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과 분노
로런 그로프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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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의 문제. 태양의 위치에서 보면 결국 인류란 추상에 지나지 않는다....

(中略)... 구체적인 것은 한곳에 초점을 맞출 때에야 보인다." - P 69 에서

 

 

소설은 로토와 마틸드, 남편과 아내라는 두 사람의 주된 서술 관점에 의해 '운명''분노',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서술되고 있다. 그리곤 각 부분은 다시금 반목하는 사건과 의식의 흐름들을 통한 시간의 분열된 서술 구성으로 정말 강렬한 매력을 발산한다. 비교적 단순한 퍼즐이지만 이 맞추기의 과정에서 조금씩 선명해지는 두 사람의 내면적 진실에 이르게 될 때 감당하게 되는 관계라는 것, 나아가 삶이라는 것 전반에 대한 곤혹한 동요를 맞보게 된다. 이를테면 로토의 관점에서 "그녀의 리듬은 그의 뼈에 새겨져 있었다." 이지만, 마틸드는 "자신의 머리를 그의 무릎에 뉘였고, 어린 로토를 밖으로 끄집어내어 어른 로토가 울음을 멈추게 한 것이다."와 같이 남편의 믿음과 아내의 의도된 행위를 짜 맞춤으로써 완성된다. 이 소설의 맛은 바로 이것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로토와 운명

 

태어난 순간부터 하고 싶은 걸 하면 된다는 말을 듣고 자란 사람. 그저 시도만 하면 되는 사람. 시쳇말로 금수저가 로토의 태생이다. 세상은 그리 어둡지 않은 곳, 타자에 대한 분노가 필요 없는 삶. 그래서 그를 바라보는 타자들은 그에게 우호적이며, 매료되고, 그의 주변에 몰려든다. 빛을 발하는 사람. 무수한 여자들이 그의 살갗을 스쳐간다. 하지만 내 육체가 알아보는, 먼저 반응하는 그 아찔한 전율을 동반하는 이성이란 것이 있다. 바로 내 반쪽이라는, '조르주 바타유'의 말로하자면 내 불연속성의 고뇌를 멈추게 해주는 연속성의 대상인 개체, 바로 그이자 그녀라는 확신 말이다. 남자는 그녀를 알아본다. 백금발의 우아한 여자, '마틸드'. 스물 두 살의 나이에 남자는 여자와 결혼한다. 남자는 세상을 얻은 것과 같은 행복과 사랑에 취하지만, 남자의 엄마, 남편의 거대한 생수회사를 상속받은 여자는 아들의 결혼에 냉담하고, 이들의 관계가 지속되는 한 어떠한 재화도 제공되지 않는다. 셰익스피어의 햄릿 배역을 시작으로 연극배우로 성공하기를 기대하지만 그의 기대와 대중의 기대는 사뭇 다르다. 삶은 곤궁하고 아내의 벌이에 의지해 소박한 일상을 지속하지만, 좌절의 심연은 깊어만 진다. 실의 속에서 끄적인 그의 희곡을 읽어 본 아내의 격려는 그를 극작가로서의 삶으로 우뚝 서게 한다. 유명한 극작가로서의 삶은 그에게 삶의 의욕, 사랑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이야기로서의 '운명'은 한 남자의 역사를 이렇게 서술하지만, 소설의 내적 구성은 자못 다채롭다. 로토가 집필한 희곡들이 부분적으로 기술되고 있는데, 이것이 다름 아닌 소설적 암시이며, 진실의 틈을 메워주고 있다는 점이다. 일례로, <디 안티고나드>라는 로토의 희곡 속에 등장하는 '로스' ''의 사랑과 죽음의 이야기는 마치 로토가 마틸드에게 들려주고픈 이야기로 보이고, 로스가 죽어가면서 고에게 남기는 마지막 문장인 "세상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곳이...."라는 구절은 아내 마틸드의 내면적 진실을 꿰뚫어보는 듯한 로토의 시선을 느끼게 해주기도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하게 되면 로토가 아내 마틸드의 내면적 고통을 모르지 않았으리라는 것과 그 고통까지 자기 것으로 하려는 로토의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아내는 그에게 "뭔가 금지된 것의 짜릿한 느낌"이기도 하며, 매일 새벽이 오기 전 "두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부옇고 어둑한 세계. 그 단어가 뭐였더라? 소슬"한 푸른색 추상화이기도 하고, 자기 어머니에 대한 분노로 "그녀의 손이 떨리는" 은둔해 있는 그 미세한 감정을 예민하게 포착하기도 한다. 명료하게 그 정체를 알지는 못하지만 아내의 고독, 고통, 분노를 충분히 감지하고 있으며, 다만 사랑하는 이를 위해 이러한 자신의 감정을 이해의 차원에서 간직하고 있는 남자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그 자신을 구성했던 모든 것이 전복된 차원, 예측 가능한 것이 폭발해버린 차원"에 봉착하게 된다. 너무도 완벽하게 그의 생활을 지배했던 그녀, 완전한 하나, 그리고 눈처럼 순수한 여자, 슬프고 외로운 여자를 만났다는 그의 앎, 그가 아는 세계의 이야기가 완전히 뒤집혀버린다. 소설은 이 이야기의 다른 관점이자 완성된 퍼즐의 짝인 '분노' 속으로 시선을 다급하게 몰아댄다.

