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처럼 단단하게
옌롄커 지음, 문현선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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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옌롄커’의 이후 작품들은 모두 이 소설이란 샘터에서 길어온 것이라 해도 되지 않을까? 사회주의 혁명이 휩쓸어 버린 사회의 잔해로 남겨진 텅 비어버린 인간들의 상처 난 심장과 상실된 인간성에 대한 울먹임이 서려있던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가 그렇고, 전체주의 중국의 일그러진 자가당착을 적나라하게 그려낸 『사서(四書)』가 또한 그렇다. 사적 욕망과 혁명언어’의 혼화를 통해 인간성의 본질이 망각되는 시대에 대한 창백한 문장들의 뿌리, 아니 근원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유연성과 부드러움, 경직과 부동의 공고함이라는 일견 모순적 연결어인 소설의 제목인‘물처럼 단단하게’에서 이미 위험한 결합을 보게 된다면 억견이 될까? 이 은유적 언어는 사랑과 혁명, 무기력과 성적 발기라는 교묘한 집합의 표현이기도 하며, 아슬아슬한 경계와 흥분, 두려움이 교차하는 극적 필연을 연상케 한다. 인간 본성과 인간성을 말살하는 문화혁명의 강압적이고 인공적인 폭력성의 대비이기도 한 이 문장은 궁극적으로 ‘단단함’이 ‘물처럼’ 이루어져야 함에 대한 희구이며, 그렇지 못한 현실에 대한 비판이기도 할 것이다.

 

인민해방군에서 전역하고 혁명의 일꾼으로 사회주의 문화혁명의 실천가가 되고자하는‘가오 아이쥔’은 귀향한다. 고향 마을은 정주학의 창시자이자 성리학의 거두인 정이(程頤), 정호(程顥) 형제의 후손들인 정(程)씨 문중의 후손들로 이루어져 유교의 봉건정신이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다. 아이쥔은 바로 이러한 봉건잔재인 청(程)씨들의 패방과 사당을 파괴하는 길만이 진정한 혁명의 시작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마을의 촌장인 장인 청씨에게 박색인 딸과의 혼인 약조인 마을 서기(書記)직을 요청하지만 거절당하고 더욱 혁명에 대한 열의를 다짐한다. 한편 도시에서 청씨 가문에 시집 온 시골마을에서 보기 드문 미색을 갖춘‘샤홍메이’라는 여성역시 마오쩌뚱(毛澤東)의 문화혁명에 열광적이며, 마을의 혁명 동참을 요구하다 청씨에게 조롱과 치욕적인 취급을 받았음을 전해 듣는다.

 

아이쥔은 곧 미색과 혁명의 열의에 찬 샤홍메이에게 매료되고, 혁명은 그녀와의 사랑이 결합된 행위가 된다. 이윽고 샤홍메이는 아이쥔의 열정에 적극 동조하고 지지하는 혁명동지가 되고, 또한 연인이 된다. 두 사람의 사랑, 이들의 육체적 탐닉은 혁명의 불씨이며, 혁명의 동력이기에 혁명과 분리할 수 없는 실체적 요건이 된다. 그러나 자칫 밀애(密愛)가 드러나면 혁명은 물거품이 되는 것이기에 이들의 성애(性愛)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한 것이어야 하고, 마음껏 타오르기에는 제한적인 한계를 내재한다. 드디어 아이쥔은 샤홍메이의 지지와 마을 청년, 노동자들을 향한 치밀한 선전과 설득을 통해 촌마을의 작은 혁명에 성공한다. 이제 촌에서 현으로, 현에서 성으로 혁명 일꾼으로서의 영역과 지위를 높여가고자 하지만 전통적 기득 세력의 은밀한 방해와 음모의 장애에 부딪치곤 한다.

