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의견 - 박권일 잡감
박권일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수에 대한 상대적 표현으로서‘소수’를 말하듯이‘상대성’을 가진 의미이다. 그래서 소수란 결코 작다거나 혹은 수적으로 적다는 절대적 의미만을 지니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보이거나 보일 수 있는 것이고 그 이면에 노출되지 않은 엄청난 다수가 잠재하고 있을 수 있다. 우리네 사회의 여론이라든가 정치권력의 의사라는 것이 마치 다수가 동의한 결집된 의견인양 말하지만 사실 아무리 떠들어도 반영되지 않는 대다수 민중의 의지는 결코 들리지 않으며, 보이지도 않는다. 결국 국민의 여론, 즉 다수의 의견이라고 몰아가는 것은 소수 권력계층이 의도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대다수이다.

 

방송, 미디어 등 소위 여론을 조작하는 보수경제권력과 자신들의 기득적인 정치권력을 유지하려는 수구적 계층이라는 소수가 다수처럼 행동하고, 그래서 정작 다수인 민중은 소수가 되고 이들의 의견은 실종되어 버리는 것이다. 정말의 다수 의견인 주류적 시각에서의‘소수 의견’이 반영되지 않는 사회이다 보니 정치, 경제, 사회문화 등 모든 부문에서 민중은 소외되고 그 삶은 점증적으로 피폐화되어 간다. 소득과 자산은 극소수에게 편중되고 배제된 소수인 대다수 민중은 극단적으로 가난해져 간다. 정책과 법제도는 기득권 유지와 부의 축적을 위한 방향성만을 모색한다. 여기에 자신들의 생활경제적 수준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양가적 자의식의 중간계층이 자기 이익의 편의에 따라 보수와 진보를 왕복하며 소수의 지배권력을 도와 주류사회라는 것을 형성한다. 이 중립적이고 선수가 아닌 심판 같은 행동만 하려는 중간계급의 이중 잣대가 스스로들은 물론 민중 모두의 의견을 분산시켜 결집을 방해하여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가속화시킨다.

 

학연, 지연을 좋다고 하는 사회

 

다수인 민중의 의견을 압살하는 모순된 중간계급의 노예 의식과 이기적 욕망이 자신 또한 배제된 소수 의견자임을 망각케 한다. 더더욱 소수 의견은 이들의 무지와 무교양으로 인해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한 종편방송의 문화평론가, 의사, 변호사, 작가, 스포츠 해설가 등 중간계급 주류 인사들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패널로 자리잡아 하는 말들은 이들의 무교양을 단적으로 입증한다. “학연 지연 자체는 좋은 거예요”라고 떠들어대며 마치 진리를 말한 것처럼 모두들 머리를 끄덕인다. 한국 사회의 건강성을 가장 악화시키는 악질적 폐해를 ‘좋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인데, 이처럼 다수인 민중의 소수의견은 오간데 없어지고 보수 언론, 다시말해 소수 기득권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몰염치와 혐오스러움만이 난무하는 것이다.

 

이들은 왜 학연과 지연이 좋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규칙과 규범 등 공정한 루트를 통하지 않고 자기 개인들의 욕망을 관철할 수 있는‘뒷문 해결’을 위한 유용한 도구이기 때문일 것이다. 남들은 어쩔 수 없이 지키는 규칙을 자신만은 지키지 않아도 될 때의 특권의식이 가져다주는 쾌락, 바로 이것 때문이다. 한국은 지구상에서‘뒷문 해결사회’의 대표적 전형으로 지목된다. ‘마이클 샌델’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사례로 들었듯이 ‘새치기의 시장 의식’을 떠 올릴 수 있다. 줄서기, 즉 규범과 규칙이라는 공평함과 자기노력의 가치인 공정성을 훼손시키는 주범이 새치기이다. 나는 규칙을 초월한 사람, 규칙의 예외를 적용받는 사람이라는 비뚤어진 권력의식이 작동하는 것이다. 쾌락의 효율성을 위해 민주적 질서와 배분양식을 파괴하는 악덕을 선이라고 주장하는 이 무지의 타락성이 오늘 한국사회의 도덕적 한계를 드러내는 것 아니고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이것은 나아가 강남이라는 특수한 지대를 낳기에 이르렀다. 학연, 지연이라는 뒷문 해결의 사회인 한국사회에서 내 자식만큼은 모두를 짓밟고 일어서서 학연과 지연의 성채를 쌓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규칙의 예외를 적용 받으면서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고 쾌락을 만끽 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강남이 아니어도, 학연과 지연이 없어도, 규칙과 규범을 지켜도 손해를 입지 않고,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이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중간 계급들이 상식이라고 행하는 것들, 사회적 관습이라고 용인되는 이러한 것들의 사슬을 끊어내지 않고 그 어떤 변화가 있겠는가? 구태의 썩은 정치를 바꾸고, 경제의 민주화를 이루자고 제아무리 외친들 이중적이고 양가적인 중간계급의 의식이 바뀌지 않고서 어느 것인들 도달할 수 있을까?

