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문학에서 본 우리들의 초상(肖像)
- 近作 다섯 편의 한국문학을 중심으로
작성: 필리아(비의식)
소설문학은 시대성을 외면할 수 없다. 그것을 쓴 작가를 에워싼 시대의 습관과 제도와 문화, 정치가 그들의 삶을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의 형태에 대한 사유가 기저에 흐르고,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자화상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보지 못하거나 망각하고 있는 것들이며, 또한 외면하고, 경계 밖으로 치워버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되어버린 것들에 대한 환기이다.
나는 작금의 우리 소설문학 작품들에서 이를 위한 치열한 노력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박완서, 황석영, 성석제로부터 김영하, 정한아에 이르기까지 이들 소설가의 작품이 주류적 삶이 배척하고 배제하고 외면하고 망각한 것들을 말하는 것에서 내 마음의 양식을 채우고, 세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 편협했던 인식과 사유의 범주를 확장시킨다.
- 『기나긴 하루』; 폭력을 삼킨 한국인의 아픔, 그리고‘같아지기’의 파국적 형상
故 박완서 작가의『기나긴 하루』는 한국인, 바로 시대를 이해하는 데 맞춤의 작품이라 할 것이다. 여기에 수록된 작품들은 소위 “걷잡을 수 없는 증언의 욕구”로 불리는 주류의 역사에서 말하지 않는 것들, 배제하거나 은폐된 것들의 드러냄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전쟁의 모순 뒤에 숨어있는 터무니없는 폭력이고 맹목적인 복수의 잔혹성을 반복하는 한국인들이며, 이 폭력을 삼키도록 강요된 민중들의 아픔의 연대이다. “이념 갈등이 동기간의 골육상쟁으로 치달은”, 발설 할 수 없는 고통의 기억을 말하지 않는 화자의 굳은 입을 떠올리게 하는「빨갱이 바이러스」라는 단편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이 땅, 그리고 우리들의 상흔인 것이다.
한편, 속물들, 위선, 정말 하찮은 인간들을 양산하는 오늘의 현실세계를 시어머니의 위장가난, 이혼한 아들내외의 그 버르장머리 없음의 편린들로 맛깔스럽게 지펴낸 「갱년기의 기나긴 하루」는 여인들의 내적 심리를 통해 이 사회가 안고 있는 세태, 즉 물질이 인간성을 압살하는 도시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표출하고 있으며, 단편「닮은 방들」에서는 물신주의의 또 하나의 속성인‘같아지기’라는 파국적 형상을 통해 마침내 그 극한인 간음(姦淫)의 자기 파괴로 명멸하는 절망적인 한국인의 초상을 진저리치게 묘사해내기도 한다. 결국 우리들의 자화상을 낯설게 보게 함으로써 가능의 외연을 확장시키고자 하는 작가의 애처로운 호소를 느끼게 된다.
-『낯익은 세상』; 절멸을 향해 달려가는 욕망과잉의 사회
그래서인지 이 같아지기의 물신주의 속성은 황석영 작가의 『낯익은 세상』에서 욕망의 과잉에 절제를 상실한 사람들의 모습으로 다시금 반복된다.
모든 것이 과잉이고 과도함이다. 그래서 거대한 소비는 또한 거대한 쓰레기 더미가 되어 산을 이룬다. 바로 소설의 배경은 역설적이게도‘꽃섬’이라 불리는 이 쓰레기 산이다. 자신들이 배출해 낸 욕망의 찌꺼기라는 오명을 두려워 한 인간들의 임기웅변이다. 그런데 바로 이 쓰레기더미를 생계의 터전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 도시의 영역에서 떠밀려 사람들의 시선에서 외면당한 곳에, 때문에 주류의 시선에서는 보이지 않는 장소로 말이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들의 더러움, 추악함, 두려움을 은폐하기 위해 너절한 수식을 하거나, 격리하고 외면해 버리며, 기억에서 지워버리려 한다. 여기에서 우린 욕망의 과잉과 소외의 깊은 연결성을 확인하게 된다. 소설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쓰레기장을 소독하기 위해 낮게 비행하며 무참히 살포하는 소독약이 그것이다. 쓰레기장의 더러움이 자신들이 사는 영역, 도시에 행여나 옮을까봐 두려워하는 의식이다. 게다가 그곳의 사람들, 영역에서 내쳐진 그들까지 소독해버리려는 듯 흥건히 그들의 속옷까지 적셔대는 과잉의 약물 말이다. 이 과잉의 소독약처럼 한국인들의 욕망은 온통 안전에 대한 두려움과 과잉의 탐욕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 지나침이 무엇을 해결하거나 궁극의 행복을 가져다주기는 하던가? 이렇듯 제동기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과잉 욕망과 분리주의적인 주류의 배타적 의식에 대한 새로운 보기를 촉구하는 것이다. 정작의 의미를 강탈당한 욕망과잉의 사회, 우리들의 일그러진 초상을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 『위풍당당』; 삽질 개발의 광기와 그 폭력성
이 과잉의 탐욕은 인간과 자연으로까지 거침없이 밀고 들어와 폭력의 광기를 뿜어댄다. 성석제는 『위풍당당』이란 반어적 뉘앙스 물씬한 소설에서 이를 마음껏 놀려대고 야유를 보낸다.
