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반양장)
쑤퉁 지음, 김은신 옮김 / 아고라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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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도시로, 도시로 사람들이 모여든다. 돈과 욕정과 행복을 보장하리라는 존재하지 않는 천국으로, 아니 죄악의 공간으로. 그곳에서 마주하는 것들은 서로에게 생채기를 남기고 증오와 분노가 되어 복수의 고통으로 번민하게 한다. 헐벗고 굶주린 자에게는 발길질이 먼저 가해지는 곳, 가진 것 없는 영혼에게는 멸시와 모욕을 뱉어내는 곳,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육체는 개 취급도 받기 어려운 곳이란 이해를 갖게 된다면, 그 사람의 어두운 내면에는 광포한 분노가 은둔하게 되지 않겠는가?

 

시커먼 탄가루가 수북한 화물칸에서 뛰어내리다 휘청거리는 시골 청년이 있다. 홍수가 휩쓸고 간 고향을 등지고 살기위해 도시에 발을 내딛은 사람의 몰골은 이미 남루함으로 거지꼴이다. 그가 처음 대면하는 것은 도로가에 웅크린 채 싸늘하게 식어버린 하나의 육체이고, 굶주림에 본능적으로 향한 곳은 부두가 폭력배들의 술판이다. 고기 한 점은 지독한 모멸의 감수와 집단적인 구타의 댓가라는 잔혹한 도시의 얼굴을 알려준다.

 

청년에게 쌀(米)은 곧 생존의 안위이고, 고향의 향기이며, 영혼의 어루만짐이다. 굶지 않을 수 있는 생명, 존재의 원천. 부두에서 쌀을 나르는 수레들이 향하는 곳을 정처없이 따라간 곳에는 미곡상회가 있고 얼이 빠진 청년은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그랬다. 그곳이 그의 영혼이 정착할 수 있는 곳일 밖에. 먹여만 준다면 땅바닥에서 자지 못할 것이 무엇인가. 공짜로 얻는 노동력을 마다할 이유가 없는 쌀집 주인은 청년을 거두고, 엄청난 선심을 베푼 것이라 가진 자의 자기기만을 망각한다.

허나 “연민과 온정은 비 온 후 길바닥에 고인 물처럼 얕고 피상적이며, 바람이 불고 햇볕이 비치면 금방 사라지는 것”임을 청년‘우룽’은 모르지 않는다.

 

문득 소설의 배경이 되는‘청베이(城北)’ 와장가(街)의 지명이 작가의 다른 작품, <성북(城北)지대>를 떠올리게 한다. 절망과 무기력에 절고 상처받은 사람들, 그리고 성숙하지 못한 갈등과 혼란의 사회가 귀 기울여주고 보듬어주지 못했던 그 시대상의 처연함이 중첩된다. 자신의 몸뚱아리를 과신하는 쌀집의 첫째 딸 쯔윈, 약자에게 거침없는 모욕과 냉소를 보내는 둘째 딸 치윈은 우룽에게 무한의 복수심을 쌓는, 도시의 본성인 증오와 폭력의 정당한 명분을 확신시킬 뿐이다. 화냥질의 댓가로 씨를 알 수 없는 처녀 임신을 한 첫째 딸의 허물을 위장하기 위해 우룽은 쌀집 사위가 되지만, 장인은 사위의 살해를 청부하기까지 한다. 자신들의 허세와 기만을 위한 이용물 이상이 아닌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이제 이야기는 우룽의 몸 곳곳에 새겨지는 정말의 흉측한 상처들의 여정으로 들어간다. 청부업자가 남긴 발가락 절단, 쯔윈이 물어뜯어 놓은 발, 장인이 쑤셔놓은 실명한 한 쪽 눈, 마침내 죄의 씨앗인 쯔윈의 자식이 망가뜨린 나머지 눈, 그리곤 매독으로 썩어가는 몸통이다. 도시의 사람들이 그에게 상처를 남길 때마다 고집스럽게 집착했던 쌀집이 그의 것이 되지만 그가 느끼는 것은 여전한 방황과 혼돈일 뿐이다. "쌀집의 방들도 흔들렸다. 이곳 역시 기차간 하나에 불과했다. 기차가 광야에서 천천히 움직일 때 우룽 자신도 여전히 떠돌고 있었다. ~ 기차가 날 어디로 데리고 갈지 나도 잘 모르겠어..."

