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브레이커 - 세상과 온몸으로 부딪쳐 자신의 길을 찾는 소년의 이야기
파올로 바치갈루피 지음, 나선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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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탄소에너지의 고갈,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으로 지구 생태계의 파괴, 인간의 도덕적 오만을 대표하는 유전공학 기술의 남용이 만들어 낸 반인(半人), 이렇듯 암울해진 미래의 인간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사회는 극단적으로 양극화되어 부자들의 세계와 빈자들의 세계는 차단되어 폐허가 된 쓰레기 더미에서 재생품을 수집하기 위해 중노동에 시달리는 아이들과 그들을 착취하고 폭력과 살인, 배신과 기만만이 숨 쉬는 무법 공간의 지옥도가 펼쳐진다.


아무런 안전도구도, 생명에 대한 어떠한 연민도 없는, 생존의 욕구만 팽배한 현장, 거대한 폐선(廢船)을 해체하여 수입이 될 수 있는 구리, 철, 폐유(廢油) 등을 수집하기 위해 불빛조차 없는 암흑의 폐선 바닥과 좁은 덕트 속에서 쉴 새 없이 목숨을 건 노동을 해야 생존할 수 있는 곳이다. 사실 이러한 묘사는 상상의 미래도, 과장된 디스토피아도 아니다. 바로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거대 글로벌 기업들이 어린 소년소녀들의 노동을 착취하는 끔찍한 선박해체 작업의 현장은 즐비하기에 소설 속 소년과 소녀를 보는 마음은 안타깝기만 하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타인을 믿는다는 것은 커다란 위험이 되는 세계이고, 중노동일지언정 그것만이 유일한 생존의 길이다. 이 거친 일마저도 얻기 위해 비굴함과 폭력에 시달려야 하고, 노동력을 상실하면 장기를 비롯한 신체를 팔아야 하고 이마저도 없어지면 죽음만이 기다리는 그런 곳이다. 그래서 감독자가 되고 쓰레기 수거권리를 가지는 자가 되어 노동에서 벗어나는 행운을 쥐기 위해 남들이 찾아내지 못한 가치 있는 물건을 찾는 것은 이상이자 꿈이 된다. 선박 해체작업의 경량(輕量)팀 일원인 소년‘네일러’는 우연히 팀의 조장인 연상의 소녀인‘피마’와 해안 근처의 섬을 탐색하던 중 폭풍우에 전복된 부자들의 세계에서 온 쾌속선을 발견하고, 그들의 눈앞에 전개된 엄청난 귀중품들과 유일한 생존자인 부자들의 세계에서 온 소녀를 마주하게 된다.


네일러와 피마에게 있어 이것은 중노동을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임을 의미한다. 소녀는 그들의 세계에 돌려주고 보상을 받을 수도, 아니면 신체라는 물질로서 팔수도 있는 대상이며, 그녀를 장식하고 있는 금과 다이아몬드등 귀금속만으로도 하나의 작업권리를 살 수 있다. 우리에게 이러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까? 내 생존의 수단으로서 한 인간 생명의 사생결단권을 갖게 되었을 경우 내 이익과 타자의 생명을 교환할 수 있을까? 더구나 자신들의 신체를 착취하고 인간적 존엄성을 부정하는 부자들의 세계에서 온 소녀를 위해 자신에게 온 행운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조차 여의치 않게 되는데, 폭력과 살인, 타자의 생명에 대해 어떠한 연민도 갖지 않는 잔혹한 인물, 바로 네일러의 아버지가 이끄는 일군의 무리와 생사를 건 사투를 벌이게 된다. 생명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살인, 끔찍한 이 세계에도 사랑과 보호와 연민의 유대는 있어 그들의 도움을 받아 경멸과 조롱의 의미를 담은 부자들, 스웽크(swank)인 소녀와 탈출을 감행한다. 소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소녀의 세계, 즉 부자들의 세계 또한 그치지 않는 탐욕으로 얼룩진 세계임을 드러낸다. 불법과 야만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서 소녀의 생명을 노리는 세력들로 인해 네일러의 꿈과 희망, 소녀의 귀환이라는 여정에는 끊임없이 위험이 놓이고 용기와 도전을 요구한다.


