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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은 나쁘다고 말하지만
가야노 도시히토 지음, 임지현 옮김 / 도서출판 삼화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폭력(暴力)이란 단어에서 긍정적이고 우호적인 느낌을 갖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어떤 대상을 거칠고 사납게 제압할 때에 쓰는, 주먹이나 발 또는 몽둥이 따위의 수단이나 힘” 또는 “무기로 상대를 억누르는 힘”이라는 사전적 의미에서처럼 자기 이외의 존재를 억누르고 제압하려는 무력적 수단이나 힘을 마주했을 때의 불쾌한 감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은‘폭력’그 자체를‘나쁘다’ 거나 ‘좋다’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단지 도덕적 당위성에 매몰되어 실제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라고 말이다. 적어도 폭력의 성분이 선(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 주장은 굉장한 도발로 여겨질 것이다. 그렇다면 폭력이 나쁜 것이 아니란 말인가?
저자는 이를 설명하는 배경으로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는 폭력을 해결할 수 없는 현실적 현상 - 정당방위와 같은 자기 생명의 구제를 위한 불가피한 폭력의 행사 등 - 들을 열거한다. 그리고 “악을 처벌하기 위한 폭력이 없다면 드라마 사극의 재미는 반감”될 것이라 하면서 이것은 폭력을 동경하는 인간의 본성, 즉 인간 존재란 본디 폭력을 바탕으로 성립한 것이라고 단정을 내린다. 인간은 폭력을 떠나서는 삶을 지탱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인간’ 존재의 존립기반으로서의‘폭력’, 인간이 지닌 것에 어찌 좋다, 나쁘다, 선하다, 악하다, 라는 도덕적 함의를 지닌 판단을 할 수 있겠는가하는 인간 중심의 오만한 반문일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 도덕적 가치를 지닌 언어로 분별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는 얘기이리라.
정언 명령의 충돌, 도덕의 상대성
이러한 주장에 쐐기를 박으려는 듯, 도덕에 무언가 이유를 부여한다면 특정 조건이나 가정에서만 그 도덕을 지키는 것이 되어버린다는 칸트의 정언명령과 가언명령의 모순관계를 통해 도덕이란 상대적인 것임을 역설(力說)한다. ‘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의 요구는 이미‘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라는 정언명령에 이유, 즉 조건을 전제하는 것이 되어 답이 불필요한 당위라는 것이다. 그러나 ‘타인을 죽인 사람은 사형시킬 수 있다’라고 하는 또 다른 정언명령인 사형제도는 분명히 전자의 정언명령에 배치된다. 결국 장소와 때에 따라 도덕이란 것은 이처럼 변하는 지극히 상대성을 지닌 것이라는 개념이다. 그런데 전자(前者)의 정언명령은 보편성을 지니지만, 후자의 사형제도 조차 보편성을 지닌 것일까? 사형제도는 인정되기도, 부인되기도 하는 보편성을 지닌 것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측면에서 저자의 예시는 불완전하게 보인다. 더구나 칸트라는 인간은 결코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어쨌든 저자는 이와 같은 인간의 본성, 그리고 도덕의 상대성이라는 두 토대 위에 폭력이란 나쁜 것이 아니라는 자신의 주장을 달성한다. 폭력은 인간 존재 그 자체의 기반이다라는 것이다. 때문에 폭력을 도덕성에 입각해 이해하려는 입장은 폭력에 아무런 대처도 할 수 없는 어리석음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폭력은 도덕성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살인자에 대한 사형, 전쟁에서의 적군 살해, 정당방위(자력구제)로서의 살인 등등,‘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도덕적 주장이 무수한 경우의 변수에 따라 허물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지극히 포스트모던한 상대주의적 발상이다. 이렇게 도덕을 해석하기 시작하면 도덕의 존재가치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굳이 도덕을 말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도덕이란 것이 본래 이현령비현령이라면 말이다. 그래서 이러한 비판의 싹을 없애버리기 위해서인지 “도덕적인 기준에서 폭력을 고찰하는 방식을 버리지 않으면 폭력을 통해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판단 가치로서의‘도덕’을 아예 배제해 버린다.
