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의 주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선택할 미래가 없는 세대의 삶의 물음, 혹은 고착화된 지배질서에 대한 반동.’ 그러나 이 주제의식를 다루는 창조적 감각이 더욱 주목하게 하는데, 곳곳에 산재하여 기지를 발휘하는 일종의 개념의 전복, 즉 예술적 상상력이라는 새로움, 신선한 문장들의 발견이다. 그리고 곧 유행어가 될법한 표제인 “‘표백’세대”라는 지금의 세상에 대한 정체성의 표상, 시대 의식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데 이보다 적확(的確)할 수 없을 만큼 예리한 통찰적 의식이다.

지금의 한국사회를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88만원세대?, 청년들이 갈 곳 없어 방황하게 하는 이 사회, 단지 삶의 존재자로서의 의무이외에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이 사회의 본성을. 자본주의를 시작한 구미(歐美)의 어느 지역보다 철저한 시장자본주의를 교조적으로 숭배하는 나라, 부와 권력의 계층적 구조를 빠르게 고착시켜 체제의 견고함을 구축한 사회, 형식적 민주주의의 실행으로 시민사회의 구조적 흠결이 없어 보이는 사회, 그래서 이 체제는 모든 사람들에게 수용과 적응만을 요구한다. 이처럼 ‘완전한 세상’에서 일탈이나 파괴, 혼란에는 명분이 차단된다. 비록 정의와는 한참 거리가 있고, 부도덕하지만 체제를 운영하는 틀, 지배적 담론, 기성의 질서는 어떤 틈새도 없을 정도로 안정되어 있어 어린 세대들은 한정된 영역에서 단지 몸부림칠 자유만이 부여되어있다.

세대를 초월해서 이러한 체제에 갇힌 사람들이라면 이 견고한 난공불락의 세상에 대항해 어떤 준비와 노력을 하고, 어떻게 삶의 자존감을 확보할 수 있을까? 이처럼 소설은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체제를‘프랜시스 후쿠야마’식으로 완결된 세상, 인류의 이데올로기와 제도의 역사가 끝났다는 인식이 지배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야만 완전한 세상을 전제로 한 등장인물들의 자살이란 반동의 행위가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더구나 오늘의 사회를“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great big white world)"라고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하얗게 표백된 세계로 표상하고 있는 것처럼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젊은 세대들은 주체성이 지워진 세대로 문자 그대로의 표백세대인 것이다.
결코 원치 않았지만 21세기 초, 한국사회의 젊은 세대는 앞선 세대들의 사회와 구성원을 위한 저항과 혁명과 같은 거대한 명분도 가질 수 없으며,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무력한 수용이외에는 선택항이 없다는 진단은 어느 만큼은 옳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즉시적인 변혁, 치열한 1등 의식만 주입된 영웅주의적 자기 확신에 대한 안달이 아닐까? 세상에는 이등도 있고 꼴등도 있으며, 또한 있어야 한다. 그리고 어쩌면 이등이나 꼴등들이 세상을 주도해왔는지도 모른다. 권력과 부라는 지배적 권위를 확보하고, 세상 체제의 일대 개혁, 체제의 대전환에 영향력을 가지는 것만이 삶의 의미는 아닐 것이다. 물론 이 사회의 던적스러움은 새삼 말 할 것도 없다. 물론 세상은 지배적 담론, 권력이 영향을 행사하지만 민중적 각성, 의지를 거스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시민의 사회 - 정치, 경제, 문화 등의 현상 - 에 대한 보편적 지적역량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이렇게 꽉 막힌 불온한 사회의 변화세력으로서 어떠한 출로를 만들어 낼 수 없는 무력감에 빠진 오늘의 젊은 세대의 현실에 공감한다. 그래서‘세연’이란 여대생의 자살선언과 그녀의 추종세력인 이 땅의 젊은이들이 사회적 파장을 가장 센세이션하게 일으킬 수 있는 즉, 기성 질서와 사회변혁의 메시지로서 인식될 수 있는 극명한 수단으로서 자살을 선택하는 것은 어떤 혁명적 행위의 씨앗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살이 일개 개인의 초라한 상황적 이유로 치부되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 자신들이 소위 가장 잘나가는 삶의 정점, 자본주의 사회의 척도로서 성공적이라는 지위에 이를 때 자살한다. 오직 그 자살이 대(對)사회적 메시지여야 하기 때문에. 이것도 부족해서 재벌 2세의 자살까지 더해서 이 사회의 시스템적 오류, 본질적인 저항의 강도를 더하고자 하지만, 이 사회의 속성, 타자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과, 타자의 죽음조차 자극적인 상품으로 취급하는 광기에 젖어든 세계에 대한 몰이해 아니면 여전히 순진하고 유아적인 낭만적 기대로 보이기까지 한다. 아마도 관음증적인 호기심으로 반짝 주목을 끌겠지만 OECD국가 중 자살율 1위 국가라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사회 시스템적 반성이나 각종 사회 제도와 장치들에 대한 변화를 위한 작은 시도조차 하지 않는 현실이 그것을 입증한다. 한국사회, 다시 말해 한국의 지배 권력들은 결코 자살을 개인적 영역에서 사회적 영역으로 변화시키지 않을 것이다.