성취를 향한 길은 결코 평탄치 않다. 때론 예기치 않은 존재로부터의 도움이 있고, 도저히 건널 수 없는 장애를 넘어서야 하는 순간이 있으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선 절대 절명의 선택이 요구되기도 한다. 그것은 미지에 대한 과감한 도전의 용기이며, 폭풍우 몰아치는 거칠고 거대한 파도의 비탈과 협곡을 곤두박질치는 사투를 건 승부의 세계이기도 하다. 소녀 니타와 소년 네일러는 그들 서로에게 ‘러키 걸’, ‘러키 보이’라는 행운으로 불리지만 이들에게 다가온 행운(lucky)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하기위해서는 이처럼 힘겨운 풍랑과 마주하는 태도일 것이다.

사실 이러한 결론은 진부하고 낭만적인 교훈이라고, 선박해체작업에 내몰린 어린 소년소녀들의 실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공허한 소리에 불과하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찾아야 할 꿈조차 꿀 수 없고, 도전해야할 희망조차 없다면, 우린 무엇을 말 할 수 있겠는가?


“교만과 죽음은 빨리 찾아오는 법”이라고 말한다. 오늘의 우리 세계가 보이는 행태는 인류 역사의 그 어느 시기보다 오만하고 자기 과신에 젖어있다. 물질은 정신을 압도하고, 과학은 자연의 본성을 통치하려한다. 아마 우린 죽음, 자신들의 운명을 재촉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 난자에 개, 호랑이, 하이에나의 유전자를 혼합하여 만들어낸 혼합생명체인 반인, 가난한 자들의 노동착취와 신체를 거래대상으로 하는 파텔, 로스앤칼슨 등 거대기업들의 부도덕성, 해수면 아래로 잠겨버린 한때 영화로 불리던 도시의 음울함 등은 이 소설이 전하려는 메시지들을 이처럼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미래 세대들, 지금의 어린 소녀 소년들에게 지향해야 할 인간의 진정한 가치, 덕목이 무엇인지를 생각게 하는 생명의 이야기가 된다. 생명, 인간의 존엄성, 그 고귀한 가치들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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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낮은 언덕들
배수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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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외의 세상을 이해하는 데 인색해질 것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이 소설은 제법 도전적이다. 타인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데 서툴고 무관심하기만 한 사람들에게 따라 올 것을 기대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마 소설에 등장하는‘말레비치’의 그림, <검은 사각형>의 일화를 통해 “세상에는 사회와 인민 이외의 무언가의 가치가 존재함”을 말하려 했듯이 은폐되고 드러나지 않은 것들, 보지 않고 외면한 것들, 알지 못한 것들을 드러내는 작업, 즉 익숙하지 않은 것들의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하나의 수단으로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리라. 존재하는 것들을 진정 보려면 말이다.

 

금지된 그림을 인민에게 드러내는 기획, 삶의 방랑자이자 시간의 방랑자인 주인공‘경희’처럼“문제 아닌 모든 것들을 모두 한꺼번에 고요히 번뜩이는 적막한 별들처럼 생각할 수”있도록 해서, 우리와도시의 존재론적 본질을 목격하는 여정으로 끌어들이는 바로 그것이다.

