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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 - 피터 버거의 지적 모험담
피터 L. 버거 지음, 노상미 옮김 / 책세상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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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겐 자신들과 상호성의 관계에 있지 않은 사람들을 부정하거나 억압하기 위하여 악랄하게 자신들이 내면화한 사회이미지의 수준으로 도덕적 정의를 강요하는 정치와 종교 권력에 대한 의심의 정당성을 말한 『의심에 대한 옹호』에 이어‘피터 버거’의 책은 이로써 두 번째의 접촉이다. 그러나 시종 중용의 사회학을 선언했음에도 근대성에 대한 서구의 일방적 시각, 푸코나 들뢰즈 등 일련의 비판 철학에 대한 비하와 극단적 보수주의의 가치관은 저자의 중용을 의심하기에 충분한 인상을 주었기에 이 선입견이 무너지기를 기대하면서 읽었다. 선입견이 확신으로 확인되었지만.

 

이 책은 일종의 지적 자서전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학문적 편력 - 대학원 공부, 연구와 논문 출간, 대학 강의 등을 중심으로 하여 종교 사회학자로서의 인생 전반에 대한 소소한 기억을 더듬고 있다. 이들 얘기 속에 자신의 주요 저작물들의 학문적 배경과 의도했던 주장들을 통해 사회학자로서 지향했던 인간적인 의지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자기변호와 주장은 있지만 반성은 어디에도 없다.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반성과 용서를 빌 것이 없을 수 있을까? 아마 지극히 자기도취적이고 이기심으로 뭉쳐지지 않고서는 가능치 않을 것이다. 결국 저자의 ‘인간주의적 사회학’이란 것에서 진정성을 발견 할 수 없다는 것이고, 많은 모순으로 가득하다는 얘기가 된다.

 

사회학자로의 길에 들어서게 한 뉴욕의‘사회조사 뉴스쿨’에서의 학업으로부터 자신의 사회학 방법론의 이론적 기반들과 특히 종교사회학자로서 베버에 대한 영향을 말한다. 그리고 뉴스쿨 쉬츠교수의 지식 사회학을 계승함으로써 인간주의적 인문학과 철학에 방법론상 가깝다고 학문적 배경을 정의하고 있다. 또한 루터의 광신자에서 온화한 개신교도로, 중도 우파 보수주의자라고 자신의 이념적 가치관을 선언하기도 한다. 물론 자신의 평가이고 주장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사실 앞선 그의 저술의 논지들조차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본의를 의심하게 될 정도였으니 ‘중도’니, ‘중용’이니 하는 수식어들이 이 사람으로부터 한없이 초라한 말이 되어버린다.

 

다만 그의 저서에서 반복되는 얘기지만 현대사회에 대한 정의에서‘다원성(Plurality)’에 대한 지적이나 ‘제한된 책임성’을 통해 근본주의의 해악을 주장하는 부분만큼에서는 사회학자로서의 일면을 볼 수 있다. 일례로 런던탑에 전시된 사형 집행인의 칼에 새겨진“‘내가 너의 목을 베는 것이 아니요, 예수께서 하심이라.’라고,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며, 단지 신의 도구일 따름이다.”라는 자기기만성이 바로 종교라는 폭로처럼 사악한 이데올로기를 폭로하는 것이 사회학이라는 주장은 저자의 사회학이 어떤 부류인지를 충분히 짐작케 한다. 나아가서 개인이 자기 역할 뒤에 숨을 수 있게 해주는 자기기만의 정체를 폭로하는 것이 그가 말하는 인간주의적 사회학이란 것이고, 이것이 인간을 환상에서 해방시킴으로써 좀 더 인간적인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한다는 신념을 보여준다.

 

한편 근대성은 세속화하지 않는다는 저자의 주장은 다원성과 연결되는데, 오히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는 신들이 늘어난 것이 그 예라고 하는 것이다. 다분히 서양인의 관점이다. 자신이 무지했던 영역을 뒤늦게 알게 됨으로써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 마치 없었던 것이 새롭게 발생한 것처럼 얘기되는 것인데, 이러한 오만의 논리는 한국 등 동아시아의 경제발전을 후기유교주의문화의 발현이라고 단정하면서 급기야는 자본주의의 도덕적 선과 지고의 가치라고 선언하는 식이다. 현장을 직접 체험하는 사회학적 방법론이 자신의 학문적 무기라고 과시하며, ‘사회학적 관광’이라고 자부하는 그 겉핥기의 관광이 어떤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현상을 단정케 하는데 이르는 것을 보면 그저 실소밖에 나오지 않는다. 더욱 가소로운 것은 이렇게 신들이 늘어났으니 다원화된 것이고, 곧 세상은 세속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연 이 논리가 타당한 것일까?

