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와 보낸 마지막 하루 - 강렬했지만 스러진 존재의 희미하지만 영원한 온기
손홍규 지음 / 문학사상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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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망회회소이불실(天網恢恢疎而不失) ; 하늘의 그물은 성글어도 빠뜨리지 않는다." 

- 老子,도덕경,七十三章

 

 

나는 이 소설을 허구의 이야기로만 읽을 수 없었다. 설혹 그것이 꿈의 기억이고 중음신(中陰身)의 유령이 들려주는 이야기일지언정. 역사 속 인물이 꿈꾸었던 세상, 그것을 좌절시켜 온 파렴치한들의 세상이 여기 있다.

 

반민중(反民衆)집단의 뿌리 깊은 탐욕과 몰염치, 기만성은 오늘에도 여전히 이 땅을 지배하는 한 축으로 작동하며 자신들의 잇속 챙기기에 방해되는 그 어떤 상황의 전개에도 발악적인 혼돈으로 맞서고 있다. 이 소설은 우리 근현대사에 있어 중대한 4개의 죽음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다. 바로 기득권의 항구화에 저항하는 민중을 살해하는 권력에 의해 벌어진 참담함이다. 녹두장군 전봉준의 죽음에서 세월호의 어린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 줌도 안 되는 지배권력이 농민, 노동자 등 민중의 분노를 향해 드러낸 특권과 무책임과 무례와 오만이 범벅된 잔혹함의 역사이다.

 

동학혁명으로 부패한 탐관오리들과 봉건제의 모든 악폐를 척결하고 무고한 농민에게 평등한 인간의 삶을 주려했던 녹두장군 전봉준이 처형을 기다리던 옥사의 어느 날이며, 양반과 지주, 친일 부역자들에의해 핍박받던 민중의 절망과 분노가 만들어 낸 공산주의자 박헌영의 권력에 의한 처형의 몇일이며, 특권과 우월의식에 잠겨있는 검찰 집단의 개혁에 앙심을 품은 정치 검사들과 수구 기득권 정치집단 및 조선, SBS등 언론기득권이 결탁해 망신주기와 조롱으로 전직 대통령을 죽음에 내몬 몇일이며, 가난한 시민이 아이 하나 낳기 힘든 사회조건에서 정성과 사랑으로 양육한 아이가 무고하게 수장된 아련하고 아득하기만한 기록이다.

 




역사적 상황이 한 세기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2021년 오늘에도 친일 부역자의 떨거지들이 정치권력이 된 정치 검찰 집단을 옹호하며 정치공작 운운하고, 여전히 그악스럽게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발악하며, 반민족, 반민주를 위해 민족지사들을 암살하고 오직 권력과 부의 축재에 혈안이 되었던 모리배의 후손이 패거리를 이루고 민중의 원()을 호도하고 있는 현실이다.

 

"비록 실패했지만 사람이면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었기에 사람답게 살기위해 바닥에 납작 엎드렸던 몸을 일으킨 사람들을, 그걸 보아버렸는데 어찌 본 적없는 것처럼 굴 수 있단 말인가."  -267

 

이제 불온한 반민중 기득권 집단의 패악질을 분간할 줄 알게 된 민중은 쥐죽은 듯 있을 수만은 없다. 동학혁명에 참여 했다고, 의병에 동조했다고 노륙당하던 전봉준이 살던 시대가 아니며, 반민족 행위자를 두둔하던 이승만과 한민당의 친일 독재세력이 민중을 마음대로 유린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승만의 탐욕스런 권력욕이 외치던 빨갱이 타령은 바로 지금에도 수구정당의 무리들로부터 여전히 자신들의 치부를 가리는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

 

동학 농민군의 접주들을 효수하여 저자거리에 내걸던 그 악의를 전봉준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목도 전국방방곡곡에 내걸려 민중의 정신이 일깨워지기를 갈구했다. "작은 복을 지어 마침내 사형을 받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겠나(150)"라며 옥중(獄中) 청년 '김해원'에게 권력의 회유를 거절하고 죽음의 길을 선택한 변을 말하기도 한다. 또한 농민과 노동자들의 피와 땀을 쥐어 짜내 자신들의 뱃속을 채우던 일제하의 지주와 친일 부역자 등 반민족적 모리배의 작태가 잉태한 공산주의자의 출현은 이 땅의 아픔이다.

