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철학자 김동규의 저술 서양 문화의 근원적 파토스, 멜랑콜리아를 바탕으로 하였음을 밝힙니다. 그 동기는 202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소설 저항의 멜랑콜리에서 시종일관 필자를 괴롭혔던 석연치 않음의 원인을 찾아보려는 소박한 이유에서 출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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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아(melancholia), 우리는 멜랑콜리(melancholy)라는 표기를 대개 일상 언어로 사용하지만, 그 의미는 상당히 의심스럽기만 하다. 서양인들에게 깊숙이 체화된 정조(情調)이기에 이와 무관한 동양인의 화법에서는 낯선 감성이기 때문이다. 어떤 특정 지역 공동체에 익숙하게 교육이나 학습으로 형성된 가치나 믿음, 정신이 내면화되어 일상성을 띤 감성을 에토스(ethos)라 하지만, 멜랑콜리아는 오래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일상적 감성, 즉 길들여진 감성인 에토스와 달리 그것에 저항하는 일시적, ()반복적 감성이기에 파토스(pathos)의 범주에 속하는 정념(情念)이다.

 

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대표작에 저항의 멜랑콜리(이하 멜랑콜리로 표기)라는 소설이 있다. 멜랑콜리에 저항, 거부의 의미가 있는데, 이중(二重)의 의미가 아닌 것으로 읽히기에 저항의라는 수식어는 아마 저항으로서의라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할 문구로 보인다. 그의 소설에 대한 감상의 제목으로 실존적 불안이라고 달았던 사탄탱고가 꼬리를 물고 윤회하는 듯한 닫힌 구조의 이야기로서 영원한 몰락의 상태를 반복하는 분노와 증오의 눈길로서 읽혔듯, 멜랑콜리는 이러한 감성에 직관적으로 닮은 이미지를 갖게 한다.(2018년 필자 본인의 리뷰 글을 참조 인용했음)


소설 멜랑콜리의 에스테르란 인물은 음악학교 학장을 은퇴하고 세상과 격리된 채 거짓된 음조에 휩쓸려 음악에 바쳤던 자신에게 자기-체벌로서 진실한 음의 조율을 향한 참을 수 없는 불협화음의 적응에 매진하는 자다. 이 인물이야말로 멜랑콜리한 서구의 인간 그 자체다. 나는 라슬로의 소설들 전반에 흐르는 이러한 정조가 왠지 거북하기만 했는데, 그네들의 멜랑콜리에 내재된 정신의 한계를 어느 만큼은 이해하여야 할 요구가 증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체 이 꺼림칙한 반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철학자 김동규는 서양문화는 멜랑콜리라는 정조에 물들어있으며, 이 정조의 바탕 위에서 수천 년의 문화를 일구어냈다.”고 이해하고 있다. 문화라는 것은 구성 개체들의 일상적 삶의 성장조건이자 한계조건이고, 따라서 특정 문화가 제공하는 삶의 토양은 그 내장된 자기 폐쇄성으로 동일성을 유지하려한다. 다시 말해 멜랑콜리는 서양인의 자기 동일성이라는 불가피한 폐쇄성 속에서 빠져나오기는커녕 소속 문화의 보편성을 강변하고 정당화하는 그 한계를 모르는 감성이다. 그런데 왜 멜랑콜리한 인간들, 즉 이미 기성의 규칙과 제도, 관습에 대한 은연한 반감의 감정을 지닌 사람들이 그 폐쇄성을 탈출하지 않는 것일까? 정신의학자 피터 크레이머가 수천 년의 적응 끝에 멜랑콜리는 그렇게 우리에게 어울리게 되었다.”고 기술했듯, 이 황량하고, 우수에 젖은 감각적 정서를 개체가 풍요롭고 안락하게 느끼는 본원의 감성이 되었기에 탈출생각조차 못하게 만드는 감옥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김동규는 중요한 역사적 이해에 기초한 해석을 말하는데, 서양사회는 근본적 단절없이 연속성을 유지했다는 사실, 서양 정신이 한 번도 타자의 정신 속에서 자기를 상실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굳이 멜랑콜리라는 자신들의 감성이 지닌 한계에 대한 자기성찰이 필요치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서구의 정신은 멜랑콜리한 인간을 위대한 비극의 광기 표상으로서 천재예술가의 내면의 상징으로 여기는 오랜 문학적, 철학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인간 내면의 어두운 정조로서 일탈과 과잉의 슬픔을 하나의 영감에 찬 기질로 이해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우울을 향해 기울어가는 멜랑콜리한 감성이란 이성이 수반되지 않을 때 광신으로, 밀교적 열광으로 바뀌기도 하여 망상에 휩싸여 질병으로 전락하기도 하고, 균형과 조화를 이뤄 건강한 이성에 토대를 둔 독창적이고 진리를 드러내는 원동력, 숭고한 존엄성의 감성으로 발현되기도 한다. 멜랑콜리는 두 얼굴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멜랑콜리를 화두로 삼은 이유는 이것의 정의를 풀어놓자는 것이 아니라, 내게 석연치 않은 감정을 가지게 한 멜랑콜리의 내재된 본질에 조금이라도 근접해보려는 것이다.