외진 산기슭 강마을에 버려진 드라마 세트장, 이 우스꽝스런 공간의 대비(對比)는 꼭 우리들의 모순된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한 미소를 짓게 한다. 문명의 장치들이 작동하지 않는 곳, 인간이 어떤 것으로 수식될 이유가 없는 곳, 그래서 과시와 허영과 기만이 부질없는 깡촌에 ‘아르마니 넥타이, 페라가모 구두, 베르사체 선글라스, 카르티에 시계’를 착용한 폭력배들이라는 소설의 구성은 더욱 희화적(戱畵的)이다.
문명과 자연의 싸움은 폭력조직과 촌동네 사람들의 전투란 소설적 사건이 되고 급기야 이 폭력성은 중장비와 덤프트럭 수백 대가 군대처럼 들어오는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4대강 개발이란 삽질정책으로 산하를 폐허화시킨 개발의 광기에 휩싸인 오만한 권력의 뻔뻔함이 겹쳐진다. “자연 잘못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자연이 가르쳐 준다”라고 외치는 자연 같아서 보이지 않는 사람, ‘여산’의 외침이 실낱같이 애처롭게 들리는 작품이다. 이 개발이란 미명하에 저질러지는 폭력에 의해 희생되는 우리들의 또 다른 몽매함의 경고일 것이다.
- 『너의 목소리가 들려』; 부인된 존재자들의 실재함에 대한 이야기
한편, 우리들의 이처럼 목불식정(目不識丁)같은 광기에 대해 약자와 소수자에게 가하는 보이지 않는 폭력성을 접하게 되는 것은 또 다른 낯섦일 것이다. 김영하의 『너의 목소리가 들려』가 바로 그것이다. 안 들리던 목소리를 비로소 들리게 하는 작업이다.
아마 근작 소설 중에서 가장 시인의 마음이 두드러진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보이지 않는 존재, 사회에서 그 존재자의 존재를 부인하고 무시했던 존재를 비로소 보이게 하고, 관심의 영역으로 인식하게 하려했다는 측면에서 말이다. 오토바이 폭주족 하면 대개의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그들에게 불온한 이미지를 바로 덧씌운다. 낯선 무엇인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할 때, 그 대상에 불편해하고, 불안한 감정을 갖는 것이다. 그리곤 곧이어 자신들의 영역에서 추방하기 위해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경찰력과 법이라는 잣대로 제단하고 배제시켜 버리는 것이다. 소설은 바로 이 불온한 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기위해 시도조차 하지 않는 우리들을 향해 있다. 우리들이 낙인을 찍어 경계 밖으로 밀어낸 존재들, 그들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린 타자에게 조차 우린 신세를 지고 있다고.
이들 소수자, 약자들에게 보내는 비하와 동정의 양가감정을 수반하는 우리들의 비틀린 시선, 사회 약자들의 자식일 뿐인 치킨 배달부와 자장면 배달부, 퀵 운송업체 직원인 그들에게 차별과 서열화된 시선을 보내는 우리들을 볼 때 이 낯설고 화끈거리는 감정이 소설의 의미가 될 것이다. 우리들, 주류사회가 부정해야 했던 불온한 것의 의미를 되새김질 하게 된다.
- 『리틀 시카고』; 연민인가? 관음증인가? 수치를 모르는 우리들
그러나 연민의 이면에 있는 양가적인 감정이 우리들의 진심을 조롱하기도 한다. 진정함이란 무엇인가? 정한아의 『리틀 시카고』는 경계 밖으로 몰아내고 잊었다가 슬그머니 사회적 죄책감과 수치심에 어설프게 그들을 관심의 영역으로 초대해 인심을 쓰는 그 허위의 실체를 쫓는다.
소설은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쇠락(衰落)하는 기지촌의 시퍼런 멍의 기록이다. 미군 기지의 이전(移轉)과 함께 세상의 시선은 비로소 골목을 찾아든다. 심심한 대중의 관음증을 채우기 위해 카메라 무리를 이룬 방송사 촬영팀이 들어와 화제를 만들고, 몰염치한 말들을 쏟아낸다. 그때 대중을 향해 이를 관통하는 강렬한 소녀의 항변이 있다. “우리 골목 때문에 숨도 못 쉬게 마음이 아픈가요?”
이 문장은“연민의 한계, 그리고 양심의 명령까지 훨씬 더 진실하게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는『타인의 고통』의 저자 ‘수전 손택’이 한국의 독자들에게 별도로 부탁했던 말에 가닿는다. 타인의 고통에 눈을 돌리는 것이라면 ‘우리’라는 말을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는 진정의 충고를.
이렇게 다섯의 소설은 실재하고 있으나‘있음’으로 인식하지 않으려는 어떤 고집스러움에 대한 비로소의 현시(顯示)인 것이다. 여기에 문학의 위상이 있는 것일 게다. “문학이 에피스테메(Episteme)들 사이의 간격을 채워준다”는 푸코(Michel Foucault)의 말이 바로 그것이다. 시대를 지배하는 인식의 기초들 사이에 벌어진 틈을 채우고 연결해주는 것 말이다. 이를 통해 문학은 세상의 외연을 넓혀 낯선 곳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경계의 저편에 혹은 기억의 심연에 밀어두었던 것을 꺼내 궁극의 진실을 드러나게 하여, 시선과 사유의 영역을 확장하게 해준다. 결국 이 광대해진 인식능력이 서로 다른 것들을 이해하고 화합하게 하며, 두려움을 떨치게 하고, 행복과 희망의 가능성을 꿈꾸게 하는 것일 게다. 소설을 읽는 것, 읽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연유에서이다.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