 

그를 버티게 한 분노와 증오, 복수심의 귀착은 무엇이었을까? 잔인함과 포악함으로 부두 폭력조직의 우두머리가 되기까지 하지만, 그의 두 번째 아내가 된 치윈의 시선처럼 “우룽의 영혼이 그 목합 안에서 광폭하게 요동치는 동시에 나지막이 통곡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누가 순수한 시골 청년에게 야수의 포악함을 주입했는가?

‘수퉁’은 그의 다른 작품에서 이러한 문장을 썼다. “만일 꽃을 키우는 사람이 그 화초들 옆에서 귀를 기울여 들었다면 가지와 잎이 자라는 소리와 꽃봉오리가 마음껏 웃는 소리까지 다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우리가 바로 외면하고 소외시키며, 씻기지 않는 오욕으로 분노를 주입시키는 장본인들 아닌가? 조금만이라도 그들의 작고 힘없는 목소리를 경청한다면 증오와 적대가 아니라 화목과 행복이 가능하지 않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은 도시로, 도시로 몰려든다. 돈과 욕정이 거칠게 춤추는 죄악의 도시로. 도시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 오늘 우리들의 연민과 온정이란 것이 고작 어떠한 것인지를 되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쌀이 수북이 쌓인 화물차에 실려 고향을 향한 마지막 길의 우룽이란 사람의 고독과 외로움, 그만이 간직했던 삶의 비밀들이 아득하게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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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매처럼 신들리는 것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4
미쓰다 신조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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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작가 ‘도조겐야’가 들려주는 토속적이고 향토색 짙은 괴담의 출발작품인 모양이다. 먼저 소개된 후속 작품들에 익숙해진 독자로서는 동일한 패턴의 양식이 주는 진부함으로 참신함에 대한 기대가 꺾이지만 고유한 민간전승의 독특함이 이내 이야기 속에 젖어들게 한다. 형식을 완전히 초월하는 스토리의 유일성, 즉 단독성이 발산하는 매력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두려워하는 것들, 반면에 지키려하는 것의 표리관계에 숨겨진 욕망이 마귀가 되고 신령이 되어 이것들의 본질을 은폐한다. 이것은 고유의 신앙이 되어 사람들에게 경외의 대상이 되고, 그 대상을 주제하는 자는 권력자가 된다. 결국 인간 세상의 신비나 알 수 없음이란 것의 이면을 파헤치면 터무니없는 실제가 존재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는 것일 게다. 다만, 작가는 이러한 명료성이 내키지 않은 듯 미완의 모호함을 남겨두지만 이미 사악할 만큼의 탐욕의 모습인 진실의 일면을 드러냈기에 소임은 다했다는 소설적 자신감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싶다.

 

가미구시가(家)라는 일인지하의 마을에 가가치가(家)라는 가문이 들어와 그 지위를 넘어서 마을이 양대 가계로 나뉘고 하나는 신(神)집이 되고, 다른 하나는 마귀(魔鬼)가계가 된 향토사(鄕土史)의 배경을 추적한다. 일종의 민속 유래의 복원과정을 거치는 작업을 하는 것인데, 이 자체만으로도 소설은 발군의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 가가치가 되고 가미구시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지, 이들이 섬기는 허수아비 신령과 신령납치, 마귀인 염매 얘기가 회자되는지, 가가치가가 마귀가계로 불리게 된 연유는 무엇인지를 고증하여 미신의 요소를 이루는 것들의 본원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답(高踏)적일 수 있는 민간 신앙의 복원 작업이 모호하고 기이하며 불가해한 사건들과 마주하면서 그 실체의 적나라함이 현대의 합리주의적 해석과 충돌한다. 가가치가의 주인이자 무녀인 사기리와 혼령받이인 손녀 사기리로 이어지는 가계의 무수한 곡절들, 가미구시와 가가치의 반목과 뒤얽힌 혼인과 애정의 은밀한 산물들이 음습하고 기괴한 산과 강의 자연적 요소들과 어울려 마성(魔性)적 공간으로 깊숙이 끌어들이고, 기이한 형상의 주검으로 발견되는 첫 피살체가 발견되면서 미스터리한 불가사의 탐험을 본격화한다.