 

라슬로의 작품, ‘멜랑콜리는 한 도시의 붕괴의 전조들, 그 가운데 등장하는 다분히 멜랑콜리한 인물들이 벌이는 혼돈의 상황이 마치 역사의 진실이란 돌고 도는 순환적 반복, 조금 인심을 써서 말하자면 모순을 살짝 덮어버리기 위한 변증법적 순환 고리를 맴도는 서사로 다가온다. 이 소설이 시적 감상을 자아내며, 걸출한 이야기의 맛을 선사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몰입하게 하는 힘에 사로잡혔던 것은 부인하지 않겠다. 그런데 결국 제자리라니, 역사의 시간이 돌면서 서로 자리바꿈을 할 뿐 원의 전체 질서를 따라 단지 원주를 도는 것이라면 그것이 과연 소설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했기 때문이다.

 

멜랑콜리를 구성하는 세 축을 김동규는 자의식 집중과 동일화, 나르시시즘이라고 정리한다. 첫째, 자기의식이 강해 자기에게 강하게 집중하는 까닭에 어떤 사랑의 대상을 상실했을 경우 그 고통은 매우 크다. 라슬로의 작품 속 에스테르나 그의 부인 모두 이러한 자기애가 놀라울 정도로 큰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물론 그것이 지향하는 방향은 극단적으로 다르지만 말이다. 둘째, 타자를 자기와 쉽게 동일화함으로써 모순과 차이를 극도로 인정하기 어려워하며, 따라서 다름을 철저히 배제한다. 에스테르 부부가 서로 극한적으로 반목하고 혐오하는 것과 상통한다. 셋째, 타자 사랑이 아닌 자기 사랑이다. 사랑의 대상을 선택할 때부터 이미 자기와 닮은 자기의 분신을 선택한다. 이러하기에 멜랑콜리한 사람은 대상을 자신으로부터 떠나보내기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에스테르가 또다른 형태의 멜랑콜리커인 몽상의 열정을 지닌 벌루시커의 행방을 애타게 찾는 것도 아마 이러한 맥락일 것이다.

 


멜랑콜리가 서양문화의 근본 정조, 즉 서양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심 줄기라한다면, 이것의 속성을 조금은 더 파고들어가 보아야 멜랑콜리가 왜 쳇바퀴 돌 듯 한계에 갇힌 답답함, 그로인한 거부감의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김동규는 자기에 집착하는 서양의 언어에 우리의 언어에는 없는 재귀용법에 주목한다. 재귀(再歸; reflexive)한다는 것은 자기를 떠나서 다시 자기 스스로에게 돌아온다는 자기 복귀를 함축하는 낱말이다. 이 언어적 특성으로 인해 그들에게 자기(self, selbst)’는 엄청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무엇인가를 자기 자신으로 이끈다는 의미의 절대자가 출현하고, 서양인들의 절대적으로(absolutely)라는 말은 그 자신에 따라서라는, 다시 말해서 오직 자기 자신만을 따르는 것이 절대적인 것이라는 의미이다. 결국 멜랑콜리는 상대인 타자를 허락하지 않은 절대이며, 이 절대는 모든 것을 자기에게 수렴시키는 정념이다. 여기서 이질적인 것은 살아남기 어려운 것이다.