 

여전히 계몽주의 이성에 뿌리를 내린 수구적 사유의 종교 사회학자의 아전인수식 관점을 지켜보는 것은 힘겨운 일이다. 푸코의 성 혁명에 대한 이론에서 영성이 넘쳐난다고 왜곡하고, “고대의 음탕한 비밀 주신제를 희한하게 재현”한 것에 불과하다고 비아냥거리는 것은 그의 무지라고 넘어가더라도, 한국, 대만, 싱가폴의 물질적 발전을 귀동냥하곤 바로 사회주의 사례는 유토피아적 상상 바깥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는 비약에는 그저 혀를 내두를 밖에 없어진다. 학문적 양심이나 사회학이 오물에 처박힌 느낌이다.

 

그리고 자신의 반 페미니즘적 언어 사용의 지적에 대해 ‘right of man'처럼 인권을 표현할 때 남성 명사인 man을 사용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총칭어로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항변하면서 페미니즘 수사학을 공박하는 것이나, 담배회사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받은 것에 대한 비난에 대해서는 금연운동의 정치적 오용이라고 말하면서 성공한 운동이란 이데올로기와 이권이 결합하는 것이고, 곧 “사회학은 분석해서 폭로한다!”라며 본질을 학문적 결실로 회피하는 모습은 지식이 얼마나 파렴치하게 동원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 할 만하지 않을까? 소위 지식사회학이라 명명하거나 종교사회학에 관심을 가진 이들에겐 어떤 참고가 될지 모르겠으나 내겐 기독교 극우 보수주의자의 탐욕스런 인생 편력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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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셀러 - 소설 쓰는 여자와 소설 읽는 남자의 반짝이는 사랑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3
아리카와 히로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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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모든 행위와 의사(意思)가 이야기다. 물론 이야기지만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관심사가 되는 것도 아니요, 더구나 소설이라는 텍스트가 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이다. 아마 작가는‘이야기는 모두 소설이다.’ 라는 명제를 주장하고 싶은 모양이다. 한 명의 독자만 있더라도 작가일 수 있다는 다소 감상적인 의미를 끼워 넣으면서. 그래서 이 이야기는 단순히 스토리인가? 아니면 소설인가? 라는 경계를 오간다. 과연 소설일까? 즉‘문학’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심은 서구 자연주의를 왜곡하여 받아들여 작가 자신의 사생활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는 사소설이 일본문학의 하나의 주류가 된 것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 같다. 타인의 일상사에 유독 관심을 보이는 특성 때문이 아닐까? 그러하다보니 그저 스토리를 가지면 소설문학이 된다는 인식에 공감하는 모양이다. 이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이야기이다. 그저 등장인물들의 시시콜콜하고 지극히 사적인 일상의 단편이요, 혹은 작가 내심의 반영, 이야기 작법의 다른 표현이란 느낌이다.

 

이야기는 두 편의 중편으로 이루어진, 연작(連作) 이야기다. 제목도 ‘side A’, ‘Side B’로 되어 각자의 상황적 측면에서 바라본 이야기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 상황이란 아내의 죽음과 남편의 죽음이란 지극히 예상 가능한 사이드(Side)이다.

사이드 A는 사고(思考)를 하면 뇌의 수명이 단축되어 죽음에 이른다는 가상의 치명적 질병을 앓고 있는 아내에 대한 남자의 애틋한 연민을 그리고 있고, 사이드 B는 교통사고와 말기 췌장암에 걸린 남편에 대한 죽음의 이별이 만들어내는 탄식과 애절한 사랑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여자는 모두 전업 작가이다. 굳이 이 이야기에 마음을 붙이려면 작가, 즉 쓴다는 행위와 읽는 행위의 관계에 대한 어떤 성스러움에 대한 진실일 것이다.

