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반양장)
쑤퉁 지음, 김은신 옮김 / 아고라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도시로, 도시로 사람들이 모여든다. 돈과 욕정과 행복을 보장하리라는 존재하지 않는 천국으로, 아니 죄악의 공간으로. 그곳에서 마주하는 것들은 서로에게 생채기를 남기고 증오와 분노가 되어 복수의 고통으로 번민하게 한다. 헐벗고 굶주린 자에게는 발길질이 먼저 가해지는 곳, 가진 것 없는 영혼에게는 멸시와 모욕을 뱉어내는 곳,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육체는 개 취급도 받기 어려운 곳이란 이해를 갖게 된다면, 그 사람의 어두운 내면에는 광포한 분노가 은둔하게 되지 않겠는가?

 

시커먼 탄가루가 수북한 화물칸에서 뛰어내리다 휘청거리는 시골 청년이 있다. 홍수가 휩쓸고 간 고향을 등지고 살기위해 도시에 발을 내딛은 사람의 몰골은 이미 남루함으로 거지꼴이다. 그가 처음 대면하는 것은 도로가에 웅크린 채 싸늘하게 식어버린 하나의 육체이고, 굶주림에 본능적으로 향한 곳은 부두가 폭력배들의 술판이다. 고기 한 점은 지독한 모멸의 감수와 집단적인 구타의 댓가라는 잔혹한 도시의 얼굴을 알려준다.

 

청년에게 쌀(米)은 곧 생존의 안위이고, 고향의 향기이며, 영혼의 어루만짐이다. 굶지 않을 수 있는 생명, 존재의 원천. 부두에서 쌀을 나르는 수레들이 향하는 곳을 정처없이 따라간 곳에는 미곡상회가 있고 얼이 빠진 청년은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그랬다. 그곳이 그의 영혼이 정착할 수 있는 곳일 밖에. 먹여만 준다면 땅바닥에서 자지 못할 것이 무엇인가. 공짜로 얻는 노동력을 마다할 이유가 없는 쌀집 주인은 청년을 거두고, 엄청난 선심을 베푼 것이라 가진 자의 자기기만을 망각한다.

허나 “연민과 온정은 비 온 후 길바닥에 고인 물처럼 얕고 피상적이며, 바람이 불고 햇볕이 비치면 금방 사라지는 것”임을 청년‘우룽’은 모르지 않는다.

 

문득 소설의 배경이 되는‘청베이(城北)’ 와장가(街)의 지명이 작가의 다른 작품, <성북(城北)지대>를 떠올리게 한다. 절망과 무기력에 절고 상처받은 사람들, 그리고 성숙하지 못한 갈등과 혼란의 사회가 귀 기울여주고 보듬어주지 못했던 그 시대상의 처연함이 중첩된다. 자신의 몸뚱아리를 과신하는 쌀집의 첫째 딸 쯔윈, 약자에게 거침없는 모욕과 냉소를 보내는 둘째 딸 치윈은 우룽에게 무한의 복수심을 쌓는, 도시의 본성인 증오와 폭력의 정당한 명분을 확신시킬 뿐이다. 화냥질의 댓가로 씨를 알 수 없는 처녀 임신을 한 첫째 딸의 허물을 위장하기 위해 우룽은 쌀집 사위가 되지만, 장인은 사위의 살해를 청부하기까지 한다. 자신들의 허세와 기만을 위한 이용물 이상이 아닌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이제 이야기는 우룽의 몸 곳곳에 새겨지는 정말의 흉측한 상처들의 여정으로 들어간다. 청부업자가 남긴 발가락 절단, 쯔윈이 물어뜯어 놓은 발, 장인이 쑤셔놓은 실명한 한 쪽 눈, 마침내 죄의 씨앗인 쯔윈의 자식이 망가뜨린 나머지 눈, 그리곤 매독으로 썩어가는 몸통이다. 도시의 사람들이 그에게 상처를 남길 때마다 고집스럽게 집착했던 쌀집이 그의 것이 되지만 그가 느끼는 것은 여전한 방황과 혼돈일 뿐이다. "쌀집의 방들도 흔들렸다. 이곳 역시 기차간 하나에 불과했다. 기차가 광야에서 천천히 움직일 때 우룽 자신도 여전히 떠돌고 있었다. ~ 기차가 날 어디로 데리고 갈지 나도 잘 모르겠어..."

 

그를 버티게 한 분노와 증오, 복수심의 귀착은 무엇이었을까? 잔인함과 포악함으로 부두 폭력조직의 우두머리가 되기까지 하지만, 그의 두 번째 아내가 된 치윈의 시선처럼 “우룽의 영혼이 그 목합 안에서 광폭하게 요동치는 동시에 나지막이 통곡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누가 순수한 시골 청년에게 야수의 포악함을 주입했는가?

‘수퉁’은 그의 다른 작품에서 이러한 문장을 썼다. “만일 꽃을 키우는 사람이 그 화초들 옆에서 귀를 기울여 들었다면 가지와 잎이 자라는 소리와 꽃봉오리가 마음껏 웃는 소리까지 다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우리가 바로 외면하고 소외시키며, 씻기지 않는 오욕으로 분노를 주입시키는 장본인들 아닌가? 조금만이라도 그들의 작고 힘없는 목소리를 경청한다면 증오와 적대가 아니라 화목과 행복이 가능하지 않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은 도시로, 도시로 몰려든다. 돈과 욕정이 거칠게 춤추는 죄악의 도시로. 도시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 오늘 우리들의 연민과 온정이란 것이 고작 어떠한 것인지를 되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쌀이 수북이 쌓인 화물차에 실려 고향을 향한 마지막 길의 우룽이란 사람의 고독과 외로움, 그만이 간직했던 삶의 비밀들이 아득하게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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