 

개혁의 대상이 되었던 정치 검찰은 적의를 품은 채 증거도 없이 전직 대통령을 여느 잡범 취급하며 수구 언론을 이용하여 심문 기록을 흘리며 모욕적 언론플레이를 하고, CCTV를 통한 중수부장의 치밀한 통제 하에 민중을 농락했다. 이 천박하고 사욕에 가득한 집단의 공작 정치 버릇은 2021년 지금까지 집요하게 이어지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초 평검사와의 회의 후 "천박한 교양과 특권의식, 무례함과 오만으로 그득한 그들은 기득권 포기 생각이 없다."고 소회를 밝혔다니 작금의 현실에서 이 언급의 긴급성이 새삼스럽기만 하다.

 

중음신이 되어 죽음의 길로 들어서는 전직 대통령의 그 날의 정경을 말하는 해원의 시선을 좇다보면 그 쓸쓸함의 기록들이 분노가 되어 되살아나기도 한다. 간악함과 탐욕과 파렴치와 기만이 세상을 지배하는 사회, 이런 세상에 부모의 사랑으로 키워진 소녀가 이유도 모른 채 검푸른 물결에 내동댕이쳐진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망각한다. 민중, 시민의 생명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다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개,돼지 정도로 아는 수구집단의 망령됨이 끝없이 지속되는 이유이다.

 

이 소설을 읽는 것은 순박하고 어리석기만한 우리네에게 부정의에 생을 달리하여야만 했던,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었던 이들의 온기를 옹색하게나마 쬐는 시간이 된다. 이 좌절된 꿈들, 실패, 그리고 또 실패. 그러나 혁명이란 바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고 있지 않은가! 촛불혁명의 민의는 지금도 아주 작지만 전진하고 있을 게다. 반동의 힘을 물리치는 오랜 시간의 중단 없는 투쟁을 계속하여야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는 것 아니겠는가? 아름다운 언어로 기술된 소설적 기억을 현실의 역사로 읽는 누를 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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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전후사의 인식 1
송건호 외 / 한길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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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된 지 대략 40년이 되었음에도 오늘 새롭게 읽혀야 하는 충분한 당위성이 있는 저작이다. 더구나 70여 년 전 이 땅의 사회,정치사를 다루고 있는 친일 부역자들과 지주세력, 모리배 등으로 이루어진 수구 세력이 대를 이어가며 오늘 한국의 정치사회의 기득권집단으로 여전히 그 천박한 탐욕의 위세를 부리고 있는 까닭이다.

 

이 책은 내부적 독립의 쟁취가 아닌 외부 세력에 의해 피동적으로 민족의 해방을 맞이한 1945815일을 전후한 한국 사회의 정치적 형상을 조사, 분석, 비판 성찰하는 정치사회사라 하겠다. 6권으로 구성된 대 저작이 되긴 하였지만 '미군정과 민족분단, 친일 반민족 세력의 실상과 해방 직후의 경제구조'를 논하고 있는 1권은 해전사(解前史)의 뿌리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러한 타율적 해방을 맞이하자 몽양 여운형의 민족적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나 정치 사회적 혼란을 차단하고 신속하게 건국을 위한 준비에 착수하려했던 선견과 좌우를 통합한 중도적 포용성을 지닌 건국준비위원회(건국동맹)란 것이 있었으나 사분오열되어 저마다의 잇속을 계산하는데 열중하는 소극적 오합지졸들로 불과 20여일 만에 해체되고 만다. 나름 몽양은 국내에 기반을 둔 토착 민족세력으로서 일제의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신들의 안전한 퇴거에 보장을 받을 수 있는 인물로 이해되었던 듯하다. 그러나 대지주등 자본 세력을 대표하는 송진우를 비롯한 후일 한국민주당 계파의 극렬한 반대로 건국준비 조직으로서 기능을 훼손당하고 만다.

 

책은 목하 좌우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망라된 필진으로 해방전후의 정치사회상을 분야별로 담당하여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그 기술의 관점은 동일하지 않다. 때론 보수적 시선으로 또 때론 진보적 시선이 개입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우 공히 신탁을 찬성하는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에 이르는 권력을 향한 욕심에서 이승만의 탐욕스러움에 대한 증거와 기록들에 대한 논평은 그리 차이가 없다.

