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둘레길 여행 바이블 - 지친 일상을 쾌적하게 바꾸는 참살이 여행
이상호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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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 고층빌딩과 수많은 사람들, 차량들이 만들어내는 감각을 무디게 만드는 이질적인 소음에 시달리고, 꽉 짜여 무력감을 야기하는 단조로운 일상의 지루함과 피곤에 쪄들어 있는 나를 느낄 때면 어딘가를 무작정 걷고 싶은 충동으로 헐떡이곤 한다. 메마른 아스팔트와 시멘트길이나 인공적인 장소가 아닌 그 어떤 곳, 마냥 홀로 걷다가 사위를 둘러보고 또는 가던 길 멈추고 나무나 바위에 앉아 무념의 여유를 자연과 호흡하고 싶은 그런 욕구에 시달리곤 한다.
그렇다고 인파가 즐비한 유명한 산이나 계곡, 관광지를 찾아 나설 마음은 추호도 없으며, 어딘가를 올라 세상을 저 아래로 내려다보며 호연지기 같은 걸 느끼고픈 허영도 없으니 마땅히 이 모호한 심사를 받아 줄 장소가 흔쾌히 그려지지 않곤 했다.

이런 내게 사는 곳 가까이에 언제라도 다가가 내 몸과 정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 도보 길을 안내해 주는 이 책은 마치 내 마음 속의 간절한 정화의 욕망을 알기라도 한 듯한, 좀 과장하자면 성스런 경전과도 같은 고마움이라 할 수 있다. 그저 작은 준비로 배낭 하나 둘러메고 가볍게 향할 수 있는 자연과 어우러진 길, 도심에서 수 십 미터만 벗어나도 자연 속에 있는 듯한 길, 구태여 산 정상과 같은 목표를 가질 필요가 없는 길, 그저 무념무상 터벅터벅 내 발걸음과 흙이 마찰하는 소리만을 들리는 그런 길에 대한 기대가 충족되었으니 그리 과장이랄 것도 없을 것이다.

더구나 초행길일 밖에 없는 내게 소개되는 서울과 수도권에 개설된 수십의 둘레길, 게다가 둘레길 마다 저마다 고유의 특색을 지닌 코스들에 접근할 수 있는 진입 경로로부터, 둘레길 내비게이션이랄 만큼 혹여 경로에 잘 못 들어설까 꼼꼼하고 상세하게 기술된 안내는 길눈 어두운 나 같은 이에게는 진정 완벽한 트레킹 지침서가 아닐 수 없다. 열 세 개의 코스로 이뤄진 남양주 소재 다산길이나, 무려 스물한 개 코스로 구성된 북한산 둘레길처럼 각 둘레길마다 너 댓개의 코스로 구성되어 비교적 평지인 곳, 약간의 구릉이 있는 곳, 강변길이 이어진 곳, 사찰과 유적 등 역사와 이야기가 흐르는 곳, 숲과 호수와 계곡이 있는 곳 등 둘레길마다 고유의 성격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어 내 감정의 느낌에 따른 선택이 가능토록 설명되어 있다는 것도 아주 유용한 정보라 할 수 있다.

지속적인 체력단련을 하지 못하고 있는 내겐 둘레길의 코스별 거리나 소요시간, 요구되는 걷기의 난이도는 매우 중요한 정보가 아닐 수 없다. 가볍게 운동화신고 별다른 의복을 준비하지 않았는데 등산화나 트레킹 전문화가 요구된다거나 스틱, 여벌의 옷 등이 필요하게 되면 난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소개되고 있는 일백여 남짓한 코스마다 별 한개 두 개 등 난이도의 표시와 코스의 고저 등 중요한 특징, 정확한 코스연장과 음료나 휴식처 유무는 내 자신의 능력에 기초한 선택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보면 내 성향과 체질에 맞게 느껴지는, 호감이 가는 몇 개의 둘레길 코스가 눈에 띈다. 예를 들어 난이도에 별 세 개가 표시된 북한산 둘레길 제14구간인‘산너미길’은 왠지 체력적 자신감이 붙고 나면 찾아야지 하고 미루게 되고, 북한산 생태 숲이 있는 별 하나짜리 4구간‘솔샘길’은 마음에 새기게 된다.

