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학의 - 시대를 아파한 조선 선비의 청국 기행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1
박제가 지음, 박정주 옮김 / 서해문집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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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세기 조선사회의 피폐함에 대한 정황은 비교적 많은 문헌들과 고증에 의해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당위성 주장을 위해 설명되는 비루한 조선의 참상에 경솔한 분노를 일으킬 정도가 아닐 만큼 익숙해져 있지만 200년이 흐른 지금에도 발견되는 동일한 반복을 행하는 우리 사회의 안일과 편협함, 위선의 모습 탓에 은근히 부아가 치미는 것까지 누르기에는 버거운 무엇이 있다.

책은 내편과 외편, 그리고 왕명에 의해 올린 진북학의 세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명확하게 내용의 성격을 구분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긴 하지만 내편은 풍물과 기술, 문화를 중심으로 청(중국)의 선진문물의 수용을 통한 경제부흥을 역설하고 있으며, 외편은 과거제도를 비롯한 국방, 외교, 관직 등의 제도와 운영에 대한 개혁을, 진북학의는 이들 내외편과 내용상 부분적으로 중복되고 있으나 왕에 상신한 공식적 제안으로서의 구체적 방법론을 담고 있다.

그러나 200여 년 전의 한 깨어난 선비의 시각으로만 온전히 바라보는 데에는 분명 거북함이 있다. 조선조 내내 사대부들인 양반 선비의 정신에 찌들어 있는 중화(中華)에 대한 사대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라는 아쉬움이 그것이며, 마치 한글이 언문불일치의 원흉인양 매도하며 중국어 사용의 당위성 주장으로까지 나아가게 한다. 그럼에도 조선의 유교 선비사회가 만들어 낸 폐쇄성과 후진성에 대한 냉혹한 비판과 이를 혁파하기 위한 구체적이고도 실용적인 대안들의 제시로 인해 민과 나라에 대한 충심, 선각자의 통증에 공감을 회피할 수 없게 한다. 또한 제도와 풍물 등 시대상에 대한 풍부한 묘사로 당대를 이해하는 귀중한 사료적 가치와 아울러 ‘북학파’로 알려진 이덕무, 유득공, 박지원 등의 서문이나 참조문 등으로 그 사실적 관계를 보는 역사의 즐거움도 있다.

하루 한 끼 먹기가 힘든 지독하게 헐벗은 민족, 누추하다 못해 걸인의 움막 같은 백성들의 부끄러운 초막들, 남루한 복장에 새끼줄로 허리를 졸라매고 선 궁궐 호위병, 중국 사신이 한 번 왔다 가면 국가의 경비가 없어 야단이 나는 나라였으니 사신단의 일원으로 북경의 넘쳐흐르는 물질의 화려함과 운송수단, 여성들의 화장과 복색, 벽돌을 사용한 가옥과 성(城)의 축조, 관개기술을 비롯한 발전된 농업기술 등 효용성을 우선시 한 물질과 기술에 시선을 맞춘 것은 당연한 요구였을 것이다.

이러한 실사구시의 기술문화 수용의 주장에서 하나의 간과할 수 없는 뚜렷한 기초 사상을 발견 할 수 있는데, 이 모든 것의 저변에는 수탈당하고 착취 속에 신음하는 고단한 백성에 대한 깊은 연민이 있다는 것이다. 김훈의 소설『흑산』에 묘사되었던 역참마부인 마노리의 애환처럼, 말(馬)이 양반의 체면수단으로서의 가치로 전락하여 말은 단지 양반 사대부를 태우고‘걷는 말’에 불과하여, 수레나 마차의 효율적 운송기능에의 접목이라는 지점에 이르지 못한, 소위 물류기능의 낙후성을 지적하고, 이를 통해 불필요하게 동원되는 백성의 노동력 절감이라는 경제적 효과와 아울러 착취로부터의 해방을 도모하는 것과 같다.

