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미술애호가의 방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호영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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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지성에 대한 멋진 한방이라고 할까? 페렉이 천착하는 사물의 획득에 대한 꿈과 몽상의 허위, 상품에 대한 광기어린 집착과 욕망의 진실을 거대한 탐조등 불빛 아래 훤하게 비추는 작업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미술 전시회의 흥행역시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한 결정적 한 방이 필요할 것이다. 알량한 미디어 문화단신의 밋밋한 작품소개 정도로는 주목을 받지 못한다. 여기에도 예외 없이 필요한 것은 황금! 전시회 돈줄의 영향력, 부자들, 예술계, 그리고 무지한 대중의 욕망을 유혹할 수 있는 기막힌 기획! 점잖게, 아주 지적으로, 미술 작품에 대한 순수한 해설과 비평의 표피를 쓰고.

 

전시회 후원자이자 미술 애호가인 거대 양조업자 ‘헤르만 라프케’의 초상화를 그린 ‘하인리히 퀴르츠’라는 화가의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이란 작품이 소개 된다. 그 작은 방의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있는 라프케의 초상을 그린 그림에는 유럽과 미국의 모든 유파와 장르를 아우르는 유명화가들의 작품들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 그림 속 작품들의 하나에는 바로 이 초상화가 다시 그려져 있고 그 속에 다시 재현되고 있는, ‘복제’ 속에 제2복제, 제3복제...가 거울 같은 방식으로 모사되어 있는 독특한 회화라고 한 미술 비평가가 썼다.

 

이 미술작품 해설이 주목을 끈 것은 대부호인 라프케가 유럽을 오가며 수집한 일명‘라프케 컬렉션’에 포함된 걸작들이 모사되어 있다는 점이다. 원작과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에 재현된 그림을 비교하느라 몰려드는 인파들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데 성공한다. 밀려드는 인파로 언론의 집중조명은 물론이고, 마침 헤르만 라프케가 사망하면서 라프케 컬렉션 작품들의 향방이 물질적 불안과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신음하는 욕망들의 소유에 대한 열정에 불을 지피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런데‘복제’란 어휘는‘발터 벤야민’이 지적한 예술성의 상실, 상업화의 폐해를 떠올리게 하면서 소위 ‘복제와 재현’의 경계에 대한 진부한 미학적 비평들을 마치 지성의 전유물인양 읊어대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그래서 복제의 복제를 반사적으로 묘사한 이 작품을 “볼거리로 제공하도록 운명 지어진 ‘창조자’라는 존재에 대한 조소와 냉소, 향수와 환멸이 서린 상징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계에 몰린, 좌절한“예술가의 우울한 운명에 대한 최후의 표현”이라고 해석하기까지 한다.

 

너무 그럴듯하지 않은가? 이 허위의 지성들, 예술의 모호함, 아니 예술계의 허구성을 생각게 한다. 그리곤 지루하게 반복되는 라프케 컬렉션의 회화들에 시시콜콜한 작품 해설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데, 사실 소설의 거의 절반의 분량에 이르는 이 수작(酬酌)이란 것이 페렉의 다분히 의도적인, 본질을 얼마나 호도할 수 있는지를 조롱하는 것이라는 의심을 하게 된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이윽고 진행되는 라프케 컬렉션의 경매에 따라, 대상 작품들의 설명을 위한 미술평론가 ‘레스터 노박’의 “하인리히 퀴르츠‘에 대한 평가는 진실의 암시와 사물이 된 미술작품의 실제 폭로라는 이중의 멋진 작업을 소화한다.

 

퀴르츠의 그림 <어느 미술애호가의 방>은 “돈벌이를 위해 복제를 해야 하는 세상에 맞서‘예술가의 자유’를 표현하려는 의도와 무관”하며, “확실히 알 수 없는 어떤 불가능한 유산을 화가에게 강요하는 역사비평적 관점도 없어 보인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 차이들은 특정한 통합과정 혹은 소유과정을 지시한다.”는 말을 통해 물질에 대한 소유욕을 읽어내는 것이고, 급기야는 “타자를 향한 투사나 프로메테우스적 ‘도둑질’을 가리킨다.”면서 이미 사기와 기만이 게재되어 있음을 해독해 낸다.

 

오늘의 사회에서 진정한 미술 작품이란 소더비나 크리스티와 같은 경매에서 거래되는 호사가들의 과시와 욕망의 종물일까? 예술이 규정할 수 있는 한계, 순수한 정신적 체계의 논리적 종결과 마침내 조우하게 되면 사실 침묵해야 하는 것이 정직한 것 아닐까? 페렉이 너절하게 깔아놓은 작품 해설을 넋 놓고 따라가다 순간 쾅하고 반전을 당하게 되는데, 슬며시 미소가 도는 것은 정말 제대로다! 라는 공감 때문일 것이다. “글로 그림을 약탈하는 글쓰기”라는 이 작품의 정의야말로 최고의 극찬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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