 

아내가 이 이상한 죽음의 병에 걸린 이유가 그녀의 가족들이 보이는 평온의 이면에 은폐된 이기심과 무관심, 무책임성이고, 타인의 성취에 보이는 치졸함의 폭력성이다. 여기에 여자의 작가적 역량을 무참히 짓밟았던 사람들의 정체성을 폭로하고, 그 트라우마를 극복케하는 남자의 헌신과 격려로 사랑의 얘기를 덧댄다. 그런데 대단히 실용적이어서 자신에게 극진했던, 작가로서 날 수 있도록 도와준 남편을 위해 저작권 등의 권리를 유산으로 남기는 마지막 대목은 지나치게 사실적이어서 허구적 즐거움을 일거에 날려버린다. 사랑이란 결국 물질적 보상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것일까?

 

두 번째 이야기는 이 첫 번째 이야기에 비해 그 완성도가 더욱 취약하다. 이야기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의기양양하게 뽐내는 것인데, 한 이야기에서 여자를 죽였으니 이번엔 남자를 죽이면 그것은 또 어떤 반응일까하는 지극히 속물적 겨냥을 하고 있는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선망했던 한 남자와 우연히 마주친 어느 날, 그 남자의 품에 자신이 쓴 소설책이 있고 더구나 그 감동으로 눈가가 젖어있다면, 그리고 절판된 옛 문예지에 발표된 단편마저도 기억하고 소장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마음이 가지 않을 수 있을까. 여기서도 역시 여자는 Side A의 여자와 같이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가 된다. 남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인 여자의 집필을 위해 삶의 리듬과 행동을 헌신한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아마 그러 할 것이다. 작가와 사랑하고 결혼한 남자, 그리고 그러한 남자의 헌신적 배려와 사랑이 고마운 작가인 여자의 이야기. 그런데 참으로 진부한 스토리 아닌가? 게다가 이러한 배우자가 불치병으로 죽음에 직면해 있다면, 그 이별만큼 인간을 간절하게 하는 상황도 없을 것이다. 만일 이것이 한국 작가의 작품이라면 어떠했을까? 흔한 사랑과 이별의 애달픈 이야기에 어떤 관심을 보여줄 수 있을까? 단지 작가와 독자의 관계성에 대한 ‘아리카와 히로’의 분신, 그 생각을 엿본다는 것 이외에 말이다. 독자와 작가의 사랑이야기라는 소재말고..., 러브 스토리를 그저 경쾌하게 즐기라는 이야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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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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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은 왜 읽는가? 라는 질문이 빈번하다. 그리고 왜 쓰는가? 라는 의문도. 그래서 당연히 어떤 의지가 작동하고 목적이 분명하며, 가능한 답변이 있으리라는 명령에 굴복해 이러저러한 답변들을 쏟아내고, 그것들이 그럴듯한 의미로 포장되어 ‘책 읽는 법’, ‘책 쓰는 법’ 따위의 제목을 달고 마치 다 알고 있고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냥 뱉어내어지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런 질문에 딱히 대답할 무엇이 없었고 제아무리 구실을 찾으려 해도 이렇다 할 것이 없었다. 그저 책을 읽는 것이 좋다는 것이고, 그 순간만큼은 외부의 소음과 차단되어 평온해졌다는 것 정도이다. 그렇다. 읽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고 목적 자체였다는 것이다. 여기에 무슨 이유를 갖다 붙여야 한다는 말인가!

 

이 책의 저자는 “누구의 부하도 되지 않고 누구도 부하로 두고 있지 않다.”라고 자유로운 정신의 실천가임을 선언하고 있다. 즉 외부의 기준이 아무것도 없는 발가벗은 형태의 읽기를 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오직 자신의 무의식을, 욕망을 텍스트에 직접 접속하는 고독한 읽기를 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자체인 즐거움을 누리면서. 이렇게 해서 그가 체득한 것은 무엇일까? “읽고 쓰는데 필요한 모든 문학적 학식 일반”이 바로 넓은 의미의‘문학’이요, 그 문학이 세상을 변혁시켜왔다는 주장이다. 분명 책이 세상의 형식을 변화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데 동의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저자가 지적하는 ‘중세 해석자 혁명’이라는 12세기 르네상스나, ‘대혁명’이라 지칭하는 루터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개혁이 바로 문학, 책으로 출발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기에.