 

 

마틸드와 분노

 

당혹스러울 정도의 반전이라고 해야 하나? '오렐리', 왠 프랑스 소녀? 혹독함, 냉담함, 잔인함과 같은 어휘들만 어울리는 어린 소녀 오렐리의 성장기를 쫓는 내내 그녀를 구성하게 될 내면의 성분들을 알게 된다. 네 살의 여자아이에게 씌워진 냉혹한 시선들, 버려진 아이, 음침함과 추함의 세계, 무관심과 고립의 세계, 철저하게 타자로부터 소외된 아이의 저 침잠한 심연이 끝없이 차오르고 올라 거대한 분노로 터져 오르는 것이 보인다. 오렐리의 마틸드로의 변신, "에너지로서의 고통, 갑작스런 분출"이라 외치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코리올레이너스>'볼룸니아'아의 분노, 그것. 이 에너지가 그녀를 명문대학 바사(Vassar)의 입학으로 이끌고, 마틸드는 학비를 위해 '불가능'의 세계, 음울한 음란의 노예를 계약한다. 대학 4년이 종료되는 시점, 그 불가능의 세계에 대한 계약이 끝나는 시간, 속박되고 소외되었던 세계의 껍질을 벗어나 자유와 풍성한 관계가 시작되는 미래, "여자는 자신의 회로를 완성하기 위해, 자신의 스위치를 최대한의 빛을 밝히기 위해 다른 존재를 필요로 한다고" 선언한다.

 

막대한 부의 상속자, 대학 내 모든 여성들의 우상, 연극배우 햄릿의 주인공, 그가 바로 다른 존재이다. 그에게 접근하는 치밀한 계획, 파티석상 저 위의 난간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환한 웃음을 짓는 남자, 그 남자의 시선이 마침내 그녀에게 이르는 순간, 그는 뛰어내려 사람들을 헤치고 그녀의 앞에 우뚝 선다. 이제 두 사람은 결혼한다. 그러나 '운명'의 로토가 말하던 상황이 아니다. 우연으로 가장된 필연, 여자의 계획된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 결합이다. 여기서부터 관점은 수없이 교차한다. 로토는 이를 "첫 눈에 반한 사건"이라 부르지만, 마틸드에게 이것은 "섹스 사건"이며, 두 사람 최초의 육체적 관계가 그녀에게는 "아기 사슴을 삼키는 보아뱀"이다. 그러나 여자는 말한다. "부부가 되어 치른 그들의 첫 관계는 너무 빨리 끝났다....(中略)....상관없었다. 분리된 자아들의 경계가 제거되었다." 그래, 그녀는 연속성을 확보했다. 그녀는 더 이상 혼자 아니게 되었다. 아마 이것으로 마틸드는 충분히 삶의 의미를 회복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문장이 막아선다. "그녀는 얼굴을 닦고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빗은 뒤 독한 표정이 사라질 때까지 미소 짓는 연습을 했다....(中略)...." 남자가 말한다. '내 골수까지 사무치도록 당신을 사랑해.' 그러나 여자는 등을 돌린 채 말한다. '나도.' " 남자는 등 돌린 여자를 보지 못한다. 등 돌린 여자의 무심한 사랑의 동의.

 

여자는 남자의 실재와 환상의 간극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또 말한다. "단 한 번도 그의 말을 바로잡아 주지 않았다. 그가 그런 환상을 간직하며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이유가 뭔가? 그것이 그를 행복하게 하는데. 그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면 그녀는 그것으로 좋았다. 기꺼이!" 다시 퍼즐을 맞추자. '운명'에서 남자는 말한다. "그녀의 중심에 자리한 어두운 채찍. 그녀는 어떻게 그 채찍을 그토록 부드럽게 휘둘러 그를 계속 움직이게 할 수 있었을까." 이 완성된 형태는 그녀가 자신에게 다짐하는 맹세에 있다. "자기 안의 어두운 공간을 그에게 절대 들키지 않겠다고 혼자 맹세했다....(中略)...오로지 그녀의 큰 사랑과 빛만 알게 하겠다고."

 

그런데 그가 먼저 떠나버렸다. 들키지 않으려했던 '그녀의 어두운 공간'이 로토의 삶을 끝내버렸다. 그녀가 결코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던 그것. 말하지 않은 거짓말. 남편이 자신이 선택한 길을 더 잘 걸어가기를 그녀가 바랐다는 사실. 모두에 인용한 소설의 문장처럼 진실은 과연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의 문제'이며, '한 곳에 초점을 맞출 때에만 보이는"것일까? 라는 의문이 고개를 쳐든다.

