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은 나쁘다고 말하지만
가야노 도시히토 지음, 임지현 옮김 / 도서출판 삼화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폭력(暴力)이란 단어에서 긍정적이고 우호적인 느낌을 갖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어떤 대상을 거칠고 사납게 제압할 때에 쓰는, 주먹이나 발 또는 몽둥이 따위의 수단이나 힘” 또는 “무기로 상대를 억누르는 힘”이라는 사전적 의미에서처럼 자기 이외의 존재를 억누르고 제압하려는 무력적 수단이나 힘을 마주했을 때의 불쾌한 감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은‘폭력’그 자체를‘나쁘다’ 거나 ‘좋다’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단지 도덕적 당위성에 매몰되어 실제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라고 말이다. 적어도 폭력의 성분이 선(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 주장은 굉장한 도발로 여겨질 것이다. 그렇다면 폭력이 나쁜 것이 아니란 말인가?

 

저자는 이를 설명하는 배경으로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는 폭력을 해결할 수 없는 현실적 현상 - 정당방위와 같은 자기 생명의 구제를 위한 불가피한 폭력의 행사 등 - 들을 열거한다. 그리고 “악을 처벌하기 위한 폭력이 없다면 드라마 사극의 재미는 반감”될 것이라 하면서 이것은 폭력을 동경하는 인간의 본성, 즉 인간 존재란 본디 폭력을 바탕으로 성립한 것이라고 단정을 내린다. 인간은 폭력을 떠나서는 삶을 지탱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인간’ 존재의 존립기반으로서의‘폭력’, 인간이 지닌 것에 어찌 좋다, 나쁘다, 선하다, 악하다, 라는 도덕적 함의를 지닌 판단을 할 수 있겠는가하는 인간 중심의 오만한 반문일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 도덕적 가치를 지닌 언어로 분별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는 얘기이리라.

 

정언 명령의 충돌, 도덕의 상대성

 

이러한 주장에 쐐기를 박으려는 듯, 도덕에 무언가 이유를 부여한다면 특정 조건이나 가정에서만 그 도덕을 지키는 것이 되어버린다는 칸트의 정언명령과 가언명령의 모순관계를 통해 도덕이란 상대적인 것임을 역설(力說)한다. ‘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의 요구는 이미‘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라는 정언명령에 이유, 즉 조건을 전제하는 것이 되어 답이 불필요한 당위라는 것이다. 그러나 ‘타인을 죽인 사람은 사형시킬 수 있다’라고 하는 또 다른 정언명령인 사형제도는 분명히 전자의 정언명령에 배치된다. 결국 장소와 때에 따라 도덕이란 것은 이처럼 변하는 지극히 상대성을 지닌 것이라는 개념이다. 그런데 전자(前者)의 정언명령은 보편성을 지니지만, 후자의 사형제도 조차 보편성을 지닌 것일까? 사형제도는 인정되기도, 부인되기도 하는 보편성을 지닌 것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측면에서 저자의 예시는 불완전하게 보인다. 더구나 칸트라는 인간은 결코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어쨌든 저자는 이와 같은 인간의 본성, 그리고 도덕의 상대성이라는 두 토대 위에 폭력이란 나쁜 것이 아니라는 자신의 주장을 달성한다. 폭력은 인간 존재 그 자체의 기반이다라는 것이다. 때문에 폭력을 도덕성에 입각해 이해하려는 입장은 폭력에 아무런 대처도 할 수 없는 어리석음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폭력은 도덕성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살인자에 대한 사형, 전쟁에서의 적군 살해, 정당방위(자력구제)로서의 살인 등등,‘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도덕적 주장이 무수한 경우의 변수에 따라 허물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지극히 포스트모던한 상대주의적 발상이다. 이렇게 도덕을 해석하기 시작하면 도덕의 존재가치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굳이 도덕을 말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도덕이란 것이 본래 이현령비현령이라면 말이다. 그래서 이러한 비판의 싹을 없애버리기 위해서인지 “도덕적인 기준에서 폭력을 고찰하는 방식을 버리지 않으면 폭력을 통해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판단 가치로서의‘도덕’을 아예 배제해 버린다.

