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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5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평점 :
옴짝달싹 하지 못할만큼 사방이 꽉 막혀 있는 현실에 놓여있을때, 대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수없이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달리 사는 방법은 없을까? 이 벽을 넘어설 방안이란 없는 것인가? 벽 너머 어딘가에 지금 여기보다 나은 삶의 가능성이 있으리라는 기대에 사로잡혀 고통스러워하는 순간들 말이다. 그러나 삶의 진실이란 것이 있다면 저너머에 찾아야 하는 정말의 삶, 내 행복을 보장하는 의미 가득한 것이 있을까? 이제 나는 그런 것을 믿지 않는다. <모래의 여자>가 이런 내게 얼마나 안성맞춤의 소설이 되었는지, 우연히 집어든 소설 한 권에 이만큼 매혹된 기억이 아득하기만 하다.
거대한 은유인 '사구(砂丘)의 구멍' 에 갇힌 남자의 이야기다. 모래땅에 사는, 대표적 사막 곤충인 '좀길앞잡이'를 채집하기 위해 해안가 모래사막이 펼쳐진 마을에 들어선 남자는 예기치 않게 모래언덕에 깊게 파인 구멍안에 갇히고 만다.
끝도없이 흘러내리는 사구 안의 초라하게 썩어가는 집, 그리고 여자, 구멍안으로 그를 안내했던 사다리는 사라지고 남자는 고립된다. 쌓이는 모래를 방치하는 순간 모래에 파묻혀야하는 삶, "모래는 절대 쉬지 않는다. 조용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지표를 덮고 멸망시킨다." 여자는 부지런히 모래를 양동이에 퍼담아 사구 정상의 수거자들에게 올리고, 물과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배급받는다. 매일의 반복되는 단순한 생존의 노동, 남자의 탈출을 위한 시도는 실패의 계속일 뿐이다. 소설은 이렇게 세계에서 고립된 인간의 처절한 내면의 투쟁을 쉴새없이 그려내고 있다.
"Got a one way ticket to blues, woo woo...." , (중략) 상처뿐인 편도표를 쥐고서도 콧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은 언젠가는 왕복표를 거머쥘 수 있는 사람에 한한다. ....절망에 차 도움을 구하는 편도파들의 아비규환을 듣지 않기위해 텔레비젼의 볼륨을 높이고 열심히 편도표 블루스를 흥얼거리는 것이다. (P156중에서) " 그래, 돌아갈, 가야할 기대가 있는 목적지가 있는 사람의 여유, 어떠한 기대도 가질 수 없는 이에게 이 노래가사는 조롱에 가깝다. 하지만 구멍 저 바깥의 세계를 단념할 수 없다. 남자는 사다리를 만들고 여자가 잠든 사이 구멍바깥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자신을 구멍에 가두고 그네들 마을의 생존을 위한 노동력으로 밀어넣은 인간들의 눈을 피해 모래길을 도주하지만 이 역시 모래늪이라는 장애에 좌절되고만다. 시간은 흐른다. 이제 그는 끝없이 되풀이되는 모래와의 투쟁과 일과가 된 수작업에 충족감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한다. 아마 이런 심정일 것이다. "....아래를 보면 안 된다. 아래를 보면 안 된다! " 아무런 돌파구도 발견 할 수 없어 이윽고 저 아래로 내려가고 그 반복되는 일상에 찌들게되면 그것도 또한 익숙함, 편안함이 되어 삶의 평온이 되기도 하는 법이니까. 파멸이라고 생각했던 것, 자학이라고 고뇌했던 것에서 쾌유되는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지만... "이대로 살아간다면, 그래서 어쩔 거냐는 생각이 가장 견딜수 없어... " 사위가 어두운 밤의 고독속에서 해답없는 이 독백을 수없이 되뇌었던 적이 어디 한두번이었던가? 그럼에도 아주 작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인내아닌 인내의 시간을 지속한다. 그러다 그 작은 끈, 그 소박한 공상과 실천의 가녀린 시도끝에 왕복표를 얻는 순간이 찾아 올지도 모른다. 이윽고 남자에게 목적지도 돌아갈 곳도, 본인이 마음대로 써넣을 수 있는 공백인 왕복표, 모래와 물의 얽매임을 풀어내는 유수장치를 만들었을 때, "그의 마음은 유수장치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욕망으로 터질듯"하고, "털어놓는다면 이 부락 사람들만큼 좋은 청중은 없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구멍 속에 있음에는 변함이 없는데, 마치 높은 탑위에 올라 있는 듯한 기분이다. (P225 중에서)" 동일한 장소, 상태에 있음에도 벽 위에 올라선 듯한 뿌듯함, 좀체 보이지 않았던 자존의 회복을 느끼는 순간, 여기도, 저기도, 인생이란 그렇게 납득할 만큼의 이유가 딱히 있는 것은 아니라는 데 이른다. 모래의 여자, 남자의 동반자가 된 구멍 속 여자의 묵묵한 삶, 결코 삶에 패배란 것은 없다고 여기는 듯한 여자의 태도, 고작 바깥 세상의 라디오와 거울만 있으면 되는 여자의 인생에 삶이란 것의 해답이 있는 것은 아닌지. 또다른 곳에 내 마음을 달래줄 무엇이 있다는 듯이 매일을 현실로부터의 도주를 꿈꾸는 나를 이제 쉬게 할 수 있을것만 같다. 이제 남자처럼 나 역시 도주 수단은 그 다음날 생각해도 무방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