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와 진실의 빛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2
누쿠이 도쿠로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사람들의 온갖 좌절과 번민과 욕망이 얽혀 만들어내는 부글거리는 삶의 현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다종다양의 군상들이 뿜어내는 개성, 경험이 다르고 학습이 다르고 지위가 다르고 그래서 그들 의 관계에서 빚어지지만 내면에 은폐된 몰이해와 무지, 질시와 혐오, 피해의식은 인생을 피폐하고 절망적으로 바라보게까지 한다. 그러나 소설의 표제처럼 왜곡된 시선으로 가려졌던 사람에 대한 이해는 진실의 빛에 의해 수치스럽게 드러나고야 만다. 그 못남과 몰지각의 정체를.

 

소설은 살인자와 경찰이라는 쫓기고 쫓는 양자가 벌이는 흔한 단선적 이야기에 너절한 복선이나 반전이란 살을 붙여댄 여느 스릴러와는 다른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경찰이라는 하나의 커다란 사회집단의 구성원들, 즉 사회 혹은 조직 속의 사람들 각자가 내면화한 의지나 욕망들의 갈등과 충돌, 위선과 위악의 실체를 투영하는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그리고 그 내면화된 자아(自我)를 만들어낸 사회적 현실로 인해 배태된 현대인의 분열적 정신을 투사(投射)하고 있다. 바로 오늘의 우리네 모습들을 보여주려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선이 이야기의 구조에 기막히게 녹아들어 있을 뿐 아니라 그 자체가 발산하는 회화적 재미도 압도적이며, 쾌락살인, 모방범, 손가락 수집가와 같은 소설의 주요 재료로 엮어내는 살인행각이나 경찰의 수사과정에서 빚어지는 감각적이고 때론 지적 흥분조차 자극하는 조성의 힘 역시 발군이다. 가히 매혹적인 소설 두 작품을 읽은 것 같은 흐뭇함을 준다고 할 수 있다.

지능화하고 정보화하는 범죄 수법, 범인의 심리와 기만적이고 엽기적인 행동, 이를 쫓아가지 못하는 공권력의 한계와 수사 방식, 형사이기 전에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지니는 관계적 한계 등의 사실감 넘치는 묘사는 이 소설을 빛내는 또 하나의 요소라 할 것이다.

 

늦은 밤 동네 주민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파출소의 제복경관은 수색 중 온 몸에 붉은 피를 뒤집어쓴 채 죽어있는 여성을 발견한다. 이 여성 피살사건으로 경시청 본청수사과, 관할 서, 기동대 형사들을 연합한 특별수사본부가 꾸려지고, 형사들은 범인 체포를 위한 조별 수사에 착수한다.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조직의 위계나 부서가 다른 구성원들 간에 보이지 않는 이질감, 위화감, 질투와 경원(敬遠)이 자리 잡아 반목과 갈등이 꿈틀거린다. 연합된 수사본부는 철저한 성과주의자, 인간관계 중시자, 균형주의자, 출세주의자, 보신주의 또는 패배주의자 등등 천태만상의 양상을 보이는 인간 군상의 격전지이다.

 

기동대의 중년 경위인 ‘와타비키’는 범인검거에 남다른 실적을 보이는 상급기관인 본청 수사과의‘사이조’라는 젊은 경위의 부문간 영역에는 아랑곳없는 수사 열정이 혐오스럽기만 하다. 일을 위해서는 주변의 시선을 염두에 두지 않는 사이조의 무심한 행동은 열등감을 조장하고 그 무심한 듯한 엘리트적 권위는 거부감만을 일으키게 한다. 이러한‘사이조’는 자신의 부서에서조차 ‘명탐정 ’이란 조롱 반, 진심 반의 별칭을 갖기까지 하고 있다. 여기에 기자로부터 향응을 받고 수사 정보를 흘리는 수사관, 실적을 위해 정보를 폐쇄적으로 운영하는 경사, 상위 권력의 압력에 굴복하고 타협하는 경관 등 저마다 자기의 안위와 욕망을 위해 꿈틀대는 인간 개체로서의 경찰을 보여준다.

 

이어서 두 번째 젊은 여성의 살해소식이 전해지고 첫 번째 피살자와 동일하게 손가락 절단이라는 동일한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연쇄살인범’의 소행이란 의미이다. 살인자는 자신의 행위를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 주목받기 위해 인터넷 음성 사이트에 다음번 살인 일자를 게시하기에 이르고, 경찰은 일정에 맞춰 경찰의 대대적인 동원을 준비하지만 다시금 살인자에게 농락당하고 만다. 범인의 윤곽조차 잡지 못하는 경찰과는 달리 살인자는 자기 현시를 위해 스스로 명명한다. 손가락 수집가!

 

살인 사건의 진행과 병행하면서 전개되는 수사관들 개개인의 내면과 삶의 면모는 반복되는 얘기지만 이 소설의 유다른 감각이다. 아내를 사고로 잃고 장애자가 된 어린 아들과 노모에 의존해야 하는 와타비키의 출세에 대한 비굴한 욕망이, 애정이라곤 사라진 아내를 피해 젊은 여성으로부터 위안을 얻는 사이조의 도피처로서의 일에 대한 열의가 소외되고 피폐해진 현대인의 우울한 초상을 읽게 한다. ‘정의’수호자라는 경찰이란 기호와는 달리 개인으로서의 이들은 그렇게 선과 정의의 표상인 것은 아니다. 추하고 비열하고 냉담한 인물이지만 조직의 일원으로서는 정의를 추구하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아마 이것이 이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이자 본질적인 물음인지도 모르겠다.

 

추함과 순수함, 선과 악, 정의와 불의란 서로 공존하지 않는 대척의 것인가? 선한 사람은 악함이 없고, 추한 이는 순수성이란 없는 것이며, 정의에는 불의가 깃들 여지가 없는 것인가? 우리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사람을 이같이 구분할 수 없는 것일 게다. 사건의 실마리는 바로 이것에 있다. 소설에서 살인자는 자신을 악의 정당한 처단자라 자부하고 있다. 악을 제거하는 자이니 정의가 아닌가? 급기야 명탐정 사이조의 불륜행각이 공개되고 타의에 의해 경찰신분을 떠나게 되면서 이 본질적 질문은 더욱 성숙한다. 젊은 여성들의 죽음과 악의 처단이 무슨 상관인 것인지, 사이조를 불명예 하차시킨 비열한 내부고발자는 누구인가? 또한 사이조의 인간관계에 대한 무관심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 것인지? 그럼에도 인간 삶의 저 밑에 있는 진실의 빛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비추어주지 않겠는가? 정말 사람은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 것인지를. 이 모두를 전복시키는 대반전까지 가세하면서 소설은 삶의 진실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질주한다. 좀처럼 만나기 힘든 완전미를 갖춘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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