특히 북악산 툴레길은 방송매체에서도 수차례 소개되었음에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건만 창의문에서 시작하여 백사실계곡을 지나 홍치문으로 이어지는 2코스는 인상적인 자연의 풍광과 미술관, 이국적 카페까지 어울려 하시라도 달려가고픈 심정으로 유혹한다. 또한 다산 정약용선생의 유적지에 이르는 다산실 2코스의 폐철로와 연꽃마을로 이어지는 여정 또한 매력적으로 다가오며, 경기도 시흥 늠내길 제4코스인 옛길은 여우고개, 소래산 마애상, 청룡약수터와 어울려 각각에 서린 다양한 이야기들이 들려 올 것만 같은 기대감을 갖게 한다. 이외에도 군포의 진산이라는 수리산 자락에 펼쳐진 일명 바람고개길(수릿길)이나 화성시에 있는 융건릉둘레길의 솔숲은 마냥 낭만적인 정취로 유혹해댄다. 예술의 향기를 느끼고 싶을 때, 자연 속에서 한껏 고독의 멋을 부리고 싶을 때, 옛 선현들의 그윽한 향취에 물들고 싶을 때, 그저 자연의 숲과 강이 발산하는 순수함에 깃들고 싶을 때, 그러한 다종의 느낌에 따라 내가 하시라도 내 딛을 수 있는 길들이 나를 위한 길처럼 손짓하고 있다는 매혹에 젖어든다.

이제 내겐 나를 해소할 수 있는 장소에 대한 변명의 구실이 사라졌다. 언제라도 마냥 걸으며 자연의 신비로운 기운을 온 몸으로 느끼고 싶었던 욕망의 길이 내게 펼쳐졌으니 말이다. 그저 갇혀있어 막혀있던 내 숨통이 그야말로 탁 트일 것만 같다. 아마 이 책은 내 배낭에 담겨 의기소침하고 표정을 빼앗아 갈 때면 나를 위한 위로와 충전의 길을 동행할 것 같다. 절로 마음이 상쾌해지고 의욕이 솟는 어떤 즐거움이 몰려온다. 겸손함으로 시작하는 작가의 말에도 불구하고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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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세상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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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가 배출해대는 욕망의 찌꺼기가 쌓아 올린 거대한 쓰레기 더미, 그것이 하도 추해서 강의 물안개가 피어올라 자꾸 가리려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무대인 꽃섬을 헤매는 내내, “생명이 없는 물질은 우아한 것으로 만들어져 공장을 나오지만, 인간은 거기서 부패하고 타락한다.”라는‘E.F.슈마허’가 들려준 한 구절이 뇌 속을 맴돈다. 기술, 조직, 정치가 한 몸이 되어 인간성을 거역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침식해서 타자의 욕망을 획득하기위해 물질적 낭비를 반복케 하고 비생산적 소비의 열중 속에 파멸해가는 우리의 우매함을 말이다.

과시적이고 물질적인 욕망이란, 게임기의 슈퍼마리오처럼 “무수하게 반복되는 행진이며 최대의 성취에 이른다 할지라도 언제나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영원한 갈증의 쳇바퀴란 걸 영악한 인간이 모를 리 없지만, 스스로를 끝장내기 위해 달려가는 길이 단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만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기만적 눈가림을 하는 모습은 지성(知性), 아니 이성(理性)의 무능력만을 확인하게 한다.

쓰레기가 만들어 낸 동네, 도시가 버린 그 쓰레기 속에서 삶이란 걸 일구는 사람들이 있던 곳, 그러나 이젠 특권층의 골프장이 들어서고 꽃단장이 되어 자신들의 더러운 욕망과 폭력의 현장을 기억의 표면에서 지워버린 듯이 태연해 보이는 어느 장소가 떠오른다. 소설이 내 시간에 대항해서 망각하고 있었던 배제된 역사의 기억들, 그 차이의 리듬을 새롭게 생성해내게 하는 것 같다.

사람들이 다 버린 것만 모여드는 곳, 그리고 버려진 쓰레기처럼 사회에서 떠밀려든 사람들의 생활터전인 꽃섬이라 부르는 쓰레기의 산, 이 반어적 이름 탓인지 아니면 소설을 견인하는 두 소년, 딱부리와 땜통의 순결함 때문인지 명치끝에 무엇이 걸린 것 같은 느낌에 한동안 사로잡혀있기도 했다. 쓰레기더미로부터 그들의 경계 밖에서 소용될 물질을 찾아내기 위해 흉측스러운 썩은 냄새와 파리 떼, 뿌연 연탄재에 파묻혀 호미질을 하는 작업자들, 그것에조차 이권이 도사리고 있어 구분하고 차별하는 흉물스런 인간들의 초라한 현장의 냄새가 내 코 속에도 확 침입해 든 것처럼 생생하다.