 

대대로 여아 쌍둥이가 출생하고, 하나는 무녀 혹은 허수아비 신령이 되고 또 하나는 혼령받이가 되어 가계의 신성을 잇는 가가치가의 신앙적 권위의 존속은 이미 신비이다. 그러나 소설은 가미구시가의 청년 렌자부로의 일기나 도조겐야의 취재일기, 가가치가의 손녀 사기리의 일기 등을 통해 이 신비에 은폐되어있는 사실성을 두려움과 모호한 기억에 실어 끝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그 불가해성에 담긴 진실을 쫓게 한다. 이 과정에 가가치가의 사람들이 연이어 살해되고 어떤 상징적 의미를 지닌 젖가락, 우산 등의 도구들이 입에 물려있는 기이하게 왜곡된 형상들을 마주하게 된다.

 

이들 죽음에는 미스터리의 흔한 도구인 밀실트릭이 한결같이 작동하고 있는데, 그래서 용의자의 규명은 더욱 미궁에 빠져버리게 된다. 용의자의 범위는 한없이 넓어지고 또한 한없이 단순화 된다. 아마 이것도 작가가 의도한 하나의 묘미일 것이다. 민간신앙의 고증, 미신과 현대의 과학적 합리주의의 갈등, 미스터리의 소설적 함정 등이 어울려 맛깔스런 독창적 작품을 조성해 내는 것이다. 가계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욕망은 살인이라는 범죄적 행위를 신의 징벌로 정당화하기에 이른다. 무릇 신앙은 인간의 탐욕을 위장하여 자신들의 부정을 신의 정의로운 명령에의 복종이라곤 한다. 물론 이 작품이 이렇듯 명쾌하게 신앙이 된 미신의 왜곡된 자기 정당화의 몫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 세계의 많은 모호함은 이러한 은밀함의 위장임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인간의 이성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에 대한 경외는 여전히 존재하리라는 민속작가의 정체성을 놓지 않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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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의 발레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김의석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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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메타포의 언어로 인생의 의미를 투시했던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의 그 기분 좋은 시적 문장들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작품이다. 치열한 자기 응시, 척박한 삶속에서도 피어나는 새로움에의 열망이 발산하는 찬연한 감동이 소설의 거대한 줄기가 되어 흐른다. 사회에서 배제되고 소외되어, 비록 가난하고 침울한 환경이 삶의 전망에 그림자를 드리워도 삶의 긴장과 희망을 위해 도전하는 자유로운 정신들은 아름다움이 되어 마음 저 깊은 곳에 어느새 들어와 앉고, 까닭모를 흐뭇한 위로와 안락의 기운에 감싸이게 된다.

 

절도죄로 수감 중이던 스무살 청년‘앙헬 산티아고’의 사면석방 풍경이 부패한 간수와의 미묘한 위협의 대화에 담겨 권력자와 피지배자의 삶의 시선이 되어 적대적으로 교차한다. 권력자인 간수는 자신이 가했던 파렴치 행위의 보복이 두려워 살인죄로 복역 중인 무기수를 빼돌려 앙헬의 목숨을 끊을 것을 청부한다. 참혹했던 오랜 군부독재가 종식되고 민주정부가 들어섰으나 사회 곳곳에 뿌리내렸던 부정과 타락과 부패는 단절되지 않고 여전히 그 악의 기운을 발하고, 편협과 독단, 획일과 고답으로 다양과 창의, 자유를 방해하며 기득권 유지의 불안으로 그 음흉함을 지속한다.

소설의 무대는 이처럼 근절되지 않은 부정의 구태에 새로움이 여전히 압도되고 있는 21세기의 칠레이다. 그러나 새로운 세대들은 사랑하고 꿈을 꾸며 자유로운 희망의 날개들을 퍼덕거리기 마련이다. 좌절된 꿈으로 절망하는 소녀, ‘빅토리아 폰세’와 앙헬의 만남은 서로에게 희망, 미래의 존재 가능성을 꿈꿀 수 있는 의지가 된다. 민주화가 되었지만 독재 군부에 의해 피살된 사람의 딸에게 보내지는 사회의 시선은 달라지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퇴학당하고 발레학원에는 수강료를 지불하지 못해 발붙일 곳이 없어진 소녀와, 세상의 사악함을 온 몸으로 체득한 청년은 그래서 서로의 꿈이 된다.

