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푸코의 휴머니즘 - 진정한 휴머니즘을 향한 푸코의 사유와 실천의 여정 철학 스케치 2
디디에 오타비아니 지음, 심세광 옮김, 이자벨 브와노 삽화 / 열린책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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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의 비판적(?) 방법론 또는 사유방식을‘지식의 고고학’이라고 한다. 고고학이란 본래 땅 속에 묻힌 역사적인 것의 기원을 통해 그 시대의 삶의 방식을 연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알려져 있지 않거나 알지 못하는 지식의 층위에 드러나지 않은 어떤 관계성을 탐색하는 것이 바로 지식의 고고학이라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 저작은 이처럼 푸코가 천착한 사유의 거대한 틀을 기반으로 인간 사회가 내재하고 있는 경향들에 대항해 그가 일관되게 말하고자 했던 저항의 담론을 생성해 낼 수 있는 도구들을 깔끔하게 정리하여 전달해주고 있다 하겠다.

푸코의 고고학적 방법론이란 특정 시대의 담론들은 그것들이 지니는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결합규칙과 상호관계를 이해하게 되면 그 시대를 지배하는 공통의 토대를 노출시키는 복잡한 관계들을 밝혀낼 수 있다는 관점이다. 그래서 그는 시대의 서로 다른 언표(言表)들과 문서고들이 외부성과 연결되어 만들어 낸, 그 어떤 한 시기를 총합하는 인식론적 형상들이나 형식화된 체계들을 발생시키는 관계를 이해해 보려고 시도한다.  그의 저술 중 『광기의 역사』에서 등장하는 대감호나 정신병원과 같은 공간이 인간의 정의, 즉 광인(狂人)이나 사회적 일탈자들이 어떻게 취급되는지를 해독해 내는 것과 같은 예라 할 수 있다. 대감호라는 격리시설은 광인들, 걸인, 빈자, 방탕자들과 같이 사회질서를 동요시킬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이성적인 동물’로 규정된 인간의 범주에서 배제하여 이성(理性)의 도식 밖에 있는 공간으로 내모는 장치이다. 바로 이러한 사회적 실천행위는 당대의 가치관이나 사상적 토대가 된 어떤 담론들의 형상화이며, 이를 통해 그 사회의 도덕성, 정치적 선택 등의 관계성을 이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같은 언표인 광인이라도 르네상스시대에 그들은 “은밀한 진실, 이성이 모르는 지식을 소유한 자”라하여 사회에서 배제되거나 격리되지 않았다. 그러나 고전시대에 들어서면 소위 데카르트의‘생각하는 나’와 같은 코기토(cogito)의 이성 중심의 사고관이나, 광기를 착각, 오류, 합리적 길을 벗어난 부도덕한 도덕적 주체로 취급하여 이성의 장으로부터 완전히 격리시키듯이 특정시기의 언표들과 실천들의 관계를 분석하면 그 시기가 의도하는 담론적 질서들을 통일 할 수 있는 관계들의 총체를 알 수 있게 된다. 이처럼 담론간에 존재하는 관계인 언표들 총체의 공통 토대를 푸코는 '에피스테메(episteme)'라 부르는데, 이것은 어떤 사회의 잠정적 형식화된 체계들을 발생시키는 지배적 담론들을 추정하고 분석, 비판, 저항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담론과 광인, 이성, 대감호, 정신병원과 같은 이질적 언표들에서 푸코가 읽어낸 ‘규율사회’와 ‘권력’과 같은 인간사회의 특징적 인식이 어떻게 사람들을 예속시키고 통제하며 조작하는지, 그 작용의 현상들을 발견하게 된다. 대감호라는 일방감시체계는 보여 질 수 있고 또 처벌받을 수 있다는 개인의 공포감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장치이다. 이는 바로 인간의 정신을 붙잡고 일탈을 예방하게 하여 규율에 맞는 동질화 된 인간, 온순하게 순종하는 신체를 만드는 일종의 기술인 것이다. 그래서 지식에 통합된 권력은 “인간을 복잡하고 규율화하는 복잡한 생산구조 내에서 기능하는 신체 상태로 환원시켜 개인을 모두 유사하거나 혹은 적어도 비교 가능하고 양립 가능한 존재”로 바꾼다. 즉 권력은 규율을 금기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을 최적화하려는 사회구조를 창조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담론이 형성하는 지배적 질서요 권력의 심급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자기 자신들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들 발화한 담론의 질서에 예속된다. 일시적 사건에 대한 허용과 금지의 이분법으로 심판하는 법과는 달리 규율은 일군의 규범들로 사람을 항시적으로 평가하고 압박한다. 그리고 이는 조사에서 점검으로 그 방법론을 진화시켜왔으며, 보이지 않는 눈들, 잠재적 통제의 임무와 같은‘내치’의 기술을 가다듬어 왔다. 사실 우리는 무한히 작은 정치권력이 포위한 환경 속, 촘촘히 들어찬 감시의 망 속에 살고 있다는 의미이다. 비근한 예로  우리는 자신들이 내면화한 규범체계에 부합하지 않는 타인에 대해,‘정상이 아니야’라고 무심히 말하지만, 이 언표에는 단지 자각하지 못했을 뿐 이미 무수한 외부의 담론적 질서에 학습되고 노출된 무의식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즉 동일한 인간으로 변형시키려는 규율사회의 권력에 침식되어 차이를 제거하고, 일탈을 금지하여 시민을 ‘온순한 신체’를 가진 부품화 하는데 저항 없이 동조하는 것인데, 그러나 정상과 비정상이란 그 본질을 보면 사실 어이없는 다양성의 배제, 차이의 제거와 같은 전체주의적 권력의 도사림을 볼 수 있다. 이처럼 동일화시키려는 규율체계에 종속된 사회체계가 다양성으로 풍부한 낯선 세계와 마주할 때에도 지속적인 존재가 가능할까?

