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명작들을 한창 읽어대던 어린 시절로부터 40여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당시의 우리 출판 및 번역시장이란 지금에 비하면 열악하기 그지없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독재정권의 금지 등 각종 출판규제와 같은 제도적 여건도 좋지 않았지만, 번역시장은 더욱 보잘것없었다. 완역된 1차 번역은 극히 드물었다고 해야 할 것이며, 고작 일본어나 영어로 번역된 책을 다시금 2차, 3차 번역한 것들이었고, 그나마 부분적이고 누락되거나 임의로 축약한 것들이 전부였다시피 했다.

이제 우리의 출판시장은 세계 어디에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역량을 쌓았고, 번역자들의 역량도 높은 수준에 올라와있다. 더구나 예전에는 접할 수 없었던 '완역'된 번역물들이 풍성하게 출간되고 있어, 미처 읽을 수 없었던 내용들이 수월하게 독자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독서 여건의 개선은 다시금 고전명작들을 대하게되는 계기가 되어주고, 어린 시절 알지 못했던 경험들을 가지게 된 즈음에 예상치 못한 즐거움에 대한 기대도 높여준다. 당시에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던 행간의 의미를 발견하는 기쁨 때문일 것이다.

           

장마도 이제 한풀 꺾이는지 매미들이 제법 우렁차게 울어댄다. 땡볕이 내리쬐는 불볕더위인 바야흐로 본격적인 피서(避暑)시즌이라는 알림일 것이다. 이런 성하(盛夏)의 계절이 외려 독서하기에는 더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시원한 계곡물이 흐르는 조용한 산속이나 외딴 섬 파란 바닷가 나무그늘 아래, 또는 모처럼 텅 빈 집안의 소파에 길게 누워 옛 시절을 회상하며 고전의 향기에 취하는 것은 일상에 지쳤던 심신에 새로운 활력과 어떤 전환적인 생기(生氣)를 가져올지도 모른다.

특히 고전(古典)이라 불리는 작품들은 제아무리 영겁(永劫)의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삶의 진실, 인간의 근원적 모습과 고결한 무엇들을 담고 있어 그 감동과 숭고함으로 내면의 엄청난 성장을 안겨준다. 사랑이 흐르고, 인간 개체와 인간사회의 속성을 말하며, 삶과 죽음의 진리에 내재하는 영원한 물음들의 답변을 들어 볼 수도 있다.
더구나 빼어난 문장들과 이야기로서의 수려함과 친근함, 재미를 갖추고 있어 그야말로 절로 마음이 풍성해진다.

최근 눈에 뛴 책은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인데, 인류사회, 당대 영국의 정치현실에 대한 그 혐오와 비판의식이 빼곡한 완역본이었다. 소인국과 거인국이라는 판타지가 아닌 그 실제를 읽어보는 유익한 여정이 된다. 또한 인간사에 대한 조롱과 풍자가 돋보이는 ‘볼테르’의 『낙천주의자, 캉디드』나, 천일야화 뺨치는‘보카치오’의 『데카메론』, 인간의 현세적 욕망의 구원을 보여주는‘괴테’의 『파우스트』또한 제법 독서의 진정한 맛을 느끼게 해준다.

여기에 인류의 지고한 선(善)인‘사랑’을 빼놓고서 무엇을 말 할 수 있을까? 해서,‘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면서 그녀의 죽음에 가득 연민을 품어보기도 하고,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을 통해 사랑의 성스러움과 애틋한 사랑의 책략에 빠져보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이 된다. 이러한 이상적 사랑을 넘어 현실적 삶이 그대로 투영된 자연주의적 작품인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까지 더하면 아마 어지간한 인간세상의 이야기는 아쉽긴 하지만 섭렵 하는 게 될 법도 하다. 피서가 따로 있을 손가! 이것이 바로 신선놀음이 아니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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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로주점
에밀 졸라 지음 / 홍신문화사 / 1994년 5월
9,500원 → 8,550원(10%할인) / 마일리지 470원(5% 적립)
2011년 08월 06일에 저장
절판