이러한 쓰레기장의 배경으로서의 장치가 시사하는 황폐하고 더러운 인간 세상과 대비되어 두 소년의 피난처이자 비밀장소인 일명 본부와 신들린 여인 빼빼엄마가 향하는 허물어진 당집과 당나무, 그리고 푸른 불빛으로 나타나는 영귀(靈鬼)인 김서방네가 안내하는 피안(彼岸)은 이제라도 돌아가야 할 당위로서의 인간세상, 순결함의 신성한 이상향으로서의 어떤 그리움으로 다가와 기울어졌던 마음의 균형을 잡아준다.

쓰레기동네가 지닌 그 버려짐의 외로운 기운 탓인지, 어른들의 어울림으로 형제가 되어버린 딱부리와 땜통, 두 소년이 바라보던 여울목을 비추던 달빛처럼 그들의 발 길이 닿는 곳은 추한 것들이 감춰지고 주변의 사물들을 친근하게 다가오게 하는 힘이 느껴진다. 천막교회를 찾아 라면상자를 전달하고 쓰레기동네의 추레한 아이들을 앞세우고 사진을 찍어대는 선량한 도시인들의 그 이중적 가면조차 이들의 소박한 기쁨과 계획에 가려지고, 도시의 휘황찬란한 소비의 광란, 그 폭력적 권위도 둘이 비워대는 자장면 곱빼기 한 그릇과 게임기의 뿅뿅 소리에 묻혀버린다.

쓰레기장의 더러움이 자신들이 사는 도시로 행여나 옮을까봐, 그리고 사회에서 버린 이들 인간들까지 소독해서 아예 없애버리려는 듯 낮게 비행하며 살포하는 소독약, 모든 것이 과잉이다. 끊임없는 권력욕, 명예욕, 물욕, 그칠 줄 모르는 그 도달할 수 없는 요원한 만족이란 걸 향해 질주한다. 그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만족이라는 효용의 극대화를 신봉하는 이 반(反)이성적 신념의 우리 세계, 역사의 교훈, 아니 자연사의 교훈은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가! 혼자서 그리 오래 가는 종(種)은 없다고 말이다.  결국 우리가 스스로를 끝장내 버릴 것인지? 우리가 가진 지성이 과연 특별하다면 그것을 입증해야 할 것이다. 김서방네 영귀가 “사람들이 그길로 가다가 모두 망쳐버렸다. 지름길인 줄 알고 갔지만 호되게 값을 치를 게다.”라고 안타깝게 막아서는 그 진리의 말처럼.

쓰레기가 뿜어내는 메탄가스가 마침내 폭발해서 판자촌과 소년을 활활 태우고 잿더미만 남기듯이 우리는 이미 극히 불안전한 세상으로 너무 멀리 치달았는지 모른다. 필요치 않음에도 너무 많이 가지려 하고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그 댓가로 얼마나 귀중한 것들을 잃고 있는지를 거듭 거듭 반추하게 된다. 그래서 소설은 궁극에는 우리들의 아이들이 푸른 대지위에서 서로 어울려 뛰 놀 수 없게 된다면 우리 뒤에 과연 무엇이 남을까? 하고 절망어린 물음에 대한 공감을 우리네와 이 사회에 요청하는 것 같다.

소박한 장소와 사람들, 그 낯익은 일상들을 통해 오늘 우리네 마음에 담긴 것들이 무엇인지, 그러나 정작 채워지지 못한 소중한 것들이 무엇인지, 잊고 있는 것은 또 무엇들인지를 생각게 한다. 무심코 바라본 강 건너 과거가 된 그곳, 매연인지 욕망의 무로(霧露)탓인지 그 흐릿함이 꿈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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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미술관 - 그림, 한눈에 역사를 통찰하다 이주헌 미술관 시리즈
이주헌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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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사에 남긴 족적의 뚜렷함으로 수없이 회자되던 인물들, 시대의 변화와 흥망의 현상을 상징지운 자취들, 그리고 그 사실이 존재해 온 연혁의 기록들인 역사의 의미를 조각과 회화작품 속에 표현된 의미를 통해 해석하고 재조명한다.
미술은 시대를 담고 있다. 설혹 그 표현이 왜곡되어 있다할지라도 그 오류를 만들어 낸 인식 자체는 시대의 시선을 담고 있으니 말이다. 인물의 초상화에서도 소박한 정물화에도, 나신의 조각상에도, 하물며 시대의 전경을 묘사한 역사화는 우리들에게 실로 수많은 의미를 전해준다.