 

아이쥔에게 혁명의 장애는 곧 제거하고 거꾸러뜨려야 하는 적대자일 뿐이다. 자신의 행로를 막아서는 사람들을 반동분자로 몰아 혁명의 무대를 넓혀나가는 맹목이 그를 장악한다. 그러나 그의 혁명은 샤홍메이와의 사랑이 결합된 행위이며, 그래서 그녀와의 온전한 결합은 혁명의 완벽한 실현을 향한 필요조건이다. 완전한 사랑을 위해 자신의 집으로부터 500여 미터에 이르는 여자의 집을 향해 2년여에 걸쳐 땅굴을 파내고, 마침내 두 사람은 연결된 지하 땅굴에서 혁명과 사랑의 온전한 결합을 만끽한다. 자유로운 교성과, 완전한 시선의 탐닉....

 

혁명과 공존의 영역을 가질 수 없는 이들의 사랑은 이처럼 지하세계에서만 가능한 것이 된다. 지상의 세계가 아닌 지하의 세계에서만 그 영역은 교집합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곳에서 혁명가(歌)의 열광적 선율이 진동할 때에만 아이쥔의 육체는 ‘물처럼 단단해’지는 것이다. 인간과 혁명의 결합이 비로소 가능해 진다는 것이다. 소설은 아이쥔에게 땅굴을 파게하면서 이미 죽음을 향한 암시를, 아이쥔과 샤홍메이의 지하에서 펼쳐지는 열락(悅樂)에서 문화혁명이라는 것의 본질을 말하고자 했던 것일 게다. 그래서 두 혁명가는 잔혹한 혁명의 행로에서 그네들 사랑의 결합은 죽음으로써만 가능하리라는 것을.

 

비단 중국의 사회주의 문화혁명만이 인간 개인의 본성을 압살하는 것은 아니다. 항시 혁명이란 기치아래 수행되는 전복에는 획일화된 이데올로기의 복종과 이에 수반되는 개인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폭력성이 정당화되곤 한다. 여기서 그 존재를 부인당하는 인간과 인간 역사의 파괴는 당대의 인간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 생존과 죽음의 양분법, 물처럼 단단하기는 지하세계에서나 가능한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적(赤)색(공산주의)과 황(黃)색(성:性)의 기만적인 금기를 깨뜨리고 훼손될 수 없는 개인의 자유로운 존엄성을 끊임없이 정면으로 마주하게 하는 옌롄커의 작가적 시선은 그 회복이 도달하기 불가능한 지점에 있기에 더욱 간절하게 보이기만 한다. 인간에게서 사랑이란 본질적 요소를 박탈하는 것이 그 무엇으로 가능하겠는가? 옌롄커 소설의 중심인 금기에 대한 도전의 뿌리를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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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의 방파제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김정란 옮김 / 새움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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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백인소녀, 쉬잔, 그리고 뒤라스

 

하나의 소설이 그것만으로 온전히 읽혀지지 않을 만큼 아득한 것이었다면 바로 이 작품이 그렇다. 이후 작가의 또 하나의 소설,『연인』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완성된 느낌을 가졌으니, 두 작품은 서로의 틈새를 메워준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인물들이 완벽하게 중첩되고 있을 뿐 아니라 정신적 외상을 남긴 광기어린 가족의 기억, 소소한 소재들이 연결시켜주는 외연의 확장으로 이면에 도사리고 있던 진의를 엿볼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태평양의 방파제』는 식민지에 이주해 사는 프랑스인 가족, 어머니, 오빠 조제프, 그리고 열일곱 살 소녀 쉬잔, 그리고 쉬잔의 연인 무슈 조의 이야기다. 여기에는 인물들에게 이름이 주어져 있다. 아마 뒤라스의 초기작으로서 소설의 허구성을 위한 치장이었을 것이다. 반면에 『연인』에서는 굳이 이름을 부여하지 않은 백인소녀인 나, 어머니, 작은오빠, 나의 연인인 중국인 남자 그가 있다. 의도적으로 자전적 작품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이 두 작품 속의 가족들과 쉬잔이자 백인소녀는 작가 뒤라스를 배제하고 읽을 수가 없으며, 이것은 곧 실존 인물에 대한 탐구, 혹은 정신분석적 탐색이란 묘한 흥분으로 이어지게 된다.

