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과 분노
로런 그로프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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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의 문제. 태양의 위치에서 보면 결국 인류란 추상에 지나지 않는다....

(中略)... 구체적인 것은 한곳에 초점을 맞출 때에야 보인다." - P 69 에서

 

 

소설은 로토와 마틸드, 남편과 아내라는 두 사람의 주된 서술 관점에 의해 '운명''분노',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서술되고 있다. 그리곤 각 부분은 다시금 반목하는 사건과 의식의 흐름들을 통한 시간의 분열된 서술 구성으로 정말 강렬한 매력을 발산한다. 비교적 단순한 퍼즐이지만 이 맞추기의 과정에서 조금씩 선명해지는 두 사람의 내면적 진실에 이르게 될 때 감당하게 되는 관계라는 것, 나아가 삶이라는 것 전반에 대한 곤혹한 동요를 맞보게 된다. 이를테면 로토의 관점에서 "그녀의 리듬은 그의 뼈에 새겨져 있었다." 이지만, 마틸드는 "자신의 머리를 그의 무릎에 뉘였고, 어린 로토를 밖으로 끄집어내어 어른 로토가 울음을 멈추게 한 것이다."와 같이 남편의 믿음과 아내의 의도된 행위를 짜 맞춤으로써 완성된다. 이 소설의 맛은 바로 이것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로토와 운명

 

태어난 순간부터 하고 싶은 걸 하면 된다는 말을 듣고 자란 사람. 그저 시도만 하면 되는 사람. 시쳇말로 금수저가 로토의 태생이다. 세상은 그리 어둡지 않은 곳, 타자에 대한 분노가 필요 없는 삶. 그래서 그를 바라보는 타자들은 그에게 우호적이며, 매료되고, 그의 주변에 몰려든다. 빛을 발하는 사람. 무수한 여자들이 그의 살갗을 스쳐간다. 하지만 내 육체가 알아보는, 먼저 반응하는 그 아찔한 전율을 동반하는 이성이란 것이 있다. 바로 내 반쪽이라는, '조르주 바타유'의 말로하자면 내 불연속성의 고뇌를 멈추게 해주는 연속성의 대상인 개체, 바로 그이자 그녀라는 확신 말이다. 남자는 그녀를 알아본다. 백금발의 우아한 여자, '마틸드'. 스물 두 살의 나이에 남자는 여자와 결혼한다. 남자는 세상을 얻은 것과 같은 행복과 사랑에 취하지만, 남자의 엄마, 남편의 거대한 생수회사를 상속받은 여자는 아들의 결혼에 냉담하고, 이들의 관계가 지속되는 한 어떠한 재화도 제공되지 않는다. 셰익스피어의 햄릿 배역을 시작으로 연극배우로 성공하기를 기대하지만 그의 기대와 대중의 기대는 사뭇 다르다. 삶은 곤궁하고 아내의 벌이에 의지해 소박한 일상을 지속하지만, 좌절의 심연은 깊어만 진다. 실의 속에서 끄적인 그의 희곡을 읽어 본 아내의 격려는 그를 극작가로서의 삶으로 우뚝 서게 한다. 유명한 극작가로서의 삶은 그에게 삶의 의욕, 사랑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이야기로서의 '운명'은 한 남자의 역사를 이렇게 서술하지만, 소설의 내적 구성은 자못 다채롭다. 로토가 집필한 희곡들이 부분적으로 기술되고 있는데, 이것이 다름 아닌 소설적 암시이며, 진실의 틈을 메워주고 있다는 점이다. 일례로, <디 안티고나드>라는 로토의 희곡 속에 등장하는 '로스' ''의 사랑과 죽음의 이야기는 마치 로토가 마틸드에게 들려주고픈 이야기로 보이고, 로스가 죽어가면서 고에게 남기는 마지막 문장인 "세상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곳이...."라는 구절은 아내 마틸드의 내면적 진실을 꿰뚫어보는 듯한 로토의 시선을 느끼게 해주기도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하게 되면 로토가 아내 마틸드의 내면적 고통을 모르지 않았으리라는 것과 그 고통까지 자기 것으로 하려는 로토의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아내는 그에게 "뭔가 금지된 것의 짜릿한 느낌"이기도 하며, 매일 새벽이 오기 전 "두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부옇고 어둑한 세계. 그 단어가 뭐였더라? 소슬"한 푸른색 추상화이기도 하고, 자기 어머니에 대한 분노로 "그녀의 손이 떨리는" 은둔해 있는 그 미세한 감정을 예민하게 포착하기도 한다. 명료하게 그 정체를 알지는 못하지만 아내의 고독, 고통, 분노를 충분히 감지하고 있으며, 다만 사랑하는 이를 위해 이러한 자신의 감정을 이해의 차원에서 간직하고 있는 남자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그 자신을 구성했던 모든 것이 전복된 차원, 예측 가능한 것이 폭발해버린 차원"에 봉착하게 된다. 너무도 완벽하게 그의 생활을 지배했던 그녀, 완전한 하나, 그리고 눈처럼 순수한 여자, 슬프고 외로운 여자를 만났다는 그의 앎, 그가 아는 세계의 이야기가 완전히 뒤집혀버린다. 소설은 이 이야기의 다른 관점이자 완성된 퍼즐의 짝인 '분노' 속으로 시선을 다급하게 몰아댄다.