 

 

"이승만은 해외 망명생활을 하였다고는 하나 독립 운동은 커녕...(중략)...상해 임정에서도 축출될 정도로 항일 운동 전선에서는 대중의 인기가 없었던 사람이다. 이승만은 이러한 자기 허구를 누구보다고 잘 아는지라...(중략)...광적으로 기승을 부렸다." -348쪽에서

 

항일 민족투사도 아니요, 그렇다고 외교 전문가도 아닌 단지 영어를 할 줄 아는 권력의 욕망에 불타는 천박한 인물에 불과했던 인물이 미군정에 달라붙어 친일 부역자들과 대지주 자본가들과 결탁하여 근본 없는 집단들의 얼굴이 되어 초대 대통령에 이르는 그 협잡과 공작 정치의 행태는 모욕과 수치심을 불러일으킨다. 미군정의 제 1 포고문은 '일본인과 미 상륙군에 대한 반란행위 처벌과 일본인의 안전에 도전하는 조선인에 대한 강력 처벌'을 담고 있었다. 이에따라 친일 일제 부역자들이 그대로 중앙 행정과 치안을 맡게 되는 황당한 정국이 전개되고 반민족행위자의 처벌이나 소작제 폐지, 토지개혁은 미군정이 종료되고 새로운 남한 단독정부의 출범시기 까지 미뤄진다.

 

 




장장 3년 남짓에 이르는 신탁과 찬탁의 싸움, 친일 부역자및 지주 자본가로 이루어진 모리배 집단이 기득권을 다지는 데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으며, 국회의 출범 후 입법된 '반민족행위자 특별법'의 시행은 이러한 반민족 행위자로 이루어진 이승만과 한민당에 의해 파괴되고, 급기야 특별위원들은 빨갱이로 몰려 암살되거나 처형, 수감되는 반동적 상황에 매몰되고 만다. 이 과정에서 여운형, 김구가 이승만등 극우집단에 의해 피살(암살)되는 것은 오늘에 이어지는 수구집단의 물불가리지 않는 탐욕의 정체를 읽게 된다. 책은 이러한 일련의 파렴치 상황을 세세히 그 과정에 은닉된 정치적 의미와 함께 풀어 놓고 있다.

 

아마 친일, 부역자들의 무수한 이름이 열거된 일제 말 친일 군상의 실태 를 보면 종교, 문예, 하물며 각종 부인회에 이르기까지 내선일체, 황국신민, 창씨개명, 황군감사, 징병찬양을 비롯하여 항공기 제작비용의 헌납부터 식량 수탈에 이르는 적극적 친일 행위자들을 보는 것은 그야말로 당혹스러움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동족을 못살게 굴었는지, 민족 정기의 말살에 전력을 다했는지 그 엄청난 단체들과 명단에 놀랍기만 하다. 물론 이 책에 기술된 인물은 그야말로 조족지혈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토지개혁 또한 유무상몰수, 무상분배와 그 대상과 한계를 두고 반민족행위자로 구성된 이승만을 비롯한 한민당은 토지개혁 실시입법을 신중론이라는 미명하에 차일미일 미루며 사전 방매행위로 개혁입법의 취지를 완전히 무의미한 형식적 법률로 만들고 만다. 미군정이 가장 먼저 손을 대고 싶어 했던 분야가 바로 이 토지개혁이었다. "미 국무성과 군정 당사자들의 공통적인 생각은 이 나라의 소작료는 세계에서 그 유례를 볼 수 없을 만큼 높(468)"았다는 것이다. 당대 지주의 예속농이 되어야만 했던 소작농이 얼마나 가혹한 생산조건에 놓여있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농경중심 사회에서 벌어진 이러한 기득권 존속을 향한 양태는 산업사회인 오늘날이라고 달라진 것이 아니다. 기득권을 항구화하기 위한 그악스런 탐욕은 오히려 더욱 세련되고 복잡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수구 정당의 대권 후보자라는 인물은 당선되면 공공사업분야의 민영화를 달성하겠다고 시민을 바보 천치 취급하고 있다. 건강보험, 전력, 대중교통을 민영화 할 경우 거대 자본집단의 뱃속을 채우게 되는 것은 지극히 뻔 한 일이다. 공공서비스의 질은 곤두박질 칠 것이고 비용은 고스란히 시민에 전가될 것이다. 이들은 경영효율성을 근거로 얘기한다. 공공의 이익은 효율성에 앞서는 인간다운 삶을 위한 보다 큰 정의이다. 토지개혁을 미루던 당대의 반민족적 수구정당은 "토지개혁은 중요한 문제이므로 정부 수립 후에 실시하는 것이 정당하다(470)."3년을 미루다가 마침내 입법에 당면하자 이를 실시하고자하는 세력은 공산주의자인 빨갱이들의 악의라고 반대하기까지 한다.