 

1. 소설의 제재들

 

식민지 토지관리국이라는 점령국의 약탈적 탐욕이 자국민들의 생존까지 위협할 만큼 부패해 있으며, 남편을 여윈 여인이 자식들과 살기 위한 방편으로 구입한 토지는 바닷물에 침수되는 곳이다. 농작의무 불이행시 환수한다는 조건을 달고 농작할 수 없는 토지를 판매하는 것이다. 부패한 토지국 관리는 물정에 어두운 사람들의 재산을 이렇게 반복적으로 착취하여 배를 불린다. 여기에 저항하듯이 여인은 방파제를 쌓지만 태풍에 여지없이 방파제는 허물어지고, 바닷물이 넘실대는 토지에서 농작은 불가능하게 된다. 관리(官吏)는 의무 불이행으로 환수를 위협하고, 여인은 어느덧 청년으로 성장한 아들의 도움으로 이들을 쫒아낸다. 결국 ‘방파제’는 조제프와 쉬잔의 어머니인 여인에겐 생존, 삶의 궁극(窮極)인 것이다.

 

이것은 이 가족의 모든 것으로 이해되지만 점차 어머니 광기, 생존을 버티는 공허함임을 조제프와 쉬잔은 이해하게 된다. 가난이 고착화된 가족, 어머니는 딸 쉬잔에게 관심을 보이는 외소한 청년, 부잣집 아들인 무슈 조를 자신의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수단화하려 한다. 쉬잔은 자신의 여체(女體)가 유용한 도구임을 깨닫고 어머니의 뜻에 부응한다. 남자는 쉬잔을 소유하기 위해 물질로 보답하고, 축음기, 그리고 고가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손에 넣는다. 다이아몬드의 처분 자금으로 빚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의 도약을 예견하지만 턱없이 부족한 금액임을 알게 된다.

 

식민지, 방파제, 육체, 다이아몬드, 이들은 착취와 폭력, 관능과 무능함의 언어이다. 여기에 의존하고 있는 삶이란 공허와 낙심, 피폐와 상처만이 남는다. 이러한 소설적 제재에도 불구하고 암담하기만 한 이들의 현실을 뚫고 조제프와 쉬잔이라는 두 젊은 영혼들의 미래를 향한 탈주의 꿈틀거림을 보여주려 한다. 그러나 그네들의 운명 앞에 선 길이 평범치는 않아 보인다.

 

2. 소설『연인』과 함께

 

『태평양의 방파제』에서 굳이 쉬잔의‘연인(戀人; L'Amant)’을‘무슈 조’라 하겠지만 사실 쉬잔의 입장에서는 연인이랄 수 없다. 애초 가족을 가난으로부터 구원할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한 상대에 불과하며, 쉬잔은 욕실의 문틈으로 잠깐씩 자신의 발가벗은 몸을 보여주어 남자를 자신에게 묶어둔다. 결국 다이아몬드를 얻어내는 것으로 이들의 연인관계는 막을 내리지만, 소설『연인』의 열다섯 살 반의 백인 소녀와 중국인 남자와의 연인 관계는 이처럼 기만적이지 않다.

 

물론 메콩강을 건너는 나룻배 위에 옅은 화장을 하고 헐렁한 원피스에 남성용 중절모를 쓴 원주민 사이에 선 백인 소녀는 다분히 의도된 것이며, 기사가 있는 고급승용차에서 내려 다가온 중국인 남자의 수줍은 접근을 헤아리고 그의 차에 서슴없이 오르는 것은 쉬잔의 의도와 유사하다. 그러나 백인소녀 나는 그에게 육체를 무기로 다가서지 않는다. 오히려 남자의 욕망에 이끌려 가진 최초의 관계에서 육체의 아름다움과 부드러움, 열락의 감각을 깨닫게 되며, 남자에 대한 갈망으로 사랑의 존재를 자문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쉬잔이 얻었던 다이아몬드 반지를 연상시키듯 백인소녀의 손가락에도 슬쩍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여줌으로써 댓가를 받았음을 시사한다.