 

책을 읽고 쓰는 것, 문득 펼쳐본 미미한 책 한 줄이, 누군가의 조용한 서재 안에서 나온 철학적 개념이 한 문명을 파괴해버리는 일이 가능한 것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책은 바로‘문학과 혁명’에 관한 얘기이다. 여기서의 문학은 오늘의 소설이나 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문학의 어원으로부터 시작해서 문학이란 텍스트 일반, 성서, 법률서, 협의의 문학, 철학을 포함하는 총체이다. 이것들이 인간의 사고와 습속, 문명적 패턴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그것의 예가 교황혁명 또는 중세해석자 혁명이요, 종교개혁이요 대혁명이다. 이 혁명이 지금 우리들이 체감하는 문명의 전환이자 초석이 되었음을 인지하는 것이다. 혁명이란 폭력혁명으로서가 아니라 이처럼 다른 형식, 문학의 형식으로 이루어졌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물론 인류 문명의 대전환을 만들어낸 이들 혁명이 문학혁명이 우선이고 폭력은 보충적이거나 사후적인 것이라는 주장에 전적인 동의를 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혁명을 완성하는 것, 즉 이전의 사회적 인식과 질서를 새로운 인식과 질서로 바꾸는 힘에 있어서 과연 폭력이 항상 후발적이고 보완적 역할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저자의 구구절절한 사실(史實)의 나열에 불구하고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 내 생각이긴 하지만 말이다. 인간의 평등과 자유를 비로소 실현시킨 프랑스 대혁명이 민중의 폭력행사 없이 성공할 수 있었겠는가? 저자는 이와는 달리 이 역시 선행한 법률과 철학, 소설 등 문학이라고 말한다. 이 진실을 과연 누가 구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여기서 저자의 자유정신은 모순에 들어간다. 세계에 대한 전문가, 지식인들의 이론을 “자신을 하나의 우뚝 솟은 전체의 모습을 제시하려는 비참한 팔루스(Phallus)적 향락”이라고 비판하던 저자 자신이 바로 이러한 행동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 향락이 없는 책이 가능하겠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잘 난체 하는 것, 내가 깨우친 것, 내가 발견 한 것을 쓰는 것이 비록 동의 받지 못하거나 허접 쓰레기에 불과한 들 그것들은 나쁜 지(知)요, 내 문학만이 좋은 지(知)라고 하는 것은 독선이 되고 만다.

 

다만, 문학과 혁명에 대한 저자의 관점만큼은 우리가 왜 책을 읽어야 하고 써야 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답변을 제공한다. 루터의 소위 종교혁명이 어떻게 가능했는가라는 측면에서 민중의 졸렬한 언어에 지나지 않았던 독일어를 근대 독일어로 정착시키고 확산시킨 성서의 해석, 다시 말해 성스러운 법을 속된 법으로 이관시키기 위한 무수한 번역작업과 세속화 작업이라는 대대적인 출판행위를 포착한 것이다. 루터 이전의 세상을 지배하던 성(聖)의 속(俗)으로의 변화는 이렇게 텍스트의 확산이 이루어낸 혁명이라는 것이다. 이로부터 저자는 혁명은 폭력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며, 폭력을 가진 자만의 의지로 되는 건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다. 이 역시 많은 반론이 가능할 것이다. 루터만큼 강력한 권력으로서의 폭력을 가진 자가 있었을까라고 묻는다면 텍스트의 선행과 폭력의 후행은 단언하기 어려운 국면에 빠져들고 만다. 지나치게 나아간 것 아닐까? 문학이, 책이 혁명의 저변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혁명의 다른 형식이 바로 문학이라 말하는 것은 미흡하다.

