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 보이지 않는 세계의 그림책 b판고전 7
야콥 폰 윅스퀼 지음, 정지은 옮김 / 비(도서출판b)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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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지 않은, 어떤 낯선 사유를 접하게 될 때면, 그 사유의 기원이나 연관을 상상해보고, 찾아보는 여정에 나서게 된다. 들뢰즈와 과타리가 쓴 천개의 고원은 자연 전체의 정동(affect,情動)을 포괄하는 내재성의 평면을 그리고자 시도하는, ‘존재의 일의성을 말하는 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렇게 간략하게 압축된 문장으로 한 권의 책을 정의한다는 것이 말도 되지 않을뿐더러, 존재, 일의성, 내재성, 정동과 같은 개념어들은 철학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의미의 난관일 것이다. 천개의 고원은 동물행동학에 사유의 기원을 둔 새로운 윤리학이기도 하다.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라는 책의 감상이 아닌 들뢰즈의 책을 앞서 말하는 것은 이 책으로 이끈 계기가 곧 이 책에 대한 감응, 또는 정동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각 개체는 자신의 고유한 환경 세계 속에서 형성되는 정동(情動)의 목록을 소유한다또는 각 개체는 그 목록 자체이다.” - 들뢰즈, 과타리, 천개의 고원에서

 

윅스퀼(Jakob von Uexküll, 1864~1944)은 생태학적 생물학자로서 현대 생태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독일의 생태철학자라 하여도 될 인물이다. 들뢰즈는 윅스퀼을 가리켜 동물행동학의 대가로 평하며, 윅스퀼의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에서 말하는 환경 세계모든 개체의 신체는 개체의 고유한 환경세계 속 대상들의 의미의 담지자로서 관계 맺는정동과 같은 강렬한 영향에 토대를 둔 것임을 천개의 고원그 자체로 드러냈다. 사실 정동이라는 좀처럼 압축된 의미로 정리되지 않는 이 개념어도 윅스퀼의 이 저작을 읽으며, 각 개체가 의미의 담지자로서 수용하는 감관적 지각의 특징을 자신의 철학적 음색으로 변용한 말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윅스퀼의 이 책을 읽으면 들뢰즈 철학을 이루는 상당부분 낯선 개념들의 입구를 여는 엄청난 단서와 암시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이 감상글을 이어가기에 앞서 여기에서는 정동(情動)의 의미를 정동은 생성이다. 신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에 근거하여, 어떤 개체의 실재적인 변화, 생성을 일으키는 에너지 또는 생성 그 자체를 의미하는 개념으로 이해하기로 한다. 순서가 밀렸지만 이 책은 1934년과 1940년에 각각 발표된 동물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그리고 의미의 이론으로 구성된 현대 생태학의 문을 연 걸출한 두 논문의 합본이다. 전자(前者)는 모든 동물 개체 각각은 그가 지각하는 모든 것이 그의 지각 세계가 되고, 행하는 모든 것은 그의 행동세계가 되기에 행동의 세계와 지각의 세계는 함께 닫힌 총체성을, 즉 고유의 체험된 개체만의 환경세계를 형성함을 구체적 실험과 관찰의 사례들을 통해 인간이 고집하는 하나로 수렴되는 세계가 아닌 다양한 환경세계가 있음을 열어 보여준다.

 