 

이 색깔 뒤집어씌우기는 2009년 용산재개발 철거민 살해를 진두지휘하던 경찰청장출신의 수구정당 국회의원이 시민이 선출한 대통령을 간첩이 도와 당선된 빨갱이라고 의정발언을 버젓이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시민의 인명에 무감각한 폭력행위를 정당화하는 이러한 양식의 뿌리는 그 연원이 오래된 것이다. 해방 후 이승만과 한민당에서 시작된 이들 반민주 반민족 행위자 집단이 고스란히 오늘의 수구정당의 뿌리를 이루고 있다


이 책을 오늘 다시금 읽게 되는 이유는 친일, 부역세력이나 기회주의자에게 재기할 기회를 준 민족적 정치 행위의 실패가 얼마나 끈질기게 국가 발전의 발목을 잡고 퇴행시키는지 그 근원을 파악토록 돕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이 제기하는 정신과 논리와 문제의식은 21세기 한국사회의 역사정치 인식에서 여전히 유효한 까닭이기도 하다. 새로운 시대를 위한 시민 정신의 도약을 위해 이 책의 유의미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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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의 시민들은 공정 혹은 정의를 '구조적 불평등의 심화나 사회적 약자의 불안정성 증가'에 대한 우려의 차원에서 말하곤 한다. 기득권자가 제도적 공정성을 훼손하는 행위를 할 때 대중들은 그것에 작동한 "특권, 특혜, 자의성, 예외성"등을 비난하고 바로잡기를 요구한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납득하기 불편한 공정성, 정의의 담론이 수구 언론을 비롯하여 지배 권력을 지닌 기득권자들이 이 언어를 자신들의 이익침해에 대한 분노의 언어로 여론을 장악, 호도하고 있다. 정치 검사였던 자가 '공정과 상식' 을 표방하며 어리석은 대중을 우롱하고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지 않은가?

 

때문에 이제는 공정이니 정의니 형평성이니 하는 말들이 불온한 언어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이러한 언어가 등장하면 외면하고 싶은, 불쾌한 기분이 앞선다. 일종의 피로 증후군이다. 쓸데없는 언어 낭비로 밖에 비치지 않은 것이다. 즉 시민들이 이해하고 요구하는 정의와는 다른 맥락에서 구성된 정의의 개념들이 하나의 언어 형식 속에 들어앉아 있어 공정이 마치 텅 빈 요란하기만한 수레처럼 여기게 된 것이다. 이러다보니 공정을 외치는 소리가 동네 개가 짖는 소리처럼 들리기에 이르렀다.

 

신진욱 교수는 공정 담론이란 단일 담론이 아니라 복합 담론이며, 혁명과 복고(revolution & restoration)의 모순적 공존이라 주장하면서 '헤게모니를 향한 투쟁'의 일환이라 보고 있다. 아래 도표는 2000년부터 2020년까지 국내 중앙지와 경제지에서 '공정성'을 포함하는 기사 건수의 추이를 분석한 자료이다. 조중동은 이명박, 박근혜를 잇는 보수정권 하에서는 한겨레나 경향신문과 달리 공정성에 대한 언급이 극히 낮게 언급되다가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2017년부터 급격하게 공정성에 대한 기사가 급증하기 시작해서 2019~2020년에는 그야말로 폭증했다.