 

동일성의 논리는 이로부터 자연히 따라 나온다. 자기가 아닌 -자기들 혹은 자기와 모순되는 것 전부를 배제하는 원리이다. 멜랑콜리라는 정조는 아무튼 독특한 배타성을 지닌 정념이다. 동어반복적 자기 동일성의 확립이 서양 인식론의 존재론적 근거라는 말이다. 그들이 애매함을 그토록 혐오하는 것이 바로 이 정신이다. 선택지를 벗어난 어떤 바깥도 부정되는 것은 바로 이 서양인의 자기동일화에 바탕을 둔 인식 때문이다. 서양 인식론을 모순배제와 동일률이 지배하는 것도 결국은 멜랑콜리한 서구 특유의 정조에 연원하는 것이다. 나르시시즘은 이 동일성의 논리에 따라 치밀하게 전개된 결과물이다. 타자가 아닌 자기 분신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는 이 지독한 정념은 불완전한 자기를 충만하게 완성함으로써 죽음을 정복하려는, 불멸의 구원에 대한 욕망이다.

 

이 어둡고 음울하고 슬픈 정조인 멜랑콜리는 이러한 자기 한계를 지닌 한편으론 기형적 감성으로 여겨진다. 이제 라슬로의 소설 저항의 멜랑콜리가 거부하는 마음으로 독자를 괴롭힌 이유가 어느 정도 해명된다. 서구인들은 그런 문화 속에 삶이 형성되고 있기에 자신들의 한계를 성찰하지 못한다. 물론 샤르트르라는 걸출한 인물이 원제목을 맬랑콜리로 하였던 소설 구토가 이러한 정조, 있음을 그대로 보지 못하고 허상에 빠져있으며, 나아가 그 허상에 빠져있음 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시대를 성찰하긴 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 결코 바깥 세계, 세계 전체를 조망하는 차원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샤르트르는 앙투안 로캉탱을 통해 인간 존재의 실존적 위치를 본의 아니게 진술하기는 했지만, 하이데거의 말처럼 자기존재가 거주하는 시대의 껍데기에 사로잡혀있음을 자각하지 못했기에 자기 정조의 한계를 보지 못했다.

 

사실 서양인들이 내세우는 고전적 지위를 차지한 문학작품들은 예외없이 이러한 멜랑콜리 정조에 깊게 물들어 있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하느라고 한다는 부패와 불의와 부정한 세계 인식과 질서에 저항하지만 그것은 그들 내부에서의 성찰에 그치고 만다. 게오르크 뷔히너는 당통의 죽음에서 프랑스 혁명을 성공시킨 주역임에도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했던 당통을 이렇게 묘사한다. 사실 난 인류 역사 전체를 비웃지 않을 수 없어 , 세상이 그대로라는 생각이 들어, 내일도, 모레도, 그리고 먼 훗날에도 모든 게 오늘과 같을 거 같아. 공연히 소란피우는 거야.”, 자신이 주도한 혁명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는 인물을 통해 역사의 쓰나미에 휩쓸려버리는 부유물, 단지 저항하는 멜랑콜리커의 권태로운 삶으로 전락해버린다.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사탄탱고저항의 멜랑콜리의 전체 줄거리에 맞춤인 문장이라 해도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절망은 희망의 산물이니 희망은 실천적 목표에 대한 갈망이고, 그 목표에 안착할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기에, 그 비극성을 성찰하고 또다른 희망의 목표를 준비하기 위해 새로운 지도를 다시 그릴 수 있게 해주지 않냐고. 아마 크러스너호르커이도 라슬로 분명 이러한 심정에서 썼을 것이다. 추악하게 권력을 차지하고 주변을, 타자를 철저히 폭력으로 굴복시키는 에스테르 부인의 여정을 보여주면서 그 비극적인 세계의 일면을 통해 성찰할 수 있는 관점을 주지 않았냐고 말이다. 그런데, 필자를 불편하게 했던 문제는 본질적인 것, 바로 그네들을 사로잡고 있는 멜랑콜리라는 그 정조가 지닌 한계를 왜 보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나를 불편하게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서구인의 배타적 관점, 자기애와 동일화의 관념을 독자들에게 무의식적으로 강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대중에게 널리 회자된 불세출의 소설인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또한 멜랑콜리에 짙게 물들어 있는 작품이다. 20세기 물질만능의 휘황찬란한 금빛 세계에 21세기 청춘들이 환호하고 있지만, 과연 보편적 정서, 인류가 지향해야 할 정신으로 납득할 수 있는가이다. 개츠비는 자신의 이름 제임스 개츠를 개명한 이름이다. 철학자 김동규도 지적하듯 개츠비는 개츠의 이상화된 자기형상화로 이미 자기도취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즉 나르시시즘이다. 자기의 이상적 이미지인 돈과 권력의 화신을 사랑하고 있음의 반증이다. 그래서 개츠비는 처절한 멜랑콜리의 길로 나설 수밖에 없는 인물이 된다.