 

국가는 유일한 합법적 폭력의 원천이다

 

이러한 비판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폭력의 가장 커다란 주체, 나아가 폭력의 합법적 원천으로서의 국가의 정의에 이른다. 근대국가의 형성에 있어서도 저자는 루소보다는 홉스의 사회계약설을 논리의 원천으로 삼는다. 개인의 자유의지에 의한 사회계약이 아니라 폭력을 수반한 즉‘획득에 의한 커먼웰스(commonwealth)’가 국가설립의 본질적 실질을 설명하는데 가깝다는 것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불식시키는 압도적인 폭력으로서의 힘에 복종하고 그 보호를 받기로 하는 계약의 결과라는 주장이다. (저자는 일본 막부의 군사력 독점을 근대국가 설립의 사례로 사용하고 있음; 다분히 일본 근대국가 성립의 시기를 앞당기려는 의도로 추정됨)

 

이렇게 해서 설립된 국가는 폭력을 독점하게 되고,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폭력을 사용하는 주체가 되었다는 관점이다. 또한 아주 중요한 시사가 있는데, 이는 독일의 정치철학작인‘헤어프리트 뮌클러’의 『새로운 전쟁』에서 언급한 무기의 발전, 포병이란 존재와 같은 대량 살상 무기로 인한 전쟁 규모의 대형화, 전쟁비용의 비약적인 증가가 세수의 안정적 조달기반의 확립과 같은 현대국가 조직의 성립으로 정착되었다는 것과 일치하는 서술이다. 무기와 같은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인해 군사력 독점이 가능해진 시기와 근대국가 형성의 시기가 일치하는 것에 대핸 주목이다. 즉 폭력 독점 과정이 곧 국가의 설립이라는 것이며, 이로써 국가란 인간사회에서‘폭력의 권리의 원천’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이 논리를 더욱 밀고나가 국가의 세금 징수는 바로 합법적인 폭력의 다른 표현이라는데 이른다. 강력한 합법적 폭력을 가진 국가는 복종과 보호의 대가로 돈을 받는 데 이것이 바로 세금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야쿠자와 같은 폭력 조직들이 보호비조로 상인들로부터 거둬들이는 돈과 세금과는 그 성격이 같은 것이지만 다만 ‘합법성’이라는 법에 의해 유일하게 승인된 주체인가 아닌가의 구별만이 다르다는 것이다. 즉, ‘법’을 통해 국가는 폭력을 독점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에 의해 국가의 폭력만이 합법성을 띠게 되고 그 법에 의해 제한되고 견제되지만, 역사 속에서 이 법이 국가 권력의 부패로 인해 자의적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수단이 되어버려 실질적인 견제가 되지 못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여기서 다시금 도덕이라는 잣대가 부상하게 된다. 그래서 존립기반 자체가 폭력인 이‘국가’라는 조직은 해체되어야 한다는 도덕적 당위의 목소리가 공감을 획득한다. 따라서 국가를 해체하는 것이 가능한가? 라는 질문이 뒤따르는 것은 당연한 이성적 요구로 들리게 된다. 과연 국가는 해체 가능한 것인가?

 

폭력은 인간과 국가의 본성이자 존립기반이다

 

책은‘불가능하다!’고 선언한다. 이 역시 홉스의 획득에 의한 커먼웰스의 사고에 기초한다. 국가라는 유일한 합법적 폭력의 원천이 사라지면, 자연상태에 빠진 개인은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고, 이는 곧 공포와 위험이 도사리는 세계에서 폭력의 주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개인과 지역, 이해관계 속에서 강력한 폭력조직은 다시 설립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국가의 해체가 다른 국가의 설립으로 대체될 뿐, 결코 실질적인 해체는 가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되면 개인들의 선택지는 지극히 한정된다. 그중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폭력을 국가에 위임하는 방법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만일 폭력 없는 상태가 인간 사회에서 당연한 것이었다면 애초에 국가란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라는 홉스의 말처럼.

 

이처럼 이 불쾌하고 불편한 폭력이 인간과 국가의 존립기반 자체임을 인정한다면 우리 개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들을 보다 잘 이해하고 그것이 혹시라도 보편성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도록 감시하고, 보상과 보호의 조화라는 평형이 한 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제도를 끊임없이 보완해야 하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권리이자 의무여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다시 말해, 이미 폭력이라는 본성에 서있으면서 도덕적 당위만으로 폭력의 배제를 주장해봐야 아무런 해결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폭력을 인정함으로써 비로소 폭력의 속성을 잘 이해하게 되며, 이로써 인간 개인 삶의 미래를 말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는 인간의 모든 행동을 비웃지 않고, 개탄하지 않으며, 저주하지 않고, 단지 이해하는 일에 몰두하겠다. ~ 中略 ~ 비록 아무리 불쾌한 것이라 할지라도 분명 필연적인 존재이고, 일정한 원인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이러한 원인을 통해 그것들의 본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라고 한 스피노자의 관점과 같은 것일 게다. 폭력은 인간의 존재 조건이며 도덕적으로 부인한다고 사라질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비록 가혹한 현실이지만 그 본성을 수긍하고 이해하려는 시도가 중요한 이유가 된다는 주장일 게다. 그래야 폭력이 힘의 논리 이외에 법이라는 다른 방법으로 제어될 가능성이 열리고, 푸코의 말처럼“권력이 보편적인 것에 반하는 경우에 한 치의 양보도 없어야 한다”는 보다 성숙된 시민으로서의 역할과 관점을 심화시킬 수 있게 되리라는 점이다.