 

 

 출처: 창작과 비평통권 193,더 큰 정의로 공정을 다시 쓴다, 51쪽 도표 부분 발췌

 

이 시기에 갑자기 한국사회에 불공정성이 증가했기 때문일까? 그것은 아니다. "권력을 누리며 불공정을 구축해온 검찰과 보수 언론(54)" 능력주의에 기초한 비례적 정의를 정의의 보편적 담론화하려는 헤게모니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도외시하는 것은 "좋은 삶과 좋은 사회가 무엇인가라는 가치의 문제(57)"를 기득권 지배계층을 위한 이익의 차원에서만 도모하기 때문 일 것이다. 이들의 정의는 "지배계급에 의해 간과되고 억압되는 평등적 정의(59)", "공존, 공생, 공유의 윤리를 사회에 확산하는 정의"가 아니라 격차의 확보를 통한 차별화, 능력주의에 따른 차등 보상의 공고화 등 기득권의 항구적 유지를 위한 공정을 가장한 불공정이다.

 

이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공공의대 설립계획에 반대하여 파업을 일으킨 의사들을 들 수 있다. 이들이 파업의 정당성을 내걸며 했던 말이 "공정성 따윈 안중에도 없는(55)" 문재인 정권이라며 자신들의 집단 이익을 위해 '정의(Justice)'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공정성이라는 보편성의 담론을 최상류 계층인 의사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용하며 정의의 담론을 훼손하는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득권 집단의 수구적 담론 전략'화한 복고가 시민의 건강을 담보로 한국 사회를 압도하는 것이다. "그람시(A. Gramsci)는 혁명과 복고중 어느 것이 압도하느냐가 그 사회의 미래 발전 방향을 규정한다(50)"고 한다. 비정규직 근로자는 매년 압도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사회 취약 계층 위에 군림하는 불의의 질서가 더욱 심화 고착화되고 있다. 기업의 거대화와 자본집적의 규모는 커지지만 고용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으며, 시민적 삶의 미래는 점점 불안성을 키워나가고 있기만 하다.

 

신진욱 교수는 '혁명/복고의 모순적 총체성'을 껴안고 더 큰 정의를 위해 다시 공정성을 쓰는 역사의 변증법을 말하고 있지만 불의한 것, 좋은 삶, 좋은 사회를 향한 이상에 다가가려는 정의의 세상을 추악한 이기심으로 오염시키는 불쾌한 공정성 담론이 뿌리 내릴 수 없는 토양으로 바꾸어 내야 한다. 이것은 시민 역량의 제고만이 가능하다. 시민이 앎의 의지를 회피하는 한 조중동을 비롯한 수구적 기득권 집단은 시민을 지속하여 농락할 것이다. 그것의 미래는 예속이며 노예화이다. 정의(공정성)의 담론이 더 이상 불쾌한 담론으로 감히 헤게모니 투쟁에 나설 수 없는 사회를 위해 앎의 열정이 모든 시민에게 지펴지기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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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의 역사 - 비너스, 미와 사랑 그리고 욕망으로 세상을 지배하다
베터니 휴즈 지음, 성소희 옮김 / 미래의창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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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nus & Aphrodite : History of a Goddess

 

"세상이 시작하기도 전 어둠이 끝없이 펼쳐진 밤으로부터 태어났다." -13

 

'아프로디테-비너스'로 상징되는 여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불멸하는 문화적 요소임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고대 신화에서 시작된 태고의 존재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인간의 삶 속에 살아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책은 6천년 전 동기시대(석기에서 청동기시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로부터 그리스와 로마, 중세 유럽, 근대서구사회에 이르는 여신에 부여된 이미지와 그 온갖 욕망 투사의 역사를 종단한다.

 

어쩌면 여신의 탄생은 위 인용문장처럼 인류의 출현과 그 시기가 같을 지도 모른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에 의해 잘려져 바다에 던져진 우라니아의 성기에서 출현하였다는 신화부터 수많은 버전으로 지중해 전역으로 전해진 이 여신의 탄생 신화는 바빌로니아 전쟁의 여신으로서 모두를 정복한 절대적 힘을 지닌 '이난다', 아카드 지역의 '이슈타르(Ishtar)', 페니키아에서는 '아스타르테(Astarte)'로 불리며 성과 흉포한 전쟁의 신으로서 숭배되었다고 한다. B.C.4,000~B.C3,000년에 이르는 당대의 유골에서 발견되는 폭력의 흔적들은 격렬한 전쟁의 시기였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격정과 욕망의 본성을 설명하기 위한 성과 폭력의 상징으로서 출현하였다는 것이다.