 

국립극장 무대에서 발레 공연을 하는 자신을 상상할 수 없는 빅토리아를 위해 무일푼의 앙헬은 은퇴한 최고의 금고털이‘베르가라 그레이’를 찾아 부정으로 축재한 권력자의 은닉된 재산을 털자고 제안한다. 추앙받는 최고의 범죄자가 아니라 고요한 범부로서의 삶을 희망하는 베르가라를 마침내 설득하여 인생의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기 위해 의기투합한 이 주변인들의 행동이 위태롭지 않고, 불온해 보이지 않는 것은 왜일까? 추악한 권력의 희생자들인 이들이 취할 수 있는 불가피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도덕적 정당성에 관용을 부여할 수 있어서일까? 아니면 꿈꾸는 자들의 순수함, 새로운 세대에 대한 희망을 막아서지 않고 싶다는 기대에서일까? ...

 

한편, 알량하고 추한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고 위선과 기만, 불변이라는 수구성을 강요하는 구태와 자기성찰의 기회를 통해 이를 반성하고 약자와 소외자를 위해 작은 몸짓이라도 하려는 변화의 소소한 충돌이 희극적 언어와 행동으로 소설의 저변을 수놓는다. 퇴학의 철회를 위해 마지막으로 부여된 구술시험에서 획일성의 구태를 고집하는 국어선생과 빅토리아의 시(詩)에 대한 해석은 변화와 혁신의 장애가 무엇인지를 꼬집는다. 또한 독재정권의 하수인이었던 순경이 빅토리아의 국립극장 공연을 위해 앙헬을 도와 지배계급들을 기만하는 장면은 사회의 진정한 변화가 누구로부터, 또한 무엇으로부터 변모해야 하는지를 고발한다. 운집한 부자들과 권력자들을 몰아내고 발레 독무를 하는 빅토리아의 찬란한 아름다움이 영상처럼 시야에 그려지는 느낌은 그 어떤 화려함보다 멋지게 가슴에 들어차고, 왜 이러한 기성권위에 대한 도발이 감동인 것인지를 되뇌게 된다.

 

네루다와 그의 우편배달부 ‘마리오’, 마리오의 연인이고 아내가 된 ‘베아트리스’의 관계와 인생의 진정한 행복감, 유쾌함, 진지함의 투명한 본질들이 베르가라와 앙헬, 그리고 빅토리아로 변신하여 그대로 삶의 아름다움,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삶의 독자성이 더욱 견고하게 전달된다. 앙헬과의 벅찬 미래를 꿈꾸며 먼발치에서 연인을 기다리는 빅토리아의 간절한 시선이 못내 안타까움과 연민이 되어 더욱 작품의 여운이 오랜 파문을 남기지만, 거대한 하나의 메타포가 된 소설이 삶의 진지한 열정이 되어 비어버린 의지를 가득 채워준다. 영원처럼 다가오는 언어들과 문장, 이야기가 알 지 못하는 기쁨으로 충만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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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견 - 박권일 잡감
박권일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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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에 대한 상대적 표현으로서‘소수’를 말하듯이‘상대성’을 가진 의미이다. 그래서 소수란 결코 작다거나 혹은 수적으로 적다는 절대적 의미만을 지니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보이거나 보일 수 있는 것이고 그 이면에 노출되지 않은 엄청난 다수가 잠재하고 있을 수 있다. 우리네 사회의 여론이라든가 정치권력의 의사라는 것이 마치 다수가 동의한 결집된 의견인양 말하지만 사실 아무리 떠들어도 반영되지 않는 대다수 민중의 의지는 결코 들리지 않으며, 보이지도 않는다. 결국 국민의 여론, 즉 다수의 의견이라고 몰아가는 것은 소수 권력계층이 의도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대다수이다.