그리고 후자는 전자의 이론적 접근으로서 생명활동의 기계론적 설명의 비판, 객관적으로 결정된 환경으로서의 숲은 존재하지 않는다.” 는 말처럼 인간중심의 목적론적 세계이해의 비판, 그리고 개체의 지각적 반응을 의미()’라는 급진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생태학적 접근의 논문이다. 들뢰즈가 윅스퀼의 개체와 세계 이해에 경탄했기 때문이 아니라, 책을 열면 마주하게 되는 진드기 삶의 묘사부터 앎의 전복성이 일어남으로써 그 신선한 사유의 시선에 매료된다. 전환적 시선을 요구함에도 거북하지 않은 친근함이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내 신체 고유의 리듬이, 묘사되는 모든 개체들의 정동과 다르지 않기 때문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앞서 인용한 천개의 고원을 대표하는 문장의 기원을 이 책에서 속속들이 발견하게 되고, 그 발견은 너무도 친숙한 어휘로 설명되고 있어, 마치 들뢰즈 사유의 구체적 증거들의 풀이를 접하고 있다고 여겨지기까지 한다. 그만큼 이 책이 들뢰즈의 철학적 사유 전환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 복잡하고 다층적 의미를 지닌 정동의 개념은 지렁이, 나방, 성게, 진드기, 갈가마귀 등등의 지각과 행동의 기능적 원환(圓環,고리)을 보면서 절로 체득되고, ‘존재의 일의성과 같은 추상적 어구의 의미가 무수히 다양한 신체가 단일한 구성임을 발견케 하는, 즉 각 개체의 환경세계들이 모두를 포함하는 하나의 장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사실의 인식에 휘감김으로써 구체화된 이미지로 체화된다. 특히 들뢰즈가 사용하는 환경세계는 윅스퀼의 어휘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음으로써 그 의미 전반이 책의 기조인 만큼 쉽사리 이해 가능한 언어로 와 닿는다. 나는 이 책을 들뢰즈 사유의 일정부분을 이해하는 원천적 사유로 읽었다.

 

이를테면 들뢰즈가 말하는 신체의 상형문자-되기’, 주체의 이집트학자-되기와 같은 ‘~되기의 생성 개념은 이 책의 두 번째 논문 의미의 이론, 특히 의미의 담지자들이라는 개체가 자신들 고유의 환경 세계 속에서 관계의 정동을 통해 제법 명쾌하게 수용되기도 한다. 들뢰즈의 이해라는 측면에서만 이 책이 의미를 지닌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의 세계에 대한 인식의 편협성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목적론적, 기계론적 이해에 기초한 인간중심 관점의 대변환을 느낄 수 있다.

 

진드기가 체험하는 일생의 시공간과 환경세계가 인간과 얼마나 다른 것임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들 인식속의 세계는 무한히 포용적인 세계로 확장되고, ‘라고 여기는 오만한 주체는 사라지게 된다. 윅스퀼이 서문에서 비판적으로 외치듯 이 책은 미지의 세계들로의 산책에 대한 묘사이고, 인간의 에고를 주장하는 주류 생리학에 대한 강력한 거부로서, 그네들이 부인하는 세계 존재에 관한 새로운 과학을 위한 안내서이기도 하다. 진드기는 포유동물인 인간과 함께 산다. 그렇다고 진드기의 세계가 인간의 세계와 같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모든 동물들은 각자 자신의 공간의 한계를 표시하는 원형집으로 둘러싸여 있다.

(...) 주체와 무관한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48

 

진드기는 단 세 가지의 지각신호를 받고 기능적 원환운동을 하는 개체다. 이 개체는 오직 포유동물의 피부에서 발하는 낙산에 대한 후각 지각에 의해 그 지각을 발산케 한 것으로 떨어진다. 그리곤 충돌과 함께 촉 지각이 따뜻한 피부로 이동케 하고, 열의 지각으로 침을 찔러 넣어 액()을 빨아먹고 산란한다. 진드기는 이 세 지각적 특징에 의해 아주 분명하고 강력하게 규정되어 행동한다. 그에게는 하늘도 대지도 물도 빛도 어둠도 없다. 또한 낙산이 그의 후각을 자극하는 시간이 18년이 결려도 견딜 수 있도록 형성되어 있다. 결국 진드기에겐 낙산신호가 새로운 활동을 불러일으킬 때 실질적 시간이 된다. 인간의 시간은 순간들의 연속으로 매우 짧은 시간 간격들로 구성되어 있다. 아마 인간에게 18년이라는 오로지 견뎌야하는 멈춘 시간이란 참을 수 없는 것일 게다. 진드기의 환경세계(Umwelt)란 이처럼 빈약하지만 이 빈약한 환경 세계가 그의 행동의 확실성의 조건이 된다. 환경의 풍부함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에게 확실성은 풍부함보다 압도적으로 중요한 요소이다.

