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뤼드 쏜살 문고
앙드레 지드 지음, 윤석헌 옮김 / 민음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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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사귀들마저 갈색 고인 물에 잠긴 채 아직도 부드러움을 간직하고 있는 곳

내 쓸모없는 결심들이 가장 편히 쉴 수 있는 곳

내 생각들이 마침내는 거의 사라져 버리는 곳.”

- 대안, 121

 

책의 헌사에 친구 외젠 루아를 위해, 이 풍자문을 썼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이 소설을 의미 그대로, 빗대어 비웃고 폭로함으로써 무엇에 대해 공격하기 위한 글로 받아들여도 곡해는 아닐 것이다. 그 무엇은 소설을 쓴다는 것이기도 하고, 삶 그 자체를 말하려 한다는 것이기도 하며, 당대 문학과 철학 등 지성의 기술(記述)이기도 할 것이다. 결국 작가 자신을 포함한 삶과 글쓰기와 당대 문예조류에 대한 부정과 모순에 대한 냉소적 비판일 것이다.

 

이렇게 작품에 진입하기도 전에 한 작품의 성격을 결정짓는다는 것이 경솔해 보이기도 하지만, 이 신중치 못한 가벼움에 기대지 않고서는 이 책을 읽어낼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일종의 서문 또는 경고의 글에서 한 권의 책은 언제나 공동 작업이다. 쓰는 이의 몫이 더 작아지고, 신이 받아들일 몫이 더 커질수록, 책의 가치도 커진다.”, 작가 자신도 알지 못한 채 집어넣었을 무언가를 독자대중이 밝혀내리라고 말하듯, 그 해석의 다양성을 열어두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모두(冒頭)의 인용 문장은 소설 속 팔뤼드를 쓰는 화자이기도 하며, 팔뤼드속 주인공인 티튀루스가 바라보는 늪의 전경일 것이다. 한편 그 늪이라는 상징적 장소, 인간의 삶과 자연의 총체가 존재하는 궁극의 공간, 바로 팔뤼드라는 이 의미가 모호한 책이 이미 담지(擔持)하고 있는, 결코 써 낼 수 없는 총합으로서의 삶 자체일 것이다. 소설 팔뤼드는 이 제목의 책을 쓰는 화자의 6일 간의 지독하게 평범한 일상의 기록이고, 그 지루해 보이는 일상의 내용은 소설 속 화자가 쓰고 있다는 팔뤼드의 맥락 없어 보이는 부분적 내용들과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얽혀 이들을 포괄하는 바로 이 책 팔뤼드를 구성하고 있다.

 

아마 이러한 텍스트, ‘둘러싸고 있는 글과 그 안에 있는 글이 서로 반영(反映)하며 영향을 미치는 형식을 미장-아빔(mise-enabyme)’이라 지칭하는 모양이다, 어쩌면 작가 앙드레 지드는 이미 말할 수 없는, 하나의 완결된 의미로 전달될 수 없는 것을 말하려는 자신의 의도를 가장 근접하게 표현하는데, 이 일종의 상호 반영 기법으로 모호성과 복잡성을 통해 본래의 텍스트를 뛰어넘는 예상 외(), 즉 신의 몫이 드러나기를 기대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이 책은 해석이 무궁무진하게 열려있는 책이다. 이러한 점(말하지 않은 것까지 말할 수 있다는)에서 작가의 야심찬 욕망의 산물임을 엿보게 된다. 이로써 지드는 자신만의 독자적 소설의 세계를 구축했다고 여겼을 법 하다. 어쨌든 소설의 전체적 성격에 대한 소감은 이쯤에서 그치기로 하고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자.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이 동일하게 연출되고 있는데, 그것은 뭐야 작업하는 거야?”라는 물음과 함께 팔뤼드를 쓰고 있어...”라는 답으로 시작하고, 뭐야 작업하는 거야?”매립지를 쓰고 있어...”라고 종료된다. 이 동일 형식에서 삶이라는 것이 지극히 변화없는 동일유사성의 반복임을, 지리멸렬한 것임을 말하려는 것만 같다. 사실 팔뤼드(paludes;)’나 매립지나 그것이 그리 전혀 다른 것이 아니듯 변화무쌍하다고 말하는 삶이라고들 말하지만 삶이란 게 사용 단어가 지닌 미묘한 의미의 차이, 혹은 사람마다 다른 이해의 차이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게 뭐지?’라는 친구의 물음에 팔뤼드를 설명하는 최초의 이야기는 무엇보다 떠날 수 없는 자에 대한 이야기야. (...) 나가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그 밭에 만족하며 사는 티튀루스라는 한 남자의 이야기야라고 답한다. 나는 이 설명을 팔뤼드에 대한 서론 격으로 읽었는데, 존재의 변화를 도모하는 어떤 행위도 없이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며, 저항 없는 그 삶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는 것으로. 늪으로 싸인 망루에 사는 독신자 티튀루스는 자신의 삶에 불만이 없으며, 늪을 바라보며 시간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모습에서 즐거움을 찾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늪을 떠난 삶을 생각하지 못하는 자의 감수(感受)일 뿐이라고 표현한다.