예를 들자면 “시간의 질적 한계에 다다르면” 이미 모든 것들, 산, 강, 도시...들은 더 이상 특정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듯이 인류 최초의 도시‘우르’에서부터 최후의 도시일 수 있는 베를린, 서울...에서 ‘존재의 중첩’을 느끼는 것은 우리의 존재란 어쩜 켜켜이 쌓인 시간의 흔적들, 혹은 그 소산임의 증거들일지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에 도달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은 이‘도시’라는 현대 사회가 발산하는 의미들, 그것에 포획되어 방황하는 존재들의 흔적을 탐사하는 여정이 된다. 도시의 속성, 도시의 자연이 된 익숙한 문화표지들에 대한 단상, 직업과 화폐와 정주(定住)의 주소와 같은 도시의 요소와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주인공의 방랑적 삶의 이야기들이 기억을 주고받으며 “오렌지 색 폐허와 낮은 언덕들의 도시”인 우르에서 스타벅스를 발견할 수 있는 오늘의 도시사이의 그 엄청난 양태적 유사에서 시공의 엷음, 존재적 예시를 보게 한다.

그런데, 방랑자들에게 잠자고 쉴 수 있는 방이나 집을 회원들끼리 공유하는‘카라코룸’에 가입하면 전 세계에 동시적인 잠자리를 갖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코스모폴리탄적 이상처럼 들려주는 얘기에서 13세기 대제국 몽골의 수도, 카라코룸에 몰려든‘세계인’들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지금은 흔적조차 없는 옛 영화(榮華)와 대비되어 주인공처럼 살짝 현기증을 느끼게 된다.

 

한편, “어메리카나이즈드 코리아”와 같이 자기의 정체성을 지워버리고 문명적 일탈을 꿈꾸는 우리의 일그러진 문화사대주의는 카라코룸을 파괴한 러시아와 몽고인들의 어리석음에 가닿고, 이것은 환경주의 게릴라가 자신들의 생활이고 그들 자체여야 했던 사람들의 일화를 빌어 “추상적인 믿음을 위해서 피부색을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닫지 못하는 우리들의 무지를 우회한다.

설혹 영혼의 동굴을 갖지 못한 기계화된 프롤레타리아 종족으로 전락했음을 인지했을지라도 우리가 “정체불명의 도시인이란 옷”을 벗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왜일까?

 

실존하지 않는 직업, ‘낭송극 전문 배우’라는 직업의 경희라는 여성의 도시 여행에서 마주하는 독일어 선생, 치유사, 미스터 노바디, 마리아, 인도인 반치, 익명의 남자...들과 나눈 이야기의 기록들이다. 그런데 이들, 그리고 경희의 실체는 왠지 잡을 수 없는, 우리에게 익숙한 그런 존재들이 아니어서 정말 “수많은 뼈와 돌들의 속삭임”처럼 아득하다. 그래서 더욱 신비롭고 저 깊숙한 시원의 어느 진실들을 비로소 보는듯한 느낌을 갖는다. 삶, 죽음, 그 순환의 위대함, 시간을 방랑하는 자들에게 그렇게 드러내는 존재의 의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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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미술애호가의 방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호영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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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지성에 대한 멋진 한방이라고 할까? 페렉이 천착하는 사물의 획득에 대한 꿈과 몽상의 허위, 상품에 대한 광기어린 집착과 욕망의 진실을 거대한 탐조등 불빛 아래 훤하게 비추는 작업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미술 전시회의 흥행역시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한 결정적 한 방이 필요할 것이다. 알량한 미디어 문화단신의 밋밋한 작품소개 정도로는 주목을 받지 못한다. 여기에도 예외 없이 필요한 것은 황금! 전시회 돈줄의 영향력, 부자들, 예술계, 그리고 무지한 대중의 욕망을 유혹할 수 있는 기막힌 기획! 점잖게, 아주 지적으로, 미술 작품에 대한 순수한 해설과 비평의 표피를 쓰고.