 

여기서 우리는 진드기의 세 가지 지각활동이 행동 활동으로 이어지는 기능적 원환관계를 알게 되고, 세 가지 지각특징을 촉발하는 의미의 담지자로 구성되는 세계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18년 동안이나 변하지 않는 환경세계를 견딜 수 있는 진드기의 능력이 가능성의 영역 너머에 있음을 발견하게도 한다. 그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과 다르며, 세계 공간의 영역도 다르다. 이제 이것으로부터 동물들 모두에게 타당한 환경세계들의 구조의 근본적 특징들을 우리는 그려볼 수 있게 된다.

 

지각적 시간을 생각해보자. 독일의 발생학자 카를 에른스트 폰 베어(Karl Ernst von Baer,1792~1876)시간은 주체의 생산물이다.” 라고 말했다. 인간에게 순간의 지속은 1/18초다. 따라서 18번의 진동은 그것들 개별로 식별되지 않지만 하나의 음처럼 지각된다. 초당 18번의 피부의 타격도 하나의 균등한 압력으로 지각한다. 그런데 물고기는 초당 18회만으로는 이미지를 인지하지 못한다. 초당 30회 이상이 되어야만 인지한다. 인간의 리듬으로 지나치게 빠른 곤충이나 새의 날개짓을 우리는 구분하지 못한다. 슬로우비디오로 긴 시간 간격으로 전개시켜야만 식별할 수 있다. 달팽이의 환경에서 초당 4회로 막대기로 두들기면 그는 막대기가 움직이지 않았다고 지각한다. 결국 우리의 환경세계에서보다 달팽이의 환경세계 속에서 시간은 더 빠르게 흘러가고, 물고기의 세계 속에서는 더 느리게 흘러간다. 모든 개체들 각각의 세계는 이처럼 시간도, 공간도, 의미의 담지자로서 맺는 관계 대상의 양도 다르다. 그렇게 다른 개체들만의 세계를 환경세계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목적성에 기반한 모든 잘못된 생각들로부터

환경세계들에 대한 검토를 구제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69

 

우리는 성게가 움직일 때 성게라는 동물개체가 움직인다고 말하는 데 익숙하다. 개가 달릴 때 다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 개라는 동물이라고 인식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성게의 다리들은 각각의 기관인 다리가 오직 각각의 다리 자신을 위한 개별반사를 소유한다. 따라서 성게는 개가 걷는다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없다. ‘성게의 다리들 각자가 걷는다.’가 진실한 표현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모든 개별 반사라는 완전한 독립성에도 불구하고 마치 시민적 평화가 지배하는 공화국적 반사 행동을 할까. 성게에게는 인간처럼 상위의 중추기관이란 것이 없어 그 어떤 지휘도 받지 않는다. 그럼에도 어떻게 조화로운 일체된 행동이 발현되는 것일까? 인간적 관점이란 이렇게 자신의 이해에서 풀려나기를 거부한다.