 


출처: 18쪽 전체 촬영

 

결국 전쟁 중심의 남성공동체가 주역이 되는 사회로 이전함으로써 여성과 남성이 혼재하는 신의 모습에서 남성 이미지는 자취를 감추고 여성의 이미지만 남게 되었다고 추정한다. 오늘날 키프러스로 불리는 사이프러스 섬은 다산과 강렬한 성적 특징을 지녔던 지역의 자연신과 동쪽에서 전해져 온 전쟁의 여신과 만남으로서 초기 아프로디테가 형태를 지니게 된다. 청동기 시대의 열기를 내뿜는 연금술은 아프로디테 숭배의 중심이 되는 요소로서 작용하여 열렬하고 과격하며 잔혹하지만 요동치는 세상의 가장 신성한 "사회적 야망의 총체"였다는 것이다. 당대 인간들의 마음 속 열정의 원리이자 욕망 충족의 후원적 존재로서 인간 욕망이 그대로 투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와 동방의 여신, 자연신이 믹스되어 고대 그리스의 주요 항구였던 사이프러스에 이름 그대로 아프로디테가 탄생한다. '성애와 전쟁 + 다산과 인간관계'를 주관하는 신이 탄생한 것이다. 현대인들이 지니고 있는 나체의 균형잡힌 몸으로 관능미를 뽐내는 그런 신이 아니다. 아프로디테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절대적 믿음으로서 믿거나 믿지 않거나의 선택 사항으로서가 아닌 현실적 존재로서 당대 인간들의 삶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

 

" 이 여신은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아주 쉽게 변하는 문화적 요소다," - 209

 

절대적 믿음이라는 것이 신성함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아프로디테가 이탈리아로 넘어가자 아프로디테는 비너스가 되고 성적 메타포로 가득한 매춘의 여신이 된다. 폼페이 도처에 비너스의 프레스코화가 넘쳐난다. '아프로디테 판데모스', 모두의 아프로디테가 되어 매춘과 성교의 수호자로 불리기 시작한다. 입법가 솔론이 지은 아프로디테 판데모스 신전은 시민들의 성적 충동을 관할하는 시설이었다는 것이다. 옷을 차려입던 아프로디테-비너스는 기원전 4세기부터 옷을 벗기 시작했다. 여신은 무언의 절대적 힘의 상징이 아니라 매력적 신체로, 극단적 열망과 욕망의 변명 구실이 되었다. 로마는 절대적 힘의 신성을 탐욕과 야망의 원동력으로 변질시켰다. 결국 아프로디테-비너스란 시대의 "인간행동과 윤리적, 문화적 딜레마를 반영하는 거울(110)"이었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윤리가 지배하던 중세란 여신이 지상에 머무는 거처를 밀어내고 그 위에 거대한 예배당을 올려 여신의 기억을 억누르는데 힘을 기울이던 시기이다. 아프로디테의 조각상과 회화 작품들이 훼손되던 시기이다. 이마에는 십자가를 새겨넣고, 조각에서 젖꼭지는 도려내지고 깨어지고 불태워졌다. 아프로디시아스의 화려한 아프로디테 신전은 장엄한 미카엘 성당이 되었다. 불결한 악마의 성소가 신성하다는 유일신의 교회가 되었다. 과연 아프로디테-비너스는 이러한 천박한 교조적 신앙에 의해 사라졌을까?

 

수천 년간 인간에게 자극과 위안을 주던 여성을 인간은 언제나 욕망하고 있음을, 인간의 본능적 요소를 종교가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동정녀 마리아의 외피를 두르고 아프로디테는 재탄생한다. 마리아에게는 항시 아프로디테의 허리띠, (비둘기)가 등장하여 아프로디테와 마리아가 서로 같다는 사실을 도처에 맹백히 드러내고 있다고 지적한다. 르네상스에 이르러 비너스는 "고대의 관념을 자극하고 전파하고 영원성을 부여하는 형이상학적 아름다움(169)"으로 재탄생한다. 15세기 화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처럼 후대에 영감을 준 작품은 없으리라. 조개 껍데기와 도금양 잔가지로 엮은 허리띠, 붉은 망토와 장미 등 작품 속 소재는 물론 그 아름다움과 사랑의 메타포는 오늘에도 여전히 모방과 패러디와 마케팅에 이용되고 있다.

