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 - 펭귄 클래식 펭귄클래식 5
앙드레 지드 지음, 이혜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좁은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내게 ‘알리사’와‘제롬’은 40여년 가까이 이름을 잊지 않은 몇 안 되는 소설 인물이다. 모든 것이 첫 인식일 만큼 어린 시절에 읽었던 작품이어서 그 감성적 영향이 깊었던 탓일 것이다. 간절함과 애틋함이 절절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비극적인 결말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알리사는 그토록 사랑하면서도 왜 제롬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일까? 또한 제롬은 왜 그렇게도 우유부단한 것일까? 뭐가 이렇게 어렵고 복잡해? 라는 안타까움이 감상의 전부였을 것이다.  

이제 나는 이 작품을 어떻게 읽어 낼 것인가? 라는 것은 스스로도 흥미로운 관심사였다. 끝내 사랑의 결실을 이뤄내지 못했던 이유를 탐색하게 된 것인데, 작가가 은밀하게 여기저기 뿌려놓은 장치들을 발견할 만큼 문학적 경험이 축적되었을 것이라는 내심의 생각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알리사 뷔콜랭’에 대해서... 

알리사란 인물을 이해하는데 있어 그녀의 미모(美貌)를 물려준 어머니 ‘뤼실 뷔콜랭’과 청교도적 엄숙주의라는 정신적 닮은꼴인 고모이자 사촌 동생 제롬의 어머니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자기 존재의 과시와 두려움의 대상으로서의 경고격인 발작의 연기로 허위와 기만, 그리고 사치와 관능적 쾌락을 추구하는 탕녀로서의 뤼실의 기질은 고모의 엄격함이라는 성스러움, 즉 도덕적 억압기제와의 결합을 암시하고 육체와 정신적 본성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알리사가 제롬에게 보낸 편지는 물론 그녀가 남긴 일기는 제롬을 향한 사랑의 진실을 확인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제롬에 대한 갈망이 깊을수록 그녀는 개인적 행복보다는 의무로서의 성스러움을 쫒으며, 결국 성(聖)이 속(俗)을 누른다는 것이고, 마침내 요양원에서 삶을 마감함으로써 성스러움을 완결한다. 세평(世評)은 이를 종교에 과도하게 매몰된 광신적 인물이라고도 하며, 사랑의 지고함에 이른 고결한 성녀라고도 하지만 구태여 이러한 양극단의 시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젊은 애인을 따라 남편과 자녀들을 버리고 떠나버린 엄마의 윤리적 배반에 대한 혐오만으로도 육체의 행복, 속세적 쾌락을 초월하고자 하는 그녀의 종교적 신성함으로의 인도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알리사는 무의식적 본성까지 통제할 수 있는 인간이상의 초월자로서 표현되지 않는다. 육신을 지닌, 오감을 느끼는 인간이다. “발끝은 옷자락 아래로 삐져나와 한 줄기 램프 불빛을 받고 있었다.”라는 소파에 길게 누워있는 알리사의 관능적 자세나, 이를 보고 아버지가 “마치 네 어머니를 보는 것 같더구나.”라고 확인하고 있듯이 그녀에게 내재된 욕망을 묵시적으로 드러내는 것과 같다.
결국 육체와 정신, 속과 성은 끊임없이 갈등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이로서 제롬을 향한 사랑이 순수하고 신비로우며 영원히 고결한 것이어야 한다는 알리사의 믿음, 신을 향한 간구는 선택의 여지없는 당위로서의 지위를 갖는 것이다.

‘제롬’과 ‘알리사’의 사랑의 술책

알리사가 지향하는 성스러움, 그 당위적 결과의 수긍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사랑은 다분히 기만적인 데가 있다. 알리사와 그녀의 아버지가 정원에서 자신(제롬)을 화제로 나누는 대화를 엿들었던 제롬이 후일, ‘쥘리에트’를 이용하여 알리사가 엿들을 수 있는 상황을 연출하여 그녀를 자극하는 것이나, 알리사가 ‘플랑티에 고모’에게 보내는 편지가 제롬에게 전해지도록 하는 것처럼 자신들의 내면적 진실을 솔직하고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않는 책략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은폐전략은 시쳇말로 밀고 당기기의 술책인데, 자기 확신에 대한 불확실성이란 문제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타자를 읽어내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발생하는 불가피성이긴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 자신들을 상대자가 읽는 것을 방해 하는 것이다. 오직 알리사에 대한 자기중심적 사랑에만 몰두하며, 자기와 주변에 대한 인식이나 이해가 결여되어 있는 무관심과 무신경한 제롬의 결함도 일조하고 있으나 알리사의 자기 내면의 기만적 표현도 완벽하게 서로의 읽기를 실패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