걸리버 여행기- 개정판
조나단 스위프트 지음, 신현철 옮김 / 문학수첩 / 1992년 7월
10,000원 → 9,000원(10%할인) / 마일리지 5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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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4일 (월)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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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 펭귄 클래식
앙드레 지드 지음, 이혜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8월
9,000원 → 8,100원(10%할인) / 마일리지 4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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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안나 카레니나 1 (무선)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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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스의 라이벌들
아서 코난 도일 외 지음, 정태원 옮김 / 비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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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 ‘셜록 홈스’를 탄생시킨 ‘코난 도일’을 비롯하여, 오늘날 추리소설의 전형을 이뤄내게 한 작가 10인의 30편 단편소설이 수록된 작품집이다. 특히, 저마다 그려낸 개성 있는 캐릭터들은 각기 독자적인 기법과 구성방식과 어울려 하나의 견고한 원형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자못 크다고 할 수 있겠다.
비록 과학 발전 등 어느 시대보다 급격하게 삶의 방식이 바뀐 21세기 오늘의 미스터리 작품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시대적 간극이 존재하지만, 그 모델의 원류이며, 근간을 제시한 작품들이라는 탁월한 문학사적 가치를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흥겨움이라 할 것이다.

결국 추리물의 고전적 반열에선 이들 작품이 만들어 낸 대표적 캐릭터들은 오늘의 작품들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엿보게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근래의 작품들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인상을 받게 되는 캐릭터와 구성적 측면의 친근함을 느끼게 될 때는 그 은밀한 쾌감으로 슬며시 환한 미소를 짓게 되기도 한다.
셜록 홈스의 직계라고 까지 불리는 ‘아서 모리슨’의 대표적 탐정 캐릭터인 ‘마틴 휴이트’의 과학적 증거주의는 우리에게 익숙한 미국식 형사 수사물로 이어진 시조(始祖)격이 아닐까할 만큼 매력적이며, 여탐정 ‘러브 데이’를 완성시킨 ‘캐서린 퍼거스’의 작품은 여성 수사관의 원류를 한참이나 앞당겨 놓는다.

또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스’가 당대에 미친 영향력을 노골적으로 입증하기라도 하듯이 작가 ‘브레트 하트’가 셜록 홈스의 철자를 변경 조합하여 창조한 탐정 ‘햄록 존스’를 접할 때는 풋! 하고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한다. 이외에도 코난 도일의 처남인 ‘어네스트 윌리엄 호넝’이 탄생시킨 걸출한 신사도둑‘래플스’가 활약하는 작품들은 오늘에도 전혀 손색이 없는 빼어난 감각을 보여주며, 괴도(怪盜) ‘루팡’의 모델이라는 점에서 그 흥미는 더욱 진작되기도 한다.
이러한 원형적 가치를 지닌 작품들을 한 권의 책에서 보게 된다는 매력 못지않게 작품의 배경이나 캐릭터의 성분을 범주화하는 관점을 통해 시대상을 읽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 되기도 한다.

오늘의 추리물이 대개 선과 악의 싸움이라는 정의관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반해, 이들 작품을 보면 이러한 관점이 그렇게 뚜렷하지 않다는 것이다. 아마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가 자본주의 완숙기에 접어듦에 따라 그 물적 풍요와 과학적 이성주의에 대해 서로 다른 이해를 반영하기 시작했던 연유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부르주아 유산계급의 화려한 일상을 배경으로 하여 가난한 노동자, 빈공계층을 악인으로 묘사하여 유산층의 도락(道樂)거리에 치중함으로써 무비판을 견지하는 작품과, ‘클레이 대령’, ‘프링글’, 그리고 ‘래플스’같은 신출귀몰하는 괴도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자본가들의 부를 강탈하지만 수사력이 따르지 못하게 하여 도덕적 일탈을 처단하지 않는, 다시 말해 부르주아와 지배질서를 조롱하는 비판적 작품으로 확연히 구분된다는 점이다.
이처럼 이들 작품이 선악의 명확한 구분을 전제하지 않음으로서 도덕적 정의관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은 당대의 시대적 특징이랄 수 있을 것 같다.
아마도 ‘추리’라는 과학적 입증주의에 모두 포획되어 그 기술적 방법론에 심취해 있었던 탓에 지적 쾌락이란 의도이외의 요소들을 인식하지 못한 것 아니었을까하는 추측도 해보게 된다.