그래서 푸코가 말하는‘주체’를 발견하는,‘주체화’에 대한 이해는 예속을 선택한 오늘의 사회를 극복하고 참된 인간관계, 다양한 사유와 행동, 문화를 존중하고 함께 살아가는 인류를 위해 절대적인 과정이 된다. 내가 말하는 것들, 마치 나의 언표나 담론이라 생각하는 것이 자신의 의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접근 할 수 없었던 숨겨진 토대, 즉 무의식의 차원에서 발화되는 것인데, 발화하는 대다수의 담론들은 우리들의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속한 사회와 제도의 산물임을 깨닫는 것이다. 결국“내 자신을 구성하게 될 이 일련의 담론, 규칙, 그리고 규범과 직면해 나는 여전히 주체일 수 있는가?”하는 의문이 당연히 터져 나온다. 이의 대답은 일견 단순하다 할 수 있는데,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예속의 절차를 깨닫고, 그리고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푸코는‘자기 배려’를 강조한다. 이는 자기 연민과 같은 자기에 대한 핥고 빨기나, 카르페 디엠(carpe diem; 지금의 매순간에 충실하라)류의 하루하루 사는 삶의 권유가 아니라, '멜레테 타나토(melete thanatou)', 즉 막 죽으려 할 때처럼 내 자신의 행동을 사유해 보려고 목표하는 것, 그럼으로써 “내 자신으로의 회귀, 내가 영위한 영원한 삶으로의 회귀, 죽음의 척도에 비추어 내가 실현하고자 하는 행동의 가치로 회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 자신을 주체화할 때 비로소 자기로의 회귀, 예속되지 않은 진정 인간다운 삶, 곧 휴머니즘을 회복할 수 있게 된다.

이 짧은 저술이 과연 푸코에 대해 얼마나 얘기해 줄 수 있을까하고 의심의 눈초리를 가졌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의 죽음’을 선언한 푸코, 안티-휴머니스트로 인식된 푸코야말로 진짜배기 휴머니스트라고 말하는 이 저술이 채택한 푸코 읽기와 해독은 그 설명과 주제의 뛰어난 연결성을 확보한 유연함과 명료한 해석으로 엄청난 지성의 광휘를 보여준다. 아마 푸코가 일관되게 제시하려 한 저항의 담론을 생산해 낼 수 있게 해주는, 사유의‘연장통 같은’개념적 도구들을 이처럼 체계적이고도 수월하게 제공한 저작은 감히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셸 푸코’의 저술들을 읽었던 사람에게는 그의 사상에 대한 완벽한 정리가 되어주고, 앞으로 읽으려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기막힌 길잡이가 되어줄 저작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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