 

 

마틸드와 분노

 

당혹스러울 정도의 반전이라고 해야 하나? '오렐리', 왠 프랑스 소녀? 혹독함, 냉담함, 잔인함과 같은 어휘들만 어울리는 어린 소녀 오렐리의 성장기를 쫓는 내내 그녀를 구성하게 될 내면의 성분들을 알게 된다. 네 살의 여자아이에게 씌워진 냉혹한 시선들, 버려진 아이, 음침함과 추함의 세계, 무관심과 고립의 세계, 철저하게 타자로부터 소외된 아이의 저 침잠한 심연이 끝없이 차오르고 올라 거대한 분노로 터져 오르는 것이 보인다. 오렐리의 마틸드로의 변신, "에너지로서의 고통, 갑작스런 분출"이라 외치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코리올레이너스>'볼룸니아'아의 분노, 그것. 이 에너지가 그녀를 명문대학 바사(Vassar)의 입학으로 이끌고, 마틸드는 학비를 위해 '불가능'의 세계, 음울한 음란의 노예를 계약한다. 대학 4년이 종료되는 시점, 그 불가능의 세계에 대한 계약이 끝나는 시간, 속박되고 소외되었던 세계의 껍질을 벗어나 자유와 풍성한 관계가 시작되는 미래, "여자는 자신의 회로를 완성하기 위해, 자신의 스위치를 최대한의 빛을 밝히기 위해 다른 존재를 필요로 한다고" 선언한다.

 

막대한 부의 상속자, 대학 내 모든 여성들의 우상, 연극배우 햄릿의 주인공, 그가 바로 다른 존재이다. 그에게 접근하는 치밀한 계획, 파티석상 저 위의 난간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환한 웃음을 짓는 남자, 그 남자의 시선이 마침내 그녀에게 이르는 순간, 그는 뛰어내려 사람들을 헤치고 그녀의 앞에 우뚝 선다. 이제 두 사람은 결혼한다. 그러나 '운명'의 로토가 말하던 상황이 아니다. 우연으로 가장된 필연, 여자의 계획된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 결합이다. 여기서부터 관점은 수없이 교차한다. 로토는 이를 "첫 눈에 반한 사건"이라 부르지만, 마틸드에게 이것은 "섹스 사건"이며, 두 사람 최초의 육체적 관계가 그녀에게는 "아기 사슴을 삼키는 보아뱀"이다. 그러나 여자는 말한다. "부부가 되어 치른 그들의 첫 관계는 너무 빨리 끝났다....(中略)....상관없었다. 분리된 자아들의 경계가 제거되었다." 그래, 그녀는 연속성을 확보했다. 그녀는 더 이상 혼자 아니게 되었다. 아마 이것으로 마틸드는 충분히 삶의 의미를 회복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문장이 막아선다. "그녀는 얼굴을 닦고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빗은 뒤 독한 표정이 사라질 때까지 미소 짓는 연습을 했다....(中略)...." 남자가 말한다. '내 골수까지 사무치도록 당신을 사랑해.' 그러나 여자는 등을 돌린 채 말한다. '나도.' " 남자는 등 돌린 여자를 보지 못한다. 등 돌린 여자의 무심한 사랑의 동의.