 

전시회 후원자이자 미술 애호가인 거대 양조업자 ‘헤르만 라프케’의 초상화를 그린 ‘하인리히 퀴르츠’라는 화가의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이란 작품이 소개 된다. 그 작은 방의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있는 라프케의 초상을 그린 그림에는 유럽과 미국의 모든 유파와 장르를 아우르는 유명화가들의 작품들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 그림 속 작품들의 하나에는 바로 이 초상화가 다시 그려져 있고 그 속에 다시 재현되고 있는, ‘복제’ 속에 제2복제, 제3복제...가 거울 같은 방식으로 모사되어 있는 독특한 회화라고 한 미술 비평가가 썼다.

 

이 미술작품 해설이 주목을 끈 것은 대부호인 라프케가 유럽을 오가며 수집한 일명‘라프케 컬렉션’에 포함된 걸작들이 모사되어 있다는 점이다. 원작과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에 재현된 그림을 비교하느라 몰려드는 인파들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데 성공한다. 밀려드는 인파로 언론의 집중조명은 물론이고, 마침 헤르만 라프케가 사망하면서 라프케 컬렉션 작품들의 향방이 물질적 불안과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신음하는 욕망들의 소유에 대한 열정에 불을 지피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런데‘복제’란 어휘는‘발터 벤야민’이 지적한 예술성의 상실, 상업화의 폐해를 떠올리게 하면서 소위 ‘복제와 재현’의 경계에 대한 진부한 미학적 비평들을 마치 지성의 전유물인양 읊어대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그래서 복제의 복제를 반사적으로 묘사한 이 작품을 “볼거리로 제공하도록 운명 지어진 ‘창조자’라는 존재에 대한 조소와 냉소, 향수와 환멸이 서린 상징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계에 몰린, 좌절한“예술가의 우울한 운명에 대한 최후의 표현”이라고 해석하기까지 한다.

 

너무 그럴듯하지 않은가? 이 허위의 지성들, 예술의 모호함, 아니 예술계의 허구성을 생각게 한다. 그리곤 지루하게 반복되는 라프케 컬렉션의 회화들에 시시콜콜한 작품 해설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데, 사실 소설의 거의 절반의 분량에 이르는 이 수작(酬酌)이란 것이 페렉의 다분히 의도적인, 본질을 얼마나 호도할 수 있는지를 조롱하는 것이라는 의심을 하게 된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이윽고 진행되는 라프케 컬렉션의 경매에 따라, 대상 작품들의 설명을 위한 미술평론가 ‘레스터 노박’의 “하인리히 퀴르츠‘에 대한 평가는 진실의 암시와 사물이 된 미술작품의 실제 폭로라는 이중의 멋진 작업을 소화한다.

 

퀴르츠의 그림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은 “돈벌이를 위해 복제를 해야 하는 세상에 맞서‘예술가의 자유’를 표현하려는 의도와 무관”하며, “확실히 알 수 없는 어떤 불가능한 유산을 화가에게 강요하는 역사비평적 관점도 없어 보인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 차이들은 특정한 통합과정 혹은 소유과정을 지시한다.”는 말을 통해 물질에 대한 소유욕을 읽어내는 것이고, 급기야는 “타자를 향한 투사나 프로메테우스적 ‘도둑질’을 가리킨다.”면서 이미 사기와 기만이 게재되어 있음을 해독해 낸다.

 

오늘의 사회에서 진정한 미술 작품이란 소더비나 크리스티와 같은 경매에서 거래되는 호사가들의 과시와 욕망의 종물일까? 예술이 규정할 수 있는 한계, 순수한 정신적 체계의 논리적 종결과 마침내 조우하게 되면 사실 침묵해야 하는 것이 정직한 것 아닐까? 페렉이 너절하게 깔아놓은 작품 해설을 넋 놓고 따라가다 순간 쾅하고 반전을 당하게 되는데, 슬며시 미소가 도는 것은 정말 제대로다! 라는 공감 때문일 것이다. “글로 그림을 약탈하는 글쓰기”라는 이 작품의 정의야말로 최고의 극찬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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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넥팅 - 창조하고 연결하고 소통하라
데이비드 건틀릿 지음, 이수영 옮김 / 삼천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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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신하는 존재자이다. 이 관계맺음에서 나를 피력하고 인정받고 공감받기를 희망한다. 그때 우린 피력하기 위한 무언가라는 소재를 대상으로 하는데 그 소재는 자신의 생각이나 신체가 경험한 것, 즉 생각과 느낌의 일부, 몸과 마음의 통일체인 무엇을 드러내고 그것으로부터 타자와의 연결이라는 연대감이 주는 평온함, 온전한 자유로움, 자존감을 맛본다.