 

이것은 소설의 서사적 논리 형식에서 연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 선택한 서양인의 오래된 정조의 발현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다. 뼛속까지 속물인 데이지라는 인물은 돈이라는 죽은 사물과 같다. 개츠비가 꿈꾸는 진솔한 사랑은 애초에 성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이다. 어쩌면 이같은 물신숭배는 서구인의 정조에 감염된 동양을 비롯한 세계 모든 지역에 확산된 기분 나쁜 정조에서 출현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 노벨문학상이라는 인류 세계에 지니는 권위와 영향력은 분명 무시할 수 없는 고귀한 가치가 있을 터이지만, 그렇다고 수상자의 작품들이 세계 모든 지역의 인간들에게 동일하고 보편적인 감응을 주는 것은 아닐 게다.

 

저항의 멜랑콜리의 인물들은 도처에 경계 지대를 지니고 있지만 서로의 접점이 없이 배격하고 분리되어 있다. 건강한 삶이란 헤아릴 수 없는 관계들 마디의 접경에서 일어난다, 타자성과의 만남에서 비로소 새로운 창조의 세계가 열릴 가능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생각이 소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너무도 미약하게 벌루시커와 에스테르의 일방적인 오해로 가득한 가느다란 접점이 있지만 그것마저도 타자에 의해 단절된다. 멜랑콜리는 자기상실을 참지 못하는 정조이다. 바로 거기에서 새로운 마디가 새롭게 맺어지는 것인데 말이다. 라슬로는 멜랑콜리의 정조를 소설의 주요 제재로 삼아 서사를 전개하지만 그것은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 형식적 구조, 커다란 틀, 세계의 폐쇄적 순환구조의 틀로만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멜랑콜리의 긍정적 특성인 저항의 실천, 열정적인 창조로서의 영감과 같은, 천재 시인 횔덜린의 예술적 광기와는 사뭇 거리가 멀어진다. 오직 질병적, 체념적, 분열적 우수만 넘실댄다.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욘 포세의 멜랑콜리아 , 미르체아 커르터레스쿠의 멜랑콜리아처럼 서구 문학인들의 정조는 어두운 우수의 정조를 강렬한 문학적 서사에 담아 생의 무한한 감각을 표현하고 있지만, 이들의 제목이 지닌 정조의 한계가 우리에게 무엇을 지향 또는 시사하고 있는지 조금은 냉철한 시선으로 보아야 할 것만 같다. 소설 읽기에 냉철함을 제안하는 것이 뒤틀린 이해라는 지적이 있겠지만, 그것이 자기 폐쇄적, 배타적 정신의 산물이 아닌지, 그 어떤 변화도 기대치 않는 순응이거나 체념의 서사는 아닌지, 그래서 우리네 삶의 그 어떤 긍정적 희망의 씨앗도 남겨주지 않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는 얘기이다. 물론 멜랑콜리라는 정조는 인간 보편의 경험인 탄생, 사랑, 죽음이라는 인생의 세 마디만큼 공유하는 보편적 정서에서 연원하는 그것들에 대한 시원적 슬픔과 우수의 감성이다. 이는 이성적 분류 체계나 논리적 접근으로 결코 잡히지 않지만 인간의 사회문화에 어떤 규정력을 발휘하는 감성으로서 현실 전복적이고 비판적 시선의 정조일 수 있다. 그래서 서양 문화의 정수인 예술이 멜랑콜리에 흠씬 젖어있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하지만 그 정조가 지닌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하지 않으려 함으로써 동일성을 반복하는 것은 배타성을, 즉 타자의 배제로 인한 창조의 불능, 정신적 불임의 사태로 여겨진다. 저항의 멜랑콜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다분히 은유로 기술된 시체(屍體)의 화학적 변화를 장황하게 기술한 페이지들은 제아무리 반동이 승리한듯해도 자연의 순리는 그에 저항하는 단계를 돌려 줄 것이라는 뻔한 순환구조의 답습에 다름 아니다. 소설의 문학적 맛을 극대화하는 기술(technic)로서 멜랑콜리가 사용된, 동어반복의 대표적 예로 여겨진다. 미학적 성취는 있었으나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인생은 백치가 지껄이는 이야기와 같다. 시끄럽고 정신없으나 아무 뜻도 없다.”를 다시금 반복하는 사태인 것만 같다. 내게 그렇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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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5-11-23 04: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작룸을 감상할 수 있었어 좋았습니다.