 

이제 흥행보증수표가 된 아프로디테-비너스는 풍만한 몸매를 드러내고 완벽한 여성이라는 불가능한 이상성의 모델이 되었다. 성적 자극의 구실, 완벽한 신체, 몽상적 성애의 굴절된 돈으로 살 수 있는 존재로 전락하게 되었다. 18~19세기 화가들은 매춘부와 정부들을 대상으로 에로틱한 비너스를 그려대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19세기 근대 제국주의의 야만성은 아프리카 여성을 충격적이고 부도덕하게 묘사하는데 비너스를 차용하기 시작했다. 인종과 성차별의 거친 천박성과 탐욕스런 쾌락만이 남았다.

 

 

 

출처: 195쪽 부분 촬영

 

압제와 억압의 상징이 된 비너스. 현대 문명은 여신을 거세하는 데 열중하며, 파괴의 열망만 남았다. 그저 "인류가 투사할 수 있는 매력적 몸매의 소유자(202)"라는 "자기 충족과 자기 도취를 돕는 도구(207)"로 전락했다. 그럼에도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가진 힘으로서 아프로디테는 오늘에도 여전히 불멸하고 있다. '레이디가가'"조개껍데기 비키니"라고 노래하는 2013년 곡 비키니 에서, 바다와 풍요의 황금빛 여신으로 변신한 '비욘세'의 모습에 살아있는 여신으로 현현한다. 군사력과 전쟁의 광포한 절대자에서부터 오늘의 자기 도취의 도구적 대상에 이르기까지 고고학과 신화, 문학과 예술 작품을 넘나들며 여신의 역사를 되집으며 시대에 따른 인간의 욕망을 파헤치는 이 문화사적 기록은 우리와 우리 사회가 지금 무엇에 현혹되어 있는지를 살피는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로서 여신을 보여준다. 오늘 우리들이 잃어버린 가치는 무엇인가? 우리의 열정과 충동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떠 올리게 하는 역작(力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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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의 사물들 - 개정판
김선우 지음 / 단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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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글과 첫 인연은 2008년 장편소설 나는 춤이다에서 시작된다. 아마 작은 나비 스터커가 붙어있는 작가의 사인에서 알지 못하는 누군가인 독자에게조차 보내려했던 성심을 느꼈던 것 같다. (물론 이 나비는 소설 속 주인공인 무용가 최승희의 비유임을 안다.) 이 기억은 얼마 전 출간된 시집 내 따스한 유령들에서 시인의 따뜻한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음을, 그 시선의 파동입자가 내 마음 속에 들어앉음으로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래서 찾아 든 책이 세 번째 개정판으로 출간된 이 에세이집 김선우의 사물들이다.

 

 

 【『나는 춤이다실천문학사, 2008.7.24. 초판본 저자 사인

 


총 스무 꼭지의 에세이에서 열두 번째 걸레라는 제목을 한 에세이의 시작부분에 '사물을 소재로 글을 쓰는 일'에 대한 문장이 있다. 여기서 시인은 "사물의 속내는 그것에 말거는 내 무의식의 속내(120)"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시인이 "건넬 말을 맞아줄만한 사물을 만나야" 비로소 이루어진 언어들이다. '흩날리는 먼지 한 톨, 그저 내리는 빗방울'의 속내를 살필 수 있는 사랑, 어쩌면 "끝내 헤어질 수 없어 끊임없이 천구(天球)를 유영해가는 바람의 윤회(43)"을 헤아리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를 알아챈 티끌들의 우연한 만남, 시인의 글을 빌면 '근사한 사건'이다. 곧 이 책은 근사한 만남이 탄생시킨 "아름다운 문양(,천문의 즐거움에서)"들이라 할 수 있다.