 

중세 해석자 혁명(12세기 르네상스) 역시 문학이라는 로마법을 주입받아 고쳐 쓰인 교회법의 텍스트를 갱신하고 체계를 이루어 근대국가의 원형을 만드는 기반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복됨으로써 인간의 신체에 각인되고 주입되는 것의 기반이 문학이라고 만 말하는 것은 과도한 도약이 아닐까? 폭력은 인간에게 그보다 오래되고 근본적인 의례가 아닌가? 아무튼 텍스트가 인류의 문명을 뒤바꾼 대혁명의 결정적인 토대였음을 새롭게 이해하는 출발점이 되어주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책을 읽고 쓰는 것이 혁명의 초석이 되고, 세상의 문제와 결별하고 변혁될 새로운 세상을 이루는 힘이 될 수 있음에 동의한다. 그래서 어설픈 이들이 지금 세상에서는“철학이 끝났다!”, “문학이 끝났다!”라고 하는 단언의 목소리는 맹랑하고 터무니없는 것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미래가 마냥 낭만적인 것일 수는 없다. 누구나 죽음으로 끝내는 것을 할 수 없다고 해서, 즉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고 해서, 병든 세상에 종말론적 시각을 보내지 못하는 것은 아닐 게다. 그만큼 오늘의 세상은 병들었다. 볼 수 없다고 해서, 알 수 없다고 해서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 말이다. 질병적 세상바라보기에 대해 지극히 혐오감을 가진 낭만적 미래관을 가진 저자의 또 하나의 편협한 독단론을 마주하는 것은 그리 유쾌한 시간이 아니다. 이웃 나라의 젊은 철학자의 독선에 쓴 웃음을 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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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인문학 읽기

 

인문학을 왜 읽는가? 그리고 읽어야 할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이 진부할지 모르겠지만 이는 어떤 책이 진정한 인문학이냐 란 얘기와 상통한다는 의미에서 너무 중요한 것이 아닐까?

『김수영을 위하여』라는 책에서 강신주가 말했듯이 “사회와 인간 삶의 문제에 실천적 전망을 제공하고”, “사회가 가진 치명적 결함을 발견”하기위한 지적바탕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그건 읽어야 할 이유가 없는 책이 될 것이다.

 

쏟아지는 책들에서 이러한 기준을 통과할 수 있는 책을 선별 한다는 것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다. 점차 선정이 신중해진다. 이번 달은 고심한 끝에 세 권의 책을 찾았다. 한 권의 직접적인 전망과 두 권의 간접적인 바탕이다. 한국인의 정신과 신체에 각인된 문화적 인식을 해부하여 오늘의 한국사회와 한국인들 자신의 결함을 직시하게 하는 것이 직접적 전망이고, 간접적인 지적 바탕을 제공하는 그 하나는 21세기 오늘의 인간과 시대적 배경의 원천이 된, 어떤 의미에서 인류의 사고에 대한 대 전환을 선언했던‘니체’의 사상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무심히 읽는 토스토옙스키나 톨스토이를 비롯한 문학의 정신에 대한 것이다.

 

일본의 젊은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의 말처럼 넓은 의미로서의 문학(텍스트)은 세상을 바꾸는 힘의 원천이고, 곧 혁명이다. 그래서 니체의 사상이, 나보코프의 문학비평이, 사회학자 정수복의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에 대한 고찰은 오늘, 지금의 우리와 우리사회를 보다 성숙한 관점으로 바라보도록 도와줄 것이다.

 

1.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 ; 정수복 著

 

오늘을 사는 한국인은 대개가 일제강점기 이후의 시간을 살아온 사람들일 것이다. 일본이 이식한 서구의 근대문명을 시작으로 미국의 해양문화를 통해 근대화를 숙성시키는 과정 속에서 훈육되고 세상을 체험하며 살았다는 의미이다. 그것들은 현세적 물질주의, 가족주의, 연고주의, 민족주의, 국가중심주의 등등이란 모습을 하고 한국인들의 몸 속 깊이 각인되어 한국인만의 문화적 관점, 틀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이것이 긍정적이기 만한 것이 아니어서 도처에서 심각한 결함의 신음소리를 들리게 한다. 그렇다. 이 책은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에 내재된 부정적 효과를 바라보자는 것이다. 당연하다고 보는 세계를 낯설게 봄으로써 이 사회가 지닌 치명적 문제들을 직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일그러진 한국인과 그 사회의 모습을. 그리고 그 극복 방법과 대책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함께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2. 니체 극장 ; 고명섭 著

 

니체의 평전이다. 초인을 선언한,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알리고, 초인이 된 그 인간들이 이제 세상을 마음대로 조작하고 있다. 이 니체라는 사람의 사상을 우린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의 책을 읽어보았는가? 그의 난해한 사상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이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왜 읽어야 하는가? 오늘의 우리들이 바로 그가 말함으로써 탄생한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체를 아는 것은 책을 읽고, 세상을 이해하는데 중대한 인문학적 배경이 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니체의 심층심리부터 그의 제반 저술들과 사상적 토대를 세심하게 해설한 이 책은 실로 고마운 저술이라 할 것이다.