 

방송, 미디어 등 소위 여론을 조작하는 보수경제권력과 자신들의 기득적인 정치권력을 유지하려는 수구적 계층이라는 소수가 다수처럼 행동하고, 그래서 정작 다수인 민중은 소수가 되고 이들의 의견은 실종되어 버리는 것이다. 정말의 다수 의견인 주류적 시각에서의‘소수 의견’이 반영되지 않는 사회이다 보니 정치, 경제, 사회문화 등 모든 부문에서 민중은 소외되고 그 삶은 점증적으로 피폐화되어 간다. 소득과 자산은 극소수에게 편중되고 배제된 소수인 대다수 민중은 극단적으로 가난해져 간다. 정책과 법제도는 기득권 유지와 부의 축적을 위한 방향성만을 모색한다. 여기에 자신들의 생활경제적 수준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양가적 자의식의 중간계층이 자기 이익의 편의에 따라 보수와 진보를 왕복하며 소수의 지배권력을 도와 주류사회라는 것을 형성한다. 이 중립적이고 선수가 아닌 심판 같은 행동만 하려는 중간계급의 이중 잣대가 스스로들은 물론 민중 모두의 의견을 분산시켜 결집을 방해하여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가속화시킨다.

 

학연, 지연을 좋다고 하는 사회

 

다수인 민중의 의견을 압살하는 모순된 중간계급의 노예 의식과 이기적 욕망이 자신 또한 배제된 소수 의견자임을 망각케 한다. 더더욱 소수 의견은 이들의 무지와 무교양으로 인해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한 종편방송의 문화평론가, 의사, 변호사, 작가, 스포츠 해설가 등 중간계급 주류 인사들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패널로 자리잡아 하는 말들은 이들의 무교양을 단적으로 입증한다. “학연 지연 자체는 좋은 거예요”라고 떠들어대며 마치 진리를 말한 것처럼 모두들 머리를 끄덕인다. 한국 사회의 건강성을 가장 악화시키는 악질적 폐해를 ‘좋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인데, 이처럼 다수인 민중의 소수의견은 오간데 없어지고 보수 언론, 다시말해 소수 기득권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몰염치와 혐오스러움만이 난무하는 것이다.

 

이들은 왜 학연과 지연이 좋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규칙과 규범 등 공정한 루트를 통하지 않고 자기 개인들의 욕망을 관철할 수 있는‘뒷문 해결’을 위한 유용한 도구이기 때문일 것이다. 남들은 어쩔 수 없이 지키는 규칙을 자신만은 지키지 않아도 될 때의 특권의식이 가져다주는 쾌락, 바로 이것 때문이다. 한국은 지구상에서‘뒷문 해결사회’의 대표적 전형으로 지목된다. ‘마이클 샌델’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사례로 들었듯이 ‘새치기의 시장 의식’을 떠 올릴 수 있다. 줄서기, 즉 규범과 규칙이라는 공평함과 자기노력의 가치인 공정성을 훼손시키는 주범이 새치기이다. 나는 규칙을 초월한 사람, 규칙의 예외를 적용받는 사람이라는 비뚤어진 권력의식이 작동하는 것이다. 쾌락의 효율성을 위해 민주적 질서와 배분양식을 파괴하는 악덕을 선이라고 주장하는 이 무지의 타락성이 오늘 한국사회의 도덕적 한계를 드러내는 것 아니고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이것은 나아가 강남이라는 특수한 지대를 낳기에 이르렀다. 학연, 지연이라는 뒷문 해결의 사회인 한국사회에서 내 자식만큼은 모두를 짓밟고 일어서서 학연과 지연의 성채를 쌓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규칙의 예외를 적용 받으면서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고 쾌락을 만끽 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강남이 아니어도, 학연과 지연이 없어도, 규칙과 규범을 지켜도 손해를 입지 않고,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이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중간 계급들이 상식이라고 행하는 것들, 사회적 관습이라고 용인되는 이러한 것들의 사슬을 끊어내지 않고 그 어떤 변화가 있겠는가? 구태의 썩은 정치를 바꾸고, 경제의 민주화를 이루자고 제아무리 외친들 이중적이고 양가적인 중간계급의 의식이 바뀌지 않고서 어느 것인들 도달할 수 있을까?