 

『연인』은 『태평양의 방파제』의 쉬잔의 삶을 더욱 구체화시켜 보여주지만, 그녀와 오빠와의 관계도 보충해 드러낸다. 『태평양의 방파제』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큰 오빠의 존재는 엄마와 함께 광기와 에고이스트, 폭력자로 그려지고 있는데, 그에게 어떠한 동정이나 연민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혐오와 환멸의 대상일 뿐이다. 반면에 둘째 오빠는 쉬잔이 못내 걱정하고 아끼던 사랑하는 오빠 조제프의 모습과 일치한다. 다만 『연인』에서 그의 죽음을 확인할 뿐이다. 쉬잔이자 백인소녀인 뒤라스의 오랜 상처가 무엇이고 그녀의 그리움의 대상이 무엇인지 우린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엄마에게 배척된 작은 오빠, 조제프와 백인소녀 쉬잔, 두 남매의 상처와 고독의 배경, 그네들의 아린 성장기의 고통이 도처에서 배어나와 뒤라스 문장의 근원, 실체를 목격하는 것만 같은 느낌을 갖는다.

 

3. 뒤라스의 사랑

 

위의 두 작품, 즉 뒤라스의 소설 속 분신인 쉬잔과 백인소녀 나는 그녀가 자신의 여성성, 여체에 대한 자각의 성장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오빠 조제프를 통해 바라보는 성적 편력은 그녀에게 육체, 성(性)의 궁극성에 대한 독특한 이해를 가져다주었던 모양이다.

이것은 기만적 목적으로 대했던 무슈 조의 갈망하는 시선에서 자신의 육체적 가치를 인식하였다면 오빠의 친구인 동네청년 아고스티를 따라가 자신의 처녀성을 단지 그가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내어주는 것처럼 자신의 여성성으로서의 육체를 다분히 이타적인 대상으로, 혹은 수단으로서 이해하는 듯하다.

 

그러나 『연인』에서는 이러한 자신의 육체가 단지 수단으로서의 매력만 있는 것이 아님을 이해한다. 비로소 그녀는 몸으로부터 전달되는 소중한 감각들을 느끼고, 그것이 갈망이 되고 또한 사랑과 다르지 않음으로 확신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사랑의 열락이 죽음과 같음을 이해하는 건 ‘조르주 바타이유와 친교를 가졌던 뒤라스로선 견고한 믿음이 되었을 것이다. 임종하기 전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사십 년 연하의 연인‘얀 앙드레아’와의 대화로 꾸며진 『이게 다예요』에서 “행복하다는 감정, 얼마쯤 죽어있는 느낌”, 또는 “예전에도 지금도 너와 나 사이에 있는 건 사랑이지, 죽음(la mort)과 사랑(l'amort)”이란 문장에서 그녀가 사랑이라고 믿은 실체를 확인하게 된다면 억측일까?

 

뒤라스를 끈질기게 따라다닌 죽음의 망령은 육체의 지고한 쾌락의 경계와 맞닿아 있는 것이지 않았을까? 그녀가 가장 사랑한 소설이라고 유언처럼 남긴 소설이 바로 이 『태평양의 방파제』이고 보면, 빠져나가고만 싶어했던 어린 시절, 그러나 가족의 사랑과 숨결이 온통 배어있는 그 시절의 기억만큼 소중한 것은 없었던 것일 게다. 고요한 저녁나절 낮게 소리 내어 읽으면 감동이 배가 될 그런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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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떠난 자리
김만권 지음 / 그린비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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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에 정치가 눌러 앉았던 적도 없으니 떠났다는 표현은 한국사회를 지나치게 높이 평가한 것 아닐까? 어쨌든 비어버린 그 공허함, 부재의 아쉬움만은 충분히 전달된다. 모 작가의 소설이 너무 정치를 지향한다고 비난하던 뉴라이트의 정말 지나치게 무식한 행동대원의 말처럼 정치는 시민사회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해괴한 인식이 뿌리깊은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시민들은 투표행사를 위한 선거이외에는 정치에 참여하거나 관여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사회의 정치에 대한 인식이 이 모양이다 보니 시민사회에 정치가 존재할리 만무한 것은 당연한 것이고, 정치와는 무관했던 시민들이 선거 날 투표하는 내용이 무지(無知)에 근거할 수밖에 없는 것은 불 보듯 뻔한 것 아니겠는가?