그것은 의외의 단순성에 있다. 어둠에 반응하는 표피의 광감각적 지각의 행동만이 있을 뿐이다. 더 자세한 상술은 피하겠다. 인간적 실존의 일상적 염려들을 자연의 개체들에게 투자하는 이런 오류의 예는 차고 넘친다. 우리는 진드기가 먹잇감을 노린다.’고 표현한다. 다분히 목적성을 기반으로 한 말이다. 그러나 모든 동물들의 행동들은 목적론적이지 않다. 진드기 단지 낙산에 반응한 것이고, 그것은 그의 정동의 발현이다. 낙산 반응이라는 후각적 지각의 특징은 포유동물의 피부에 떨어짐으로써 촉지각적 지각으로 바뀌고 후각지각은 사라진다. 진드기의 행동은 낙산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일련의 지각적 기능 원환의 전개는 다음 단계의 행동을 사전에 계획해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기능적 원환운동은 어떤 지각적 특징에 의해 활성화될 뿐인 것이다. 들뢰즈의 욕망하는 기관(부분신체)’의 단서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우리 인간은 어떤 목표에서 다른 목표로 삶을 힘겹게 끌고 가는데 익숙하다. 때문에 동물들도 동일한 방식으로 살고 있다고 확신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 외의 자연에 대한 근본적 오류다. 하나의 예만 소개한다면 어미 닭의 행동에 관한 관찰이다. 줄에 묶여 병아리가 삐약 대면 어미 닭은 달려와 가상의 적을 향해 부리를 쪼아댄다. 그런데 유리컵 속 다리 묶인 병아리를 어미 닭이 보았을 때, 어미닭은 아무런 동요도 행동도 하지 않는다. 어미 닭에게는 삐약 소리라는 지각적 특징이 부리로 쪼아대기라는 작동적 특징을 발현할 뿐이다. 병아리가 아무리 발버둥 처도 삐약 소리가 나지 않으면 어미닭에게는 아무런 작동적 행동이 발현되지 않는 것이다. 즉 기능적 원환운동을 촉발하는 지각적 특징이 없다면 아무런 행동도 활성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미 닭에게는 목적론적 지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의미의 이야기로 옮겨가보자. 다시 진드기를 떠올려보면 그에게는 세 가지 자극물에 따른 작동적 행동인 떨어지다’, ‘탐사하다’, ‘찌르다라는 각 지각에 대응하는 활동이 있으며, 그것을 우리들은 활동의 내포적 의미라고 지칭할 수 있다. 나뭇가지를 향해 날아가는 잠자리는 그의 환경세계 속에 나뭇가지는 앉다라는 내포적 의미에 의해 특징 지워지는 지각적 특성이 일으킨 작동적 행동일 것이다. 바로 이 내포적 의미가 나뭇가지를 구별짓고 다른 모든 것들 가운데 그것을 선택하게 만든다.

 

인간의 환경세계 속에서 대상들의 활동적 내포 의미는 의자는 앉기, 탁자는 식사하기, 잔과 접시들은 마시기와 먹기, 마루판은 걷기, 책장은 독서와 같이 열거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달리 동일 대상에 대해 개의 환경세계 속에서는 앉기, 식사하기, 걷기에 한정된다. 따라서 탁자, 책장 등은 그에게 장애물의 내포적 의미에 불과할 것이다. 파리의 환경세계 속에서는 자극물이 되는 열기 말고는 모든 대상물이 그저 도정(道程)의 내포적 의미만을 소유한다. 환경세계는 외부 자극물이 촉발한 지각신호들의 산물이다. 모든 개체들은 그들만의 자극이 다르게 존재할 수밖에 없다. 저마다의 강력한 효력이 드러나는 환경세계, 개체 자신만이 유일하게 지각할 수 있는 환경세계들을 우리는 관찰하고 통찰 할 수 있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동일 주체는 그 자신이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여러 다양한 환경세계들 속에서, 대상으로서의 자신을 어떻게 현시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가질 때, 우리들은 전체의 시각에 이를 수 있음을 알게 된다고 말이다. 떡갈나무는 노력한 벌목꾼에게는 일정량의 목재로서 나무둥치들의 크기로 선별되는 것일 게다. 여우에게는 나무와 뿌리사이에 자신의 소굴을 만들어 가족을 보호하는 거주지로, 다람쥐에겐 기어오르다 라는 내포적 의미일 것이고, 어린 아이에게는 나무껍질의 주름이 만들어내는 마녀의 얼굴이 주는 공포심이 내포적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이렇게 떡갈나무의 세계에 있는 거주자들의 지각 이미지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구조화되고 그들 활동의 다양한 내포적 의미들과 일치할 것이다. 중립적 대상으로서의 떡갈나무는 주체와 관계하자마자 의미의 담지자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대상이 주체에 의해 부여된 담지자로 변하는 것은 오로기 관계를 통과하면서 발생하는 사건임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동일한 꽃의 줄기도 환경세계에 따라 장식적 역할(인간), 도로의 역할(개미), 펌프의 역할(매미 애벌레), 영양물의 역할(암소)을 한다. 꽃의 줄기가 이처럼 의미의 담지자 역할을 수행하는 순간 주체의 신체 안에서도 의미의 이용자와 관련한 무엇인가와 연결된다. 개체의 각 행동은 그 지각적 구성성분과 작동적 구성성분을 가지고 대상에 대해 의미를 각인하고, 각각의 환경세계에서 그 대상을 주체와 밀착된 의미의 담지자로 만든다. 각각의 의미담지자는 자신의 기능적 원환에 자리 잡으면서 다른 개체의 보체(補體, complement)가 된다.