 

비도덕성이 옹호되는 저열함이 그득한 사회

 

자, 다수로 보이는 것들의 왜곡과 편협의 사례는 이 사회에 무궁무진하다. 소위 소셜 미디어라고 칭하는 SNS의 공간으로 들어가 보자. 여론을 읽어내고 소통하는 만능의 공간처럼 주류의 미디어들은 떠들어 댄다. 그러나 정작 이 도구가 세상의 문제와 본질, 그리고 민중의 의견을 읽어내는, 진정한 의견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인가? 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인, 재벌, 그리고 고작 연예인들의 자기 전시 욕망의 표출 장소이고 연극성 인격장애와 무교양의 자폭 공간이외의 무엇을 발견할 수 있었는가? 더구나 감각적이고 표피적 단문으로 본질을 논하기 보다는 취향의 시비를 다투는 저열함이 더 극성을 부리지 않는가? 자신을 보여주고 대상화 하는 것에 집중하는 전시 욕망, 바로 물신화와 자기소외의 황폐함만이 그득하지 않은가? 정신의 실종, 생각의 결여, 문제본질의 왜곡, ...

 

그래서 사회안전망의 바깥에 선 오늘의 청년과 중노년의 불안과 사회전체의 생산력을 불임화시키는 불안정 노동 진전의 사회인 현실의 논의는 이런 곳에서 행해지지도 않을 뿐 아니라 설혹 누군가 의문을 제기하더라도 엉뚱하게도 무지의 대결인 취향의 이전투구(泥田鬪狗) 장으로 추락하고 만다.

“임금소득 불평등 OECD 1위, 임시직 비율 2위”, “비정규직 858만명(2008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조사)”, OECD국가 “GDP대비 공적 사회복지 지출 비중 최하위”라는 지표가 말하듯이 한국사회는 불과 5년도 이르기 전에 두 국민(1%의 강부자와 99%의 민중)정책의 성공적 성취로 인해 국민 전체가 가난해지는 상황에 이르렀다. 고용없는 성장, 불안정 노동의 확산, 자산 소득의 극단적 불평등으로 남미사회의 지독한 양극화 모델과 동일해지고 있다.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시장의 비도덕성이 옹호되는 도덕성 상실의 사회, 탈규범적 행태를 능력이라 찬양하는 타락과 부패의 사회가 된 한국사회에서 소수 의견이 짓밟히고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혁신을 기치로 내건 사람, 공평과 정의, 새로운 나라를 만들자고 하는 사람이 나서 이제 한국사회를 바꾸자고 외친다.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 것인지, 누가 변화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가? 바로 소수가 된 민중, 양가적인 중간계급이 자신들의 상식을 파괴하는 힘든 여정을 지나야 하는 것일 게다. 정치, 일상, 이데올로기에서부터 취업, SNS, 청년빈곤 문제에 이르는 음영이 짙게 드리운 이 사회에 날선 비판을 담고 있는 이 책‘소수의견’이 다수, 주류의 의견이 되는 사회가 곧 우리들이 지향해야 하는, 변화의 도달지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소수 의견이 상식이 되는 그날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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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를 위한 밤 데이브 거니 시리즈 2
존 버든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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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이야기에 이 만큼 완결성을 내재한 구성력을 갖춘 작품을 발견한다는 것은 어쩜 행운일지도 모른다. 구태여 분류하자면 범죄 스릴러의 장르라고 하겠지만 ‘존 버든’의 소설은 이런 어정쩡한 구분을 넘어선다. 삶의 방향감각에 대해서, 인간과 사물, 어떤 대상에 대한 이해, 성 에너지와 같은 인간 내면의 독특한 심상들이 특정 사건의 해결을 향한 추리와 탐색이란 과정과 분리되지 않고 촘촘히 얽혀 뻔한 재미 이상의 진중한 무엇을 선사한다.

 

전작 <658,우연히>에서 느껴졌던 전직 뉴욕형사‘데이브 거니’의 자기 성찰과 삶의 정작 중요한 것들에 대한 이해로 다가서는 고뇌의 원천이 계속하여 저변에 흐르고,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취약한 정신세계를 조롱하는 지적도발 역시 이 작품의 세련됨을 더해준다.

소설 속에 인용되고 있는 노벨상 수상자인 영국의 극작가‘헤럴드 핀터’의 “인간의 마음속에서 생성되는 가장 큰 두려움은 말로 설명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것”이란 말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이 첫 페이지의 문장들은 그야말로 평온 속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담겨진 위협들로 엄청난 공포의 직면을 기대케 한다.

