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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버지를 죽였다
마리오 사비누 지음, 임두빈 옮김 / 문학수첩 / 2011년 2월
평점 :
소설제목의 선정성, 패륜성이 시사하는 부도덕성에서 이를 변호하려는 논리의 기만성을 보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존속살해(尊屬殺害), 아비를 죽이는 아들의 행위에는 대체 어떤 이유를 거론 할 수 있을까? 하는 이성적 거부로 인한 비난의 시선을 작가는 어떻게 설명하려는가에 대한 엿보기의 심리라 하여야 할까? 아무튼 이러한 독자로서의 심리를 꿰뚫듯이 “숨 쉬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아버지를 죽였다.”고 하는 문장에 휘말려 그만 내쳐 읽을 수밖에 없게 된다.
3장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2장은 살해자가 쓴 소설사이의 소설인「미래」라는 미완성 소설이 놓여있다. 살해자가 심리 상담자에게 진술하던 중 자신의 심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읽기라고 제안된 이야기이다. 이는 아버지를 살해하기 이전의 시기에 소위 “지적인 야망을 즐기고 그것들이 우리들 삶에서 점점 더 멀리 떨어뜨린다는 사실을 안 사람이 수확한 결실”이라는 반(反)지성주의와 원죄를 찬양하는, 즉 “악도 성스러운 구도의 통합체의 일부일 뿐 아니라 신의 본질가운데 일부를 차지”한다는 자신의 초월자로서의 깨달음, 살인의 당위적 결론을 위한 배경이라 할 수 있다.
진술은 아동기부터 시작해서 살인을 한 당일까지의 기억과 사실로 이어지는데, 엄마에 대한 절대적 애정과 이 애정의 경쟁자로서 아버지와 자신의 갈등이 얘기되고 있다. 이러한 계기가 된 사건으로 바다에 빠진 자신을 아버지가 구해준 것은 바로 자신의 최초의 굴욕이라는 것인데, 경쟁자에 대한 수치심, 이 사건으로 인한 엄마와 아버지의 공고해진 결합으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이러한 심리적 현상을‘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간단하게 해석할 수 있지만, 화자는 그러한 얕은 틀의 정신분석으로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사춘기가 오기 전 엄마의 암으로의 사망은 금융자본가로 사회적 성공을 거두고 있는 부자인 아버지와의 관계를 극단적으로 벌려놓는다. 자본주의적 성취는 분주함을 요구하고 그런 아버지는 아들과의 친밀감을 만들지 못하는데, 화자에게는 이 무관심이야말로 곧 적대감의 표현으로 수용되고 부자의 감성적 간극은 더욱 벌어지기만 한다.
이 소설은 이처럼 이야기 구조를 따라 감으로써 화자가 왜 존속살해라는 사회적 터부(taboo)를 실행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이유들을 작품 전체의 구석구석에서 찾아내고 마침내 사실의 행위로서 직접적 동기를 접할 수도 있지만, 화려하달 정도로 선과 악, 삶의 본질, 의식과 감각, 이성과 본능에 대해 뿜어내는 인간정신의 성찰을 위해 끌어대는 철학적 사유의 빈정거림과 패러독스에서 획득하는 보다 큰 그림으로부터의 진실의 발견도 꽤나 즐거운 작업이 된다. 일례로 소설 속 소설에 등장하는 지적 삶의 대척에 있는 표층문화만으로 지혜롭게 또 다른 정신의 삶을 사는 친구의“이성에 대한 본능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고안된 장소”로서의 레스토랑 장면에서‘바타이유’가 현현하고, ‘이반 카라마조프’의 존속살해를 고안한‘도스토엡스키’를 통해 악이 도덕성을 어떻게 초월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식이다. 또한 단지‘질투’라는 감정적 현상을 말하는데 조차‘나와 너’라는 주체와 타자성이란 말장난을 일삼는 현대철학의 허위성을 꼬집는 데에서는 헛웃음이 나오기조차 한다.
그리고 소설의 또 하나의 재미는 도처에 흩뿌려 놓은 살해자의 살해 동기나 심리적 본성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심리상담자를 마주하는 피상담자의 자세가 거의 기만적이고 우월적, 자기도취적 위치에 있다는 것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데, 그래서 독자는 읽어나가면서 계속 본질에 접근하는 증거들을 줍게 만드는 것이다. “심리분석가가 내 속을 속속들이 들여다 봐주기를 원하는 최고의 나르시시스트”라고 자신의 정신적 일면을 진단한다든가, 심리상담자에게 읽게 한 자신의 미완성 소설에 심리적 해석을 통해 자기 정신의 초월성을 확정하는 것들이랄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소설적 도구들은 살해의 동기가 신으로서의 행위, 즉 초월자로서의 행위였음을 강변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의 소설 속 소설에 등장하는 악의 화신인‘파르파렐로 신부’의 ‘정신적 인간’이 지니지 못한 도덕성까지 내재하는 새로운 신적 본질의 깨달음, 악과 선은 무한대에서 만나며 그 무한대가 곧 신이라는 그만의 진실에 이르는 것이다.
자기 삶의 장애자로서 고통스러운 존재인 아버지를 극복하는 새로운 삶의 길은, “신의 성스러운 계획에 필수적인 그 더러운 역할을 맡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산물로서 신에 의해 특별한 은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수행”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나아가 선악의 통합체를 완성하는 것, 곧 신으로, 초월자로 완성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정신적으로 존속살해에 대한 명백한 교리를 획득한 자는 이를 실행하면 되는 것이다. 화자의 말을 빌면 아버지를 살해한 동기로서, “나는 유전 인자와 심리학적 사회적 격발 요소들 이외의 것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초월적인 것, 악을 처단함으로서 신적 합일에 이르는 성스런 행위인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지옥으로 만들어버린 한 비정상을 제거하는 것이며, 그(아버지)를 “악마성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고 포용하는 것과 다름없으며”, 그럼으로써 “한 명의 아버지로 축복받을 수” 있게 해주는 사랑의 행위였다는 것이다. 더구나 아버지의 가학성을 죽음으로 돌려준 것은 바로 ‘도덕적 동종요법’이라고 주장한다. 아마 독자들이 이러한 사이비 종교식 궤변에 현혹될 리는 없겠지만, 인간 심리에 도사린 나르시시즘의 이러한 탐색에는 머리를 끄덕 일 수 있을 것이다.
어지간한 자극에는 감흥이 없는 무감각증으로 인한 현대인의 권태로움이 얼마나 많은 악을 낳고 있는지 우리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또한 성취일변만을 지향하는 인식구조는 가정마저 파편화시키는 지경에 이르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 그 자녀들에게 부지불식간에 누적되는 분노가 바로 악을 창조한다. 이와 같은 형이상학적 이유를 반전시키는 살해의 직접적 동기가 읊어지는 데에 이르면 그 처벌이 진정 도덕성을 잃지 않았다는 판단에 이르게 된다. 이는 어떤 의미에선 작가에게 실컷 조롱당한 기분까지 느끼게 되는데, 그야말로 오늘의 표층문화의 얄팍한 실용주의와 종교적, 철학적 허영심과 위선에 대한 기막힌 역설의 한 마당이었다는 당혹감 때문일 것이다. 아마“문학이란 이미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의 불행을 확인시켜주는 예술이며, 인간의 행복이 얼마나 유한한가를 보여주는 예술이다!”하는 화자의 진술은 이 작품 전체를 은유하는 또 다른 막강한 이미지가 아닐까? 서사의 독특하고도 새로운 재미는 물론이고 인간세상 면면의 부조리함에 대한 통찰력 또한 손색없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