 전체를 은유하는 또 다른 막강한 이미지가 아닐까? 서사의 독특하고도 새로운 재미는 물론이고 인간세상 면면의 부조리함에 대한 통찰력 또한 손색없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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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의 회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2
헨리 제임스 지음, 최경도 옮김 / 민음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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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꼬리를 물기시작하면 그 생각의 심연에서 빠져나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사의 회전처럼 돌아 갈수록 더욱 죄어지고 깊어진다. 그래서인데 표현되지 못한 욕망이란 타인의 시선, 기성의 가치와 제도에 억눌려 은폐되곤 하지만,  이러한 억압의 환경을 벗어나 독단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은밀한 내면의 욕망은 환상적인 자아도취가 되어 절제 없는 자기 심화의 외곬으로 빠져든다. 아마 그 끝은 어둠의, 악의, 죽음의 그 언저리가 되지 않을까?
무의식 속에 잠재한 욕망을 실현하려는 충동은 환상을 만들어 내고, 존재하지 않는 환상을 실재하는 것으로서의 믿음을 강화하도록 이끈다. 이 강화의 행위는 절대적인 욕망충족의 과정이므로 이에 대한 장애의 제거는 필수적인 것이 된다. 그래서 누군가가 유령(환상)을 보았다면 자신의 심리적 욕망을 투영시키기 위한 욕구의 실재(實在)화라 해도 실수는 없을 것이다.

이 오래된 소설이 지금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이유는 이와 같은 인간 내면의 어두운 심리를 선구적으로 탐색했기 때문이지만, 이를 더욱 매혹적으로 느끼게 하는 것은 부존하는 대상에 대한 진술과 믿음을 주변사람들로부터 승인받으려는 심리적 기만과 강요의 모습, 그리고 타자의 심리와 진실성을 자기심리와 동일하게 취급하는 반사회적 성향 등 모호하지만 항상 자가당착적으로 작용하는 인간의식 흐름의 세련된 묘사라 할 수 있다.

작품의 도입부인 프롤로그를 제외하면 소설 속 등장인물은 환영(幻影)이나, 화자인 가정교사의 주인인 내용상의 인물을 제외하면 네 사람에 불과하다. 가정교사인 화자(話者)와 집사격의 그로스 부인, 그리고 삼촌에 의해 양육되는 고아가 된 어린 남매인 마일스와 플로라, 즉 구성원의 간결성은 폐쇄성과 권력이 용이하게 행사될 수 있다는 의미의 배경이다. 글을 읽지 못하는 선한 마음씨의 집사여인이나 아이들은 가정교사의 지적사고나 사회적 위치를 넘어설 수 없는 인물이며, 이것은 가정교사에게 더 할 수 없는 욕망 분출의 장소가 되고, 자기 의지대로 타인을 조종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한 것이다.

아이들의 가정교사로 저택에 도착하자 화자는 저택의 여주인으로서의 지위와 자유의 행복감에 젖지만, 이내 첫날 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어떤 소리가 반복해서 들려왔다면서, 그 소리는 자연이나 외부에서 들려온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내부에서 울려온 소리라고, 웅크리고 있던 억압된 욕망의 현재화를 위한 잠재적 준비가 그녀의 내면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너무도 아름다운 어린 소녀와 고귀한 모습의 소년, 충실한 집사, 그리고 고즈넉한 저택의 환경은 충만한 애정과 소유의 집착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결국 이러한 환경은 그녀의 상상력과 기질, 허영심이 혼합된 산물로서 유령의 존재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화자는 결코 유령이 자신의 정신세계가 만들어 낸 존재임을 인식하지 못하지만 독자들은 유령의 출현이 위선과 거짓된 상상임을 모호하지만 알게 된다. 이러한 정황은 자기“내부의 예민한 기질이 결국 모든 것에 대한 함정이 되고 말았다.”라던가, “환상에 사로잡힌 나의 끔찍한 습성을 내 동료가 놀라움과 동정심이 반씩 섞인 채”와 같은 식으로 암시한다.

결국 유령의 부존재를 아는 독자는 가정교사의 심리를 쫒게 되는데, 자신이 본 유령의 악마성과 위협으로부터 어린 아이들을 지켜내기 위해 보호막으로서 속죄하는 희생양이 될 것이라고 집사를 설득하고 동료화시키는 자기 확신모습이나, 무심한 순수함의 어린 아이들의 행위에서 그들의“노골적인 매력이 계산적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거나, 자기 눈앞에 펼쳐지는 아이들의 평화로운 모습을 기만이라고 단정하는 판단에서 인간 본성으로서의 욕망이란 것이 사회의 제약을 상실했을 때 얼마나 파렴치하고 폭력적으로 변하는지 목격하게 된다. 이는 순진무구한 아이들의 천연스러움을 “계속 순진한 표정을 가장”한 것으로 인식하고, 예전에 아이들의 보호자였던 이미 망자가 된 주인의 시종과 전임 가정교사를 유령의 정체로 함으로서 악의적인 적대세력으로 정의하여, 확신을 강화하고 심화시키는 나르시시즘(narcissism)에 이른다. 더구나 아이들은 알지 못하는 유령의 출현을 아이들의 은밀한 비밀로 간주하고는 아이들과 유령의 교통이라는 존재하지 않는 진실을 추궁하고 강요하는 상황으로 치닫는데, 경계를 허문 낯선 존재로서의 유령에 대한 공포보다 환상이라는 무의식에 감추어진 인간의 추악한 욕망, 그 본성을 보는 것에서 오히려 수치스러운 외마디 비명을 지르게 된다.

마침내 소년‘마일스’를 추궁하던 끝에 그의 거짓 없음과 완전한 순수성을 보게 되지만, 욕망에 가려진 의식세계가 고작 하는 말이란, “만일 그가 순진하다면 나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고 자문하는 것일 뿐이다. 아이들의 운명을 자신의 욕망에 일치시켜 권력을 행사하는 가정교사가 아이를 절명 시키면서 내뱉는 마지막 선언, “악령을 쫒아 낸...”에서는 그만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꽉 죄인 나사 같은 숨 막히는 절망감을 느끼게 된다.  심리소설의 선구작(先驅作)이라 불리는 이유를 입증하듯이 독자의 의식흐름까지 지배하는 사악하고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는 이 소설의 탁월성을 무엇이라 해야 할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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