아무튼 이와 같은 여러 특징적 구성을 한 이 소설집은 추리문학의 모델로서 그 문학사적 위상이 뚜렷한 작품들이 집대성된 책으로, 미스터리 문학을 즐겨 찾는 독자들에게 현대추리소설 인물들의 다양한 원형들을 만나는 풍부한 즐거움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스터리 문학의 황금시대를 이끌어 간 천재 작가들의 빛나는 작품들! 그 자체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한 보상을 하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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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 - 펭귄 클래식 펭귄클래식 5
앙드레 지드 지음, 이혜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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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내게 ‘알리사’와‘제롬’은 40여년 가까이 이름을 잊지 않은 몇 안 되는 소설 인물이다. 모든 것이 첫 인식일 만큼 어린 시절에 읽었던 작품이어서 그 감성적 영향이 깊었던 탓일 것이다. 간절함과 애틋함이 절절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비극적인 결말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알리사는 그토록 사랑하면서도 왜 제롬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일까? 또한 제롬은 왜 그렇게도 우유부단한 것일까? 뭐가 이렇게 어렵고 복잡해? 라는 안타까움이 감상의 전부였을 것이다.  

이제 나는 이 작품을 어떻게 읽어 낼 것인가? 라는 것은 스스로도 흥미로운 관심사였다. 끝내 사랑의 결실을 이뤄내지 못했던 이유를 탐색하게 된 것인데, 작가가 은밀하게 여기저기 뿌려놓은 장치들을 발견할 만큼 문학적 경험이 축적되었을 것이라는 내심의 생각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알리사 뷔콜랭’에 대해서... 

알리사란 인물을 이해하는데 있어 그녀의 미모(美貌)를 물려준 어머니 ‘뤼실 뷔콜랭’과 청교도적 엄숙주의라는 정신적 닮은꼴인 고모이자 사촌 동생 제롬의 어머니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자기 존재의 과시와 두려움의 대상으로서의 경고격인 발작의 연기로 허위와 기만, 그리고 사치와 관능적 쾌락을 추구하는 탕녀로서의 뤼실의 기질은 고모의 엄격함이라는 성스러움, 즉 도덕적 억압기제와의 결합을 암시하고 육체와 정신적 본성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알리사가 제롬에게 보낸 편지는 물론 그녀가 남긴 일기는 제롬을 향한 사랑의 진실을 확인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제롬에 대한 갈망이 깊을수록 그녀는 개인적 행복보다는 의무로서의 성스러움을 쫒으며, 결국 성(聖)이 속(俗)을 누른다는 것이고, 마침내 요양원에서 삶을 마감함으로써 성스러움을 완결한다. 세평(世評)은 이를 종교에 과도하게 매몰된 광신적 인물이라고도 하며, 사랑의 지고함에 이른 고결한 성녀라고도 하지만 구태여 이러한 양극단의 시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젊은 애인을 따라 남편과 자녀들을 버리고 떠나버린 엄마의 윤리적 배반에 대한 혐오만으로도 육체의 행복, 속세적 쾌락을 초월하고자 하는 그녀의 종교적 신성함으로의 인도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알리사는 무의식적 본성까지 통제할 수 있는 인간이상의 초월자로서 표현되지 않는다. 육신을 지닌, 오감을 느끼는 인간이다. “발끝은 옷자락 아래로 삐져나와 한 줄기 램프 불빛을 받고 있었다.”라는 소파에 길게 누워있는 알리사의 관능적 자세나, 이를 보고 아버지가 “마치 네 어머니를 보는 것 같더구나.”라고 확인하고 있듯이 그녀에게 내재된 욕망을 묵시적으로 드러내는 것과 같다.
결국 육체와 정신, 속과 성은 끊임없이 갈등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로서 제롬을 향한 사랑이 순수하고 신비로우며 영원히 고결한 것이어야 한다는 알리사의 믿음, 신을 향한 간구는 선택의 여지없는 당위로서의 지위를 갖는 것이다.