 

결국 화자가 팔뤼드를 쓰는 것은 이러한 순응적 삶, 권태와 무료함의 삶을 이탈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그래서 화자는 글을 쓰지 않았다면 나도 그들과 다를 바 없었겠지.”라고 말한다. 이 말에서 이미 팔뤼드는 거기에 무엇인가 더 써야 될 것, 또는 무언가를 끼워 넣어야 할 것이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때문에 팔뤼드는 그저 계속 작업되고 있는 것일 뿐일 게다. 따라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도무지 진척이 없어.”라고 말하는 것은 진실이다.시적 산문이 한 문장 흐르는데, 이렇다.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물 위의 가느다란 풀들은 벌레가 내려앉은 까닭에 고개를 숙이고 있다.......물이 조금 흘러나와 식물의 뿌리를 적셨다.....시상(詩想)을 더 붙들고만 있을 수 없었으므로,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이렇게 적었다.    티튀루스가 웃는다.”

 

티튀루스의 조용한 웃음은 마치 만물의 조화를 깨달은 자의 미소 같다. 거기에 이미 모두 있는 것을, 아마 그래서 화자는 팔뤼드가 대체 무얼 얘기하는 거냐는 물음에 한 권의 책은 알처럼 닫혀있고, 가득 차 있고, 매끈한 거야. (...) 알은 채워지는 게 아니야. 가득 찬 채로 나오는 거지. (...) 게다가 그 얘기는 이미 팔뤼드안에 있어. 더 나은 것 따위, 나는 바라지도 않았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일 게다.

 

그런데 소위 글을 쓴다는 이들, 아마 1895년 당대의 문학, 철학자들과 그네들의 글쓰기에 대한 비판일 것 같은데, 플라톤의 대화편을 연상시키는 향연이라는 소제목을 한 어느 목요일의 여사친 앙젤의 집에 모인 문인과 철학자들이 화자의 팔뤼드에 관해 각자의 이해에 기초한 물음과 판단, 이의 등이 어우러지는 대화는 어쩌면 이 한 마디로 포괄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팔뤼드라고? 그게 대체 뭔가요? 설명했는데, 모두 어정쩡한 투였다.”


사실 화자가 설명하는 팔뤼드는 늪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어두운 동굴 속에서 살아가는 동물의 이야기이고. 특징 없는 땅의 이야기이며, 오로지 구멍을 메우기 위해 만들어진 매일 똑같이 형편없는 일만을 하는 삶의 이야기이기도 하니, 어느 한 부분의 이야기만을 들은 이들이 전체를 말하는 데는 당연히 역부족이고, 몰이해이기 십상이다. 다들 제대로 보지 않고 밖에 있다고 믿고 있음을 지적해야 한다.”는 말처럼, 자신들은 마치 외부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 가소로운 것이다. 끝날 수 없는 이야기, 한 마디의 문장으로 담아낼 수 없는 이야기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팔뤼드에는 이미 그 모든 것이 있는 데.

 

화자의 얘기를 듣다보면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못마땅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행동을 강요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고, 결국 자기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질책처럼, 다시 말해 사람들이 저마다 다르게 살아갈 수 있음을 부정하는 것처럼, 그래서 혁명을 요구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법도 하다. 이봐요, 당신은 도대체 뭘 원하는 겁니까?” , “제가 원하는 것은요, 개인적으로 원하는 것은 팔뤼드를 마저 쓰는 겁니다.” 과연 이미 거기 있는 것, 스스로 가득한 것을 마저 쓴다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 그저 살아 갈 뿐인 것을, 마치 삶의 여백, 또는 가능성이라는 것에 무얼 채워 넣으려는 가당치 않은 생각, 이미 존재하는 삶 자체에 대체 무얼 더 기입할 수 있다는 말인가? 처럼 들린다.