 

 

 

3. 나보코프 러시아 문학 강의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著

 

책을 읽는 행위, 그것은 세상을 바꾸는 행위이다. 즉 실천적 전망을 제공하는 것이 책이요, 특히 문학이기 때문이다. 아마 톨스토이, 고골, 고리키, 토스토옙스키, 체홉 등 러시아 문학처럼 우리에게 많이 읽힌 문학도 없을 것이다. 한국인의 정서, 감성에 여하튼 영향을 미치고 있다. 『롤리타』의 작가, 나보코프는 이들 작가와 작품을 통해 문학의 정신을 알리려 하고 있다. 공리주의를 비판하고 때론 예술성을 강조하기도하며 문학답지 못한 것들에 신랄한 멸시의 비판을 하면서. 그리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문장으로 세계의 모든 독자에게 자유로서의 문학을 해설하고 있다. 문학을 읽고 느끼고 탐닉하는 방법을 거장으로부터 제대로 배우는 기회가 될 것 같다. 삶의 바탕을 이해하는 인문학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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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와 진실의 빛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2
누쿠이 도쿠로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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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람들의 온갖 좌절과 번민과 욕망이 얽혀 만들어내는 부글거리는 삶의 현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다종다양의 군상들이 뿜어내는 개성, 경험이 다르고 학습이 다르고 지위가 다르고 그래서 그들 의 관계에서 빚어지지만 내면에 은폐된 몰이해와 무지, 질시와 혐오, 피해의식은 인생을 피폐하고 절망적으로 바라보게까지 한다. 그러나 소설의 표제처럼 왜곡된 시선으로 가려졌던 사람에 대한 이해는 진실의 빛에 의해 수치스럽게 드러나고야 만다. 그 못남과 몰지각의 정체를.

 

소설은 살인자와 경찰이라는 쫓기고 쫓는 양자가 벌이는 흔한 단선적 이야기에 너절한 복선이나 반전이란 살을 붙여댄 여느 스릴러와는 다른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경찰이라는 하나의 커다란 사회집단의 구성원들, 즉 사회 혹은 조직 속의 사람들 각자가 내면화한 의지나 욕망들의 갈등과 충돌, 위선과 위악의 실체를 투영하는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그리고 그 내면화된 자아(自我)를 만들어낸 사회적 현실로 인해 배태된 현대인의 분열적 정신을 투사(投射)하고 있다. 바로 오늘의 우리네 모습들을 보여주려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선이 이야기의 구조에 기막히게 녹아들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자체가 발산하는 회화적 재미도 압도적이며, 쾌락살인, 모방범, 손가락 수집가와 같은 소설의 주요 재료로 엮어내는 살인행각이나 경찰의 수사과정에서 빚어지는 감각적이고 때론 지적 흥분조차 자극하는 조성의 힘 역시 발군이다. 가히 매혹적인 소설 두 작품을 읽은 것 같은 흐뭇함을 준다고 할 수 있다.

지능화하고 정보화하는 범죄 수법, 범인의 심리와 기만적이고 엽기적인 행동, 이를 쫓아가지 못하는 공권력의 한계와 수사 방식, 형사이기 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지니는 관계적 한계 등의 사실감 넘치는 묘사는 이 소설을 빛내는 또 하나의 요소라 할 것이다.