‘제롬’과 ‘알리사’의 사랑의 술책

알리사가 지향하는 성스러움, 그 당위적 결과의 수긍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사랑은 다분히 기만적인 데가 있다. 알리사와 그녀의 아버지가 정원에서 자신(제롬)을 화제로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던 제롬이 후일, ‘쥘리에트’를 이용하여 알리사가 엿들을 수 있는 상황을 연출하여 그녀를 자극하는 것이나, 알리사가 ‘플랑티에 고모’에게 보내는 편지가 제롬에게 전해지도록 하는 것처럼 자신들의 내면적 진실을 솔직하고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않는 책략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은폐전략은 시쳇말로 밀고 당기기의 술책인데, 자기 확신에 대한 불확실성이란 문제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타자를 읽어내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발생하는 불가피성이긴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 자신들을 상대자가 읽는 것을 방해 하는 것이다. 오직 알리사에 대한 자기중심적 사랑에만 몰두하며, 자기와 주변에 대한 인식이나 이해가 결여되어 있는 무관심과 무신경한 제롬의 결함도 일조하고 있으나 알리사의 자기 내면의 기만적 표현도 완벽하게 서로의 읽기를 실패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쥘리에트’의 사랑과 좌절 
 
한편 제롬의 무관심과 무신경은 알리사의 여동생 ‘쥘리에트’의 제롬을 향한 사랑을 깨닫지 못하게 한다. 자신이 만들어낸 사랑이란 환상을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네 사랑의 실체를 되돌아보라는 알리사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쥘리에트는 제롬으로부터 알리사를 향한 사랑의 감정을 들어주고 알리사의 근황을 전해주는 메신저가 되어야하지만, 제롬을 사랑하게 되고 언니와의 경쟁관계에 들어선다. 그러나 제롬의 알리사를 향한 사랑의 확인 후에 사랑 없는 결혼을 진행한다. 알리사의 내적 갈등에 가려져 쥘리에트의 희생은 드러나지 않지만, 그녀의 고통은 결코 알리사의 그것에 뒤지는 것이 아니다.
 
 
알리사의 요양원 죽음 이후, 많은 세월이 지나 쥘리에트의 집을 방문한 제롬과의 재회에서 알리사의 물건을 정리해 모아놓은 방을 소개하며, 쥘리에트가 제롬에게 하는 질문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그럼 오빠는 희망 없는 사랑을 그렇게 오래도록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다고 믿는 거예요?"

“그래 쥘리에트"

“그걸 간직한 채 하루하루 숨 쉬고 살아갈 수 있다는 거군요?”

또한 그녀의 딸을 대녀로 받아줄 것을 제롬에게 요청하면서, 아이의 이름이 ‘알리사’임을 말하는 장면이나, 여전히 알리사를 떨치지 못하는 제롬에게 “자! ~ 이제 깨어나야 해요...”라며, 주저앉아 눈물을 훔치는 쥘리에트에게서 그녀의 사랑이 알리사의 그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언니와 제롬의 사랑을 위해 자신의 사랑을 희생한 쥘리에트의 완전한 사랑, 신을 매개로한 성스러움을 지향한 알리사의 사랑, 어떤 것이 더 아름다우며, 고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흥미로운 도구와 장치들 
 
이렇듯 타자읽기의 실패와 맹목성과 기만성의 교차, 완전한 행복의 추구라는 성과속의 갈등과 같은 플롯에 못지않게 풍부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 장치와 도구들을 발견하는 것은 분명 이 소설의 재미이기도 하다.

기억나는 것으로 제롬 아버지의 장례기간인 상(喪)중에 검은색 상복을 착용하지 않고, 뤼실 뷔콜랭이 흰 드레스와 붉은색 숄을 두르고 있는 것인데, 흰 색 위에 붉은 색의 조합은 엄숙함에 관능성을 더한 교묘한 파격이다.  

이것은 뤼실의 방을 본의 아니게 엿보게 된 제롬의 묘사에서 뤼실이 끌어들여 서로 희롱하고 있던 젊은 애인이 바닥에 떨어진 붉은 숄에 걸리는 것인데, 유혹과 쾌락의 세계를 암시하는 기막힌 장치로서 색(color)을 통한 인물들의 내적 심리를 설명하는 도구로서 돋보인다.
색이 하나의 상징체계인 기호로서 하얀 드레스를 입고 정원에 앉아 제롬을 기다리는 알리사를 통해 그녀의 순결함과 성스러움에 대한 내적 지향을 표현하기도 한다.
또 하나 인상적인 도구로 램프가 떠오르는데, 비스듬히 누운 알리사의 드러난 발을 비추는 램프와, 쓰러져 눈물짓는 쥘리에트의 방으로 하녀가 램프를 들고 들어오는 마지막 장면이다. 램프는 육감을 두드러지게도 하지만 그 관능에 빛을 비춤으로써 현세적 욕망을 어떤 성스러움의 세계로 인도하는 손길로 이해되기도 하며, 좌절과 사랑의 고통을 비추어 마침내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알리는 방향등이란 작용을 완수하기도 한다.