 

촛불, 마음이 가난한 자의 노래라는 글이 있다. 나는 이 글에서 촛불을 응시하는 고양이 봄비와 함께 책상에서 한밤을 세우는 시인이 있는 하나의 회화를 본다. 촛불을 응시하는 봄비의 눈 속에 타오르는 촛불을 응시하는 그런 시인의 눈을 나는 응시한다. 시인의 시집 녹턴에 수록된 시 花飛,그날이 오면 "당신 눈동자 속 나의 눈부처를"하는 구절이 떠오른다. 무상함이 가르쳐주는 사랑, 그새 망각했던 생의 의지를 되살려내려 시도해본다. 시인은 촛불의 무욕과 무소유의 혼()을 말한다. 자신을 태워 어둠을 껴안는 스스로 영롱해지는 빛, 그 정결한 혼에 대해서.

 

젊었던 그 어느 날, 소리 없는 울음을 터뜨리며 내 입을 틀어막던 모습을 생각나게 하는 글이 있다. 못이 숫하게 박혀있는 옥탑방에 살던 시인이 하나씩 그 용도를 상상해 나가며 삶의 상처들을 "황홀한 통증의 뿌리(65)", 그 깊어진 상처로부터 피어나는 꽃을 볼 수 있게 한다. 부엌 구석 수도꼭지 위의 못의 용도를 생각하다 조그마한 사각 거울을 놓는다. 그리곤 쭈그려 앉아 양치를 하며 거울을 바라보는 젊은 날의 시인이 치솔을 입에 문 채 울고 웃는 장면을 떠올려본다. 우리네는 이렇듯 오랜동안 여기저기 박힌 상처들로 이루어져 있으리라.

 

"소라의 존재 방식은 심플하다. 그저 자기 몸 하나로 달랑 자기 거처를 삼은 이의 눈부신 가난을 들여다본다." -92, 소라껍데기, 몽유의 문에서

 

소라 껍데기를 귀에 댄 시인의 무구한 얼굴을 본다. "무소유의 개념조차 무색해지게 하는" 몸이면서 집이었던 소라 껍데기에서 고동치는 따스한 맥박을 집어내는 시인의 감각에 동화된다.

 

이 책의 글들을 사랑하게 된다. 고정관념의 위선을 드러내고 저속하고 음험한 것을 정직하게 구도하는 사물로 회복시키는 세심한 감각을 사랑한다. 더러움의 형식으로 존재하지만 정결함을 품은 '걸레' "양지를 품은 음지의 사물(121)"이라 말할 줄 아는 시인의 명민함을 사랑한다. "엄마 꽃이 비쳤어."라며 말 할 수 있도록 시인에게 연대와 보호와 축복의 느낌을 준 시인의 엄마와 가족들의 긍정과 사랑의 힘을 공유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그리고 시인 백석의 '눈알만한 잔()'의 탐미적 감각을 "치열하고 눈물겨운 생의 뒤안길이면서 최전방(150)"이라 말 하는 시인의 미학을 사랑한다.

 




그런데 시인에게 시비를 걸고 싶은 하나의 글이 있다. 부채, 집 속에 든 날개에서 "다채로우며 풍부한 감성의 맛"이라며 부채의 바람을 예찬한다. 도시 속 서늘한 냉방의 욕구를 "악순환의 폐쇄성", "이기적 속물성"이라고 힐난한다. "더위에 대한 냉방의 요구는 견딜만한 수준의 것이 아닌가."라고. 도심의 뜨거운 공기는 누군가에게는 잠깐의 불편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생사를 가르는 열기로 작용한다.

 

닭장같은 좁은 공간에 갇혀 꼼짝없이 24시간을 머물러야하는 경비노동자에게 에어컨은 생사의 장비이다. 텍배기사와 건설노동자의 체험온도는 관측기온보다 평균 20도가 높다고 한다. 열스트레스가 정치적 과제가 되고 있는 현실이다. 가슴 아픈 일이다. 부채를 부치며 한가로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은 세상이다. 이기적 속물성이라고 편협하게 정의할 수만은 없는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지 않은가? 숨 쉬는 곳이 다름을 느끼게 하는 것은 곧 차별의 언어가 된다. 시인의 숨이 여기에도 다가가기를.

 

눈시울이 붉어지고 가슴 설레기도 하며, 사람으로서의 동질감으로 감응의 깊은 심연으로 매 글마다 끌려 내려가곤 했다. 그래 당연시하는 사회, 평균화되는 사회는 폭력적이다. 그 폭력성이 넘어설 수 없는 저 너머에 가닿는 징검다리를 놓는 시인의 마음, 그 가득한 사랑을 느낀다. 이 책은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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