 

작품에는 이와 유사한 물음이 있다. "로토가 그 공포에 귀를 기울였다면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명성도 얻지 못하고 희곡도 쓰지 못했겠지만, 평화, 편안함, 돈은 누렸을 것이다. 화려함은 없었겠지만 자식은 있었을 것이다. 어느 삶이 더 나은가?" 그리곤 "우리가 말할 수는 없다."고 맺는다. 정말 말 할 수 없는 것인가? 나는 이것이 잘못된 질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명성과 부의 편안함의 대비로 한 사람의 삶의 의미를 대체하는 이런 경박한 질문 말이다. 결혼생활이란 이런 것이 아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란 이러한 관점의 대상이 아니라 신뢰와 진실의 대상이 아닐까? 이런 구절도 있다.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다정함, 말 없는 친밀함," 이러한 것들이 "그들의 결혼 생활을 이루었다.". 여기에는 무엇이 도도히 흐르고 있는가? 신뢰 아닌가? 그 신뢰의 기반이 무너질 때, 우리도 같이 무너져 내리지 않겠는가? 실제 마틸드와 그가 그녀라고 믿었던 마틸드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간극. 그녀는 볼룸니아처럼 "분노는 제 자양분, 제 저녁 식사입니다. 그걸로 배를 채우다 결국 죽음을 맞겠지요."라고 외치지만, 로토의 자양분, 저녁식사는? 로토는 그녀의 부드러운 채찍과 환상으로 배를 채우라는 것인가? 과연 결국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이기만 한 것일까? 그리고 "결혼이란 거짓말투성이야. 대체로는 친절한 거짓말이지만, 말하지 않는 거짓말이지."라는 말이 진실이 될 수 있을까?

 

소설 속 두 사람의 서술들은 많은 관점의 이야기들로 논쟁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은 관점, 결혼의 정의부터, 그리고 '거투르드 스타인'이 자기 반려자를 회고하며 "그녀에 대한 기억을 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발언처럼 마틸드가 살아낸 오직 남편의 행복을 위한 삶의 의미에 대해서, 아내의 말하지 않은 거짓에 대한 로토의 고뇌에 대해서, 로토가 쓰고 마틸드가 가필한 많은 소설 속 희곡들의 해석에 대해서, 그리고 사랑과 연속성에 대해서. 그네들 거실의 석상 뒤에 걸린 푸른색 추상화의 그 소슬한 느낌에 푹 빠져있던 느낌, 여운이 꽤나 오래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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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본원적 욕망으로서의 비생산적 소비, 에로티즘과 죽음에 대해서

 


 

오늘의 소비중심주의 문화현상을 일찌감치 ‘에로티즘’과  ‘죽음’이라는 인간 생명체의 근본적 본질의 탐구를 통해 이를 인류의 본원적 가치라고 말하는 전복적 사유로 현대사상의 거대한 뿌리를 제공한 ‘조르쥬 바타이유’는 내 인생관을 그의 위대한 저술 『에로티즘』 전후로 분리하게 했을 만큼 엄청난 영향을 준 사상가라 할 수 있다. 이 한편의 저술을 접함으로써 인간 욕망의 뿌리, 그 과잉의 탐구, 소비의 사회학이라 할 수 있는 『저주의 몫』은 물론, 『에로티즘의 역사』에 이르는 우리 인간과 사회제도를 해석하는 일반경제학과 전형적인 비생산적 소비인 성(性)과 성담론의 행보를 따라가게 되었다고 감히 말 할 수 있다.

 

특히 그의 소비경제학은 현대사회의 비판적 담론가들의 대표자라 할 수 있는 데리다, 푸코, 부르디외, 보드리야르 등에 과시적 소비사회에 대한 탁월한 이론들을 낳게 하는 근간이 되었으며, 오늘의 인간과 세계의 존재조건들을 이해케 하는데 귀중한 인식론적 준거를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낭비, 소모라는 본원적 가치로서의 에로티즘에 이르게 한 사상적 기점이자 근원적 사유를 담고있는 『저주의 몫』은 이후 그의 소설작품이나 예술관, 사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필수적 저술이다. 바타이유의 모든 사유를 지배하는 관념으로서‘비생산적 소비’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는 절대적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모든 유기체는 에너지(富)의 원천과 본질을 아무 대가없이 베푸는 태양 광선에서 얻으 

며, 이 대가없는 베풂 때문에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받아들이고, 초과분은 체계의 성장에 사용토록 한다. 그런데 만약 이 체계가 어느 순간 그 에너지를 활용하여 성장하는 것이 한계에 이르러 그 초과에너지가 성장에 흡수될 수 없게 되면, 남아도는 에너지는 폭발할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어떠한 방식으로든 대가없이 소모되어야만 안정과 균형을 이룰 수 있다. 는 것이라 하겠다.