1909년 발표된 작품이니 이제 100년을 넘어섰다. 종교적 색채를 떨쳐내지 못하고 성(聖)의 질서와 신념에 인간의 사랑을 지나치게 몰아댄 느낌이지만, 수많은 자아를 지닌 인간들의 사실적 드러내기와 주체와 타자성에 대한 발견처럼 오늘에도 그 신선함 을 잃지 않는 주제의식은 이 소설이 명작의 반열에서 거듭 읽히는 이유가 된다.

비록 연인의 죽음으로 속세적 결합에 실패하는 비극이지만 그 죽음을 통해 영원한 합일, 완전한 사랑의 추구, 그리고 잿빛 땅거미가 방안 물건 하나하나를 덮어내며 복원하듯이 어떤 희망적 기대가 여운처럼 맴도는 것도 사실이다. 모처럼의 낭만적 기운으로 설렘이 있던 옛 추억의 세계에 한동안 머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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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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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주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선택할 미래가 없는 세대의 삶의 물음, 혹은 고착화된 지배질서에 대한 반동.’ 그러나 이 주제의식를 다루는 창조적 감각이 더욱 주목하게 하는데, 곳곳에 산재하여 기지를 발휘하는 일종의 개념의 전복, 즉 예술적 상상력이라는 새로움, 신선한 문장들의 발견이다. 그리고 곧 유행어가 될법한 표제인 “‘표백’세대”라는 지금의 세상에 대한 정체성의 표상, 시대 의식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데 이보다 적확(的確)할 수 없을 만큼 예리한 통찰적 의식이다.

지금의 한국사회를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88만원세대?, 청년들이 갈 곳 없어 방황하게 하는 이 사회, 단지 삶의 존재자로서의 의무이외에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이 사회의 본성을. 자본주의를 시작한 구미(歐美)의 어느 지역보다 철저한 시장자본주의를 교조적으로 숭배하는 나라, 부와 권력의 계층적 구조를 빠르게 고착시켜 체제의 견고함을 구축한 사회, 형식적 민주주의의 실행으로 시민사회의 구조적 흠결이 없어 보이는 사회, 그래서 이 체제는 모든 사람들에게 수용과 적응만을 요구한다. 이처럼 ‘완전한 세상’에서 일탈이나 파괴, 혼란에는 명분이 차단된다. 비록 정의와는 한참 거리가 있고, 부도덕하지만 체제를 운영하는 틀, 지배적 담론, 기성의 질서는 어떤 틈새도 없을 정도로 안정되어 있어 어린 세대들은 한정된 영역에서 단지 몸부림칠 자유만이 부여되어있다.