화자인‘적 그리스도’는 7급 공무원시험 준비를 하면서 시종 하급관료, 삶의 영원한 패자로서 묘사하고 있다. 서열중심의 계급적 질서를 고착화시키는 이러한 관료임용제도가 오늘의 환경 하에서 옳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직급이 가질 수 있는 권력적 행위의 지극한 협소가 사회적 영향력에서 거의 무력하기 때문에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항변은 그야말로 엘리트주의, 기성 질서의 시각을 그대로 고수하는 관점이다. 7급, 9급이 변해야 한다. 기성의 썩은 질서에 물들지 않고, 개개인 스스로 변혁의 일원이라는 자각 말이다. 화자는 이러한 반론에 회의를 보인다. 보다 넓었던 선택의 길이 이처럼 대학생들이 하급 공무원시험에나 매달릴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라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경시하고 있지 않느냐고. 잘못된 지적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의 세대에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다. 경제권력적 시각에서 보는 한 궁극적인 물음이 될 수 없다. 순환논리에 빠져 멍청한 논쟁만 하게 될 뿐. 다만 지배적인 사회장치의 심각한 오류들을 바로 잡기위한 저항의 수단이 자살이란 점에는 동의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자칫 시대에 압도당해 의지를 상실하거나 자유를 상실할 수 있는 젊음에게 선택의 여지없는 상황에 처해 선택을 강요당하는 불행의 무지와 안이함에 머물지 않고 처절한 반동의 자각과 실천적 행동을 제시한다는 점에서는 몇 번이고 갈채를 보낸다.
실 날 같은 소리라도 밖으로 표출하려면 실 날 같은 바람 한 가닥이라도 만나야 하듯이 세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기인식과 반성없는 사회에 무지와 과욕, 자멸의 이치에 대한 경고를 보내는 것은 절대 필요한 역사적 이치이고 깨우친 이들의 의무이다. 좌절과 절망으로 암흑을 헤매는 표백세대일 밖에 없는 오늘의 젊은 세대들의 고통의 실체가 안이하기 짝이 없는 기성질서에 보내는 냉혹한 메시지로서 이 소설의 의지는 이미 위대하고, 탁월하다. 한 여학생의 자살선언문을 비롯한 유언적 잡기(雜記)와 현실 속 화자의 삶이 병행하며 치닫는 급진적인 속도가 아찔할 정도로 이야기의 재미도 풍성하다. 논리와 감성을 오가며 절묘한 균형을 이뤄낸 보기 드문 지적 역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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