 

사실 틈틈이 지적하였듯이 사례의 왜곡과 논리적 부당성이 곳곳에 자리잡고, 더구나 그것에 이론적 토대를 쌓아올려 주장의 당위에 이르는 불완전성, 또한 도덕성 배제의 이유가 충분한 동의를 얻기에는 미흡하지만 국가의 설립에 이르는 역사적 배경지식과 통찰이나, 국가 폭력에 대처하기 위한 실체적 탐색은 점점 은밀하게 행사되는 오늘의 국가폭력의 형태를 이해하고 견제하는 데 귀중하고 충분한 지침을 제시해 준다. 특히 폭력에 대해 “자신의 도덕적 입장 표명에 만족을” 느끼는 데 불과한 도덕주의로 인해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개인적으로 내 도덕적 관점과 국가에 대한 이해를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울물 소리
황석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야기꾼이 들려주는 이야기, 이야기란, 아니 오늘의 한국문학이란 바로 이런 뿌리에 연유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전기수, 강담사, 그리고 재담꾼, 연희재담가들이 읽어주고, 꾸며내 들려주던 규방일화와 염정담, 군담 등 민담, 방각본 언패소설, 판소리 등 민중들의 삶에 기초하고 있다고. 정작의 역사는 바로 이러한 민중의 삶의 이야기 속에 깃들어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사람이 곧 하늘(人乃天)’이라고, 비로소 민중 자신의 말을 하기 시작한 시대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참말의 이야기, 바로 우리들의 진짜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에 대한 작가 스스로의 정의처럼 주류의 역사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자생적 근대화”를 통과하는 조선 민중의 고통과 상처의 실체라는 이 무거운 진실이 고요한 산마을 오직 여울물 소리만 돌돌돌 나듯이 나지막하게, 꾸밈없는 할아버지의 옛 이야기로 들리는 까닭은 역시 우리들의 몸속에 흐르는 이야기에 대한 민중적 공감과 동의의 탓일 것이다. 더구나 소설의 말머리부터 색주가와 흔쾌한 어우러짐의 질펀한 대화, 관기였던 양반첩이 된 관기 월선과 그 소생인 연옥의 등장은 익살과, 재치와 기지 넘치는 이야기의 세계로 곧바로 이끌어댄다. 저 먼 권력자들의 아귀다툼을 쓴 민중과 괴리된 역사가 아니라 민초들의 역사라는 그 친근함의 이야기로.

 

“가지마라 부헝”...아마 이 부엉이 울음소리는 다가 올 여인의 인고(忍苦)를 만류하려 함이었을까? 그럼에도 자신의 발목을 잡은 남정네의 손아귀에 끌려 어느새 그의 품에 안겨있었다는 話者,‘연옥’의 말은 여인네의 수줍은 듯 발칙한 연정이 그득하다. 이 하룻밤의 운우지정(雲雨之情)덕에 민중의 삶을 민중의 시선으로 보게 된다. 그 이름도 신통방통한‘이신통’이란 이야기꾼(傳奇叟)이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지아비가 되고, 연옥은 사랑, 그 무심한 남정네의 행적을 쫓아 시대를 술회한다.

 

삼정(三政)이 무너지고, 백성은 탐관의 부패로 신음하던 시절, 과거제 역시 매관매직의 다른 형식으로 타락하고, 무능한 권력은 외세에 꺾여 제 목소리를 잃어버리던 시대, 백성은 어디에도 그 고통을 말 할 곳이 없었을 것이다. 이 의탁할 곳 없는 백성들의 믿음이었던 서양의 천주학조차 침략과 약탈의 표리부동이었으니 민중의 신앙으로서 동학(東學)의 자생적 발흥은 결단코 필연이자 당위였을 것이다. 소설은 이러한 시대사(時代史) 자체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민중적 실체, 그 속살을 말하고 있다. 또한 민담, 재담과 같은 이야기로서의 한계를 넘지 않으면서, 삶이란 것 자체의 순수성으로 더 많은, 더 깊은 시대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과거장의 풍경 속에서 시골 유생들의 염원을 기만하는 돈벌이, 각종 차별과 부당함 등 시장 장터와 같은 문란함과 혼탁함이 익살스럽게 그려지고, 거창한 역사적 명명인 임오군란 역시 생존까지 수탈당하는 백성들의 무참하고 쓸쓸한 죽음으로 이어지는 일상적 면면들이 역사를 대체한다.

어쨌든 소설의 중심을 흐르는 시대적 사건은 동학혁명이다. 인간이 하늘이다. 라는 이 천지가 개벽할 민중적 자각을 위해 모든 이야기가 모인다고 해도 지나친 것은 아닐 것이다.