세대를 초월해서 이러한 체제에 갇힌 사람들이라면 이 견고한 난공불락의 세상에 대항해 어떤 준비와 노력을 하고, 어떻게 삶의 자존감을 확보할 수 있을까? 이처럼 소설은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체제를‘프랜시스 후쿠야마’식으로 완결된 세상, 인류의 이데올로기와 제도의 역사가 끝났다는 인식이 지배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야만 완전한 세상을 전제로 한 등장인물들의 자살이란 반동의 행위가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더구나 오늘의 사회를“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great big white world)"라고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하얗게 표백된 세계로 표상하고 있는 것처럼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젊은 세대들은 주체성이 지워진 세대로 문자 그대로의 표백세대인 것이다.
결코 원치 않았지만 21세기 초, 한국사회의 젊은 세대는 앞선 세대들의 사회와 구성원을 위한 저항과 혁명과 같은 거대한 명분도 가질 수 없으며,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무력한 수용이외에는 선택항이 없다는 진단은 어느 만큼은 옳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즉시적인 변혁, 치열한 1등 의식만 주입된 영웅주의적 자기 확신에 대한 안달이 아닐까? 세상에는 이등도 있고 꼴등도 있으며, 또한 있어야 한다. 그리고 어쩌면 이등이나 꼴등들이 세상을 주도해왔는지도 모른다. 권력과 부라는 지배적 권위를 확보하고, 세상 체제의 일대 개혁, 체제의 대전환에 영향력을 가지는 것만이 삶의 의미는 아닐 것이다. 물론 이 사회의 던적스러움은 새삼 말 할 것도 없다. 물론 세상은 지배적 담론, 권력이 영향을 행사하지만 민중적 각성, 의지를 거스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시민의 사회 - 정치, 경제, 문화 등의 현상 - 에 대한 보편적 지적역량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이렇게 꽉 막힌 불온한 사회의 변화세력으로서 어떠한 출로를 만들어 낼 수 없는 무력감에 빠진 오늘의 젊은 세대의 현실에 공감한다. 그래서‘세연’이란 여대생의 자살선언과 그녀의 추종세력인 이 땅의 젊은이들이 사회적 파장을 가장 센세이션하게 일으킬 수 있는 즉, 기성 질서와 사회변혁의 메시지로서 인식될 수 있는 극명한 수단으로서 자살을 선택하는 것은 어떤 혁명적 행위의 씨앗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살이 일개 개인의 초라한 상황적 이유로 치부되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 자신들이 소위 가장 잘나가는 삶의 정점, 자본주의 사회의 척도로서 성공적이라는 지위에 이를 때 자살한다. 오직 그 자살이 대(對)사회적 메시지여야 하기 때문에. 이것도 부족해서 재벌 2세의 자살까지 더해서 이 사회의 시스템적 오류, 본질적인 저항의 강도를 더하고자 하지만, 이 사회의 속성, 타자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과, 타자의 죽음조차 자극적인 상품으로 취급하는 광기에 젖어든 세계에 대한 몰이해 아니면 여전히 순진하고 유아적인 낭만적 기대로 보이기까지 한다. 아마도 관음증적인 호기심으로 반짝 주목을 끌겠지만 OECD국가 중 자살율 1위 국가라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사회 시스템적 반성이나 각종 사회 제도와 장치들에 대한 변화를 위한 작은 시도조차 하지 않는 현실이 그것을 입증한다. 한국사회, 다시 말해 한국의 지배 권력들은 결코 자살을 개인적 영역에서 사회적 영역으로 변화시키지 않을 것이다.

화자인‘적 그리스도’는 7급 공무원시험 준비를 하면서 시종 하급관료, 삶의 영원한 패자로서 묘사하고 있다. 서열중심의 계급적 질서를 고착화시키는 이러한 관료임용제도가 오늘의 환경 하에서 옳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직급이 가질 수 있는 권력적 행위의 지극한 협소가 사회적 영향력에서 거의 무력하기 때문에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항변은 그야말로 엘리트주의, 기성 질서의 시각을 그대로 고수하는 관점이다. 7급, 9급이 변해야 한다. 기성의 썩은 질서에 물들지 않고, 개개인 스스로 변혁의 일원이라는 자각 말이다. 화자는 이러한 반론에 회의를 보인다. 보다 넓었던 선택의 길이 이처럼 대학생들이 하급 공무원시험에나 매달릴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라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경시하고 있지 않느냐고. 잘못된 지적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의 세대에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다. 경제권력적 시각에서 보는 한 궁극적인 물음이 될 수 없다. 순환논리에 빠져 멍청한 논쟁만 하게 될 뿐. 다만 지배적인 사회장치의 심각한 오류들을 바로 잡기위한 저항의 수단이 자살이란 점에는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자칫 시대에 압도당해 의지를 상실하거나 자유를 상실할 수 있는 젊음에게 선택의 여지없는 상황에 처해 선택을 강요당하는 불행의 무지와 안이함에 머물지 않고 처절한 반동의 자각과 실천적 행동을 제시한다는 점에서는 몇 번이고 갈채를 보낸다.
실 날 같은 소리라도 밖으로 표출하려면 실 날 같은 바람 한 가닥이라도 만나야 하듯이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기인식과 반성없는 사회에 무지와 과욕, 자멸의 이치에 대한 경고를 보내는 것은 절대 필요한 역사적 이치이고 깨우친 이들의 의무이다. 좌절과 절망으로 암흑을 헤매는 표백세대일 밖에 없는 오늘의 젊은 세대들의 고통의 실체가 안이하기 짝이 없는 기성질서에 보내는 냉혹한 메시지로서 이 소설의 의지는 이미 위대하고, 탁월하다. 한 여학생의 자살선언문을 비롯한 유언적 잡기(雜記)와 현실 속 화자의 삶이 병행하며 치닫는 급진적인 속도가 아찔할 정도로 이야기의 재미도 풍성하다. 논리와 감성을 오가며 절묘한 균형을 이뤄낸 보기 드문 지적 역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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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 데리다 들뢰즈 지식인마을 33
박영욱 지음 / 김영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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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차연(differance)의 철학으로 대변할 수 있는 들뢰즈와 데리다의 사유 읽기이다. 이들의 저술을 대하면 그 낯선 개념에 당혹스럽고 좀체 선명한 이해의 세계로 다가서지 못하는 답답함을 느끼게 되는데, 이 책은 이러한 아쉬움을 해소시켜주고, 두 사람의 사상 공간으로 진일보하게 하는데 커다란 도움을 준다.
특히, ‘차이’라고 하는 유사한 개념으로 출발하지만, 어떠한 개념적 구별이 있는 것인지, 그들이 의도하고 전달하고자 하는 세상 읽기가 어떤 것인지를 비교철학적으로 설명하고 있어 한층 명료한 앎을 갖게 된다.