 

“뻔뻔한 년을 제거하는 작업은 여러모로 성공적이었다고 결론지어도 좋으리라. - 中略 - 거울 앞에 서서 미소 짓는 자신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또한 이 문장은 한 사람을 살해한 자의 도취적 독백과 모습을 암시함과 아울러, “제아무리 추리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그를 쫓을 수 없었다.” 라는 한껏 고양된 자신감으로 아예 초장부터 도발해 댄다. 많은 하객들이 모인 결혼식에서 신부가 살해되었지만 현장에는 불가능한 단서들, 조작된 단서들 이외에는 흔적조차 없다. 다만 사건과 함께 사라진‘멕시코인 정원사’라 알려진‘헥터 플로레스’란 인물이 유일한 추적의 대상일 뿐이다. 이미 전작에서 경험한 답변이 불가능한 살인사건에의 봉착이란 동일한 플롯임에도 이 작품은 더욱 지적 깊이를 더한 복선들로 한 없이 몰입되게 한다.

 

소설의 키워드라 할 것들을 감히 정리해본다면 ‘섹스 중독’혹은 ‘성 에너지’, ‘경계 의식’혹은 ‘반사회적 인격 장애’, ‘잠복근무’혹은 , ‘감정적 이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어휘들은 소설 저변을 도도히 흐르는 이야기의 정체성이자 주제이고, 사람과 삶의 방식에 대한 빛나는 통찰적 언어들이라 해도 무방할 듯싶다. 성적 피해자였으나 가해자로서 폭력성을 습득하게 된 여자 아이들의 성 중독을 치료하겠다는 특수학교, 섹스 중독 치료분야의 권위자인 정신과의사가 소설의 배경을 가득 채우고, “다른 사람이 칼에 찔리는 것을 바라보게 될 때 움찔하는 하는 것처럼” 친절하게도 인간의 불완전한 경계의식이야말로 타자에 대한 연민의 기초임을 설명하며 사이코패스들의 완벽한 경계의식을 통해 인간 본성의 본질을 생각게 한다. (사이코패스들은 움찔하지 않는 단다!)

 

특히 거의 작품을 지배하는 정의라 할 수 있는 “상대가 믿어주기를 바라는 사실을 그가 스스로 발견하도록 유도하는 기술”이 바로 잠복근무임을 통해 인간이 자신의 감정적 이득으로 인해 시야를 흐릴 수 있음을 지적 하는 대목은 우리들의 삶의 방향감각과 이해에 대한 정곡을 가리키며, 동시에 사건 해결의 단서로 향하는 길목을 제대로 바라볼 것을 경고한다. 이를테면 자신이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삶에서 자신이야말로 항상 부재중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사건을 바라보는 것과 같이 자신의 생각이 맞기를 무의식중에 간절히 바라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이처럼 소설은 하나의 시선과 언어에서 삶의 본질에 대한 사유와 사건의 추적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단서로 동시에 작동한다. 같은 맥락에서 그 자체로 가공할 위력을 지닌 성(性) 에너지의 특징들을 통해서 사건의 완전무결성, 위험성, 왜곡의 현상들을 보여준다. “인간을 그토록 완전무결하게 집중시킬 수 있는 힘”으로써 성(SEX)은 인간의 고통과 욕망의 근저에 자리잡는다. 자 속칭 ‘개잡년’이라고 명명된 섹스중독의 여자들이 잇달아 살해되는 범죄의 본류를 따라가야 하는 험난한 수사는 감정적 이득으로 판단을 흐려서도 안 되며, 그 엄청난 파괴력과 집중성이라는 힘을 이해해야 하고, 인간의 가면이라는 태생적 본질을 망각해서도 안 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즉, 이야기를 믿고 싶은 바로 그 마음이 우리를 파멸시키기에 인간의 상상력만큼이나 인간을 파괴하는 것은 없으리라는 이해일 것이다. 이 소설이 가진 미덕들을 얘기하다보니 스토리가 소홀해졌지만, 소설을 지배하는 암흑의 심연이 발산하는 압도적인 흡인력은 거부하기가 버거울 정도로 폭력적이라는 말로 대체해야 할 것 같다. 재미와 사유를 동시에 잡아맨 걸작이라 아니 할 수 없다. 600여 쪽에 달하는 분량이 오히려 부족하다 할 정도로 빠져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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