 

민중이라는 나라의 실질적 주체들에게 역사를 돌려주려는 작업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책무를 짊어진 이가 바로 이야기꾼이다. 반쪽짜리 양반인 서자인 아버지에 다시금 노비의 소생인 얼자라는 계급은 이미 신분상의 한계를 의미한다. 그래서 자신의 여인들, 가족을 위해서 정착하지 못하고 방랑하는 인물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게다. 그들에게 떳떳한 지아비로서, 아들로서, 형제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는 시대였으니 말이다. 사람들에게 언패소설을 읽어주는 이야기꾼이 되었던 것은 젊은 청년‘이신’이 세상과 함께 울고 웃으며 서로 어루만지는 유일한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책을 읽어주던 전기수의 삶이 동학이라는 민중으로서의 의식을 깨우치게 하는 목소리가 되기까지의 스스로 얽어맨 삶의 행적은 그대로 이야기꾼, 작가의 소명이라는 본질, 아니 어떤 소명의식에 가닿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를, 서방의 행적을 좇는 여인, 그녀의 신산한 행적조차 경박하지 않고 엄숙해 보이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 일 것이다. 사랑하는 이를 향한 오랜 좇음의 기대는 그녀에게 재회와 잉태라는 숭고하기조차 한 역할을 부여한 것만 같다. 민중의 얘기, 정말의 역사가 후대에도 잇닿게 하는 그런 소명을 그녀의 몸에 불어 넣은 것이 아닐까? 그래서 오늘의 우리들의 몸속에도 이야기꾼의 그 진실한 삶의 이야기들이 전해질수 있도록 말이다.

 

아마 우리의 소설이란 이렇게 질서와 권위의 힘에 가려진 민중의 삶들을 드러내는 것이고, 바로 그 연원이란 이들의 행적에 담겨있음을, 또한 이야기꾼이란 세상을 말하는 일꾼의 목소리이기도 함을 말하려는 것일 게다.

사위가 고요한 산속 여울물 소리처럼 번잡함과 거창함이 배제된 소박한 이야기에 빠져 절로 우리들의 몸과 신체에 흐르는 역사의 소리를 듣는 듯하다. 이야기의 역사, 그리고 민중의 역사가 같은 호흡을 하며 다가오는 우리 문학의 새로운 장을 보게 된 것 같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12-12-15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리아님, 좋은 리뷰 고맙습니다. 담아두고 있던 신작, 주문 어서 해야겠어요. 땡스투유~^^

비의식 2012-12-15 10:36   좋아요 0 | URL
이야기꾼이 들려주는 이야기꾼의 이야기죠...고맙습니다. 프레이야님~~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5
우타노 쇼고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제목에서 느껴지는 계절의 모호한 경계, 그리곤 궁극에는 다가올 수밖에 없는 을씨년스러움과 왠지 모를 쓸쓸함이 잔득 묻어 있는 소설이다. 쇄락과 죽음, 돌이킬 수 없는 안타까움 같은 것이랄까? 대형 슈퍼마켓 지점의 보안부장인 오십대 남성‘히라타’, 그의 앞에는 빵과 우유를 절도한 초췌한 여성이 앉아있다. 그녀의 신분증에 기재된 1985년 출생의 기록은 회사의 재산을 지키는 엄격함을 남자로부터 지워버린다. “두 번 다시 이러면 안 돼”, “돌아가도 좋아”

 

남자의 일상적 행동에 일탈이 생긴 것은 곧 사건이랄 수 있을 것이다. 삶을 지탱하는 소중한 기억, 혹은 감히 심연에서 퍼 올릴 엄두를 못 내던 고통의 기억이 건드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접근하고, 남자는 여자의 추레하고 헐벗은 차림새와 뻔히 읽히는 내면의 진부함으로 외면하지만 교차하는 동정과 연민의 감정까지 피하지 못한다. 겨울날씨에 맨발의 샌들, 닳아 얄팍해진 겉옷은 생활고로 고통 받는 여자임을 감추지 못한다. 다만 그녀의 생일이 1985년 10월 5일이라는 사실이 뺑소니사고로 사망한 딸에 대한 애틋함과 보고 싶은 간절함과 동일한 의미를 부여하게 한다.

 

소설은 시점을 바꿔 7년 전 딸아이의 뺑소니 교통사고에 의한 사망과 아비로서의 통렬한 애처로움의 기억을 더듬고, 딸의 죽음이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아내의 고통스런 자살의 기억을 술회한다. 외려 피해자인 죽은 딸아이의 부주의만을 열거하며 자신들의 무능력을 회피하는 경찰들에 대한 분노까지, 자식을 상실한 부모의 쓰라리고 아픈 통한(痛恨)이 혼자가 된 남자의 내면을 흐른다. 대기업 임원승진의 유력한 후보자였지만 중앙의 격렬한 경쟁 지대에서 벗어나 지방의 지사로 내려와 억울하게 희생된 딸과 아내의 원통한 응어리를 간직한 채 시간을 지탱하는 고독한 남자, 그가 자신의 딸과 동갑내기인 여자에게 선의를 베푸는 것은 일종의 보상심리였을 것이다.