 

즉 대가없이 소모하는 것, 바로  '비생산적 소비’라는 것으로써, 이는 인류평화, 생존과 유지를 위한 최고의 진리라는 것이다. 물질의 풍부한 생산이 미덕이 아니라 생산에는 전혀 관여치 않는 사치와 소모가 미덕이라는 말이 언뜻 낯선 이야기로 인식되지만 고대사회의 증여에 의한 교환시스템이나 희생제의와 같은 종교적 축제를 비롯해서 군사기획사회로서의 이슬람의 소모적 전쟁이나, 티베트의 승려사회라는 비생산적 집단, 서구 중세 종교기획사회의 모습을 통해 잉여의 해소가 인간과 지구, 나아가 우주 질서의 본성임을 다채로운 사례들을 통해 납득케 하고 있다.

 

이처럼 ‘에너지 과잉’을 안정화시키기 위한 행위로서 비생산적 소비는 “사치, 종교예식, 기념물 건조, 전쟁, 축제, 스포츠, 장례, 예술, 도박, 섹스”와 같은 “소비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소비”이다. 여기서 섹스는 과잉 에너지를 해소하는 아주 본원적이며 유용한 수단이라는 것이 도출된다. 예로서 북미 인디언의  ‘포틀래치’와 같은 독특한 증여메커니즘이나,  값비싼 장신구, 넘치는 음식물, 피의 희생과 같은 엄청난 부의 소비를 요구했던 고대 아즈텍인들의 ‘희생제의(犧牲祭儀)’는 신성한 소비, 비생산적 소비, 과잉에너지의 효율적 소비라고 해석되듯이, 섹스로서의 에로티즘은 인류의 죽음에 대한 깨달음, 다시 말해서 소멸에 대한 가치, 비생산적 소비의 본원적 중대성의 이해로부터 시작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의 에로티즘에 대한 위대한 해석,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숭고하다고 할 만한 업적이 탄생한다. 고대 동굴벽화의 죽음에 대한 공포와 경외감, 그리고 죽음에 대한 관능의 모습, 공포라는 죽음의 외연이 만들어낸 종교적 감수성에 대한 인류의 섹스에 대한 목적의식의 발견은 에로티즘의 역사에 대한 성찰을 낳는다.  죽음의 인식으로부터 살해의 금지와 같은 금기를 낳고 궁극에는 금기위반을 둘러싼 욕망의 메커니즘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두 개체의 하나로의 결합, 이는 새로운 불연속적 존재를 탄생시키고 둘은 소멸한다. 곧 성행위는 죽음의 다른 이면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알몸과 알몸이 결합하는 한 순간 자아의 경계가 사라지며, 이순간이 바로 존재의 연속성이 구현되는 순간, 즉 신성성에 이르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곧 생명의 절정인 에로티즘을 통해 인간은 역설적이게도 죽음의 심연을 맛보는 것의 다름 아니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며, 결국 에로티즘은 신성성의 현현이며, 비생산적소비의 전형이라는 것이다. 바타이유를 이해하게 될수록 인간이란 근원적으로 생산의 이성보다 소비의 욕망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임을 이해하게 되는 정말 엄청난 사유의 대 전복을 경험케 되는 것이다. 대체 욕망이 선악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로부터 시작되는 금기(禁忌)의 장치들에 대한 현대의 담론적 장치들의 세계로 사상적 지평이 활짝 열리게 된다.

 

소설 얘기를 빼 놓을 수는 없겠다. 그의 사상적 기반에 어떠한 형식으로든 영향을 끼친 출생과 불우한 성장의 환경에서부터, 니체로부터의 영감이나 투우장 죽음의 목격이 반영된 지극히 개인적 체험이 반영 된 것들이기에 인간의 내면에 잠재워진 뿌리 깊은 강박, 그 요소들인 에로티즘과 죽음의 비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눈의 이야기>는 이러한 그의 심리적 세계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화자와 마르셸, 시몬을 통해 드러내는 그로테스크한 괘락, 수용하기에 버거운 불결함과 외설스러움의 갈망들은 불쾌한 공포의 전율만 느껴지기도 한다. 나아가 그의 저술 『에로티즘의 역사』속 화보를 방불케 하는 소설 <하늘의 푸른 빛>은 관습, 금기의 질서에 도전한다. 절판 또는 미출간이었던 이들 소설이 '비채'에 의해 다시금 국내에 소개되는 기회가 된 것은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많은 독자들이 그의 세계로 접근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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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5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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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짝달싹 하지 못할만큼 사방이 꽉 막혀 있는 현실에 놓여있을때, 대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수없이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달리 사는 방법은 없을까? 이 벽을 넘어설 방안이란 없는 것인가? 벽 너머 어딘가에 지금 여기보다 나은 삶의 가능성이 있으리라는 기대에 사로잡혀 고통스러워하는 순간들 말이다. 그러나 삶의 진실이란 것이 있다면 저너머에 찾아야 하는 정말의 삶, 내 행복을 보장하는 의미 가득한 것이 있을까? 이제 나는 그런 것을 믿지 않는다. <모래의 여자>가  이런 내게 얼마나 안성맞춤의 소설이 되었는지, 우연히 집어든 소설 한 권에 이만큼 매혹된 기억이 아득하기만 하다.