영웅에서 폭군까지, 클레오파트라에서 왜곡의 절정인 오달리스크로, 피와 죽음의 시대를, 그리고 인류 정신의 변천사로 구분하여 전달하는 이 역사서이자 그림책은 인간 해석의 또 하나의 인문학적 통로를 제공한다. 문학이 그렇고 철학이 그렇듯이 미술 작품 속에 들끓는 시대의 인식을 발견하는 것은 분명 지성의 도구를 하나 더 구비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익히 습득된 역사적 인물들과 사건들에 대한 비평적 이해를 미술 작품들과 대비하여 그 진실을 다시금 탐사하는 재미는 흥미로운 지적 경험이다.

그림이 전하는 인간 내면의 역사들

대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드로스의 관용의 리더십에 대한 이야기는 일견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시선을 매혹하는 그림이 있다. 「캄파스페를 그리는 아펠레스」라는 알렉산드로스의 정부(情婦)를 그리는 총애하는 화가와의 에피소드에 나타난 일화인데, 왕의 여인을 사랑하게 된 화가의 불안한 마음을 헤아리는 알렉산드로스의 관대함이 깊은 인상을 남기는 작품이다. 그림 속 화가를 바라보는 알렉산드로스의 경이로운 시선이 일품이다. 그런가하면 수세기가 지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무덤을 찾은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를 묘사한 17세기 화가‘부르동’의 그림은 알렉산드로스와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을 신격화하고 정치적 함의를 과시하려 한 아우구스투스와 시대적 환경을 완벽하게 담아내고 있다.

이처럼 회화는 인물의 내적 세계는 물론 시대의 정황을 한 폭에 압축적으로 담아 몇 권의 책으로 서술될 의미들을 토해내고 있다. 이러한 기능적 역할의 대표적인 그림인‘이아생트 리고’가 그린 「루이 14세」의 위세초상(swagger portrait)은 왕이 지향하던 절대권력에 대한 열망을 더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한 편의 초상화가 이토록 많은 이야기들을 말해주는 작품도 없으리라. 절대군주의 이미지에 집착했던 루이 14세를 통해 17~8세기 절대주의 프랑스의 역사를 조명한다.

이에 버금가는‘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의 대관식」은 그야말로 역사화의 걸작이라 할 것이다. 저자는 나폴레옹의 예술가들에 대한 존경이 만들어 낸 절대걸작이라 추켜세우고 있는데, 인물들의 배치와 세밀한 작은 동작조차도 역사적 의미를 덧씌운 화가의 열정에서 당시 각 인물들의 자기 인식과 심리를 읽어 낼 수 있을 만큼 강렬한 직관이 살아나게 한다.
피투성이가 된 아들의 시신을 안고 황망한 눈을 하고 울부짖는 이반 뇌제의 그림이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전형작인 노란 광명의 빛을 온전히 받으며 의연히 서있는 스탈린을 묘사한 「조국의 아침」같은 우상화, 여인의 품격을 한 없이 고귀하게 표현한 ‘리투르드’의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 사도 바울에서 히틀러, 케네디로 이어지는 카리스마의 개념 변천과 그에 따른 묘사들까지 인간의 내면과 정신사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시대를 대변하는 그림들

시대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회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는데, 중세를 상징하는 카톨릭의 위세가 시대를 고할 수밖에 없게 된 중대한 역사적 배경에 대한 관점이다. 14세기 유럽대륙을 휩쓸었던 페스트의 창궐이다. 유럽인구의 1/3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 자연의 위력에 인간과 종교는 한 없이 취약한 존재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삶과 괴리되었던 죽음이 삶에 들러붙어 죽음이 일상의 인식에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죽음은 계급도, 재산도, 성과 인종의 구분도 없는 무차별적인, 모든 인간에 평등하게 드리워진 것이라는 이해이다. 결국 평등한 죽음의 도래, 이 공포는 중세를 무너뜨렸으며, 종교개혁과 인간 평등과 같은 계몽의 시대로 이어지는 인류사의 대 전환점이 되었다는 시각이다.