국가는 유일한 합법적 폭력의 원천이다
이러한 비판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폭력의 가장 커다란 주체, 나아가 폭력의 합법적 원천으로서의 국가의 정의에 이른다. 근대국가의 형성에 있어서도 저자는 루소보다는 홉스의 사회계약설을 논리의 원천으로 삼는다. 개인의 자유의지에 의한 사회계약이 아니라 폭력을 수반한 즉‘획득에 의한 커먼웰스(commonwealth)’가 국가설립의 본질적 실질을 설명하는데 가깝다는 것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불식시키는 압도적인 폭력으로서의 힘에 복종하고 그 보호를 받기로 하는 계약의 결과라는 주장이다. (저자는 일본 막부의 군사력 독점을 근대국가 설립의 사례로 사용하고 있음; 다분히 일본 근대국가 성립의 시기를 앞당기려는 의도로 추정됨)
이렇게 해서 설립된 국가는 폭력을 독점하게 되고,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폭력을 사용하는 주체가 되었다는 관점이다. 또한 아주 중요한 시사가 있는데, 이는 독일의 정치철학작인‘헤어프리트 뮌클러’의 『새로운 전쟁』에서 언급한 무기의 발전, 포병이란 존재와 같은 대량 살상 무기로 인한 전쟁 규모의 대형화, 전쟁비용의 비약적인 증가가 세수의 안정적 조달기반의 확립과 같은 현대국가 조직의 성립으로 정착되었다는 것과 일치하는 서술이다. 무기와 같은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인해 군사력 독점이 가능해진 시기와 근대국가 형성의 시기가 일치하는 것에 대핸 주목이다. 즉 폭력 독점 과정이 곧 국가의 설립이라는 것이며, 이로써 국가란 인간사회에서‘폭력의 권리의 원천’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이 논리를 더욱 밀고나가 국가의 세금 징수는 바로 합법적인 폭력의 다른 표현이라는데 이른다. 강력한 합법적 폭력을 가진 국가는 복종과 보호의 대가로 돈을 받는 데 이것이 바로 세금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야쿠자와 같은 폭력 조직들이 보호비조로 상인들로부터 거둬들이는 돈과 세금과는 그 성격이 같은 것이지만 다만 ‘합법성’이라는 법에 의해 유일하게 승인된 주체인가 아닌가의 구별만이 다르다는 것이다. 즉, ‘법’을 통해 국가는 폭력을 독점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에 의해 국가의 폭력만이 합법성을 띠게 되고 그 법에 의해 제한되고 견제되지만, 역사 속에서 이 법이 국가 권력의 부패로 인해 자의적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수단이 되어버려 실질적인 견제가 되지 못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여기서 다시금 도덕이라는 잣대가 부상하게 된다. 그래서 존립기반 자체가 폭력인 이‘국가’라는 조직은 해체되어야 한다는 도덕적 당위의 목소리가 공감을 획득한다. 따라서 국가를 해체하는 것이 가능한가? 라는 질문이 뒤따르는 것은 당연한 이성적 요구로 들리게 된다. 과연 국가는 해체 가능한 것인가?
폭력은 인간과 국가의 본성이자 존립기반이다
책은‘불가능하다!’고 선언한다. 이 역시 홉스의 획득에 의한 커먼웰스의 사고에 기초한다. 국가라는 유일한 합법적 폭력의 원천이 사라지면, 자연상태에 빠진 개인은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고, 이는 곧 공포와 위험이 도사리는 세계에서 폭력의 주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개인과 지역, 이해관계 속에서 강력한 폭력조직은 다시 설립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국가의 해체가 다른 국가의 설립으로 대체될 뿐, 결코 실질적인 해체는 가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되면 개인들의 선택지는 지극히 한정된다. 그중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폭력을 국가에 위임하는 방법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만일 폭력 없는 상태가 인간 사회에서 당연한 것이었다면 애초에 국가란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라는 홉스의 말처럼.
이처럼 이 불쾌하고 불편한 폭력이 인간과 국가의 존립기반 자체임을 인정한다면 우리 개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들을 보다 잘 이해하고 그것이 혹시라도 보편성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도록 감시하고, 보상과 보호의 조화라는 평형이 한 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제도를 끊임없이 보완해야 하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권리이자 의무여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다시 말해, 이미 폭력이라는 본성에 서있으면서 도덕적 당위만으로 폭력의 배제를 주장해봐야 아무런 해결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폭력을 인정함으로써 비로소 폭력의 속성을 잘 이해하게 되며, 이로써 인간 개인 삶의 미래를 말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는 인간의 모든 행동을 비웃지 않고, 개탄하지 않으며, 저주하지 않고, 단지 이해하는 일에 몰두하겠다. ~ 中略 ~ 비록 아무리 불쾌한 것이라 할지라도 분명 필연적인 존재이고, 일정한 원인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이러한 원인을 통해 그것들의 본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라고 한 스피노자의 관점과 같은 것일 게다. 폭력은 인간의 존재 조건이며 도덕적으로 부인한다고 사라질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비록 가혹한 현실이지만 그 본성을 수긍하고 이해하려는 시도가 중요한 이유가 된다는 주장일 게다. 그래야 폭력이 힘의 논리 이외에 법이라는 다른 방법으로 제어될 가능성이 열리고, 푸코의 말처럼“권력이 보편적인 것에 반하는 경우에 한 치의 양보도 없어야 한다”는 보다 성숙된 시민으로서의 역할과 관점을 심화시킬 수 있게 되리라는 점이다.
사실 틈틈이 지적하였듯이 사례의 왜곡과 논리적 부당성이 곳곳에 자리잡고, 더구나 그것에 이론적 토대를 쌓아올려 주장의 당위에 이르는 불완전성, 또한 도덕성 배제의 이유가 충분한 동의를 얻기에는 미흡하지만 국가의 설립에 이르는 역사적 배경지식과 통찰이나, 국가 폭력에 대처하기 위한 실체적 탐색은 점점 은밀하게 행사되는 오늘의 국가폭력의 형태를 이해하고 견제하는 데 귀중하고 충분한 지침을 제시해 준다. 특히 폭력에 대해 “자신의 도덕적 입장 표명에 만족을” 느끼는 데 불과한 도덕주의로 인해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개인적으로 내 도덕적 관점과 국가에 대한 이해를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