 

거대한 은유인 '사구(砂丘)의 구멍' 에 갇힌 남자의 이야기다. 모래땅에 사는, 대표적 사막 곤충인 '좀길앞잡이'를 채집하기 위해 해안가 모래사막이 펼쳐진 마을에 들어선 남자는 예기치 않게 모래언덕에 깊게 파인 구멍안에 갇히고 만다.

끝도없이 흘러내리는 사구 안의 초라하게 썩어가는 집, 그리고 여자, 구멍안으로 그를 안내했던 사다리는 사라지고 남자는 고립된다. 쌓이는 모래를 방치하는 순간 모래에 파묻혀야하는 삶, "모래는 절대 쉬지 않는다. 조용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지표를 덮고 멸망시킨다." 여자는 부지런히 모래를 양동이에 퍼담아 사구 정상의 수거자들에게 올리고, 물과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배급받는다. 매일의 반복되는 단순한 생존의 노동, 남자의 탈출을 위한 시도는 실패의 계속일 뿐이다. 소설은 이렇게 세계에서 고립된 인간의 처절한 내면의 투쟁을 쉴새없이 그려내고 있다.

 

 "Got a one way ticket to blues, woo woo...." , (중략) 상처뿐인 편도표를 쥐고서도 콧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은 언젠가는 왕복표를 거머쥘 수 있는 사람에 한한다. ....절망에 차 도움을 구하는 편도파들의 아비규환을 듣지 않기위해 텔레비젼의 볼륨을 높이고 열심히 편도표 블루스를 흥얼거리는 것이다. (P156중에서) " 그래, 돌아갈, 가야할 기대가 있는 목적지가 있는 사람의 여유, 어떠한 기대도 가질 수 없는 이에게 이 노래가사는 조롱에 가깝다. 하지만 구멍 저 바깥의 세계를 단념할 수 없다. 남자는 사다리를 만들고 여자가 잠든 사이 구멍바깥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자신을 구멍에 가두고 그네들 마을의 생존을 위한 노동력으로 밀어넣은 인간들의 눈을 피해 모래길을 도주하지만 이 역시 모래늪이라는 장애에 좌절되고만다.  시간은 흐른다. 이제 그는 끝없이 되풀이되는 모래와의 투쟁과 일과가 된 수작업에 충족감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한다.  아마 이런 심정일 것이다. "....아래를 보면 안 된다. 아래를 보면 안 된다! " 아무런 돌파구도 발견 할 수 없어 이윽고 저 아래로 내려가고 그 반복되는 일상에 찌들게되면 그것도 또한 익숙함, 편안함이 되어 삶의 평온이 되기도 하는 법이니까. 파멸이라고 생각했던 것, 자학이라고 고뇌했던 것에서 쾌유되는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지만... "이대로 살아간다면, 그래서 어쩔 거냐는 생각이 가장 견딜수 없어... " 사위가 어두운 밤의 고독속에서 해답없는 이 독백을 수없이 되뇌었던 적이 어디 한두번이었던가?  그럼에도 아주 작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인내아닌 인내의 시간을 지속한다. 그러다 그 작은 끈, 그 소박한 공상과 실천의 가녀린 시도끝에 왕복표를 얻는 순간이 찾아 올지도 모른다. 이윽고 남자에게 목적지도 돌아갈 곳도, 본인이 마음대로 써넣을 수 있는 공백인 왕복표, 모래와 물의 얽매임을 풀어내는 유수장치를 만들었을 때, "그의 마음은 유수장치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욕망으로 터질듯"하고, "털어놓는다면 이 부락 사람들만큼 좋은 청중은 없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구멍 속에 있음에는 변함이 없는데, 마치 높은 탑위에 올라 있는 듯한 기분이다. (P225 중에서)" 동일한 장소, 상태에 있음에도 벽 위에 올라선 듯한 뿌듯함, 좀체 보이지 않았던 자존의 회복을 느끼는 순간, 여기도, 저기도, 인생이란 그렇게 납득할 만큼의 이유가 딱히 있는 것은 아니라는 데 이른다. 모래의 여자, 남자의 동반자가 된 구멍 속 여자의 묵묵한 삶, 결코 삶에 패배란 것은 없다고 여기는 듯한 여자의 태도, 고작 바깥 세상의 라디오와 거울만 있으면 되는 여자의 인생에 삶이란 것의 해답이 있는 것은 아닌지. 또다른 곳에 내 마음을 달래줄 무엇이 있다는 듯이 매일을 현실로부터의 도주를 꿈꾸는 나를 이제 쉬게 할 수 있을것만 같다.  이제 남자처럼 나 역시 도주 수단은 그 다음날 생각해도 무방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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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처럼 고요히
김이설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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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한 국면을 클로즈업(Close-Up)하면 이렇게 보이지 않을까? 고상하고 기품있고 아름다워 보이고 관능적이기까지 한 무엇에 렌즈를 가까이 갖다대면 댈수록 이내 그 본색인 천박하고 추하거나 불결해보여 외면하고 싶은 그런것, 이 작품집을 읽는 내내 이러한 감정 상태를 떨쳐내기가 어려웠다. 그리곤 자살, 추방, 폭력, 고립과 같은 단어들에서 발산되는 어둠의 답답함이 시종 가슴을 압박하는 불쾌한 기분에 짓눌린 기분이었다고 해야겠다. 오늘의 우리네 삶의 이야기가 이런 것이라는, 우리의 의식이 손사래를 치며 은폐시키고 있던 것들을 어쩔수 없이 마주하는 그런 수치심, 몸서리, 분노, 자괴감이 뒤엉킨 무기력 같은 것...