이의 상징적 대표작으로서 당시 인간들의 태도를 보여주는 ‘죽음의 춤’이라는 모순된 이중적 태도는 죽음 앞의 참회와 얼마 남지 않은 삶의 쾌락주의적 열정을 결합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홀바인’의 「죽음의 춤」시리즈는 교회의 타락과 죽음, 그리고 개혁의 비판적 이미지를 극히 선명하게 각인시켜준다. 이는 20세기에 들어 다시금 강렬한 이미지들을 남기는 1차 대전(Great war)의 참혹한 전쟁화들로 이어지는데, 잘 알려진‘사전트’나 ‘오토 딕스’의 전쟁의 기억, 죽음의 참상을 그린 회화들이 그것이다. 이 전쟁이 낳은 또 다른 대변혁, 전쟁근로자가 되어야 했던 여성들, 죽음으로 사라진 수많은 젊은 남성들이 남긴 무수한 젊은 미망인들, 이것은 여성의 성적 개방과 지위의 향상, 여성 참정권의 부여로부터 이어진다. 이를 아마 가장 적확하게 그려낸 작품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리하르트 치글러’의 「젊은 미망인」은 전쟁의 상흔, 기존의 도덕적 관습과 성적 자유의 갈등과 공존, 욕망의 주체자로서의 지위를 확보한 여성상을 모두 함축하는 걸작으로 다가온다.

미술의 정신사적 탐사

이 책의 백미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어떤 부분보다 인문학적 서술이 돋보이는 장(chapter)으로 카리스마 개념의 역사학적 변천에 따른 지배 유형의 고찰을 ‘막스 베버’의 『경제와 사회』 , 그리고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를 통해 회화작품에 표현된 이미지와 곁들여 인류의 정신사를 탐조하는 것이다. 특히 당대의 풍속화와 정물화에 나타난 속세의 금욕주의와 종교개혁, 근대 자본주의의 연계를 읽어내는 것인데, ‘얀트렉’의 「바니타스 정물」이나, ‘얀스테인’의「사치를 조심하라」같은 작품은 인류의 윤리의식이나 지성사의 흐름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역사와 미술, 이 둘은 항상 우리들의 정신을 저 멀리 떨어진 과거의 시공(時空)으로 데려다 준다. 거기에는 우리들이 알고자하는 삶과 죽음의 기막힌 이해와 지혜들이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지금에도 영감을 선사하는 사랑들은 어떤 모습인지, 인간의 본성과 그 사회적 발현이 만들어내는 다채로운 변주들의 시작과 종말은 어떠했는지 와 같은 경이로움으로 안내한다. 미술과 역사의 이야기를 결합하여 시각적 이미지와 인문학적 서술이 서로 교호하며 안내하는 인간 사상의 세계는 그야말로 화려하고 즐거운 지적 산책이 되어준다. 빼곡하게 인류의 전환적 역사의 서술이나 수백 컷에 이르는 그림과 조각 작품들의 이미지는 저자의 말처럼 그림에 대한 이해를 높이면서 역사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채울 수 있는 유용한 인문교양서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다해내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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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의 - 시대를 아파한 조선 선비의 청국 기행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1
박제가 지음, 박정주 옮김 / 서해문집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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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세기 조선사회의 피폐함에 대한 정황은 비교적 많은 문헌들과 고증에 의해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당위성 주장을 위해 설명되는 비루한 조선의 참상에 경솔한 분노를 일으킬 정도가 아닐 만큼 익숙해져 있지만 200년이 흐른 지금에도 발견되는 동일한 반복을 행하는 우리 사회의 안일과 편협함, 위선의 모습 탓에 은근히 부아가 치미는 것까지 누르기에는 버거운 무엇이 있다.

책은 내편과 외편, 그리고 왕명에 의해 올린 진북학의 세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명확하게 내용의 성격을 구분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긴 하지만 내편은 풍물과 기술, 문화를 중심으로 청(중국)의 선진문물의 수용을 통한 경제부흥을 역설하고 있으며, 외편은 과거제도를 비롯한 국방, 외교, 관직 등의 제도와 운영에 대한 개혁을, 진북학의는 이들 내외편과 내용상 부분적으로 중복되고 있으나 왕에 상신한 공식적 제안으로서의 구체적 방법론을 담고 있다.

그러나 200여 년 전의 한 깨어난 선비의 시각으로만 온전히 바라보는 데에는 분명 거북함이 있다. 조선조 내내 사대부들인 양반 선비의 정신에 찌들어 있는 중화(中華)에 대한 사대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라는 아쉬움이 그것이며, 마치 한글이 언문불일치의 원흉인양 매도하며 중국어 사용의 당위성 주장으로까지 나아가게 한다. 그럼에도 조선의 유교 선비사회가 만들어 낸 폐쇄성과 후진성에 대한 냉혹한 비판과 이를 혁파하기 위한 구체적이고도 실용적인 대안들의 제시로 인해 민과 나라에 대한 충심, 선각자의 통증에 공감을 회피할 수 없게 한다. 또한 제도와 풍물 등 시대상에 대한 풍부한 묘사로 당대를 이해하는 귀중한 사료적 가치와 아울러 ‘북학파’로 알려진 이덕무, 유득공, 박지원 등의 서문이나 참조문 등으로 그 사실적 관계를 보는 역사의 즐거움도 있다.