당시 조선의 절반이 선비일 만큼 놀고먹는 계급이 많은 사회에서 나머지 백성이 부담하여야 할 공,노역과 세금, 군역의 고통은 삶을 파괴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이러한 사회구조는 제반 사회현상에 연결되어 총체적인 난맥상을 드러내게 되는데, 농업, 상업, 공업과 괴리된 양반계급들이 이들 분야의 발전적 연구를 한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환경이며, 따라서 국가의 기간산업의 생산성은 정체되거나 점진적으로 낙후될 수밖에 없는 토양이 되는 것이다. ‘위항도인(박제가의 호)’이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이기도 하다. 즉 비생산적 소비인력이기만 한 양반계급의 생산적 흐름으로의 참여라는 계급제도의 혁파라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외편에서는 2개 항에 걸쳐 당시 공맹이나 외우고, 시나 읊어대는 과거제도에서 탈피하여 국가의 정치, 경제, 외교, 산업 정책 등에 실질적인 지식을 검증하는 제도로의 혁신을 주장한다. 이들의 사례로서 꿀 먹은 벙어리인냥 외교무대에서 입 한번 벙긋하지 못하는 양반 사대부들의 무력과 무능이나, 농공업은 물론 건축 및 도로, 운송 등 산업인프라(산업 기간시스템)의 전무와 같은 국가 생산의 낙후성을 비판한다. 특히 이러한 비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제반 부문별로 그 구체적 대안들을 방법론까지 설명하며 제시하고 있다.

인간의 육체에만 의존하는 전국의 생산물 운송체계가 수레의 이용과 그‘규격화’를 통해 획득되는 효율성을 일일이 비교하여 입증하는가 하면 수레의 개발이 가져올 파급적인 효과로서 도로의 규격화, 개발로의 이행 및 물류비용 및 시간의 혁신적 단축 등에 이르는‘총합적 사고’를 도입하고 있다. 이러한 시스템적 사고는 벽돌의 생산, 배의 구조 개선처럼 일면 단순한 발상의 변화이지만 이것들이 주거와 도시, 군사적 방어 체계와 연계되고 생산물의 안정적 수송, 절감 및 유지보관의 효율성, 나아가 국가 생산성의 제고로까지 이어지는 것인데, 이러한 체계적인 정책 사고는 아마 당대에는 획기적인 선견이었을 것이다.

우물안 개구리인 당대 조선 사회의 기득권 계층인 양반계급들이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입으로 유교경전을 충실히 인용하는 것 말고는 외교도, 농사도, 무역은 물론 상업유통도, 그리고 하찮은 농기구는 물론 농업기술을 비롯한 어떠한 산업기술에도 아는 것 없는 그야말로 상무식한들이었으니 국가의 경제력 피폐화의 원인을 알 수 없는 것은 자명한 것이었을 게다. 고작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서 그 얼마 되지도 않는 것으로 행세만 하려고 하였으니, 당대의 도기나 자기들의 바닥이 평평치 못하고 모래가 그대로 붙어 제대로 서있지도 못하는 것 또한 자업자득인 것이다.

“쓸모없는 선비가 오늘날에는 많고, 쓸모 있는 수레는 오늘날에는 없습니다.”라는 이 한 구절만큼 조선사회를 명료하게 표현하는 문장도 없겠지만, 이는 지금 우리 사회에 그대로 인용하더라도 무난한 말이기도 하다. 대체로 속된 사람이 현명한 사람보다 많으면 속된 사람이 우세하다는 초정선생의 지적처럼 다수가, 지배계층이 이렇게 엉뚱한 길로 들어서서 나라를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것이 우리 사회이다보니 목숨 내걸고 진언하였던 28조 58항목으로 구성된 정유선생의 이 기록에 새삼 행동하지 않는 자신이 부끄럽다는 생각도 든다. 곤고한 백성에 대한 연민과 나라의 발전을 위한 충심이 촘촘히 배어있는, 진실과 강직한 개혁인물의 인격의 진면목이 드러난 귀중한 18세기 정책기획안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의 한심스러운 정치현실을 볼 때 개혁가 박제가 선생의 의지가 더욱 새롭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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