 

1. 너무도 현실이어서 비현실적인

 

"아버지가 칼등으로 블루길의 대가리를 찍었다."라는 첫 페이지의 문장이 시선을 장악하는 이 소설집의 첫 단편인 <미끼>의 흥건하게 흐르는 폭력의 피비린내가 훅 하고 내 정신을 훑는다. "버텨 살아남은 놈이 주인이 되는 거야, 알겠어?", 아들인 화자(話者)를 절름발이로 만들어놓은 아버지가 하는 말이다. 대어를 잡아들이는 떡밥의 비밀을 취재하기 위한 VJ의 탐욕스러움이 가세하여 이들 부자(父子)가 하는 낚싯가게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폭력의 쇼는 바로 그 속성인 완력, 힘의 자기 파괴력일 것이다.  그래, 살아남은 놈이 주인이 되는 거다. 바로지금 우리의 정치사회에서 벌어지는 어이없기그지없는 쇼의 궁극이 바로 이것이지 않은가? 어떻게 이 구조적인 사슬을 끊어야 할까?  약자는 모두 쓰레기처럼 풀 숲에 던져버려지는 것이 진실인가?

 

나는 수록된 이 소설들을 모두 읽어낼 수 있을까?  얼마나 오래 이 클로즈업된 전경들을 마주할 수 있을까하는 용기가 필요했으니까. 거의 소설집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다 <아름다운 것들>이라는 단편에 이르렀을 때, 소스라치게 놀라게하는 문장을 만났다. "가만히 잠든 아이의 얼굴위에 베개를 올려놓았다. 아이의 숨소리가 조금 더 크게 들렸다. 가만히 베개를 누르자...."  파업 노동자인 남편의 자살 후 천문학적인 파업손해배상액을 빚으로 떠 안은 정신분열의 시어머니, 어린 두아이의 엄마가 견뎌야하는 잔인한 현실의 결말이다. 쓰레기처럼 방치되는 것이 바로 현실이다. 지나치게 현실이어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그런 현실, 우리의 적나라한 모습들...

 

단편 <폭염>의 화물트럭 운전으로 딸아이를 키워내는 여인, <흉몽>의 모텔 청소부인 여인, 억척스런 생활의 몸부림에도 그네들을 모욕으로 점철시키는 우리들의 사회는  "나도 따라 죽을거야.", 혹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찢어진 눈매를 치켜보며 비어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거나, 삶이란 절망과 고통스런 의혹일 뿐이다.

 

2. 언어나 문자 따위로 전할 수 없는

 

'다카다 아키노리'라는 일본 철학자의 '궁극의 선택'이라는 어휘가 떠오른다. "똥맛 카레와 카레맛 똥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와 같은 불가능한 선택을 강요하는 사회적 속박을 일컫는 말이다. 아마 우리들중 많은 이들은 오늘 이러한 속박을 피할 길 없는 상태에 있을 것이다. 이것(사회적 속박)을 벗어나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아마 자살이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가?  '김이설'의 소설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인물들로 가득차 있다. 내 존재를 떠 받쳐주는 타자가 없는 이들, 세계가 외면한 곳에는 항시 죽음의 그림자가 떠돈다. <폭염>, <흉몽>, <복기>, <아름다운 것들>..., 또한 한결같이 등장인물들은 아이를 갖지못한다. 이 사회의 번식녀 계급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보이지 않는 이 잔혹한 폭력의 세계...

 

'숨기어 남에게 드러내거나 알리지 않은'또는 '언어나 문자 따위로 전할 수 없는'이라는 비밀의 얘기로 돌아가자. 사실 우리들의 사회가 은폐한 것들의 이야기이니 이 소설집의 모든 작품들이 비밀의 발설이라 해야할 터이다. <비밀들>이라는 단편의 주인공은 남편으로부터 일방적인 이혼요구를 받고 친정으로 내려온 여인의 이야기다. 그런데 "내 부모와 세상이 바라는 정상적인 과정"이라는 문장이 눈길을 끈다. 사회적 속박의 다른 표현이다.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지 못한,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의 혼란과 방황이다. 온갖 편협한 편견들과 반지성이라 불리는 옹색하고 천박한 자기주장, 이미 윤리적 도덕적 올바름을 망각한 세계가 말하는 '정상'이란 단어처럼 의심스런 것도 없으리라. 이 구조적인 폭력이 여인이 온전히 서 있을 곳을 지워버린다.  "여전히 나는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서울행 버스가 도착했다. 정수리에 박힌 햇빛이 뜨거웠다."  이 마지막 문장이 왜 그리 울려대는지...