 ‘쥘리에트’의 사랑과 좌절 
 
한편 제롬의 무관심과 무신경은 알리사의 여동생 ‘쥘리에트’의 제롬을 향한 사랑을 깨닫지 못하게 한다. 자신이 만들어낸 사랑이란 환상을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네 사랑의 실체를 되돌아보라는 알리사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쥘리에트는 제롬으로부터 알리사를 향한 사랑의 감정을 들어주고 알리사의 근황을 전해주는 메신저가 되어야하지만, 제롬을 사랑하게 되고 언니와의 경쟁관계에 들어선다. 그러나 제롬의 알리사를 향한 사랑의 확인 후에 사랑 없는 결혼을 진행한다. 알리사의 내적 갈등에 가려져 쥘리에트의 희생은 드러나지 않지만, 그녀의 고통은 결코 알리사의 그것에 뒤지는 것이 아니다.
 
 
알리사의 요양원 죽음 이후, 많은 세월이 지나 쥘리에트의 집을 방문한 제롬과의 재회에서 알리사의 물건을 정리해 모아놓은 방을 소개하며, 쥘리에트가 제롬에게 하는 질문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그럼 오빠는 희망 없는 사랑을 그렇게 오래도록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다고 믿는 거예요?"

“그래 쥘리에트"

“그걸 간직한 채 하루하루 숨 쉬고 살아갈 수 있다는 거군요?”

또한 그녀의 딸을 대녀로 받아줄 것을 제롬에게 요청하면서, 아이의 이름이 ‘알리사’임을 말하는 장면이나, 여전히 알리사를 떨치지 못하는 제롬에게 “자! ~ 이제 깨어나야 해요...”라며, 주저앉아 눈물을 훔치는 쥘리에트에게서 그녀의 사랑이 알리사의 그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언니와 제롬의 사랑을 위해 자신의 사랑을 희생한 쥘리에트의 완전한 사랑, 신을 매개로한 성스러움을 지향한 알리사의 사랑, 어떤 것이 더 아름다우며, 고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흥미로운 도구와 장치들 
 
이렇듯 타자읽기의 실패와 맹목성과 기만성의 교차, 완전한 행복의 추구라는 성과속의 갈등과 같은 플롯에 못지않게 풍부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 장치와 도구들을 발견하는 것은 분명 이 소설의 재미이기도 하다.

기억나는 것으로 제롬 아버지의 장례기간인 상(喪)중에 검은색 상복을 착용하지 않고, 뤼실 뷔콜랭이 흰 드레스와 붉은색 숄을 두르고 있는 것인데, 흰 색 위에 붉은 색의 조합은 엄숙함에 관능성을 더한 교묘한 파격이다.  

이것은 뤼실의 방을 본의 아니게 엿보게 된 제롬의 묘사에서 뤼실이 끌어들여 서로 희롱하고 있던 젊은 애인이 바닥에 떨어진 붉은 숄에 걸리는 것인데, 유혹과 쾌락의 세계를 암시하는 기막힌 장치로서 색(color)을 통한 인물들의 내적 심리를 설명하는 도구로서 돋보인다.
색이 하나의 상징체계인 기호로서 하얀 드레스를 입고 정원에 앉아 제롬을 기다리는 알리사를 통해 그녀의 순결함과 성스러움에 대한 내적 지향을 표현하기도 한다.
또 하나 인상적인 도구로 램프가 떠오르는데, 비스듬히 누운 알리사의 드러난 발을 비추는 램프와, 쓰러져 눈물짓는 쥘리에트의 방으로 하녀가 램프를 들고 들어오는 마지막 장면이다. 램프는 육감을 두드러지게도 하지만 그 관능에 빛을 비춤으로써 현세적 욕망을 어떤 성스러움의 세계로 인도하는 손길로 이해되기도 하며, 좌절과 사랑의 고통을 비추어 마침내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알리는 방향등이란 작용을 완수하기도 한다.

1909년 발표된 작품이니 이제 100년을 넘어섰다. 종교적 색채를 떨쳐내지 못하고 성(聖)의 질서와 신념에 인간의 사랑을 지나치게 몰아댄 느낌이지만, 수많은 자아를 지닌 인간들의 사실적 드러내기와 주체와 타자성에 대한 발견처럼 오늘에도 그 신선함 을 잃지 않는 주제의식은 이 소설이 명작의 반열에서 거듭 읽히는 이유가 된다.

비록 연인의 죽음으로 속세적 결합에 실패하는 비극이지만 그 죽음을 통해 영원한 합일, 완전한 사랑의 추구, 그리고 잿빛 땅거미가 방안 물건 하나하나를 덮어내며 복원하듯이 어떤 희망적 기대가 여운처럼 맴도는 것도 사실이다. 모처럼의 낭만적 기운으로 설렘이 있던 옛 추억의 세계에 한동안 머물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