하루 한 끼 먹기가 힘든 지독하게 헐벗은 민족, 누추하다 못해 걸인의 움막 같은 백성들의 부끄러운 초막들, 남루한 복장에 새끼줄로 허리를 졸라매고 선 궁궐 호위병, 중국 사신이 한 번 왔다 가면 국가의 경비가 없어 야단이 나는 나라였으니 사신단의 일원으로 북경의 넘쳐흐르는 물질의 화려함과 운송수단, 여성들의 화장과 복색, 벽돌을 사용한 가옥과 성(城)의 축조, 관개기술을 비롯한 발전된 농업기술 등 효용성을 우선시 한 물질과 기술에 시선을 맞춘 것은 당연한 요구였을 것이다.

이러한 실사구시의 기술문화 수용의 주장에서 하나의 간과할 수 없는 뚜렷한 기초 사상을 발견 할 수 있는데, 이 모든 것의 저변에는 수탈당하고 착취 속에 신음하는 고단한 백성에 대한 깊은 연민이 있다는 것이다. 김훈의 소설『흑산』에 묘사되었던 역참마부인 마노리의 애환처럼, 말(馬)이 양반의 체면수단으로서의 가치로 전락하여 말은 단지 양반 사대부를 태우고‘걷는 말’에 불과하여, 수레나 마차의 효율적 운송기능에의 접목이라는 지점에 이르지 못한, 소위 물류기능의 낙후성을 지적하고, 이를 통해 불필요하게 동원되는 백성의 노동력 절감이라는 경제적 효과와 아울러 착취로부터의 해방을 도모하는 것과 같다.

당시 조선의 절반이 선비일 만큼 놀고먹는 계급이 많은 사회에서 나머지 백성이 부담하여야 할 공,노역과 세금, 군역의 고통은 삶을 파괴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이러한 사회구조는 제반 사회현상에 연결되어 총체적인 난맥상을 드러내게 되는데, 농업, 상업, 공업과 괴리된 양반계급들이 이들 분야의 발전적 연구를 한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환경이며, 따라서 국가의 기간산업의 생산성은 정체되거나 점진적으로 낙후될 수밖에 없는 토양이 되는 것이다. ‘위항도인(박제가의 호)’이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이기도 하다. 즉 비생산적 소비인력이기만 한 양반계급의 생산적 흐름으로의 참여라는 계급제도의 혁파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외편에서는 2개 항에 걸쳐 당시 공맹이나 외우고, 시나 읊어대는 과거제도에서 탈피하여 국가의 정치, 경제, 외교, 산업 정책 등에 실질적인 지식을 검증하는 제도로의 혁신을 주장한다. 이들의 사례로서 꿀 먹은 벙어리인냥 외교무대에서 입 한번 벙긋하지 못하는 양반 사대부들의 무력과 무능이나, 농공업은 물론 건축 및 도로, 운송 등 산업인프라(산업 기간시스템)의 전무와 같은 국가 생산의 낙후성을 비판한다. 특히 이러한 비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제반 부문별로 그 구체적 대안들을 방법론까지 설명하며 제시하고 있다.

인간의 육체에만 의존하는 전국의 생산물 운송체계가 수레의 이용과 그‘규격화’를 통해 획득되는 효율성을 일일이 비교하여 입증하는가 하면 수레의 개발이 가져올 파급적인 효과로서 도로의 규격화, 개발로의 이행 및 물류비용 및 시간의 혁신적 단축 등에 이르는‘총합적 사고’를 도입하고 있다. 이러한 시스템적 사고는 벽돌의 생산, 배의 구조 개선처럼 일면 단순한 발상의 변화이지만 이것들이 주거와 도시, 군사적 방어 체계와 연계되고 생산물의 안정적 수송, 절감 및 유지보관의 효율성, 나아가 국가 생산성의 제고로까지 이어지는 것인데, 이러한 체계적인 정책 사고는 아마 당대에는 획기적인 선견이었을 것이다.

우물안 개구리인 당대 조선 사회의 기득권 계층인 양반계급들이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입으로 유교경전을 충실히 인용하는 것 말고는 외교도, 농사도, 무역은 물론 상업유통도, 그리고 하찮은 농기구는 물론 농업기술을 비롯한 어떠한 산업기술에도 아는 것 없는 그야말로 상무식한들이었으니 국가의 경제력 피폐화의 원인을 알 수 없는 것은 자명한 것이었을 게다. 고작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서 그 얼마 되지도 않는 것으로 행세만 하려고 하였으니, 당대의 도기나 자기들의 바닥이 평평치 못하고 모래가 그대로 붙어 제대로 서있지도 못하는 것 또한 자업자득인 것이다.