 

저자는 이러한 투표, 소위 대의민주제하에서의 비민주적이고 시민의식이 부재하는 정치의 비극이 안타까웠을 것이다. 한국인의 투표는 결코 정치적이었던 적이 없으며, 오직 지연과 혈연, 지역적이며 경제적 소망이었을 뿐이다. 물론 양식(政治的 良識)있는 사람들의 투표가 존재하긴 하지만 무지의 인민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니 이렇게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비단 이번 대선의 결과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선거를 보며 내 주변의 이들은 입을 모으곤 했다. ‘사람들의 의식이 깨어나야 돼’라고. 또한‘저 지역 좀 봐, 뻑 하면 노동쟁의를 벌이고 공권력에 무참히 당하면서도 그 주체에 다시 투표하잖아’ 결국 민주적 형식행위로서 전락하고 굳이 엄청난 국고를 낭비하면서 할 필요가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서 이 말을 하고 있는 것도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할 것 같다. 깨어나려 하고,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미 한정적이고 자기들끼리만 매번 같은 얘기를 반복해야 아무런 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독자들이라면 민주주의, 자유주의, 진보, 유토피아의 상실을 설명하는 저자의 열변은 아마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잘 알고 있는 내용일 것이다. 그래 안타깝고 아쉽다. 민주주의는 더욱 후퇴하고, 진보는 자기의 정체성은 물론 스스로 민주적 근간을 훼손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들이 누리는 자유가 평등한 사회에 대한 염원이 자취를 감춘 사회에 어찌 절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저자가 지적하듯이 한진중공업 해고근로자를 응원하던 희망버스에 탑승했던 시민들처럼 ‘자유’란 이미 평등해야 한다는 것을 체화하고 있는 많은 시민들이 있으며, 또한 동행하지는 못했지만 그 참뜻을 깊이 응원하는 시민들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회의를 멈출 수가 없다. 이들에 대한 자유의 침해가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여기는 다수의 시민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계급에 반하는 투표를 하고 있지 않은가? 이 점에 대한 저자의 믿음은 몇 가지로 요약되는 듯하다.

 

정치는 기성의 소수 제도정치세력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시민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정치이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민주정이기에 지금까지 외면했던 시민의 깨어남을 위해 식견있는 기성의 정치인들은 시민참여 정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시민들 또한 정치극장을 팔짱끼고 관람만 하는 수동적이고 무지한 자세를 탈피하고 “자유를 확장하는 시민 게릴라”로서 능동적으로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전자의 방법론으로 진정 퇴행하는 한국사회의 민주주의와 자유, 평등의 가치를 되살리려 한다면 진보세력은 분파적 신념에 매몰되지 말고 신뢰를 기반으로 한‘연대’, 즉 시민의 정치 참여는 물론 자유주의를 비롯한 혁신세력과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후자를 위해서는 시민들의 자유에 대한 사유와 실천의 용기를 말한다.

 

