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의 고백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
미시마 유키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동성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동경을 ‘나’라는 부인하기 어려운 자기 내면 심리의 섬세한 묘사를 통하여 강력한 설득력을 구사한 회심의 미학적 개가(凱歌)이다.
마치 동성애의 고고학적 고찰인양 자신의 성장과정상 성적 발현의 특징들을 성애와 관련한 다양한 인문학적 성찰을 곁들여 당사자인‘나’의 다수와의 다름에 따른 고통에 무심한 듯 동정과 공감을 요구할 만큼 교활하다. 이렇듯 배경을 조성하고 그리고 성적 위기에 처한 동성애자의 심리적 갈등을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깊숙이 탐색한다.

그 탐색은 융의 자아와 자기의 분별적 추구와 같은 지극히 분석적인 성찰이다. 거기에는 자신의 남성성의 모순적 발현에 저항하고 세상의 가치관에 적응하려는 노력의 처참한 고통이 있었음을 확신시키려는 의지가 담겨있는 것 같다. 이것은 자기내면의 반복적인 기만, 그 거짓된 내면이 진실처럼 굳어져야했던 인물을 통해서‘사랑’의 본질을 발견케 하는 작업이 되고, 또한 마음속에 감추어둔 것을 사실대로 숨김없이 말하는‘고백’이라는 드러냄의 형식으로 내밀한 감성의 세계를 통해 증언하고 있는 정신과 육신의 배반적 동거라는 낯선 가능성을 입증하는 수단이 된다.

이것은 고교시절의 한 일화인 버스 안내양에 대한 동급생들의 여성에 대한 반응에 공감하지 못하는 자신의 동성애를 위장하기 위하여 과잉의 성적 언사를 행사하는 기만을 보이는 것으로 드러난다. 또한 어떠한 성적 유발이나 관심도 일으키지 않는 친구의 여동생에 남성으로서의 호감과 친밀감을 가장하여 성 정체성의 정상성을 외부에 확신시키려는 자기 불안의 행위로도 나타난다.
이처럼 남성에게만 반응하는 소년의, 청년의 육체라는 배반된 자기 인식을 숨길 수밖에 없는 자의 무력감으로 이를 은폐하기 위하여 거짓된 외연, 가면을 자기화 시킨다. 그럴수록 이러한 이중성은 자기혐오를 증폭시키고 급기야 이 가면이 진실과 혼동을 일으키고 일면 진실을 대체하기에 이른다.

속인 자기의 내면이 속아서 그 속은 거짓이 자기의 내면이 되는 기만. 이 배신적 공생, 모순이 한 인간을 끝나지 않을 고독 속에 가둬놓는다. 이것은 세상에 적응하려는 남성성의 확인을 위한 시도로 이어져 매춘여성을 통해 남성의 발흥을 확인해보지만 결코 여성에게는 어떠한 정상성도 발생하지 않는 자신을 확인케 할 뿐이다. 결국 이것은 자기 정체성, 변할 수 없는 동성애적 기질의 진실에 사회적 공감을 요구하는 확신 행위이기도 하다. 이것은 노력해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외침이기도 하다.

특히 소설의 마지막장인 4장에 이르면 자기기만으로 혼인을 좌절시켜야만 했던 친구의 여동생 ‘소노타’와의 정신적 불륜을 이어 나감에 따라, 타인의 아내가 된 그녀와의 만남이 귀결되어야 하는 성적 결합의 기대를 완성시킬 수 없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동성애자인‘나’의 심리를 밀도 높게 묘사함으로써 불변적 성 정체성, 그 불가능의 한계를 확고한 진실로 굳혀버린다. 1949년 발표작인 만큼 당대의 일본사회가 동성애를 수용한다는 것은 가능한 이해가 아니었을 것이다.