“쓸모없는 선비가 오늘날에는 많고, 쓸모 있는 수레는 오늘날에는 없습니다.”라는 이 한 구절만큼 조선사회를 명료하게 표현하는 문장도 없겠지만, 이는 지금 우리 사회에 그대로 인용하더라도 무난한 말이기도 하다. 대체로 속된 사람이 현명한 사람보다 많으면 속된 사람이 우세하다는 초정선생의 지적처럼 다수가, 지배계층이 이렇게 엉뚱한 길로 들어서서 나라를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것이 우리 사회이다보니 목숨 내걸고 진언하였던 28조 58항목으로 구성된 정유선생의 이 기록에 새삼 행동하지 않는 자신이 부끄럽다는 생각도 든다. 곤고한 백성에 대한 연민과 나라의 발전을 위한 충심이 촘촘히 배어있는, 진실과 강직한 개혁인물의 인격의 진면목이 드러난 귀중한 18세기 정책기획안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의 한심스러운 정치현실을 볼 때 개혁가 박제가 선생의 의지가 더욱 새롭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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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의 고백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
미시마 유키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동성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동경을 ‘나’라는 부인하기 어려운 자기 내면 심리의 섬세한 묘사를 통하여 강력한 설득력을 구사한 회심의 미학적 개가(凱歌)이다.
마치 동성애의 고고학적 고찰인양 자신의 성장과정상 성적 발현의 특징들을 성애와 관련한 다양한 인문학적 성찰을 곁들여 당사자인‘나’의 다수와의 다름에 따른 고통에 무심한 듯 동정과 공감을 요구할 만큼 교활하다. 이렇듯 배경을 조성하고 그리고 성적 위기에 처한 동성애자의 심리적 갈등을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깊숙이 탐색한다.

그 탐색은 융의 자아와 자기의 분별적 추구와 같은 지극히 분석적인 성찰이다. 거기에는 자신의 남성성의 모순적 발현에 저항하고 세상의 가치관에 적응하려는 노력의 처참한 고통이 있었음을 확신시키려는 의지가 담겨있는 것 같다. 이것은 자기내면의 반복적인 기만, 그 거짓된 내면이 진실처럼 굳어져야했던 인물을 통해서‘사랑’의 본질을 발견케 하는 작업이 되고, 또한 마음속에 감추어둔 것을 사실대로 숨김없이 말하는‘고백’이라는 드러냄의 형식으로 내밀한 감성의 세계를 통해 증언하고 있는 정신과 육신의 배반적 동거라는 낯선 가능성을 입증하는 수단이 된다.

이것은 고교시절의 한 일화인 버스 안내양에 대한 동급생들의 여성에 대한 반응에 공감하지 못하는 자신의 동성애를 위장하기 위하여 과잉의 성적 언사를 행사하는 기만을 보이는 것으로 드러난다. 또한 어떠한 성적 유발이나 관심도 일으키지 않는 친구의 여동생에 남성으로서의 호감과 친밀감을 가장하여 성 정체성의 정상성을 외부에 확신시키려는 자기 불안의 행위로도 나타난다.
이처럼 남성에게만 반응하는 소년의, 청년의 육체라는 배반된 자기 인식을 숨길 수밖에 없는 자의 무력감으로 이를 은폐하기 위하여 거짓된 외연, 가면을 자기화 시킨다. 그럴수록 이러한 이중성은 자기혐오를 증폭시키고 급기야 이 가면이 진실과 혼동을 일으키고 일면 진실을 대체하기에 이른다.

속인 자기의 내면이 속아서 그 속은 거짓이 자기의 내면이 되는 기만. 이 배신적 공생, 모순이 한 인간을 끝나지 않을 고독 속에 가둬놓는다. 이것은 세상에 적응하려는 남성성의 확인을 위한 시도로 이어져 매춘여성을 통해 남성의 발흥을 확인해보지만 결코 여성에게는 어떠한 정상성도 발생하지 않는 자신을 확인케 할 뿐이다. 결국 이것은 자기 정체성, 변할 수 없는 동성애적 기질의 진실에 사회적 공감을 요구하는 확신 행위이기도 하다. 이것은 노력해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외침이기도 하다.