결국 모든 철학이 그러하듯이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보고 진실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어떻게 인식하고 인식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의 사색이다. 이러한 질문들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이유는 실로 당연한 것임에도 우리들 대다수는 잊고 지내거나, 삶의 운영에 있어서 불필요한 것이라고 저 멀리 치워버리기도 한다. 그러하다보니 서로 어떤 대상을 함께 바라보았지만 인식하는 세계가 다르고 또한 전혀 다른 이해와 판단으로 잦은 갈등과 충돌로 반목하고 적대시하는 상황에 이르곤 한다. 그러나 그 양극으로 갈라진 근원은 놔둔 채 고작 현상을 가지고 해결하려하며 이 때문에 어떠한 타협이나 진실에 이르지 못하고 그 골은 더욱 깊어지기만 한다.
인간들의 이런 일반적인 갈등뿐 아니라 소위 근대라고 하는 오늘의 세계가 지향해 온 세계의 인식방법 - 합리주의, 이성중심, 자본주의, 기계화와 과학적 사고, 물질주의 등등 - 의 획일화는 실로 인간들로부터 많은 것들을 잃게 해왔으며, 그것들을 우리는 소외니, 파편화니, 감성이나 다양성의 상실이라고 부르며 근대의 주류적 가치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수일 전‘오슬로’에서 발생한 집단 살해사건의 살해범의 주장처럼, 다문화에 대한 적대감은 오늘 우리들의 세계가 인간을, 사회를,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한 극명한 실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건의 영향은 유럽 국가들의 다문화, 다양성의 부정, 다시 말해 서로 다른 차이에 대한 본격적인 반감으로 이어지고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로 회귀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게 하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퇴화적인 민족주의적, 인종주의적, 국수주의적인 인식으로의 후퇴는 구미 선진국들인 그네들의 탐욕인 세계화, 신자유주의 체제를 스스로 부인하는 꼴이기도 하다. 더구나 소비와 과시라는 현대 물질문명 중심의 사회를 무한히 추구한 결과가 필연적으로 야기할 수밖에 없는 일종의 자승자박의 형국이라 할 수 있다. 지독하리만큼 근대, 모더니티를 추구한 지배적 이성이 만들어 낸 욕심과 수단으로서의 획일화, 동일화의 심각한 모순인 것이다.
 이렇게 편협한 인식에 현대인들이 포획된 것은 무엇이 잘못된 것이기 때문일까? 들뢰즈는 이것을 우리의 ‘표상’체계의 오류 탓이라고 했고, 데리다는 대상을 바라보는 인간의 경직적이고 일면적인 사고방식이라 하였다. 즉 이 세상을 개념적으로만 파악하려는 절름발이식의 왜곡되고 조작된 사유방식에 있다는 것이라 하겠다.