 

"비밀을 만드는 사람은 결국 외롭게 되어있어." 라는 단편 <부고>의 문장에 가 닿는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 같았다."라는 화자(話者)의 독백에서 또한 자기의 이야기가 없는 인물을 만난다. 그녀의 삶에 자기 것이라곤 일체 없다. "논문을 쓰다보면 그것이 내 논문 같고, 내가 석사 박사가 된 것 같았다. 학원으로 출근하다보면 내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강사 같았다. 상준과 누워있으면 아내 같고, 여자를 엄마라고 부른 뒤로는 여자의 친자식 같았다." 다음 시간 단위에서 발생하는 일이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 관계없이 일어나는 것들의 지속이라면 아마 우린 순간을 살아내는 것 뿐일 것이다. 여기에 무슨 자유가 있을까? 이런 상황에 계속 굴복하여 살도록 강요하는, '시몬 베이유(Simone Weil)'가 말한 '공장화된 현대사회'의 본성인 '타인의 의지로만 움직이는 물건이된 인간'을 떠 올리게 된다.

 

'OO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이란, 우리들의 모습일 것이다. TV광고 속 그와 그녀 같은, 드라마, 스포츠, 재벌,...의 그 무엇과 같은. 급기야 단편 <빈집>에 이르러서는 신도시에 아파트를 장만한 여자 '수정'은 이렇게 말한다.  "새 아파트는 잡지 사진과 최대한 닮은 것"으로 만들겠다고. 모방, 지속되는 결핍, 미완성의 고통만이 늘어날 것이다. 그녀는 말끔히 정리하곤 아무것도 없는 빈방에 들어앉아 비로소 평온을 느낀다. 그 고요함이 마냥 지속되기를. 완전히 자유로워지기를. 이 은밀한 고통들, 폭력들, 속박들의 고리가 끊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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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선(善)한 악인(惡人)을 생각하며...

 

우리네 삶이란, 비좁은 가설무대에서 공연되는 연극일 뿐이라는 듯 펼쳐지는 <파우스트>를 다시금 읽게 된것은, 자신의 살인 행위에 어떤 회한도 지니지 않은 인간, 즉 '근본악의 존재'를 그린 '정유정'의 소설 ,<종의 기원>에 대한 반감에서 시작되었다고 해야겠다. 그래서 '융'의 분석 심리학에 기댄  '존 샌포드'의 < 융 심리학, 악, 그림자>에서 주장하는 자기(self)의 온전함, 개성화 과정에 대한 확인을 통해 악인이라는 새로운 종자(種子)가 마치 출현한 것 같은, 아니 별개로 존재하는 것 같은 주장의 부정에 더욱 위안과 확신을 가졌다고 해야겠다. 그리곤 샌포드의 자기 입증의 반영을 위해 등장하는 신(神)과 메피스토펠레스의 내기,  메피스토펠레스와 파우스트의 영혼을 담보로 한 계약의 실체, 인간본성의 이중성에 대한 우아하기 그지없는 삶과 죽음의 매혹적인 형상인 <파우스트>에 이르게 되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우리들의 태도이다. 자신들에게는 티끌만큼의 악도 존재하지 않다는 듯이 범죄자들을 이상한 사람으로, 마치 전혀 새로운 인종을 대하는 듯한 사람들의 역설, 그것이다. 자기 안의 악을 들여다보려 하지않는, 자기 안의 악은 은폐한 채 타인만을 판단하려는 그 시선에 대한 위화감이 왠지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나만큼은 선인(善人)이고 정상이다라고 주장하는 몽매함 말이다.

샌포드의 주장은 이렇다. 인간의 심연에는 무수한 악이 존재하지만 그 악은 철저하게 거부되고 억압되고 침잠해 있을 뿐이다. 성적갈망, 분노, 거짓, 폭력성, 탐욕, 증오, 시기심 ...등등 어둡기만한 그것은 무의식의 저 깊숙한 곳으로 가라앉아 있다.  즉 이상적이고 도덕적인 자아가 되기위해 억압한 그림자 - 우리가 되고자 하는 어떤 존재와 일치되지 않고 거부된 것들 - 가 바로 악(惡)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린 왜 이 그림자를 인식하는 것에 주저하는 것일까? 아마 자신의 내면에 쌓여있는 악과 마주하는 두려움, 공포, 죄의식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 악, 어둠의 그림자에 압도되지 않기 위해서, 그것을 피하려 든다. 결국 우린 가면(페르조나)을 쓴다. 다양한 세계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각기 다른 가면을 쓴다. 자아의 인격을 덮어씌우는 덮개로 포장한다.