이러한 제안을 위해 한국사회의 정치 현실이 삶의 목적을 생존으로 바꾸어 놓은 국가 중심의 개발독재에 뿌리를 둔 천민자본주의에 연장에서 해독하며 우리의 민주주의가 공존의 모델이 아니라 생존의 모델로 전락하면서 시민들이 정치적 자유의 토대라는 기본을 잃어버렸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자신의 처지와는 상반되는 집단에 투표하는 계급배반투표를 하는 시민들의 행동은 당연한 귀결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모두 옳다. 그러나 “정치적 자유를 존중하는 시민의 결핍”이 현실인 사회, 경제적 이해득실에 자신들의 정치적 자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보편화된 사회에서는 이들을 어떻게 정치적 자유인이 되도록 깨어나게 하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정치적 무지,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무지, 현실을 바꾸기 위한 삶의 열정인 유토피아의 상실을 이해시킬 수 있겠는가? 경제적 번영과 생존에만 매달린 시민들에게 동등한 자유를 누릴 권리가 곧 동등한 존재로서의 인정이며 소통의 시작임을 어떻게 깨우치게 한다는 말인가? 한국사회가 진정한 자유를 지지하고 민주주의의 정체가 안정되는 사회이기를 기대하는 사람들만의 대화만으로는 아무런 변화도 얻어내지 못하게 된다. 이번 18대 대선의 선거처럼 말이다. 쳇바퀴처럼 돌기만하는 지식인이라 자처하는 이들의 지혜가 깨어있는 시민들보다 결코 깨어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오히려 문제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다만 능동적인 시민정치 참여에 대한 프로그램들은 기성 정치의 혐오로 정치에서 철수한 정치적 자유를 존중하던 도망한 시민들이 되돌아와야 할 중대한 시사와 용기를 제공한다. 주변의 누군가가 나보다 못한 자유를 누린다면 그것은 이미 자유롭지 않다는 이해만큼 중요한 인식은 없을 것이다. 우리사회는 분명 수구정권의 5년을 통과하면서 너무도 많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퇴행을 목격해 왔음에도, 다시금 5년을 연장시켰다. 이 절망의 나락에서 시민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되찾는 방법은 정치적 자유에 대한 심각한 인식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이 인식을 자기 계급에 반하는 투표를 하는 많은 시민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는 가에 대한 지속적인 방법론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을 그들이 읽어 주었으면, 그리고 변화되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결코 이 책을 읽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책을 읽지 않는 시민들이며, 경제가 정치보다 우선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딜레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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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날들
메리 올리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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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 나는 마음의 긴장을 이완시키기가 어지간히도 어려운 시간을 통과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지상에서의 하루가 완벽하다고 외치는 이 책을 선택한 것은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꽉 조여진 내 정신에게 잠시나마 여유를 주고 평온의 호사를 가져보려는 안타까운 의도였다 할 수 있다. 대자연의 스스럼없음을 마주할 때 느껴지는 그 안온함, 아마도 아침이 오기전의 어슴푸레한 새벽 공기와 이리저리 나무사이를 오가는 새들의 지저귐을 오롯이 홀로 느끼는 순간의 청명함 같은 것에 마음을 내려놓고 싶었던 모양이다. 좀체 갖기 힘든 그런 진짜배기 여가를 기대하면서.

 

그러나 이 정신 사나운 시간에‘자연(Nature)’타령이나 하고 있겠다는 내 의도가 불순했는지 문장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계속 거부했다. 그래서 책을 덮어놓곤 몇 날이 지났다. 일과 여가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던 시간이 지나고 일이란 것을 비로소 마음에서 내려놓았을 때 흑청(黑淸)의 대비가 뚜렷한 표지의 이 책은 다시금 나를 유혹했다. 결국 시간은 흐르고 그 섭리에 저항하는 것이 왠지 부질없음을 깨닫는다. “아침에 나는 길을 내려갔다. 나뭇가지에 벌새가 있는지 보려고-없으면, 부재의 핑 하는 작은 울림을 느끼려고.” 존재와 부재 사이에 놓여있는 흐름의 진실을 꿰뚫는 시인의 섬세한 눈길에 공감하면서 나는 그렇게‘메리 올리버’의 문장에 젖어 들어갔다.

 

그리곤 시인‘워즈워스’의 자연의 불가해한 위대성에 대한 깨달음의 일화에서 상쾌함과 공포, 광휘와 심연의 기묘한 조화의 자연, 그 자체가 발산하는 경외의 신비가 문득 가슴에 무언가를 치밀고 들어오는 듯한 충만한 안정감에 온전히 나를 맡긴다. 내 몸이 야생의 자연을 많이도 그리워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도시가 제공하는 물질에 종속된 삶을 지탱해야 하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내게 숲과 야생동물이 어우러지고 바다가 지척에 있는 그런 자연은 언감생심이다. 더구나‘메리 올리버’처럼 썰물 때 미처 나가지 못하고 물웅덩이에 갇힌 물고기를 관찰하고, 눈밭 위에 찍힌 여우의 발자국을 보며 그의 삶을 상상하거나 인간에 길든 개의 야생성에서 자연의 미덕을 깨우칠 수가 없다.