‘개념’이란 인간이 어떤 대상의 존재를 분류하고 체계화하기위해 만들어 낸 것으로 책상, 개, 자동차와 같은 것이다. 일례로 흰색과 육면체의 고체이며 짠맛하면 머릿속으로 소금을 떠올린다. 세상의 사물들을 구분하는 머릿속의 기준, 즉‘표상’을 통해 소금이란 개념을 떠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이러한 것들로만 구성되어 있진 않다. 우리가 모르는 무수한 성질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의 개념과 사물 그 자체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고작 개념이라 부르며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결코 우리는 완전하게 어떤 대상을 인식하거나 지각할 수 없는 것이다.

개념의 불완전성을 보완하기 위해서 칸트는‘이념’, 즉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믿고 있는 사상체계로서 우리의 지각능력이나 사고 능력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이 주관적 용어를 도입하였고, 들뢰즈는 이를 자신의 용어로 발전시켜‘다양체’를 도입하였다. 음계 중 어떤 특정 음, 예로써 ‘도(Do)'음을 들었다고 하자. 그러나 그 도음에는 무수한 배경음, 잠재음이 있으며, 그 중에서 우린 주음인 도음만을 듣게 된다. 이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양체임을 설명하는 것이다. 결국 개념으로만은 사물을 온전하게 드러낼 수 없는 것이며 이 드러낼 수 없는 그 자체의 차이를 들뢰즈는 “차이 자체”라고 표현했다. 즉 이 세상 존재 모두가 다 다르다는 말이다.

데카르트는 물론 헤겔조차도 이 세상을 개념적으로만 파악하였다. 완벽한 지식체계가 현실의 원래 모습과 일치한다고 가정하였으며, 인간의 지식이 곧 세계의 본래 모습을 증명하기 위해 인간의 근본적인 사고 능력과 세계의 본질이 일치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성 우월 관념, 합리주의라는 편의적 사고는 모든 것을 개념으로만 파악하여 차이를 없애고 동일성만 남게 하였다. “같은 것만을 강조하면 다른 점이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가 가진 표상체계는 이렇듯 물자체를 표현하지 못한다. 현실의 풍부함과 다양성이 억압되고 차이를 무시하는 표상적 사유는 그래서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현실의 모든 존재에 잠재해 있는 저마다의 독특하고 개성적인 목소리”는 해방되어야 한다. 여기에 오늘의 대중매체는 사람들에게 세상 보는 눈, 감각을 획일화하는데 거대자본과 결탁하여 사력을 다한다. 또한 각종 문화산업도 인간의 감성을 무미건조하게 만드는데 앞장서고 있다. 즉 이러한 획일화를 위한 무차별적인 현대의 주류적 담론세계는 인간의 감성적 능력을 획일화시켜 창조적 능력, 비판정신을 상실시켜 자본과 권력의 공고화는 물론 항구화하려든다. 이것은 약소국과 강대국, 빈국과 부국, 빈자와 부자, 약자와 강자의 고착화이고 인류에게 불행한 그늘을 드리우는 시작이다.

들뢰즈와 데리다의 철학은 우리와 괴리된 관념적 허구의 세계가 아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억압하고 있는 인식체계의 오류를 지적하고, 그것으로부터 적극적으로 해방되어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들의 실질적 사유로 향하는 길을 안내하는 친절한 입문서이고 통로의 역할을 완벽하게 하고 있다. 일탈과 절단이라는 기계론적 사유의 한계, 리좀적 세계관과 같이 세상을 한층 투명하고 보다 완전하게 볼 수 있는 데리다와 들뢰즈의 사유의 틀로 진입하기 위한 키워드들을 메를로퐁티, 가타리, 소쉬르, 바타이유 등 이들의 사상에 영향을 준 기원적 사유들과 연계하여 풍부하고 수월한 이해를 돕는다. 들뢰즈와 데리다에 입문하는 이들에게 꼭 먼저 읽어 볼 것을 추천하고픈 책이다. 보이지 않고 낯설어 보이던 것들이 밝고 익숙한 것으로 체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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