특히 소설의 마지막장인 4장에 이르면 자기기만으로 혼인을 좌절시켜야만 했던 친구의 여동생 ‘소노타’와의 정신적 불륜을 이어 나감에 따라, 타인의 아내가 된 그녀와의 만남이 귀결되어야 하는 성적 결합의 기대를 완성시킬 수 없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동성애자인‘나’의 심리를 밀도 높게 묘사함으로써 불변적 성 정체성, 그 불가능의 한계를 확고한 진실로 굳혀버린다. 1949년 발표작인 만큼 당대의 일본사회가 동성애를 수용한다는 것은 가능한 이해가 아니었을 것이다.

성도착증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이해는 동류의 인간들에게 고립과 가면의 생활을 강요한다. 그러나 ‘미시마 유키오’의 처절한 자기‘고백’의 형식을 띤 이 치열한 성의 심리학적 폭로는 자기변호에의 안주가 아니라는 측면에서 주류사회에 강력한 설득을 이루어냈을 것만 같다. 그럼에도 이러한 의문이 남는다. 제아무리 자기 감상에 냉소를 보내지만 육체의 그 실체적 감각을 과연 영구히 배반할 수 있을까?하고.

한편 이 작품의 미학적 묘미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고교시절‘오미’라는 어떤 시원적인 거친 야만성, 탄력 넘치는 근육과 터질듯이 굽이치는 혈류의 활기참, 그 피의 역동성을 느끼게 하는 동급생에 대한 성적 갈망의 관능적 터치나, 상상의 공간에서 전개되는 모순적 성희의 묘사, 정신과 육체의 배반적 반응, 성적 갈증과 죽음의 임박성이 동일선상에서 작동하는 그 악마적 쾌락, 내면의 무수한 기만과 합리화의 심리적 작용들이 애틋하다 못해 사무치는 진실성으로 미적 승화, 일종의 숭고함까지 느끼게 한다는 점이다. 더욱이 감각의 화려함이 만들어내는 야릇한 긴장, 춤추는 듯한 이야기의 기복이 가져다주는 쾌락적 요소들은 어떤 만개한 아름다움으로 빠져드는 환각조차 들게 한다. 동성애란 소재를 통해 심약한 인간 정신의 한계를 돌파해보겠다는 호기로운 이 시도는 이처럼 소설적 성공에 동의하게 한다. 그러나 육체를 정신과 분리한 이원적 구조 속에서 통제의 논리로 냉담함을 유지한 그의 시선은 실패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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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11-11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먼저 읽으셨군요, 필리아님. 저도 미시마유키오를 좋아해서 얼마 전에 샀거든요. [금각사]를 좋아하지만 이 책이 편하게 읽히지는 않더라고요. 제가 워낙 중간에 던져놓기를 잘해서 아직도 그대로 있어요. 그래서 필리아님 리뷰도 제게는 좀 어렵네요. 다시 독서를 시작해야겠어요.

반갑습니다, 필리아님 :)

필리아 2011-11-11 16:38   좋아요 0 | URL
네, <금각사>만큼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에요. 그러나 읽기에는 감각적 호소가 많은 만큼 보다 수월하죠. // 결국 태생적인, 일종의 주어진 조건에 안주하며, 자신의 다름을 쓰다듬으며 훌쩍거리기보다는 본능, 혹은 무의식에 저항하는 것이죠. 이를 보다 확대하면 약해빠진 인간들의 자기연민에 냉소를 보내는 것이기도 하구요. 그러나 저는 ‘미시마 유키오’가 정신과 육신을 이원적으로 구분하고 이를 통제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공감하지 못하고 있어요. 육체의 반응과 모순된 정신을 내면화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주인공인 ‘나’는 실패한 것이라고 봐요. 전 미시마의 주장에 반기를 드는 것이지요...

아이리시스 2011-11-11 16:57   좋아요 0 | URL
아, 설명을 들으니 수월해지는데 감각적 호소에 동조하지 못하고 읽어내려갔기 때문일 수 있겠어요. 저도 정신과 육신을 이원적으로 구분하는 게 가능할까 하고 있거든요. 그러니 드라마틱한 자살도 가능한 작가였겠지요. 남들이 보지 못한 것, 남들이 쉽게 인정하지 않는 것들. 그렇게 본인을 몰아간 것은 아닐지. 작가비평을 하자는 건 아니지만요. 잘 안 읽히던 원인이 거기 있었던가 봐요. 저는 [금각사]는 오래됐지만 어려운데 비해 잘 읽힌다고 느꼈던 기억이 있어서요. 무언가에 저항하는 건 언제나 어렵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