 

작가의 역량이 돋보이는 것은 이렇게 가족을 잃고, 세상을 외롭게 허우적대는 남자와 또 다른 상처를 지닌 여자와의 조우와 같은 흔하고 낡은 패턴의 이야기가 너절하게 들리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폭력배에 불과한 남자와 동거하며 급기야는 진심의 도움을 베풀었던 남자를 간통으로 협박하기에 이르는 여자와 같이 진부함의 끝이 보이지만, 이에 반응하는 중년 남자의 허를 찌르는 태도와 그의 육체적 반전은 이를 완전히 쇄신해 버리는 것이다.

보안부장의 직위를 이용하여 여성 절도범에 성적 요구를 협박했다는 모함과 위협은 가족을 잃은 고독한 중년 남자의 이성을 허물어버릴 만큼의 강박이 되지 못한다. 더구나 그 남자가 시한부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면 아마 어불성설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구성이 소설적 우연을 남용하여 이야기의 진정성이나 재미를 반감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전혀 미스터리하지 않았던 소설의 흐름이 이로 인해 내용의 깊이를 더하게 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작가적 역량이라 하여도 무방하리라. 여자가 잊고 간 듯한 휴대전화와 손가방! 이 우연찮은 물건이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넘나들게 한다. 딸아이 사망의 진실? 뺑소니 운전자의 발견? 남자를 10년 남짓에 이르는 고통의 시간에서 풀려나게 하는 해결이 될까?

 

누군가가 궁지에 빠진 나를 진심으로 구원하려 한다면, 그리고 그 구원의 의지에 고결한 아픔이 있는 것이라면, 그 구원자의 아픔을 위해 나는 어떤 보답을 할 수 있을까? 그가 안은 아픔과 슬픔이 자신의 죽음을 방치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것이라면 그가 죽기 전에 그 고통에서 해방되도록 도울 수 있을까? 그것이 나의 죽음을 요구하는 것일지라도? 그래서 여자의 실수 같은 실수는 진실 같은 진실이 되고, 거짓 같은 새하얀 거짓이 된다. 자신들의 생명으로 하는 보시(布施), 영영 진실을 모르기에 구원되는 이 아이러니, 삶이란 본디 이렇게 부조리한 것일 게다. 정말의 사랑, 죽음의 희생을 통해 구원되노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름 없는 독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독(毒)이란 사전적 의미처럼 건강이나 생명에 해를 끼치는‘성분’이다. 이것은 어떤 도덕적 기준이나 양심의 개입을 허용하는 개념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독은 ‘인간의 도덕률에 어긋나는 나쁨’이라는 악(惡)과 구별되지만, 그럼에도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는 본성을 가진 것임에는 분명하다. 즉 독 자체가 의지를 가진 것이 아니지만 이것이 무엇인가에 의해 표출되면 악과의 분별은 무의미해 진다. 독은 이처럼 표출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모호한 것이고, 소설의 제목처럼‘이름’을 가질 수 ‘없는’것일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독이 어디에 있는 것이고, 그것이 어떻게 사람들의 사회에 작동되고 있는가는 항상 주의를 요구한다. 소설은 직설적으로 무차별연쇄독살 사건으로 독의 물질적 실체를 드러내지만 사실 의지가 없는 독으로서, 이 형상은 결과이지 본질이 아니다. 성분에 불과한 독이란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만져지지도 않는다. 무엇인가가 품고 있는 것이다. 아마 이러한 독성을 가장 많이 지니고 있는 것, 또한 이것을 가장 많이 뿌리는 것이 사람이 아닐까? 하는 의문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는 바로 사람이라는 생각 말이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추리소설에 지나치게 무거운 접근이 되어버렸지만, 이 작품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발산하는 독성에 대한 탐색이기 때문이다. 산책 중의 한 노인이 편의점에서 산 우롱차를 마시고 돌연사 한다. 불특정인을 대상으로 하는 무차별적인 독극물 주입에 의한 네 번째 희생자가 된 것이다. 청산가리라는 독은 누군가라는 사람의 의도에 의해 정말의 독이 되었다. 사람의 행동이 수반된다. 한편으로 이마다 콘체른이란 대기업 사내보 편집실의 26세 아르바이트 여성의 극단적인 자기애는 타인에 대한 폭력행위로 나타나고, 직장 동료들을 지속적으로 가해한다. 이 병적인 여성의 행동은 오직 타인을 고통스럽게 함으로써 자기 위안이란 보상으로 대체하는 것인데, 그녀가 퍼뜨리는 성분은 분명 남을 해친다는 측면에서 독이다.