 

비도덕성이 옹호되는 저열함이 그득한 사회

 

자, 다수로 보이는 것들의 왜곡과 편협의 사례는 이 사회에 무궁무진하다. 소위 소셜 미디어라고 칭하는 SNS의 공간으로 들어가 보자. 여론을 읽어내고 소통하는 만능의 공간처럼 주류의 미디어들은 떠들어 댄다. 그러나 정작 이 도구가 세상의 문제와 본질, 그리고 민중의 의견을 읽어내는, 진정한 의견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인가? 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인, 재벌, 그리고 고작 연예인들의 자기 전시 욕망의 표출 장소이고 연극성 인격장애와 무교양의 자폭 공간이외의 무엇을 발견할 수 있었는가? 더구나 감각적이고 표피적 단문으로 본질을 논하기 보다는 취향의 시비를 다투는 저열함이 더 극성을 부리지 않는가? 자신을 보여주고 대상화 하는 것에 집중하는 전시 욕망, 바로 물신화와 자기소외의 황폐함만이 그득하지 않은가? 정신의 실종, 생각의 결여, 문제본질의 왜곡, ...

 

그래서 사회안전망의 바깥에 선 오늘의 청년과 중노년의 불안과 사회전체의 생산력을 불임화시키는 불안정 노동 진전의 사회인 현실의 논의는 이런 곳에서 행해지지도 않을 뿐 아니라 설혹 누군가 의문을 제기하더라도 엉뚱하게도 무지의 대결인 취향의 이전투구(泥田鬪狗) 장으로 추락하고 만다.

“임금소득 불평등 OECD 1위, 임시직 비율 2위”, “비정규직 858만명(2008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조사)”, OECD국가 “GDP대비 공적 사회복지 지출 비중 최하위”라는 지표가 말하듯이 한국사회는 불과 5년도 이르기 전에 두 국민(1%의 강부자와 99%의 민중)정책의 성공적 성취로 인해 국민 전체가 가난해지는 상황에 이르렀다. 고용없는 성장, 불안정 노동의 확산, 자산 소득의 극단적 불평등으로 남미사회의 지독한 양극화 모델과 동일해지고 있다.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시장의 비도덕성이 옹호되는 도덕성 상실의 사회, 탈규범적 행태를 능력이라 찬양하는 타락과 부패의 사회가 된 한국사회에서 소수 의견이 짓밟히고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혁신을 기치로 내건 사람, 공평과 정의, 새로운 나라를 만들자고 하는 사람이 나서 이제 한국사회를 바꾸자고 외친다.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 것인지, 누가 변화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가? 바로 소수가 된 민중, 양가적인 중간계급이 자신들의 상식을 파괴하는 힘든 여정을 지나야 하는 것일 게다. 정치, 일상, 이데올로기에서부터 취업, SNS, 청년빈곤 문제에 이르는 음영이 짙게 드리운 이 사회에 날선 비판을 담고 있는 이 책‘소수의견’이 다수, 주류의 의견이 되는 사회가 곧 우리들이 지향해야 하는, 변화의 도달지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소수 의견이 상식이 되는 그날을 꿈꾸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