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낮은 언덕들
배수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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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외의 세상을 이해하는 데 인색해질 것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이 소설은 제법 도전적이다. 타인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데 서툴고 무관심하기만 한 사람들에게 따라 올 것을 기대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마 소설에 등장하는‘말레비치’의 그림, <검은 사각형>의 일화를 통해 “세상에는 사회와 인민 이외의 무언가의 가치가 존재함”을 말하려 했듯이 은폐되고 드러나지 않은 것들, 보지 않고 외면한 것들, 알지 못한 것들을 드러내는 작업, 즉 익숙하지 않은 것들의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하나의 수단으로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리라. 존재하는 것들을 진정 보려면 말이다.

 

금지된 그림을 인민에게 드러내는 기획, 삶의 방랑자이자 시간의 방랑자인 주인공‘경희’처럼“문제 아닌 모든 것들을 모두 한꺼번에 고요히 번뜩이는 적막한 별들처럼 생각할 수”있도록 해서, 우리와도시의 존재론적 본질을 목격하는 여정으로 끌어들이는 바로 그것이다.

예를 들자면 “시간의 질적 한계에 다다르면” 이미 모든 것들, 산, 강, 도시...들은 더 이상 특정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듯이 인류 최초의 도시‘우르’에서부터 최후의 도시일 수 있는 베를린, 서울...에서 ‘존재의 중첩’을 느끼는 것은 우리의 존재란 어쩜 켜켜이 쌓인 시간의 흔적들, 혹은 그 소산임의 증거들일지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에 도달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은 이‘도시’라는 현대 사회가 발산하는 의미들, 그것에 포획되어 방황하는 존재들의 흔적을 탐사하는 여정이 된다. 도시의 속성, 도시의 자연이 된 익숙한 문화표지들에 대한 단상, 직업과 화폐와 정주(定住)의 주소와 같은 도시의 요소와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주인공의 방랑적 삶의 이야기들이 기억을 주고받으며 “오렌지 색 폐허와 낮은 언덕들의 도시”인 우르에서 스타벅스를 발견할 수 있는 오늘의 도시사이의 그 엄청난 양태적 유사에서 시공의 엷음, 존재적 예시를 보게 한다.

그런데, 방랑자들에게 잠자고 쉴 수 있는 방이나 집을 회원들끼리 공유하는‘카라코룸’에 가입하면 전 세계에 동시적인 잠자리를 갖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코스모폴리탄적 이상처럼 들려주는 얘기에서 13세기 대제국 몽골의 수도, 카라코룸에 몰려든‘세계인’들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지금은 흔적조차 없는 옛 영화(榮華)와 대비되어 주인공처럼 살짝 현기증을 느끼게 된다.

 

한편, “어메리카나이즈드 코리아”와 같이 자기의 정체성을 지워버리고 문명적 일탈을 꿈꾸는 우리의 일그러진 문화사대주의는 카라코룸을 파괴한 러시아와 몽고인들의 어리석음에 가닿고, 이것은 환경주의 게릴라가 자신들의 생활이고 그들 자체여야 했던 사람들의 일화를 빌어 “추상적인 믿음을 위해서 피부색을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닫지 못하는 우리들의 무지를 우회한다.

설혹 영혼의 동굴을 갖지 못한 기계화된 프롤레타리아 종족으로 전락했음을 인지했을지라도 우리가 “정체불명의 도시인이란 옷”을 벗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왜일까?

 

실존하지 않는 직업, ‘낭송극 전문 배우’라는 직업의 경희라는 여성의 도시 여행에서 마주하는 독일어 선생, 치유사, 미스터 노바디, 마리아, 인도인 반치, 익명의 남자...들과 나눈 이야기의 기록들이다. 그런데 이들, 그리고 경희의 실체는 왠지 잡을 수 없는, 우리에게 익숙한 그런 존재들이 아니어서 정말 “수많은 뼈와 돌들의 속삭임”처럼 아득하다. 그래서 더욱 신비롭고 저 깊숙한 시원의 어느 진실들을 비로소 보는듯한 느낌을 갖는다. 삶, 죽음, 그 순환의 위대함, 시간을 방랑하는 자들에게 그렇게 드러내는 존재의 의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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