 

여기에 독은 산업사회가 무책임하게 저질러댄 오염물질로서도 그 모습을 나타낸다. 특히 새집증후군이나 오염된 토지에 건설된 주택으로 인한 각종 질병은 바로 사람들의 욕망이 만들어 낸 찌꺼기로서의 독이다. 한국사회로 말하자면 개발열풍으로 토양에 대한 성분 조사도 없이 준공업지나 공업지에 마구 지어진 주택단지가 그 희생물일 것이다. 원인도 모를 천식과 피부질환 등등, 사람을 해치는 독을 뿌려대는 바로 그 사람들의 무책임한 의식이야말로 독이라는 것이다. 소설은 또 추가한다. 학교에서 저질러지는 집단 따돌림(이지메)에 희생되는 아이들의 돌이킬 수 없는 정신적 외상(外傷)을. 사람들이 뿜어내는 독성들이 너무도 많아서 그것들에 일일이 이름을 붙여줄 수 없을 정도이다. 결국 인간이 독 그 자체가 아닐까하는 소설 속 인물의 독백은 의문이 아니라 단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야기의 구조는 독극물 연쇄살인사건을 중심으로 보통의 사람들이 겪는 일상의 에피소드들이 결합하면서 거대한 독의 그물망으로 촘촘히 채워진 세상의 현실을 해부하는 모양을 가지고 있다. 이‘독의 네트워크’의 현실을 엮는 이는 대기업의 사내보 편집실 직원인‘스기무라’라는 삼십대 후반의 남성이고, 더구나 회장의 사위라는 신분으로 대상없는 살인을 저지르는 청년의 궁박한 삶이나, 자기 욕망 달성의 한계에 분노를 일으키는 여성과 대비되어 간접적이고 넌지시 부조리한 오늘의 삶의 형상을 조명하게 한다.

 

이렇듯 일면 무거운 사회 비평적 시각을 주제로 하고 있긴 하지만, 이 소설의 재미에 압도당하는 이유는 희생자의 손녀인 여고생 미치카와 회장의 딸인 스기무라의 아내인 나호코, 그네들의 딸 모모코등이 어우러져 발산하는 연민과 가족애와 같은 따뜻한 온기 때문이고, 사내보 편집실의 여성 편집장인 소노다를 비롯한 직원들의 수식되지 않은 인간미일 것이다. 여기에 더해 세상물정에 어두울 것만 같은 어수룩한 인물인 사내보 편집직원인 스기무라의 탐정 아닌 탐정으로서의 역할 수행이 어떤 작위도 없이 사건의 중심으로 접근하게 되는 자연스런 이야기의 전개가 큰 몫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소설은 엄청난 감정의 기복이나 자극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우리 현대인들의 도덕적 무관심을 질타하고 있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타인의 감성을, 건강을, 생명을 해치는 것은 아닌지, 독성을 간직한 우리 사람들은 스스로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나의 부(富)가, 나의 지위가, 나의 직업이, 나의 태도와 행동, 그 자체만으로도 독성이 발산될 수 있음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설 문학에서 본 우리들의 초상(肖像)

   - 近作 다섯 편의 한국문학을 중심으로

작성: 필리아(비의식)

 

소설문학은 시대성을 외면할 수 없다. 그것을 쓴 작가를 에워싼 시대의 습관과 제도와 문화, 정치가 그들의 삶을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의 형태에 대한 사유가 기저에 흐르고,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자화상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보지 못하거나 망각하고 있는 것들이며, 또한 외면하고, 경계 밖으로 치워버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되어버린 것들에 대한 환기이다.

 

나는 작금의 우리 소설문학 작품들에서 이를 위한 치열한 노력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박완서, 황석영, 성석제로부터 김영하, 정한아에 이르기까지 이들 소설가의 작품이 주류적 삶이 배척하고 배제하고 외면하고 망각한 것들을 말하는 것에서 내 마음의 양식을 채우고, 세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 편협했던 인식과 사유의 범주를 확장시킨다.

 

- 『기나긴 하루』; 폭력을 삼킨 한국인의 아픔, 그리고‘같아지기’의 파국적 형상

 

故 박완서 작가의『기나긴 하루』는 한국인, 바로 시대를 이해하는 데 맞춤의 작품이라 할 것이다. 여기에 수록된 작품들은 소위 “걷잡을 수 없는 증언의 욕구”로 불리는 주류의 역사에서 말하지 않는 것들, 배제하거나 은폐된 것들의 드러냄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전쟁의 모순 뒤에 숨어있는 터무니없는 폭력이고 맹목적인 복수의 잔혹성을 반복하는 한국인들이며, 이 폭력을 삼키도록 강요된 민중들의 아픔의 연대이다. “이념 갈등이 동기간의 골육상쟁으로 치달은”, 발설 할 수 없는 고통의 기억을 말하지 않는 화자의 굳은 입을 떠올리게 하는「빨갱이 바이러스」라는 단편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이 땅, 그리고 우리들의 상흔인 것이다.

