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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의 역사 - 비너스, 미와 사랑 그리고 욕망으로 세상을 지배하다
베터니 휴즈 지음, 성소희 옮김 / 미래의창 / 2021년 8월
평점 :
Venus & Aphrodite : History of a Goddess
"세상이 시작하기도 전 어둠이 끝없이 펼쳐진 밤으로부터 태어났다." -13쪽
'아프로디테-비너스'로 상징되는 여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불멸하는 문화적 요소임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고대 신화에서 시작된 태고의 존재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인간의 삶 속에 살아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책은 6천년 전 동기시대(석기에서 청동기시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로부터 그리스와 로마, 중세 유럽, 근대서구사회에 이르는 여신에 부여된 이미지와 그 온갖 욕망 투사의 역사를 종단한다.
어쩌면 여신의 탄생은 위 인용문장처럼 인류의 출현과 그 시기가 같을 지도 모른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에 의해 잘려져 바다에 던져진 우라니아의 성기에서 출현하였다는 신화부터 수많은 버전으로 지중해 전역으로 전해진 이 여신의 탄생 신화는 바빌로니아 전쟁의 여신으로서 모두를 정복한 절대적 힘을 지닌 '이난다', 아카드 지역의 '이슈타르(Ishtar)', 페니키아에서는 '아스타르테(Astarte)'로 불리며 성과 흉포한 전쟁의 신으로서 숭배되었다고 한다. B.C.4,000~B.C3,000년에 이르는 당대의 유골에서 발견되는 폭력의 흔적들은 격렬한 전쟁의 시기였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격정과 욕망의 본성을 설명하기 위한 성과 폭력의 상징으로서 출현하였다는 것이다.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1/0905/pimg_7290341033093522.jpg)
【출처: 18쪽 전체 촬영】
결국 전쟁 중심의 남성공동체가 주역이 되는 사회로 이전함으로써 여성과 남성이 혼재하는 신의 모습에서 남성 이미지는 자취를 감추고 여성의 이미지만 남게 되었다고 추정한다. 오늘날 키프러스로 불리는 사이프러스 섬은 다산과 강렬한 성적 특징을 지녔던 지역의 자연신과 동쪽에서 전해져 온 전쟁의 여신과 만남으로서 초기 아프로디테가 형태를 지니게 된다. 청동기 시대의 열기를 내뿜는 연금술은 아프로디테 숭배의 중심이 되는 요소로서 작용하여 열렬하고 과격하며 잔혹하지만 요동치는 세상의 가장 신성한 "사회적 야망의 총체"였다는 것이다. 당대 인간들의 마음 속 열정의 원리이자 욕망 충족의 후원적 존재로서 인간 욕망이 그대로 투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와 동방의 여신, 자연신이 믹스되어 고대 그리스의 주요 항구였던 사이프러스에 이름 그대로 아프로디테가 탄생한다. '성애와 전쟁 + 다산과 인간관계'를 주관하는 신이 탄생한 것이다. 현대인들이 지니고 있는 나체의 균형잡힌 몸으로 관능미를 뽐내는 그런 신이 아니다. 아프로디테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절대적 믿음으로서 믿거나 믿지 않거나의 선택 사항으로서가 아닌 현실적 존재로서 당대 인간들의 삶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
" 이 여신은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아주 쉽게 변하는 문화적 요소다," - 209쪽
절대적 믿음이라는 것이 신성함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아프로디테가 이탈리아로 넘어가자 아프로디테는 비너스가 되고 성적 메타포로 가득한 매춘의 여신이 된다. 폼페이 도처에 비너스의 프레스코화가 넘쳐난다. '아프로디테 판데모스', 모두의 아프로디테가 되어 매춘과 성교의 수호자로 불리기 시작한다. 입법가 솔론이 지은 아프로디테 판데모스 신전은 시민들의 성적 충동을 관할하는 시설이었다는 것이다. 옷을 차려입던 아프로디테-비너스는 기원전 4세기부터 옷을 벗기 시작했다. 여신은 무언의 절대적 힘의 상징이 아니라 매력적 신체로, 극단적 열망과 욕망의 변명 구실이 되었다. 로마는 절대적 힘의 신성을 탐욕과 야망의 원동력으로 변질시켰다. 결국 아프로디테-비너스란 시대의 "인간행동과 윤리적, 문화적 딜레마를 반영하는 거울(110쪽)"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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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윤리가 지배하던 중세란 여신이 지상에 머무는 거처를 밀어내고 그 위에 거대한 예배당을 올려 여신의 기억을 억누르는데 힘을 기울이던 시기이다. 아프로디테의 조각상과 회화 작품들이 훼손되던 시기이다. 이마에는 십자가를 새겨넣고, 조각에서 젖꼭지는 도려내지고 깨어지고 불태워졌다. 아프로디시아스의 화려한 아프로디테 신전은 장엄한 미카엘 성당이 되었다. 불결한 악마의 성소가 신성하다는 유일신의 교회가 되었다. 과연 아프로디테-비너스는 이러한 천박한 교조적 신앙에 의해 사라졌을까?