 

왜 모르겠는가? 그녀의 말처럼 여가가 일상인 삶을 지닐 수 있다면 모를까. 이른 아침 “포근한 햇살 속으로 들어간 아주 평범한 순간 발작적인 행복감”에 젖어드는 그 찰라의 무념무상이 무엇인지 내 몸에 새겨진 태곳적 감성은 이해한다. 그래서 “장미꽃잎들 속에 서서 바람이 벌의 날개 아래서 졸면서 내는 소리보다 크지 않게 웅웅거리는 소리를 들을 때 강력한 확실성에 이른다”는 그 평온하고 평범함에 대한 그리움에 더욱 막막해진다. 그녀가 부럽다. 또한 낯설다. 질투심이 솟는다. 자연 예찬, 삶의 완벽함에 대한 신비로움 그득한 그녀의 때 묻지 않은 음성에 간극을 느낀다.

 

이쯤해서 자연을 물리고나면 ‘랠프 월도 에머슨’과 ‘너새니얼 호손’의 문학세계와 그들의 삶을 현재로 옮겨와 유령처럼 되살려 낸다. 신비주의에 매혹된 시인의 심리가 읽힌다. 특히 호손의 『일곱 박공의 집』과 『낡은 목사관의 이끼』는 그녀의 새로운 시선으로 해석된 서평으로 작품에 대한 흥미를 지펴내기도 한다. 마음과 풍경이 조우하는 삶, 존재자로서의 기쁨을 말하는 시인이 안내하는 세상의 이해가 몇 편의 시와, 산문에 고요하게 펼쳐져 있는 이 책은 결코 내쳐 읽을 책이 아니다. 가끔 존재의 피곤함이 밀려 올 때,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을 때 펼쳐들면 아침 산책길의 그 뿌듯한 실체감이 되어 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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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준의 마음을 품은 집 - 그 집이 내게 들려준 희로애락 건축 이야기
구본준 지음 / 서해문집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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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물(建造物)들에 어린 사연, 그리고 미학적 감상 약간을 얹어 세상의 모습, 그것이 가능케 한사람들의 마음을 관통해보려는 시도 같다. 그래서 내용의 구분도 희(喜), 노(怒), 애(哀), 락(樂) 넷으로 되었을 터이다. 책의 제목이‘집’임에도 불구하고 굳이‘건조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이나 동물이 추위, 더위, 비바람 따위를 막고 그 속에 들어 살기 위하여 지은 건물”이라는 사전적 의미의 ‘집’이 사실 나에게는‘주택’이라는 협의의 의미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책 속의 집들은 도서관, 성당, 박물관, 묘역(墓域), 요새(要塞), 복합상가, 정자, 고택(古宅) 들이어서 그저“지어서 만든 물건”이라는 광의의 표현인 건조물이 납득하기 쉽기 때문이다.

 

지어서 만든 물건이다. ‘짓는다’는 말은 여러 재료를 섞어서 만들어내는 행위이다. 이렇게 섞는 행위는 자연 사람들의 의도가 반영된다. 그것이 곧 마음이려니, 각양각색의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서 어떻게 섞어야 하느냐라는 방법론이 나오고 이것에 갑론을박하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가장 잘못 섞은 물건들이 성내다, 나무라다라는 의미의 ‘노(怒)’부분에 소개되고 있는데, 건축가 김수근이 남긴 옛 부여박물관이 그 하나이고, 더구나 슬프고, 민망하다라는 뜻을 가진 ‘애(哀)’부분에 악명높은 서울의 추물(醜物)인 세운상가로 김수근은 다시금 등장하기도 한다.