 

그런데, 자신을 페르조나와 동일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오늘 우리의 세계에는 넘쳐난다. 진짜 인격이 감추어지고, 페르조나가 드러내는 역할만을 하려드는 사람들, 피상적이고, 거짓되고, 깊이가 없는 인격의 사람들, 진정한 자신의 많은 부분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되고만다. 만일 어질고, 선만을 위해서 애쓸 경우, 그 사람은 가증스러운 인간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살아보지 못한 생기 넘치는 삶의 일부, 그 생동감 넘치는 에너지를 거절했을때 삶이 얼마나 위태로워 질 수 있는지,  자신의 영혼을 담보로 삶의 쾌락을 위해 악마 메피스토와 계약하는 파우스트가 선 바로 그 경계일 것이다. 더 많은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마다 쌓이는 악의 축적으로 악인이 되지 않을까?

 

악인은 별난 새로운 종이거나 정상과 비정상과 같은 작위적인 분류에 의한 별종이 아니다. 자기 안의 악을 외면하고, 부인하고, 억압해온, 선한 인간이라 자처하는 인간일 뿐이다. 마침내 억압된 그림자가 차고넘칠만큼 축적된 인간이 자기의 내면을 보았을 때, 그는 자기를 어떻게 인식해야 할까? '한강'의 <채식주의자>에 그려지는 '영혜'처럼 자기를 무화(無化)시키려 하거나, 그림자에 사로잡혀 <종의 기원>의 살인자처럼 그림자의 원형을 삶에서 실현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이 되어버리지 않을까? 오늘 우리의 사회는 선한 박애주의자의 페르조나를 쓴 악인의 전형을 보면서 촛불들을 들어 올리고 있지 않은가?

 

'파우스트'는 어떤 인간인가?  '초라하게' 책상 앞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시작되는 비극 제1부에서 " 아, 나는 이제 철학도, 법학도, 의학도, 게다가 신학까지 열심히 공부하고 철저히 연구했다. 그 결과가 이 가엾은 바보 꼴이구나."라고 자신의 학식과 덕망과 명예라는 선만을 위해 살아왔지만 결국에는 초췌하게 늙은 한 노인만이 남아있다는 삶에 대한 회한에 사로잡힌 인간이다. 그리곤 악마에게 자신의 영혼까지 담보하면서 인생 내내 거부하고 억눌러왔던 그림자의 삶으로 향한다.  "차라리 관능의 심연 속에 들어가 이 불타는 정열을 식히게 해라! (중략) 시끄러운 시간의 여울 속으로 사건의 와중으로 뛰어들자! 거기에는 고통과 쾌락, 성공과 불만이 번갈아서 덤벼들어도 좋다."고 외친다. 파우스트는 모르고있지만 여기에는 하나의 내기가 전제되어있다. 하나님과 사탄의 내기이다. 신(神)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파우스트를 악으로 끌어들여보라고 내어준다. 신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은 어쩌면 신의 형상을 했다는 우리 인간 개체의 총체, 즉 온전한 하나, 선과악이 공존하는 총합된 인격으로서의 자기(self)일지도 모른다. 즉, 신은 선이고 사탄은 악이라는 이분법, 또는 이원적 구성이란 공허한 말에 불과하며, 실은 신은 선악을 초월한, 혹은 인간의 언어에 불과한 선악의 총합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 , 30년이나 젊어진 파우스트의 탐욕스러움, 순수한 아름다움으로 장식된 처녀'그레첸'을 자신의 손에 넣기위한 술책과 관능적 사랑, 발푸르기스의 밤에 펼쳐지는 온갖 쾌락, 고대 그리스의 극치미(美)인 헬레나를 소유하기위해 지옥의 심연까지 내려가는 인간 욕망의 극한, 교활한 전쟁의 승리와 전리물로서의 광활한 해안영토의 취득, 나아가 드넓은 자신의 영토와 바다의 전망에 한 점의 장애까지도 제거하기 위해 노부부의 초가를 불태우는 파렴치에 이르기까지 그의 새로운 인격은 한계가 없다. 선이 억압해왔던 악의 마주함을 통해서 파우스트는 비로소 구원되고, 온전한 영혼이 된다. 우리들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또한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다. 우리들의 의식적인 인격이 확실히 도덕적인 태도를 지니기 위해서는 결코 악, 무의식의 그림자를 대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식함으로써 우린 그것을 절제하고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비극 제2부 5막, 파우스트 시신의 매장 중 천사들에게 담보로 잡아두었던 귀한(파우스트) 영혼을 빼앗기고 어이없어하는 메피스토펠레스의 허망한 주절거림을 듣게된다. 악마와 내기했던 하나님은 정말 영리했다. 선악을 넘어 비로소 '온전함'을 달성한 파우스트를 구원한 것이다. 악마는 강탈당했다고 억울해하지만 이미 이길수 없는 내기였다는 것이 시인 '괴테'의 신념이었을 것이다. 근본악이라는 것은 지극히 잔인하고 피를 얼어붙게 만들며, 인간의 것이라 생각할 수 없는 그러한 극한적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선만을 추구하려는 한 필연적으로 빠지는 함정 이상이 아닌 것이 아닐까? 자기가 쌓아둔, 은폐시킨 자기 악으로부터의 침식, 결코 부인하고 인정할 수 없는 자아(自我)의 편협함, 성장하지 못한 어린아이의 자기변명 같은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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