 

모든 개체의 기관들은 모두 외부에서 오는 의미의 요소들의 이용자들인 한에서 어떤 권위를 입게 되고, 이 권위에 따라 기관들의 형태나 물질의 분배가 일어난다. 따라서 모든 생명체에게서 의미에 관한 물음은 최초의 중요성을 묻는 것과 같은 것이다.

 

개별 세포들의 운명은 오로지 그 세포들이 구성하는 중인 형태 안에서

각 세포가 차지하는 자리에 달려있다.” -160

 

동식물의 생식세포는 산딸기 형태에서 극점이 오목하게 함입된 구체로 변화하고, 이 구체는 단번에 세 개의 배엽으로 나누어진다. 이렇게 낭배(囊胚,gastrula)를 형성하며, 이것은 대부분의 동물들의 시원적 형태, 즉 모든 고동동물에 이르기까지 생명을 개시하는 것은 이러한 단선적 멜로디다. 인간이라고 뭐 그렇게 대단하거나 다른 발생학적 기원을 갖는 위계질서의 상위를 차지할 그 무엇도 아니다. 이렇게 낭배, 낭포라는 기본적 초기 형태로 완성된 생애를 가지는 동물들도 아주 많다. 해파리, 말미잘, 변형균류 등등은 그것들 나름의 의미관계를 구성하기 위한 형태잡기로 충분하다는 인상을 준다. 독일의 배아생물학자 스페만(hans Spemann, 1894~1941)의 배아조직 이식의 사례를 거론할 것도 없이 이식 세포가 다른 의미의 질서를 수용하게 될 장소에 놓이게 될 때, 숙주의 의미의 질서에 따른다. 그런 다음 이식된 세포는 자신의 고유한 형태화의 멜로디에 복종한다. 이 실험에서 의미를 획득하는 질서는 언제나 동일하다. 그러나 형태를 획득하는 질서는 전적으로 다양하다.”는 사실만을 확인하도록 하자.

 

스페만의 실험은 생명체의 기관들이 기계의 부분들과는 정반대로 본래적인 의미의 음색을 소유하고 있으며, 따라서 원심적 방식이 아닌 다른 식으로는 그 형태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의미의 개념에 입각해서 세워진 자연에 대한 포괄적 개념화를 이룬 놀라운 업적임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중요한 인식의 전환이 될 것이다. 거미는 실제의 파리를 만나기도 전에 거미줄을 짠다, 그 결과 거미줄이 물리적인 파리의 복제물일 수는 없지만 물리적으로 주어지지 않은 파리의 원형을 재현한다. 생물학적 통찰이 갑자기 형이상학으로 이전된 된 듯한 곤혹감이 들기도 하지만, 모든 동물 개체에서 지각적 특징으로 이루어진 환경세계를 인식한 사람에겐 오로지 대상들의 상호관계, 즉 자연의 사건에 대한 주체의 영향력을 알지 못하는 기계론적 유물론자들의 물질적 실체에 대한 다분히 상상적인 형이상학에 비하면 윅스퀼의 주장은 오히려 더욱 과학적이다. 책의 설명으로 흘러가다보니 너무도 장황한 글이 되어버렸다.