 

이 섞는 방법이 만만찮음이다. 한 번 지어진 물건을 허무는 것이 현대사회, 특히 사적소유가 분명한 자본주의사회에 와서는 더욱 수월한 것이 아니어서 잘못 섞어진 것에 사람들은 그저 속수무책으로 방해 받을 밖에 없다. 그러나 잘 섞어진 물건은 소박한 것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의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그 아름다움에 공감케 하며, 위로마저 받을 수 있기도 하다. 기쁨을 주고, 즐거움을 나누는 대상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책이 어린이대공원 꿈마루나 대한성공회 서울 대성당에서 부분적으로 공간의 미학적 견해를 피력하고, 세운상가를 통해서는 공간계획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발설하기도 하지만, 가장 큰 미덕은 이 섞는 방법에 도사린 사람들의 의식, 섞는 방법의 정신적 조건, 그 기초에 대한 것들의 통찰이라 할 것이다.

 

‘희(喜)’편에 소개된 뾰족하게 높이 솟아오른 첨탑을 지니지 않은 성공회 서울대성당의 한옥의 지붕과 창 등 한국적 이미지들의 융합, 성스러움을 잃지 않는 소박함 속의 경건함과 숭고함에서 뽐내지 않으니 더욱 높아 보이는 것의 진리를 발견케 되고, 순천의 “진짜 상식적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어린이 도서관에서 섞는 이의 고결한 정신의 실체를 보게 된다. 도서관의 주체는 누구인가, 어린이를 위한 도서관은 정말 어떤 공간이어야 하는가, 알지 못하던 이 건조물들이 단지 지어진 물건의 의미를 넘어서는 순간일 것이다.

 

한편, 성산동 좁은 골목 언덕길에 조촐하게 자리 잡은‘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이라는 이름의 일제 종군위안부였던 할머니들을 기리는 기념관의 사연은 박물관의 곳곳에 새겨진 섬세한 공간적 설계와 배려에도 불구하고 씁쓸한 입맛을 다시게 한다. 독립공원에 천한 위안부의 기념관을 건립할 수 없다는 권력집단의 기막힌 방해에 의해 설립 부지를 잃었다는 것이다. 국가라는 것이 본디 지배권자들을 위한 관리소이긴 하지만 자신들의 국가조차 이러할진대 그러한 국가가 나서서 일본에 진심의 사죄를 요구하는데 미온적인 것은 보지 않아도 보이는 것이다.

 

사실 많은 이정표적 건조물들은 그 규모나 자원투입의 측면에서 공공(公共)물이 대부분이라 할 것이다. 또한 옛 건조물들 역시 막강한 권력을 지닌 왕이나 귀족, 사대부들, 지배권자들, 종교적 권위의 산물이다. 이러한 물건 중에 고립과 소통의 경험적 진실을 말해주는 스리랑카에 소재한 시기리야 요새는 흥미로운 주제를 던져준다. 영화(榮華)와 권력을 지키기 위해 깎아지른 수백 미터 높이의 고원에 지은 궁전, 그러나 생존하기 위해서는 내려와야만 한다. 견고하게 쌓아올린 성채는 주변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단절은 곧 쇠망이다. 다채로운 소통, 경계 없는 왕래와 통행만이 존속과 영화를 만들어냄을 배울 수 있게 된다. 권력과 가진 자들의 구별 짓기, 경계 쌓기는 근친적 고립과 퇴보, 죽음의 착수일 것이라는 근엄한 역사적 가르침일 것이다. 인도 무굴제국의 혐오와 슬픔을 간직한 채 현대의 관광객들을 모으는 타지마할과 아라포트성의 사연도 시기리야 못지않은 진리를 발산한다.

 

그러고 보면 이 책은 인간이 지은 물건들에 어린 역사적이고 체험적이며, 사실적인 진실들의 다양한 이야기의 보고(寶庫)라 할 수도 있겠다. 창덕궁 후원에 그 많은 정자들, 부엌, 방, 마루, 각 한 칸씩 세칸으로 이루어져 양용삼간이라 불리는 충재에서 간결과 절제의 정갈한 미, 아니 삶의 진수를 발견하는 것과 같은 재미이다. 자신의 설익어 어설픈 욕구를, 혹은 권세를 과시하려는, 또는 권력에 아부하고 재화의 축적에 눈 먼 탐욕을 섞어 지은 물건들의 이야기조차 신경이 곤두서는 피곤함을 물리고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넉넉한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구태여 안목까지 요구하지 아니하며 건조물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는 그런 책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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