 

늦은 밤 동네 주민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파출소의 제복경관은 수색 중 온 몸에 붉은 피를 뒤집어쓴 채 죽어있는 여성을 발견한다. 이 여성 피살사건으로 경시청 본청수사과, 관할 서, 기동대 형사들을 연합한 특별수사본부가 꾸려지고, 형사들은 범인 체포를 위한 조별 수사에 착수한다.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조직의 위계나 부서가 다른 구성원들 간에 보이지 않는 이질감, 위화감, 질투와 경원(敬遠)이 자리 잡아 반목과 갈등이 꿈틀거린다. 연합된 수사본부는 철저한 성과주의자, 인간관계 중시자, 균형주의자, 출세주의자, 보신주의 또는 패배주의자 등등 천태만상의 양상을 보이는 인간 군상의 격전지이다.

 

기동대의 중년 경위인 ‘와타비키’는 범인검거에 남다른 실적을 보이는 상급기관인 본청 수사과의‘사이조’라는 젊은 경위의 부문간 영역에는 아랑곳없는 수사 열정이 혐오스럽기만 하다. 일을 위해서는 주변의 시선을 염두에 두지 않는 사이조의 무심한 행동은 열등감을 조장하고 그 무심한 듯한 엘리트적 권위는 거부감만을 일으키게 한다. 이러한‘사이조’는 자신의 부서에서조차 ‘명탐정 ’이란 조롱 반, 진심 반의 별칭을 갖기까지 하고 있다. 여기에 기자로부터 향응을 받고 수사 정보를 흘리는 수사관, 실적을 위해 정보를 폐쇄적으로 운영하는 경사, 상위 권력의 압력에 굴복하고 타협하는 경관 등 저마다 자기의 안위와 욕망을 위해 꿈틀대는 인간 개체로서의 경찰을 보여준다.

 

이어서 두 번째 젊은 여성의 살해소식이 전해지고 첫 번째 피살자와 동일하게 손가락 절단이라는 동일한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연쇄살인범’의 소행이란 의미이다. 살인자는 자신의 행위를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 주목받기 위해 인터넷 음성 사이트에 다음번 살인 일자를 게시하기에 이르고, 경찰은 일정에 맞춰 경찰의 대대적인 동원을 준비하지만 다시금 살인자에게 농락당하고 만다. 범인의 윤곽조차 잡지 못하는 경찰과는 달리 살인자는 자기 현시를 위해 스스로 명명한다. 손가락 수집가!

 

살인 사건의 진행과 병행하면서 전개되는 수사관들 개개인의 내면과 삶의 면모는 반복되는 얘기지만 이 소설의 유다른 감각이다. 아내를 사고로 잃고 장애자가 된 어린 아들과 노모에 의존해야 하는 와타비키의 출세에 대한 비굴한 욕망이, 애정이라곤 사라진 아내를 피해 젊은 여성으로부터 위안을 얻는 사이조의 도피처로서의 일에 대한 열의가 소외되고 피폐해진 현대인의 우울한 초상을 읽게 한다. ‘정의’수호자라는 경찰이란 기호와는 달리 개인으로서의 이들은 그렇게 선과 정의의 표상인 것은 아니다. 추하고 비열하고 냉담한 인물이지만 조직의 일원으로서는 정의를 추구하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아마 이것이 이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이자 본질적인 물음인지도 모르겠다.

 

추함과 순수함, 선과 악, 정의와 불의란 서로 공존하지 않는 대척의 것인가? 선한 사람은 악함이 없고, 추한 이는 순수성이란 없는 것이며, 정의에는 불의가 깃들 여지가 없는 것인가? 우리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사람을 이같이 구분할 수 없는 것일 게다. 사건의 실마리는 바로 이것에 있다. 소설에서 살인자는 자신을 악의 정당한 처단자라 자부하고 있다. 악을 제거하는 자이니 정의가 아닌가? 급기야 명탐정 사이조의 불륜행각이 공개되고 타의에 의해 경찰신분을 떠나게 되면서 이 본질적 질문은 더욱 성숙한다. 젊은 여성들의 죽음과 악의 처단이 무슨 상관인 것인지, 사이조를 불명예 하차시킨 비열한 내부고발자는 누구인가? 또한 사이조의 인간관계에 대한 무관심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 것인지? 그럼에도 인간 삶의 저 밑에 있는 진실의 빛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비추어주지 않겠는가? 정말 사람은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 것인지를. 이 모두를 전복시키는 대반전까지 가세하면서 소설은 삶의 진실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질주한다. 좀처럼 만나기 힘든 완전미를 갖춘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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