 

아마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 주장으로 읽혔을 법한데, ‘발달과 형태발생의 모티프에 이르면 의미의 담지자와 대위점이라는 두 개념에 의해 대위법의 점은 언제나 대상의 실존을 결정하는 모티프라고 주장하는 데서 정점에 이른다. 그것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꽃이 꿀벌에 대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그리고 꿀벌이 꽃에 대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결코 저들은 화합하지 못할 것이다.“ -219

 

이를 다른 말로 해석하면 이렇게 옮길 수 있겠다. 손잡이가 달린 거피잔은 인간의 손과 갖는 대위법적 관계다. 커피잔을 제작할 때 작용하는 모티프들에 강한 영향을 미친다. 결국 이 말은 일상적 대상의 의미는 그 대상이 완수하는 기능에 놓여있으며 그러한 기능은 언제나 대상과 환경세계 사이에 놓인 어떤 대위법의 점으로 보내져 실존을 결정하는 모티프를 구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윅스퀼은 결론에 이르러 각 개체의 신체는 의미의 담지자의 발달 멜로디를 자신의 고유한 구조 속의 모티프처럼 사용한다는 주장에 이르고, 위대한 문장을 남긴다.

 

나는 자연 전체가 나의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인격 형성에 모티프로서

참여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자연을 인식하기 위한

기관들을 갖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233

 

결국 모든 개체가 지니는 지각적 특징, 들뢰즈의 용어로 정동은 존재 개체를 형성하며 존재는 정동 그 자체다. 라는 말로 이해해도 될 듯하다. 우리들을 포함한 자연의 모든 개체들은 자연이 자신의 구성들 가운데 하나로서 우리를 들어오게 했던 한에서만 우리들은 자연에 참여한다고 말 할 수 있게 된다. 모든 환경세계가 오로지 이러한 의미의 상징들만을 포함한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의미의 상징이 개체의 형태 발생과 발달에서의 의미의 모티프임을 직시하게 되면, 이 모두를 포함하는 하나의 장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우리는 인식할 수 있다. 구성의 단일성을 주창하는 이 외침은 들뢰즈의 존재의 일의성이 되어, “정동은 생성이다, 신체가 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놀라운 테제가 의미하는 것, 다시 말해 개체 각자에 주어지는 미지의 자연에 대한 믿을 수 없는 느낌, 정동으로서 고무되고 동요되어 개체의 역량이 실현되는 환경세계에 대한 이해를 갖출 수 있게 된다. 생성은 결코 단독적으로 일어나지 않으며, 언제나 환경세계 속에서, 사이에서 일어난다.

 

생성(~되기)은 자신의 고유성을 상실하는 대가를 치르면서 새로운 정동을 획득하는 것이다. 자연이 정동으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개체들이 생성과 의미의 존재임을 깨우치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사유의 전환을 설득해낸다. ~되기란 정말 힘겨운 일이다. 말이 쉽지 자기 고유의 지각적 특징을 변환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새로운 인식에 마음을 열고 감응을 위한 노력을 한다면 어쩌면 우리의 신체에 새로운 정동이 내려앉아 어떤 창발적 행동을 낳을지 그 누가 알겠는가. 이 반()목론적, ()유물론적 생물학 저작은 아마도 다채로운 영감을 독자들에게 선사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더구나 들뢰즈에 호감과 그 지향하는 사유에 공감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없는 원천적 지식의 선물이 되어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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