 

여자는 남자의 실재와 환상의 간극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또 말한다. "단 한 번도 그의 말을 바로잡아 주지 않았다. 그가 그런 환상을 간직하며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이유가 뭔가? 그것이 그를 행복하게 하는데. 그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면 그녀는 그것으로 좋았다. 기꺼이!" 다시 퍼즐을 맞추자. '운명'에서 남자는 말한다. "그녀의 중심에 자리한 어두운 채찍. 그녀는 어떻게 그 채찍을 그토록 부드럽게 휘둘러 그를 계속 움직이게 할 수 있었을까." 이 완성된 형태는 그녀가 자신에게 다짐하는 맹세에 있다. "자기 안의 어두운 공간을 그에게 절대 들키지 않겠다고 혼자 맹세했다....(中略)...오로지 그녀의 큰 사랑과 빛만 알게 하겠다고."

 

그런데 그가 먼저 떠나버렸다. 들키지 않으려했던 '그녀의 어두운 공간'이 로토의 삶을 끝내버렸다. 그녀가 결코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던 그것. 말하지 않은 거짓말. 남편이 자신이 선택한 길을 더 잘 걸어가기를 그녀가 바랐다는 사실. 모두에 인용한 소설의 문장처럼 진실은 과연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의 문제'이며, '한 곳에 초점을 맞출 때에만 보이는"것일까? 라는 의문이 고개를 쳐든다.

 

작품에는 이와 유사한 물음이 있다. "로토가 그 공포에 귀를 기울였다면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명성도 얻지 못하고 희곡도 쓰지 못했겠지만, 평화, 편안함, 돈은 누렸을 것이다. 화려함은 없었겠지만 자식은 있었을 것이다. 어느 삶이 더 나은가?" 그리곤 "우리가 말할 수는 없다."고 맺는다. 정말 말 할 수 없는 것인가? 나는 이것이 잘못된 질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명성과 부의 편안함의 대비로 한 사람의 삶의 의미를 대체하는 이런 경박한 질문 말이다. 결혼생활이란 이런 것이 아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란 이러한 관점의 대상이 아니라 신뢰와 진실의 대상이 아닐까? 이런 구절도 있다.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다정함, 말 없는 친밀함," 이러한 것들이 "그들의 결혼 생활을 이루었다.". 여기에는 무엇이 도도히 흐르고 있는가? 신뢰 아닌가? 그 신뢰의 기반이 무너질 때, 우리도 같이 무너져 내리지 않겠는가? 실제 마틸드와 그가 그녀라고 믿었던 마틸드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간극. 그녀는 볼룸니아처럼 "분노는 제 자양분, 제 저녁 식사입니다. 그걸로 배를 채우다 결국 죽음을 맞겠지요."라고 외치지만, 로토의 자양분, 저녁식사는? 로토는 그녀의 부드러운 채찍과 환상으로 배를 채우라는 것인가? 과연 결국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이기만 한 것일까? 그리고 "결혼이란 거짓말투성이야. 대체로는 친절한 거짓말이지만, 말하지 않는 거짓말이지."라는 말이 진실이 될 수 있을까?

 

소설 속 두 사람의 서술들은 많은 관점의 이야기들로 논쟁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은 관점, 결혼의 정의부터, 그리고 '거투르드 스타인'이 자기 반려자를 회고하며 "그녀에 대한 기억을 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발언처럼 마틸드가 살아낸 오직 남편의 행복을 위한 삶의 의미에 대해서, 아내의 말하지 않은 거짓에 대한 로토의 고뇌에 대해서, 로토가 쓰고 마틸드가 가필한 많은 소설 속 희곡들의 해석에 대해서, 그리고 사랑과 연속성에 대해서. 그네들 거실의 석상 뒤에 걸린 푸른색 추상화의 그 소슬한 느낌에 푹 빠져있던 느낌, 여운이 꽤나 오래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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