성도착증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이해는 동류의 인간들에게 고립과 가면의 생활을 강요한다. 그러나 ‘미시마 유키오’의 처절한 자기‘고백’의 형식을 띤 이 치열한 성의 심리학적 폭로는 자기변호에의 안주가 아니라는 측면에서 주류사회에 강력한 설득을 이루어냈을 것만 같다. 그럼에도 이러한 의문이 남는다. 제아무리 자기 감상에 냉소를 보내지만 육체의 그 실체적 감각을 과연 영구히 배반할 수 있을까?하고.

한편 이 작품의 미학적 묘미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고교시절‘오미’라는 어떤 시원적인 거친 야만성, 탄력 넘치는 근육과 터질듯이 굽이치는 혈류의 활기참, 그 피의 역동성을 느끼게 하는 동급생에 대한 성적 갈망의 관능적 터치나, 상상의 공간에서 전개되는 모순적 성희의 묘사, 정신과 육체의 배반적 반응, 성적 갈증과 죽음의 임박성이 동일선상에서 작동하는 그 악마적 쾌락, 내면의 무수한 기만과 합리화의 심리적 작용들이 애틋하다 못해 사무치는 진실성으로 미적 승화, 일종의 숭고함까지 느끼게 한다는 점이다. 더욱이 감각의 화려함이 만들어내는 야릇한 긴장, 춤추는 듯한 이야기의 기복이 가져다주는 쾌락적 요소들은 어떤 만개한 아름다움으로 빠져드는 환각조차 들게 한다. 동성애란 소재를 통해 심약한 인간 정신의 한계를 돌파해보겠다는 호기로운 이 시도는 이처럼 소설적 성공에 동의하게 한다. 그러나 육체를 정신과 분리한 이원적 구조 속에서 통제의 논리로 냉담함을 유지한 그의 시선은 실패한 것이 아닐까?...


댓글(3)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이리시스 2011-11-11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먼저 읽으셨군요, 필리아님. 저도 미시마유키오를 좋아해서 얼마 전에 샀거든요. [금각사]를 좋아하지만 이 책이 편하게 읽히지는 않더라고요. 제가 워낙 중간에 던져놓기를 잘해서 아직도 그대로 있어요. 그래서 필리아님 리뷰도 제게는 좀 어렵네요. 다시 독서를 시작해야겠어요.

반갑습니다, 필리아님 :)

필리아 2011-11-11 16:38   좋아요 0 | URL
네, <금각사>만큼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에요. 그러나 읽기에는 감각적 호소가 많은 만큼 보다 수월하죠. // 결국 태생적인, 일종의 주어진 조건에 안주하며, 자신의 다름을 쓰다듬으며 훌쩍거리기보다는 본능, 혹은 무의식에 저항하는 것이죠. 이를 보다 확대하면 약해빠진 인간들의 자기연민에 냉소를 보내는 것이기도 하구요. 그러나 저는 ‘미시마 유키오’가 정신과 육신을 이원적으로 구분하고 이를 통제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공감하지 못하고 있어요. 육체의 반응과 모순된 정신을 내면화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주인공인 ‘나’는 실패한 것이라고 봐요. 전 미시마의 주장에 반기를 드는 것이지요...

아이리시스 2011-11-11 16:57   좋아요 0 | URL
아, 설명을 들으니 수월해지는데 감각적 호소에 동조하지 못하고 읽어내려갔기 때문일 수 있겠어요. 저도 정신과 육신을 이원적으로 구분하는 게 가능할까 하고 있거든요. 그러니 드라마틱한 자살도 가능한 작가였겠지요. 남들이 보지 못한 것, 남들이 쉽게 인정하지 않는 것들. 그렇게 본인을 몰아간 것은 아닐지. 작가비평을 하자는 건 아니지만요. 잘 안 읽히던 원인이 거기 있었던가 봐요. 저는 [금각사]는 오래됐지만 어려운데 비해 잘 읽힌다고 느꼈던 기억이 있어서요. 무언가에 저항하는 건 언제나 어렵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