 

그렇기에 화자는 어떤 결실도 볼 수 없음에도, 난 언제나 팔뤼드를 지니고 다니는 것 같아요라고 단지 떨치기 힘든 느낌을 말한다. 달리 보면 팔뤼드는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원죄(?)이거나 스스로를 옭아매는 짐 덩어리인, 삶과 뗄 수 없는 삶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매번 편히 쉬기 위해 쌓아올린 지붕처럼, 비를 피하게 해주지만 태양을 감추기도 하는, 그럼에도 떨쳐낼 수 없는 지붕을, 그것을 만들겠다고 자재를 모으며 싣고 돌아다니느라 구부러진 어깨를 할 수 밖에 없는 삶을. 때문에 화자가 쓴다는 팔뤼드의 주인공 티튀루스의 지루함과 권태로 이루어진 삶보다 우리네 삶이 장담하건대 훨씬 음울하고 시시해요.”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 된다. 화자가 여사친 앙젤에게 이 책의 주제라고 말하는, 생각해 보지 않았기에 우리는 늪 망루의 독신자의 삶을 허무라고 감히 말 할 수 있다고.

 

사실 작중 화자가 쓰는 팔뤼드는 결코 끝을 맺을 수 없을 게다. 실제로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들을 제대로 성공시키지 못했으니까. (...) 게다가 내가 고수하는 미학적 원칙은 소설의 구상과도 대립한다.”. 삶의 총체, 그 자체를 어찌 글로 옮겨 한 권의 책으로 써낼 수 있겠는가? 또는 한 권의 책으로 감히 진실을 말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결국 팔뤼드에 이어 쓰일 작품의 제목이 매립지인 것은 필연적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지리멸렬해 보이는 나날의 일상적 모음, 아무런 변화도 없는, 때론 괴어 썩은 늪지의 물표면 같은 그런 삶에 찬란한 광채가 펼쳐지는 순간이 있듯, 늪이여! 대체 그대의 매력을 말하는 자 누구인가! 티튀루스!”와 같이, 삶이라는 늪, 자신의 영혼에 맞추어져 만들어진 것이 아주 타당하게 여겨지는 감수(甘受)의 덕목이 또한 팔뤼드인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 작품의 해석은 이미 언급했 듯 무궁무진할 것이다. 주관주의적 정신주의라 할 수 있는 당대 상징주의 사조에 대한 비아냥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향연에서 문인과 철학자들이 팔뤼드를 저마다의 이해로 단정 짓거나, 모호해하는 말들은 화자가 쓰고 있다는 팔뤼드에 대한 사실의 진술일 것이다. 바로 그 진술들이 사실인 만큼, 상징주의는 틀렸다는 주장을 비꼬아 풍자한 것이리라. 그러나 이는 작품의 하나의 소주제일 뿐이고, 이들을 모두 싸 안는 것은 바로 삶의 총체적 진술의 불가능성일 것이다.

 

그럼에도 화자는 이 무모한 글쓰기에 도전한 것이다. 애초에 삶이 지닌 불편과 불쾌를 탈주하기 위한 몸부림으로써 작업에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몇 차례 더 반복하여 읽게 되면 또 다른 해석에 도달할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경이롭다기보다는 기이하면서도 낯설지 않은 느낌을 주는 미묘하다는 여운을 주는 소설이다. 다시 읽을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글쓰기의 부정에 얽힌 한 인용글이 여기에 이르게 했듯, 또 어떤 인연이 닿아 읽게 될 때, 새로운 이해를 내게 던질지도 모르겠다. 분명 이 작품은 그러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화자의 여사친 앙젤이 그에게 던지는 말이 일말의 진실을 품고 있을지도.

 

불행한 친구여, 왜 당신은 팔뤼드를 시작했나요?

그토록 많은 다른 주제들이, 더 시적인 것들이 있을 텐데.” - 일요일,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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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8-31 1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용하신 ˝쓰는 이의 몫이 더 작아지고, 신이 받아들일 몫이 더 커질수록, 책의 가치도 커진다˝ 라는 문구처럼 이 소설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네요. 흥미롭습니다.

필리아 2025-08-31 11:54   좋아요 0 | URL
굳이 미장-아빔의 형식을 띠지 않더라도 모든 문학작품, 또는 써진 글은 단어들, 무수한 의미를 담고 있어 독자들 고유의 이해에 따라 각양의 해석이 가능하겠지요. 팔뤼드라는 단어 또한 늪에서부터 질병 등등 그 함유하는 여러 의미 탓에 모호하기 그지없는 제목이기도 하답니다. 결코 쓰일 수 없는 것을 쓰려는 작가들의 고뇌이기도 할 것 같습니다. ‘아니요‘의 작가와 작품의 목록에 추가될 소설이라 말하고 싶네요. 잉크냄새님, 댓글 감사합니다. 유쾌한 주말시간 되시기를~~

젤소민아 2025-09-03 0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왓! 표지도 엄청 멋지네요! 이 책, 몰랐는데, 꼭 읽어보고 싶습니다! 고마워요, 필리아님

필리아 2025-09-03 08:04   좋아요 0 | URL
표지 그림의 색감이 시선을 끌지요. 스물여섯의 지드가 쓴 야심찬 작품이랍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젤소민아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