수천 년간 인간에게 자극과 위안을 주던 여성을 인간은 언제나 욕망하고 있음을, 인간의 본능적 요소를 종교가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동정녀 마리아의 외피를 두르고 아프로디테는 재탄생한다. 마리아에게는 항시 아프로디테의 허리띠, 새(비둘기)가 등장하여 아프로디테와 마리아가 서로 같다는 사실을 도처에 맹백히 드러내고 있다고 지적한다. 르네상스에 이르러 비너스는 "고대의 관념을 자극하고 전파하고 영원성을 부여하는 형이상학적 아름다움(169쪽)"으로 재탄생한다. 15세기 화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처럼 후대에 영감을 준 작품은 없으리라. 조개 껍데기와 도금양 잔가지로 엮은 허리띠, 붉은 망토와 장미 등 작품 속 소재는 물론 그 아름다움과 사랑의 메타포는 오늘에도 여전히 모방과 패러디와 마케팅에 이용되고 있다.
이제 흥행보증수표가 된 아프로디테-비너스는 풍만한 몸매를 드러내고 완벽한 여성이라는 불가능한 이상성의 모델이 되었다. 성적 자극의 구실, 완벽한 신체, 몽상적 성애의 굴절된 돈으로 살 수 있는 존재로 전락하게 되었다. 18~19세기 화가들은 매춘부와 정부들을 대상으로 에로틱한 비너스를 그려대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19세기 근대 제국주의의 야만성은 아프리카 여성을 충격적이고 부도덕하게 묘사하는데 비너스를 차용하기 시작했다. 인종과 성차별의 거친 천박성과 탐욕스런 쾌락만이 남았다.
【출처: 195쪽 부분 촬영】
압제와 억압의 상징이 된 비너스. 현대 문명은 여신을 거세하는 데 열중하며, 파괴의 열망만 남았다. 그저 "인류가 투사할 수 있는 매력적 몸매의 소유자(202쪽)"라는 "자기 충족과 자기 도취를 돕는 도구(207쪽)"로 전락했다. 그럼에도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가진 힘으로서 아프로디테는 오늘에도 여전히 불멸하고 있다. '레이디가가'의 "조개껍데기 비키니"라고 노래하는 2013년 곡 〈비키니 〉에서, 바다와 풍요의 황금빛 여신으로 변신한 '비욘세'의 모습에 살아있는 여신으로 현현한다. 군사력과 전쟁의 광포한 절대자에서부터 오늘의 자기 도취의 도구적 대상에 이르기까지 고고학과 신화, 문학과 예술 작품을 넘나들며 여신의 역사를 되집으며 시대에 따른 인간의 욕망을 파헤치는 이 문화사적 기록은 우리와 우리 사회가 지금 무엇에 현혹되어 있는지를 살피는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로서 여신을 보여준다. 오늘 우리들이 잃어버린 가치는 무엇인가? 우리의 열정과 충동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떠 올리게 하는 역작(力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