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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 들뢰즈 :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 데리다 들뢰즈 ㅣ 지식인마을 33
박영욱 지음 / 김영사 / 2009년 9월
평점 :
차이와 차연(differance)의 철학으로 대변할 수 있는 들뢰즈와 데리다의 사유 읽기이다. 이들의 저술을 대하면 그 낯선 개념에 당혹스럽고 좀체 선명한 이해의 세계로 다가서지 못하는 답답함을 느끼게 되는데, 이 책은 이러한 아쉬움을 해소시켜주고, 두 사람의 사상 공간으로 진일보하게 하는데 커다란 도움을 준다.
특히, ‘차이’라고 하는 유사한 개념으로 출발하지만, 어떠한 개념적 구별이 있는 것인지, 그들이 의도하고 전달하고자 하는 세상 읽기가 어떤 것인지를 비교철학적으로 설명하고 있어 한층 명료한 앎을 갖게 된다.
결국 모든 철학이 그러하듯이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보고 진실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어떻게 인식하고 인식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의 사색이다. 이러한 질문들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이유는 실로 당연한 것임에도 우리들 대다수는 잊고 지내거나, 삶의 운영에 있어서 불필요한 것이라고 저 멀리 치워버리기도 한다. 그러하다보니 서로 어떤 대상을 함께 바라보았지만 인식하는 세계가 다르고 또한 전혀 다른 이해와 판단으로 잦은 갈등과 충돌로 반목하고 적대시하는 상황에 이르곤 한다. 그러나 그 양극으로 갈라진 근원은 놔둔 채 고작 현상을 가지고 해결하려하며 이 때문에 어떠한 타협이나 진실에 이르지 못하고 그 골은 더욱 깊어지기만 한다.
인간들의 이런 일반적인 갈등뿐 아니라 소위 근대라고 하는 오늘의 세계가 지향해 온 세계의 인식방법 - 합리주의, 이성중심, 자본주의, 기계화와 과학적 사고, 물질주의 등등 - 의 획일화는 실로 인간들로부터 많은 것들을 잃게 해왔으며, 그것들을 우리는 소외니, 파편화니, 감성이나 다양성의 상실이라고 부르며 근대의 주류적 가치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수일 전‘오슬로’에서 발생한 집단 살해사건의 살해범의 주장처럼, 다문화에 대한 적대감은 오늘 우리들의 세계가 인간을, 사회를,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한 극명한 실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건의 영향은 유럽 국가들의 다문화, 다양성의 부정, 다시 말해 서로 다른 차이에 대한 본격적인 반감으로 이어지고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로 회귀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게 하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퇴화적인 민족주의적, 인종주의적, 국수주의적인 인식으로의 후퇴는 구미 선진국들인 그네들의 탐욕인 세계화, 신자유주의 체제를 스스로 부인하는 꼴이기도 하다. 더구나 소비와 과시라는 현대 물질문명 중심의 사회를 무한히 추구한 결과가 필연적으로 야기할 수밖에 없는 일종의 자승자박의 형국이라 할 수 있다. 지독하리만큼 근대, 모더니티를 추구한 지배적 이성이 만들어 낸 욕심과 수단으로서의 획일화, 동일화의 심각한 모순인 것이다.
이렇게 편협한 인식에 현대인들이 포획된 것은 무엇이 잘못된 것이기 때문일까? 들뢰즈는 이것을 우리의 ‘표상’체계의 오류 탓이라고 했고, 데리다는 대상을 바라보는 인간의 경직적이고 일면적인 사고방식이라 하였다. 즉 이 세상을 개념적으로만 파악하려는 절름발이식의 왜곡되고 조작된 사유방식에 있다는 것이라 하겠다.
