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의 본원적 욕망으로서의 비생산적 소비, 에로티즘과 죽음에 대해서
오늘의 소비중심주의 문화현상을 일찌감치 ‘에로티즘’과 ‘죽음’이라는 인간 생명체의 근본적 본질의 탐구를 통해 이를 인류의 본원적 가치라고 말하는 전복적 사유로 현대사상의 거대한 뿌리를 제공한 ‘조르쥬 바타이유’는 내 인생관을 그의 위대한 저술 『에로티즘』 전후로 분리하게 했을 만큼 엄청난 영향을 준 사상가라 할 수 있다. 이 한편의 저술을 접함으로써 인간 욕망의 뿌리, 그 과잉의 탐구, 소비의 사회학이라 할 수 있는 『저주의 몫』은 물론, 『에로티즘의 역사』에 이르는 우리 인간과 사회제도를 해석하는 일반경제학과 전형적인 비생산적 소비인 성(性)과 성담론의 행보를 따라가게 되었다고 감히 말 할 수 있다.
특히 그의 소비경제학은 현대사회의 비판적 담론가들의 대표자라 할 수 있는 데리다, 푸코, 부르디외, 보드리야르 등에 과시적 소비사회에 대한 탁월한 이론들을 낳게 하는 근간이 되었으며, 오늘의 인간과 세계의 존재조건들을 이해케 하는데 귀중한 인식론적 준거를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낭비, 소모라는 본원적 가치로서의 에로티즘에 이르게 한 사상적 기점이자 근원적 사유를 담고있는 『저주의 몫』은 이후 그의 소설작품이나 예술관, 사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필수적 저술이다. 바타이유의 모든 사유를 지배하는 관념으로서‘비생산적 소비’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는 절대적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모든 유기체는 에너지(富)의 원천과 본질을 아무 대가없이 베푸는 태양 광선에서 얻으
며, 이 대가없는 베풂 때문에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받아들이고, 초과분은 체계의 성장에 사용토록 한다. 그런데 만약 이 체계가 어느 순간 그 에너지를 활용하여 성장하는 것이 한계에 이르러 그 초과에너지가 성장에 흡수될 수 없게 되면, 남아도는 에너지는 폭발할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어떠한 방식으로든 대가없이 소모되어야만 안정과 균형을 이룰 수 있다. 는 것이라 하겠다.
즉 대가없이 소모하는 것, 바로 '비생산적 소비’라는 것으로써, 이는 인류평화, 생존과 유지를 위한 최고의 진리라는 것이다. 물질의 풍부한 생산이 미덕이 아니라 생산에는 전혀 관여치 않는 사치와 소모가 미덕이라는 말이 언뜻 낯선 이야기로 인식되지만 고대사회의 증여에 의한 교환시스템이나 희생제의와 같은 종교적 축제를 비롯해서 군사기획사회로서의 이슬람의 소모적 전쟁이나, 티베트의 승려사회라는 비생산적 집단, 서구 중세 종교기획사회의 모습을 통해 잉여의 해소가 인간과 지구, 나아가 우주 질서의 본성임을 다채로운 사례들을 통해 납득케 하고 있다.
이처럼 ‘에너지 과잉’을 안정화시키기 위한 행위로서 비생산적 소비는 “사치, 종교예식, 기념물 건조, 전쟁, 축제, 스포츠, 장례, 예술, 도박, 섹스”와 같은 “소비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소비”이다. 여기서 섹스는 과잉 에너지를 해소하는 아주 본원적이며 유용한 수단이라는 것이 도출된다. 예로서 북미 인디언의 ‘포틀래치’와 같은 독특한 증여메커니즘이나, 값비싼 장신구, 넘치는 음식물, 피의 희생과 같은 엄청난 부의 소비를 요구했던 고대 아즈텍인들의 ‘희생제의(犧牲祭儀)’는 신성한 소비, 비생산적 소비, 과잉에너지의 효율적 소비라고 해석되듯이, 섹스로서의 에로티즘은 인류의 죽음에 대한 깨달음, 다시 말해서 소멸에 대한 가치, 비생산적 소비의 본원적 중대성의 이해로부터 시작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의 에로티즘에 대한 위대한 해석,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숭고하다고 할 만한 업적이 탄생한다. 고대 동굴벽화의 죽음에 대한 공포와 경외감, 그리고 죽음에 대한 관능의 모습, 공포라는 죽음의 외연이 만들어낸 종교적 감수성에 대한 인류의 섹스에 대한 목적의식의 발견은 에로티즘의 역사에 대한 성찰을 낳는다. 죽음의 인식으로부터 살해의 금지와 같은 금기를 낳고 궁극에는 금기위반을 둘러싼 욕망의 메커니즘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두 개체의 하나로의 결합, 이는 새로운 불연속적 존재를 탄생시키고 둘은 소멸한다. 곧 성행위는 죽음의 다른 이면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알몸과 알몸이 결합하는 한 순간 자아의 경계가 사라지며, 이순간이 바로 존재의 연속성이 구현되는 순간, 즉 신성성에 이르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곧 생명의 절정인 에로티즘을 통해 인간은 역설적이게도 죽음의 심연을 맛보는 것의 다름 아니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며, 결국 에로티즘은 신성성의 현현이며, 비생산적소비의 전형이라는 것이다. 바타이유를 이해하게 될수록 인간이란 근원적으로 생산의 이성보다 소비의 욕망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임을 이해하게 되는 정말 엄청난 사유의 대 전복을 경험케 되는 것이다. 대체 욕망이 선악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로부터 시작되는 금기(禁忌)의 장치들에 대한 현대의 담론적 장치들의 세계로 사상적 지평이 활짝 열리게 된다.
소설 얘기를 빼 놓을 수는 없겠다. 그의 사상적 기반에 어떠한 형식으로든 영향을 끼친 출생과 불우한 성장의 환경에서부터, 니체로부터의 영감이나 투우장 죽음의 목격이 반영된 지극히 개인적 체험이 반영 된 것들이기에 인간의 내면에 잠재워진 뿌리 깊은 강박, 그 요소들인 에로티즘과 죽음의 비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눈의 이야기>는 이러한 그의 심리적 세계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화자와 마르셸, 시몬을 통해 드러내는 그로테스크한 괘락, 수용하기에 버거운 불결함과 외설스러움의 갈망들은 불쾌한 공포의 전율만 느껴지기도 한다. 나아가 그의 저술 『에로티즘의 역사』속 화보를 방불케 하는 소설 <하늘의 푸른 빛>은 관습, 금기의 질서에 도전한다. 절판 또는 미출간이었던 이들 소설이 '비채'에 의해 다시금 국내에 소개되는 기회가 된 것은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많은 독자들이 그의 세계로 접근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