이 책은 우리를 이러한 존재자로서의 자존감과 연대감으로 이어주는 궁극의 요소를‘만들기’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만들기라는 행위에는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내는 능력”, 즉 창조의 과정과 느낌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특히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은 거기에 새겨지는 인격과 개성, 고유한 본성이 내재하는 것이고, 이 행위를 통해 안으로부터의 동력을 얻는다고 한다. 다시 말해 “공을 들이고 있고 바라고 있기 때문에 곧 존재하게 되리라 느껴지는 것을 만들고 있는 사람은 몸 뿐 아니라 의식과 영혼의 에너지를 쓰고 있는 것”이며, 그로서 인류가 되고 우리 삶은 행복해지고 다채로워진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이러한 만들기의 터전에서 아주 멀리 배격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학교교육은 기계적 구조화되어 일상의 경험과 분리된 구조로서 추상성만을 주입하고, 자본주의적 노동 분업체계는 극히 일부분에만 참여하게 되어 온전한 무엇을 만드는 것, 개인 고유의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를 박탈하고 있다. 결국 “우두머리가 낱낱이 가르쳐주는 대로 흠잡을 데 없이 물건을 만들어내는 도구”가 되는데 불과하여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자유롭게 표출하거나, 자신의 노동을 장악하지 못하게 한다. 여기에 자기의 느낌과 생각이라는 고유의 창조성과 자존감이 개입할 여지는 상실되고 만다.

 