‘개념’이란 인간이 어떤 대상의 존재를 분류하고 체계화하기위해 만들어 낸 것으로 책상, 개, 자동차와 같은 것이다. 일례로 흰색과 육면체의 고체이며 짠맛하면 머릿속으로 소금을 떠올린다. 세상의 사물들을 구분하는 머릿속의 기준, 즉‘표상’을 통해 소금이란 개념을 떠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이러한 것들로만 구성되어 있진 않다. 우리가 모르는 무수한 성질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의 개념과 사물 그 자체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고작 개념이라 부르며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결코 우리는 완전하게 어떤 대상을 인식하거나 지각할 수 없는 것이다.
개념의 불완전성을 보완하기 위해서 칸트는‘이념’, 즉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믿고 있는 사상체계로서 우리의 지각능력이나 사고 능력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이 주관적 용어를 도입하였고, 들뢰즈는 이를 자신의 용어로 발전시켜‘다양체’를 도입하였다. 음계 중 어떤 특정 음, 예로써 ‘도(Do)'음을 들었다고 하자. 그러나 그 도음에는 무수한 배경음, 잠재음이 있으며, 그 중에서 우린 주음인 도음만을 듣게 된다. 이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양체임을 설명하는 것이다. 결국 개념으로만은 사물을 온전하게 드러낼 수 없는 것이며 이 드러낼 수 없는 그 자체의 차이를 들뢰즈는 “차이 자체”라고 표현했다. 즉 이 세상 존재 모두가 다 다르다는 말이다.
데카르트는 물론 헤겔조차도 이 세상을 개념적으로만 파악하였다. 완벽한 지식체계가 현실의 원래 모습과 일치한다고 가정하였으며, 인간의 지식이 곧 세계의 본래 모습을 증명하기 위해 인간의 근본적인 사고 능력과 세계의 본질이 일치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성 우월 관념, 합리주의라는 편의적 사고는 모든 것을 개념으로만 파악하여 차이를 없애고 동일성만 남게 하였다. “같은 것만을 강조하면 다른 점이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가 가진 표상체계는 이렇듯 물자체를 표현하지 못한다. 현실의 풍부함과 다양성이 억압되고 차이를 무시하는 표상적 사유는 그래서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현실의 모든 존재에 잠재해 있는 저마다의 독특하고 개성적인 목소리”는 해방되어야 한다. 여기에 오늘의 대중매체는 사람들에게 세상 보는 눈, 감각을 획일화하는데 거대자본과 결탁하여 사력을 다한다. 또한 각종 문화산업도 인간의 감성을 무미건조하게 만드는데 앞장서고 있다. 즉 이러한 획일화를 위한 무차별적인 현대의 주류적 담론세계는 인간의 감성적 능력을 획일화시켜 창조적 능력, 비판정신을 상실시켜 자본과 권력의 공고화는 물론 항구화하려든다. 이것은 약소국과 강대국, 빈국과 부국, 빈자와 부자, 약자와 강자의 고착화이고 인류에게 불행한 그늘을 드리우는 시작이다.
들뢰즈와 데리다의 철학은 우리와 괴리된 관념적 허구의 세계가 아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억압하고 있는 인식체계의 오류를 지적하고, 그것으로부터 적극적으로 해방되어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들의 실질적 사유로 향하는 길을 안내하는 친절한 입문서이고 통로의 역할을 완벽하게 하고 있다. 일탈과 절단이라는 기계론적 사유의 한계, 리좀적 세계관과 같이 세상을 한층 투명하고 보다 완전하게 볼 수 있는 데리다와 들뢰즈의 사유의 틀로 진입하기 위한 키워드들을 메를로퐁티, 가타리, 소쉬르, 바타이유 등 이들의 사상에 영향을 준 기원적 사유들과 연계하여 풍부하고 수월한 이해를 돕는다. 들뢰즈와 데리다에 입문하는 이들에게 꼭 먼저 읽어 볼 것을 추천하고픈 책이다. 보이지 않고 낯설어 보이던 것들이 밝고 익숙한 것으로 체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