 

한편, 속물들, 위선, 정말 하찮은 인간들을 양산하는 오늘의 현실세계를 시어머니의 위장가난, 이혼한 아들내외의 그 버르장머리 없음의 편린들로 맛깔스럽게 지펴낸 「갱년기의 기나긴 하루」는 여인들의 내적 심리를 통해 이 사회가 안고 있는 세태, 즉 물질이 인간성을 압살하는 도시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표출하고 있으며, 단편「닮은 방들」에서는 물신주의의 또 하나의 속성인‘같아지기’라는 파국적 형상을 통해 마침내 그 극한인 간음(姦淫)의 자기 파괴로 명멸하는 절망적인 한국인의 초상을 진저리치게 묘사해내기도 한다. 결국 우리들의 자화상을 낯설게 보게 함으로써 가능의 외연을 확장시키고자 하는 작가의 애처로운 호소를 느끼게 된다.

-『낯익은 세상』; 절멸을 향해 달려가는 욕망과잉의 사회

 

그래서인지 이 같아지기의 물신주의 속성은 황석영 작가의 『낯익은 세상』에서 욕망의 과잉에 절제를 상실한 사람들의 모습으로 다시금 반복된다.

모든 것이 과잉이고 과도함이다. 그래서 거대한 소비는 또한 거대한 쓰레기 더미가 되어 산을 이룬다. 바로 소설의 배경은 역설적이게도‘꽃섬’이라 불리는 이 쓰레기 산이다. 자신들이 배출해 낸 욕망의 찌꺼기라는 오명을 두려워 한 인간들의 임기웅변이다. 그런데 바로 이 쓰레기더미를 생계의 터전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 도시의 영역에서 떠밀려 사람들의 시선에서 외면당한 곳에, 때문에 주류의 시선에서는 보이지 않는 장소로 말이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들의 더러움, 추악함, 두려움을 은폐하기 위해 너절한 수식을 하거나, 격리하고 외면해 버리며, 기억에서 지워버리려 한다. 여기에서 우린 욕망의 과잉과 소외의 깊은 연결성을 확인하게 된다. 소설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쓰레기장을 소독하기 위해 낮게 비행하며 무참히 살포하는 소독약이 그것이다. 쓰레기장의 더러움이 자신들이 사는 영역, 도시에 행여나 옮을까봐 두려워하는 의식이다. 게다가 그곳의 사람들, 영역에서 내쳐진 그들까지 소독해버리려는 듯 흥건히 그들의 속옷까지 적셔대는 과잉의 약물 말이다. 이 과잉의 소독약처럼 한국인들의 욕망은 온통 안전에 대한 두려움과 과잉의 탐욕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 지나침이 무엇을 해결하거나 궁극의 행복을 가져다주기는 하던가? 이렇듯 제동기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과잉 욕망과 분리주의적인 주류의 배타적 의식에 대한 새로운 보기를 촉구하는 것이다. 정작의 의미를 강탈당한 욕망과잉의 사회, 우리들의 일그러진 초상을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 『위풍당당』; 삽질 개발의 광기와 그 폭력성

 

이 과잉의 탐욕은 인간과 자연으로까지 거침없이 밀고 들어와 폭력의 광기를 뿜어댄다. 성석제는 『위풍당당』이란 반어적 뉘앙스 물씬한 소설에서 이를 마음껏 놀려대고 야유를 보낸다.

외진 산기슭 강마을에 버려진 드라마 세트장, 이 우스꽝스런 공간의 대비(對比)는 꼭 우리들의 모순된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한 미소를 짓게 한다. 문명의 장치들이 작동하지 않는 곳, 인간이 어떤 것으로 수식될 이유가 없는 곳, 그래서 과시와 허영과 기만이 부질없는 깡촌에 ‘아르마니 넥타이, 페라가모 구두, 베르사체 선글라스, 카르티에 시계’를 착용한 폭력배들이라는 소설의 구성은 더욱 희화적(戱畵的)이다.