저자는 인류사회의 중심 가치로서 개인의 자발적 창조성을 강조한 ‘존 러스킨’과 ‘윌리엄 모리스’의 투박한 장인의 결과물과 미술공예운동의 사례를 통해 소박한 삶과 수준 높은 사고에 이바지하는 만들기라는 행위 속에 내재한 창조성, 행복감, 민주성, 연대감을 얘기한다. 우리들은 자신의 노력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한 하나를 다루고 싶어 한다. 바로 이 자신만의 창조성을 드러내게 될 때 보다 완벽한 사람이 되었다고 스스로 느끼게 된다. 비록 그것이 매끈하지 않고 불완전함이 있을지언정 이 불완전성 덕분에 더욱 뚜렷한 인간적 요소가 드러나고 특별해진다. 아마 권력자와 엘리트에 기대어 예술성을 인정받으려는 미술이 저마다의 기벽과 재능이 한데 어우러져 불완전함과 상상력, 그리고 능력만큼 표현된 결과물이 지닌 이 투박함만큼 존재의 지위를 상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창조성은 느껴지는 것이지 외부 전문가의 검증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라거나, “결과물의 양과 쓸모가 아니라, 정말의 즐거움은 대체로‘과정’에 있다.”라는 말과 같이 기술적 성취의 인정보다는 사람 냄새나는 작업, 정서적 공감, 만들기라는 행위 그 자체의 느낌에 본질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일 게다. 즉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행위에는 일상적 창조의 기쁨, 타자와의 공감의 교환 등 부드럽고 평온한 세계와의 연결을 만들어 준다. 이것이야말로 자유롭고 창조적인 소통이라 할 것이다. 책은 이와 같이 인간은 “스스로 일하고 무언가를 만들 때 더욱 행복하고 세계와 결합되며 발전하고 배우기 쉽다는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자유로운 자기표현의 세상인 웹2.0 기반의 개방적 커뮤니티의 플랫폼들을 우리 인류가 지향해야 할 사회적 가치의 중요한 터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례로 많은 이들이 어떠한 보상도 없는데 왜 많은 수고를 필요로 하는 블로그를 할까? 하는 질문을 한다. 우린 블로그에 자기만의 기억이나 일상의 단상, 책이나 영화, 음반에 얽힌 감상이나 관련 정보들을 쓰거나 스크랩하고 링크하며 편집하는‘자기만의 만들기’를 통해 자신과 연관된 측면에 관심을 표현하거나 내보인다. 비슷한 친구들과 연결되고 싶어서, 자기 존재와 사상을 드러내고 그것이 관심을 받고, 나아가 다른 이에게 긍정적 반응을 일으켜 공감과 지지와 격려라는 정서적 지지와 의미 있는 사회적 연결을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만들기란 자기의 자유로운 생각과 느낌의 표현이며, 이는 타자들과의 공유이며, 나아가 그들의 반응이라는 협력의 형태를 통해 상호교류와 인정, 믿음과 공통의 가치를 향한 공동체의 형성, 상생하는 사회, 창조와 다양성이라는 역동적 문화에 이바지 하는 힘임을 증거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튜브, 트위터, 페이스북, 블로그 등으로부터 형성되는 연결이 과연 이렇듯 사회자본의 화려하고 낭만적인 긍정성만 있는 것일까? 일시적이고 단순한 느슨한 관계, 의미 없는 조잡한 영상들, 비슷하거나 공통된 관심으로만 엮여 오히려 폐쇄적인 발칸화된 적대적 그룹의 양상만을 부채질하여 연결 사회 자본을 약화시키고, 웹2.0 기반의 거대기업들이 참여자들을 산업 도구화하는 움직임은‘만들기’의 고유한 긍정성을 저해한다. 더구나 낯설고 이질적인 것은 제거하려는 권력화 된 힘들의 어리석음이 빈번하게 개인의 창조성과 자유, 민주주의를 차단하려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부정적 측면들 때문에“무언가를 만드는 활동에서 적어도 한 사람의 활발한 지성이 물질 또는 디지털 세계와 만나는 과정”이랄 수 있는‘일상의 창조성’, 만들기가 지닌 개인의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 다양성의 획득과 개인들의 결합을 만들어내어 연결이라는 귀중한 사회적 가치를 포기해야만 하는 걸까? 도구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 비대해지면 통제, 의존, 착취, 무기력이 증가한다는 것을 우린 경험의 실제를 통해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생각과 문화를 자유롭고 제약 없이 표현하고 공유할 기회를 차단하거나, 이를 사용하는 이들에게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 산업적 도구화에 대항할 답변을 항상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오랜 민주주의 전통”을 기반으로 월드와이드웹을 만들어낸 ‘버너스 리’의 “순수한 중립성”의 정신처럼, 일상의 창조활동을 촉진하는 체계를 우린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제안하고 있다. 공짜이용이 아니라 작은 정보들에 값을 지불하면 거대 포털, 플랫폼들의 산업적 도구화를 막을 수 있으니 우리 이용자들이 이러한 개방커뮤니티 플랫폼의 이용에 대한‘사회계약’을 체결하자는 것이다. 만일 이용대금의 지불이 마땅치 않다면 각국의 정부들이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전 지구적 온라인 저장소를 만들어 커뮤니티를 제공하는 비영리재단을 만들고 문지기도 없는 최소한의 규제로 창조활동을 돕는 것도 인류의 행복과 사회관계의 총량을 높이는 것이니 가능하리라는 것이다.

 

개인을 “그저 소비자로 여기고 노동자들을 얼굴 없는 서비스 공급자로 만드는” 오늘의 신자유주의 시장 시스템은 개인들의 발언권을 거부함으로써 창조성과 사회 자본을 상실시키고 있다. 사람들이 자신을 표현하는 만들기의 자유로운 행위, 참된 자기표현의 길을 위해 자유주의적이고, 자립적이며, 대항 문화적이고, 반소비주의 운동과 맥을 같이하는 이‘연결 사회자본’의 인류 문화적 가치를 주창하는 이 책은 손으로 만든 사물과 자연과 사랑과 연결되는 참된 공동체 촉진의 길을 발견하게 하고 있다.