비의식 2025-11-23 08:0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호시우행님.
‘저항의 멜랑콜리‘는 ‘사탄탱고‘만큼 흥미롭지는 않지만, 한 세계의 몰락에 대한 전조로 그려지는 적대적 시선의 느낌, 사방에 넘쳐나는 쓰레기가 추위에 얼어붙은 전경, 고래 전시와 군중들의 기묘한 열정 등의 서사 진행이 독자를 사로잡습니다. 그리고 이에 반응하는 어처구니없는 인간들의 이합집산의 행동들, 권력의 이동이 더없이 천박하게 그려지고 있지요. 이야기 자체로는 분명 매혹적인 작품인데요, 제겐 계속 석연치않은 거부감이 그치질 않았습니다. 그에 이런 감상으로 이어졌네요. ^^

페넬로페 2025-11-23 09: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침 <당통의 죽음>을 읽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1월엔 <사탄탱고>를 읽을 예정이고요. <저항의 멜랑콜리>도 읽어봐야겠어요. 이 리뷰 도움 많이 되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비의식 2025-11-23 10:27   좋아요 1 | URL
오, 페넬로페님~ ‘사탄탱고‘는 제게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제법 지나면서 제 관점에도 변화가 생기면서 ‘저항의 멜랑콜리‘에 이르러 의심스러움이 생겼네요. 아무튼 우리들의 감성을 휘젓는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즐거운 독서가 되시기를요.

잉크냄새 2025-11-23 1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담입니다만 멜랑꼴리는 예전 처음 영어 단어를 외울 때 좀 있어 보이려 쓰던 기억이 나네요. ˝오늘 좀 멜랑꼴리해˝라고 말이죠. 깊은 의미도 잘 모르면서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코프를 들먹이던 시절처럼 말이죠. ㅎㅎ

비의식 2025-11-23 10:23   좋아요 0 | URL
서구 정신이 우리들에게 어느 새 깊게 잠식해 들어온 것이겠지요. 회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저 수용하기에는 무언가 꺼림칙한 요소들이 있어요. 김동규의 저술은 서양의 주변부에 있는 자로써 미래 철학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박동환, 김상봉 등이 있지요. 참고할만한 분들입니다. 고맙습니다, 잉크냄새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