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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의 발레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김의석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유쾌한 메타포의 언어로 인생의 의미를 투시했던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의 그 기분 좋은 시적 문장들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작품이다. 치열한 자기 응시, 척박한 삶속에서도 피어나는 새로움에의 열망이 발산하는 찬연한 감동이 소설의 거대한 줄기가 되어 흐른다. 사회에서 배제되고 소외되어, 비록 가난하고 침울한 환경이 삶의 전망에 그림자를 드리워도 삶의 긴장과 희망을 위해 도전하는 자유로운 정신들은 아름다움이 되어 마음 저 깊은 곳에 어느새 들어와 앉고, 까닭모를 흐뭇한 위로와 안락의 기운에 감싸이게 된다.
절도죄로 수감 중이던 스무살 청년‘앙헬 산티아고’의 사면석방 풍경이 부패한 간수와의 미묘한 위협의 대화에 담겨 권력자와 피지배자의 삶의 시선이 되어 적대적으로 교차한다. 권력자인 간수는 자신이 가했던 파렴치 행위의 보복이 두려워 살인죄로 복역 중인 무기수를 빼돌려 앙헬의 목숨을 끊을 것을 청부한다. 참혹했던 오랜 군부독재가 종식되고 민주정부가 들어섰으나 사회 곳곳에 뿌리내렸던 부정과 타락과 부패는 단절되지 않고 여전히 그 악의 기운을 발하고, 편협과 독단, 획일과 고답으로 다양과 창의, 자유를 방해하며 기득권 유지의 불안으로 그 음흉함을 지속한다.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2/1004/pimg_729034103791331.jpg)
소설의 무대는 이처럼 근절되지 않은 부정의 구태에 새로움이 여전히 압도되고 있는 21세기의 칠레이다. 그러나 새로운 세대들은 사랑하고 꿈을 꾸며 자유로운 희망의 날개들을 퍼덕거리기 마련이다. 좌절된 꿈으로 절망하는 소녀, ‘빅토리아 폰세’와 앙헬의 만남은 서로에게 희망, 미래의 존재 가능성을 꿈꿀 수 있는 의지가 된다. 민주화가 되었지만 독재 군부에 의해 피살된 사람의 딸에게 보내지는 사회의 시선은 달라지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퇴학당하고 발레학원에는 수강료를 지불하지 못해 발붙일 곳이 없어진 소녀와, 세상의 사악함을 온 몸으로 체득한 청년은 그래서 서로의 꿈이 된다.
국립극장 무대에서 발레 공연을 하는 자신을 상상할 수 없는 빅토리아를 위해 무일푼의 앙헬은 은퇴한 최고의 금고털이‘베르가라 그레이’를 찾아 부정으로 축재한 권력자의 은닉된 재산을 털자고 제안한다. 추앙받는 최고의 범죄자가 아니라 고요한 범부로서의 삶을 희망하는 베르가라를 마침내 설득하여 인생의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기 위해 의기투합한 이 주변인들의 행동이 위태롭지 않고, 불온해 보이지 않는 것은 왜일까? 추악한 권력의 희생자들인 이들이 취할 수 있는 불가피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도덕적 정당성에 관용을 부여할 수 있어서일까? 아니면 꿈꾸는 자들의 순수함, 새로운 세대에 대한 희망을 막아서지 않고 싶다는 기대에서일까? ...
한편, 알량하고 추한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고 위선과 기만, 불변이라는 수구성을 강요하는 구태와 자기성찰의 기회를 통해 이를 반성하고 약자와 소외자를 위해 작은 몸짓이라도 하려는 변화의 소소한 충돌이 희극적 언어와 행동으로 소설의 저변을 수놓는다. 퇴학의 철회를 위해 마지막으로 부여된 구술시험에서 획일성의 구태를 고집하는 국어선생과 빅토리아의 시(詩)에 대한 해석은 변화와 혁신의 장애가 무엇인지를 꼬집는다. 또한 독재정권의 하수인이었던 순경이 빅토리아의 국립극장 공연을 위해 앙헬을 도와 지배계급들을 기만하는 장면은 사회의 진정한 변화가 누구로부터, 또한 무엇으로부터 변모해야 하는지를 고발한다. 운집한 부자들과 권력자들을 몰아내고 발레 독무를 하는 빅토리아의 찬란한 아름다움이 영상처럼 시야에 그려지는 느낌은 그 어떤 화려함보다 멋지게 가슴에 들어차고, 왜 이러한 기성권위에 대한 도발이 감동인 것인지를 되뇌게 된다.
네루다와 그의 우편배달부 ‘마리오’, 마리오의 연인이고 아내가 된 ‘베아트리스’의 관계와 인생의 진정한 행복감, 유쾌함, 진지함의 투명한 본질들이 베르가라와 앙헬, 그리고 빅토리아로 변신하여 그대로 삶의 아름다움,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삶의 독자성이 더욱 견고하게 전달된다. 앙헬과의 벅찬 미래를 꿈꾸며 먼발치에서 연인을 기다리는 빅토리아의 간절한 시선이 못내 안타까움과 연민이 되어 더욱 작품의 여운이 오랜 파문을 남기지만, 거대한 하나의 메타포가 된 소설이 삶의 진지한 열정이 되어 비어버린 의지를 가득 채워준다. 영원처럼 다가오는 언어들과 문장, 이야기가 알 지 못하는 기쁨으로 충만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