만들기와 행동주의를 결합시켜 일상의 창조성이라는 무언가를 함께 만들고 나누는 일이 인간의 행복과 연대감을 축조하는 사회의 중심 가치임을 다시금 확인케 하는 열린 공동체, 아름다운 네트워크를 향한 따뜻한 지성의 웅변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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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의 비극 - Mystery Best 1
엘러리 퀸 지음, 강호걸 옮김 / 해문출판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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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작품의 작가는‘엘러리 퀸’으로 공식 표기되어 있으나, 정작 집필자는‘버나비 로스’이다. 그런데 버나비 로스조차 본명이 아니고, 사촌형제인 ‘맨프리드 배닝턴 리(Manfred Bennington Lee) ’와 ‘프레더릭 더내이(Frederick Dannay)의 공동 집필명인 엘러리 퀸을 교대로 대표하는 또 하나의 가명이라니 복잡하기 그지없다. 이 정도의 신비주의 전략이 필요했다면 당시 추리소설의 치열한 경쟁상황을 짐작케 된다. 그래서인지‘윌리엄 아이리시’의 『환상의 여인』과‘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함께 세계 3대 추리소설로 이 작품이 불리게 된 것은 어쩜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이러한 시장적 배경이나 평단의 평가에 현혹되지는 않았다. 사실 이 작품을 전부 읽고 난 후에야 세간의 목소리를 비로소 확인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 역시 최고 추리 걸작품이라는 평가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추리소설 고유의 스릴을 포함한 지적 쾌락과 이상심리학, 사회학, 병리학, 그리고 윤리학적 토대에 선 심원한 도덕적 메시지까지 더해 문학적 균형은 물론 독자의 지적 체면까지 배려하는 세심함에는 그저 그 완결성, 완벽성에 저항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우선 이 소설의 첫 번째 매력적 특징으로 현란한 트릭이나 작위적 연결을 배제하고 순수한 논리적 기반에 의해 서스펜스와 스릴 등 추리문학의 강박적 쾌락을 완전하고 유연하게 구성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따라서 이야기의 전개를 따라가며 오직 독자 자신만의 추리력만으로 주인공들과 지적 경쟁을 펼칠 수 있게 된다. 사건 현장의 묘사나 수사 정보는 소설 속 수사관이나 독자가 공히 공유하고 있으며, 나중에 추가적인 단서나 증거가 있었다고 우롱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소소한 전환이나 대반전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공감하면서도 자책하게 되는 몰입의 즐거움을 박탈하지 않는 구성과 전개의 탄탄한 축조역량이라고 할 밖에 없다.


그 둘째는 사건의 당사자로 등장하는 인물들에 설정된 개성의 명쾌함이다. 언론의 가십(gossip)란을 단골로 장식하는 가문, 악덕과 천재성 등 세상의 이목을 모으는 기이한 집안으로서 추문으로 얼룩진 여성 부호‘에밀리 해터’를 중심으로 하는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에 잔뜩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5주전에 실종 신고 되었던 에밀리의 남편인 화학자 ‘요크 해터’로 추정되는 사체의 발견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의문에 휩싸였던 이 집안의 인물들이 세상에 노출되는 것이다.