 

문명과 자연의 싸움은 폭력조직과 촌동네 사람들의 전투란 소설적 사건이 되고 급기야 이 폭력성은 중장비와 덤프트럭 수백 대가 군대처럼 들어오는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4대강 개발이란 삽질정책으로 산하를 폐허화시킨 개발의 광기에 휩싸인 오만한 권력의 뻔뻔함이 겹쳐진다. “자연 잘못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자연이 가르쳐 준다”라고 외치는 자연 같아서 보이지 않는 사람, ‘여산’의 외침이 실낱같이 애처롭게 들리는 작품이다. 이 개발이란 미명하에 저질러지는 폭력에 의해 희생되는 우리들의 또 다른 몽매함의 경고일 것이다.

 

- 『너의 목소리가 들려』; 부인된 존재자들의 실재함에 대한 이야기

 

한편, 우리들의 이처럼 목불식정(目不識丁)같은 광기에 대해 약자와 소수자에게 가하는 보이지 않는 폭력성을 접하게 되는 것은 또 다른 낯섦일 것이다. 김영하의 『너의 목소리가 들려』가 바로 그것이다. 안 들리던 목소리를 비로소 들리게 하는 작업이다.

아마 근작 소설 중에서 가장 시인의 마음이 두드러진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보이지 않는 존재, 사회에서 그 존재자의 존재를 부인하고 무시했던 존재를 비로소 보이게 하고, 관심의 영역으로 인식하게 하려했다는 측면에서 말이다. 오토바이 폭주족 하면 대개의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그들에게 불온한 이미지를 바로 덧씌운다. 낯선 무엇인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할 때, 그 대상에 불편해하고, 불안한 감정을 갖는 것이다. 그리곤 곧이어 자신들의 영역에서 추방하기 위해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경찰력과 법이라는 잣대로 제단하고 배제시켜 버리는 것이다. 소설은 바로 이 불온한 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기위해 시도조차 하지 않는 우리들을 향해 있다. 우리들이 낙인을 찍어 경계 밖으로 밀어낸 존재들, 그들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린 타자에게 조차 우린 신세를 지고 있다고.

 

이들 소수자, 약자들에게 보내는 비하와 동정의 양가감정을 수반하는 우리들의 비틀린 시선, 사회 약자들의 자식일 뿐인 치킨 배달부와 자장면 배달부, 퀵 운송업체 직원인 그들에게 차별과 서열화된 시선을 보내는 우리들을 볼 때 이 낯설고 화끈거리는 감정이 소설의 의미가 될 것이다. 우리들, 주류사회가 부정해야 했던 불온한 것의 의미를 되새김질 하게 된다.

 

- 『리틀 시카고』; 연민인가? 관음증인가? 수치를 모르는 우리들

 

그러나 연민의 이면에 있는 양가적인 감정이 우리들의 진심을 조롱하기도 한다. 진정함이란 무엇인가? 정한아의 『리틀 시카고』는 경계 밖으로 몰아내고 잊었다가 슬그머니 사회적 죄책감과 수치심에 어설프게 그들을 관심의 영역으로 초대해 인심을 쓰는 그 허위의 실체를 쫓는다.

 

소설은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쇠락(衰落)하는 기지촌의 시퍼런 멍의 기록이다. 미군 기지의 이전(移轉)과 함께 세상의 시선은 비로소 골목을 찾아든다. 심심한 대중의 관음증을 채우기 위해 카메라 무리를 이룬 방송사 촬영팀이 들어와 화제를 만들고, 몰염치한 말들을 쏟아낸다. 그때 대중을 향해 이를 관통하는 강렬한 소녀의 항변이 있다. “우리 골목 때문에 숨도 못 쉬게 마음이 아픈가요?”

 

이 문장은“연민의 한계, 그리고 양심의 명령까지 훨씬 더 진실하게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는『타인의 고통』의 저자 ‘수전 손택’이 한국의 독자들에게 별도로 부탁했던 말에 가닿는다. 타인의 고통에 눈을 돌리는 것이라면 ‘우리’라는 말을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는 진정의 충고를.

 

이렇게 다섯의 소설은 실재하고 있으나‘있음’으로 인식하지 않으려는 어떤 고집스러움에 대한 비로소의 현시(顯示)인 것이다. 여기에 문학의 위상이 있는 것일 게다. “문학이 에피스테메(Episteme)들 사이의 간격을 채워준다”는 푸코(Michel Foucault)의 말이 바로 그것이다. 시대를 지배하는 인식의 기초들 사이에 벌어진 틈을 채우고 연결해주는 것 말이다. 이를 통해 문학은 세상의 외연을 넓혀 낯선 곳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경계의 저편에 혹은 기억의 심연에 밀어두었던 것을 꺼내 궁극의 진실을 드러나게 하여, 시선과 사유의 영역을 확장하게 해준다. 결국 이 광대해진 인식능력이 서로 다른 것들을 이해하고 화합하게 하며, 두려움을 떨치게 하고, 행복과 희망의 가능성을 꿈꾸게 하는 것일 게다. 소설을 읽는 것, 읽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연유에서이다. (終)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