요크와 에밀리 사이의 첫째 딸인 천재 여류시인‘바바라’, 알콜 중독의 방탕하고 성마른 아들 ‘콘래드’, 미모 뒤에 숨겨져 있는 악덕으로 뭉쳐진 막내 딸 ‘질’, 이 미친 듯한 해터 집안의 혈족이 아닌 아들의 아내 ‘마사’, 그녀의 두 아이들, 그리고 그 불구(不具)성으로 인해 더욱 주목 받는 벙어리이자 장님이고 귀머거리인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얻은 40세의 딸‘루이자’는 이들의 독특한 개성으로 인해 이미 강력한 흡입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이 소설의 세 번째 미덕은 법이라는 인위적인 인간의 제도와 윤리 도덕적 관점의 충돌에 대한 성찰이랄 수 있다. 자칫 이러한 관념적 판단에 대한 내용이 소설의 흐름과 괴리되어 겉돌 수 있음에도 완전히 사건의 전개과정에 녹아들어 일체의 소설적 즐거움도 훼손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례로 사건이 영원한 미제(未濟)사건이면서도 동시에 해결된 사건이 되어버리는 결말에 이르면 인간의 취약성에 대한 연민이 법적 경직성을 초월하여 이해를 구할 수 있는 것인지 처럼 즐거움 못지않게 인간적 본질에 대한 애정, 인간을 하나의 존재자 그 자체자로서의 이해라는 심원한 메시지에 절로 도달케 하는 것과 같다.


여기에 더해 사건의 중심축에 놓이는 인물인 장님이자 벙어리이며 귀머거리인‘루이자’를 통한 오감(五感)을 동원한 범인의 추정과정은 물론 의도된 살인 미수, 위장된 살인 등 치밀하게 설계된 악의적 행위의 이면에 은폐된 진실의 추적, 소위 밀실구조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진행되는 사건의 연쇄적 발생이라는 안달이 나게 하는 구조는 사건에 투입된 뉴욕경찰의 강력반 ‘샘’경감을 돕는 유명 연극배우라는 직업과는 어울리지 않는‘드루리 레인’이라는 수사 자문역에 거의 자신을 동일시하게 할 만큼 깊숙이 빠져들게 한다.


사실 수사관이 된 것처럼 소설을 따라가다 보면 직감이 작동하게 되는데, 이것은 작가가 여기저기 흩뿌려 놓은 정황과 증거들의 무의식적 조합을 가능하게 하려는 의도 때문일지도 모른다. 수사관들에게자신들의 저택이 장악된 침체되고 어두운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미친듯이 악의를 발산하는 아이들’이나, ‘천재성과 광기’의 형질적 동일성을 야기하는 유전성의 질병과 같은 암시아닌 암시들과 전 남편의 딸인 불구자인 딸, 루이자의 가여움에 집착하는 엄마 에밀리에 대한 형제들의 적대감까지 한 집안의 광기어린 몰락을 예견케 하는 배경들은 사건의 동기를 다면화시켜 사실상의 무동기로 만들어버리는 발칙함으로 지적 경쟁심이 유발되게 하기도 한다.


한편 소설의 제목인‘Y의 비극’이 어떤 의미에선 이미 범인을, 소설의 모두를 말하고 있기도 하다. ‘비극’이란 단어는 거부할 수 없는 어떤 운명적 요소를 느끼게 한다. 그리고 ‘Y'는 사체로 발견된 ‘요크 해터’의 이니셜 머리글자여서 이 Y가 실체화되는 곳에서 진실을 찾아야 할 것임이 암시되기도 한다. ‘홈즈’를 떠올리게 하는 수사 자문역 ‘레인’과 경감 ‘샘’의 듀오가 범인의 실체를 추리하는 매혹적 이야기가 탈규범적이며 존재론적이기 조차 한 인간의 성찰, 즉 범죄의 도덕적 책임에 대한 유전론적 또는 환경론적 물음까지 하고있는 이 다층적 미스터리 작품은 추리소설 고유의 스릴과 지적 쾌락을 가히 완전하게 즐기게 한다. 예견된 반전조차 마치 그 지적 탐색의 동반자였다는 기분으로 즐거움이 될 만큼 어떠한 흠결도 지니지 않은 추리문학의 전범(典範)이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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