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의 사물들 - 개정판
김선우 지음 / 단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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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글과 첫 인연은 2008년 장편소설 나는 춤이다에서 시작된다. 아마 작은 나비 스터커가 붙어있는 작가의 사인에서 알지 못하는 누군가인 독자에게조차 보내려했던 성심을 느꼈던 것 같다. (물론 이 나비는 소설 속 주인공인 무용가 최승희의 비유임을 안다.) 이 기억은 얼마 전 출간된 시집 내 따스한 유령들에서 시인의 따뜻한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음을, 그 시선의 파동입자가 내 마음 속에 들어앉음으로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래서 찾아 든 책이 세 번째 개정판으로 출간된 이 에세이집 김선우의 사물들이다.

 

 

 【『나는 춤이다실천문학사, 2008.7.24. 초판본 저자 사인

 


총 스무 꼭지의 에세이에서 열두 번째 걸레라는 제목을 한 에세이의 시작부분에 '사물을 소재로 글을 쓰는 일'에 대한 문장이 있다. 여기서 시인은 "사물의 속내는 그것에 말거는 내 무의식의 속내(120)"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시인이 "건넬 말을 맞아줄만한 사물을 만나야" 비로소 이루어진 언어들이다. '흩날리는 먼지 한 톨, 그저 내리는 빗방울'의 속내를 살필 수 있는 사랑, 어쩌면 "끝내 헤어질 수 없어 끊임없이 천구(天球)를 유영해가는 바람의 윤회(43)"을 헤아리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를 알아챈 티끌들의 우연한 만남, 시인의 글을 빌면 '근사한 사건'이다. 곧 이 책은 근사한 만남이 탄생시킨 "아름다운 문양(,천문의 즐거움에서)"들이라 할 수 있다.

 

촛불, 마음이 가난한 자의 노래라는 글이 있다. 나는 이 글에서 촛불을 응시하는 고양이 봄비와 함께 책상에서 한밤을 세우는 시인이 있는 하나의 회화를 본다. 촛불을 응시하는 봄비의 눈 속에 타오르는 촛불을 응시하는 그런 시인의 눈을 나는 응시한다. 시인의 시집 녹턴에 수록된 시 花飛,그날이 오면 "당신 눈동자 속 나의 눈부처를"하는 구절이 떠오른다. 무상함이 가르쳐주는 사랑, 그새 망각했던 생의 의지를 되살려내려 시도해본다. 시인은 촛불의 무욕과 무소유의 혼()을 말한다. 자신을 태워 어둠을 껴안는 스스로 영롱해지는 빛, 그 정결한 혼에 대해서.

 

젊었던 그 어느 날, 소리 없는 울음을 터뜨리며 내 입을 틀어막던 모습을 생각나게 하는 글이 있다. 못이 숫하게 박혀있는 옥탑방에 살던 시인이 하나씩 그 용도를 상상해 나가며 삶의 상처들을 "황홀한 통증의 뿌리(65)", 그 깊어진 상처로부터 피어나는 꽃을 볼 수 있게 한다. 부엌 구석 수도꼭지 위의 못의 용도를 생각하다 조그마한 사각 거울을 놓는다. 그리곤 쭈그려 앉아 양치를 하며 거울을 바라보는 젊은 날의 시인이 치솔을 입에 문 채 울고 웃는 장면을 떠올려본다. 우리네는 이렇듯 오랜동안 여기저기 박힌 상처들로 이루어져 있으리라.

 

"소라의 존재 방식은 심플하다. 그저 자기 몸 하나로 달랑 자기 거처를 삼은 이의 눈부신 가난을 들여다본다." -92, 소라껍데기, 몽유의 문에서

 

소라 껍데기를 귀에 댄 시인의 무구한 얼굴을 본다. "무소유의 개념조차 무색해지게 하는" 몸이면서 집이었던 소라 껍데기에서 고동치는 따스한 맥박을 집어내는 시인의 감각에 동화된다.

 

이 책의 글들을 사랑하게 된다. 고정관념의 위선을 드러내고 저속하고 음험한 것을 정직하게 구도하는 사물로 회복시키는 세심한 감각을 사랑한다. 더러움의 형식으로 존재하지만 정결함을 품은 '걸레' "양지를 품은 음지의 사물(121)"이라 말할 줄 아는 시인의 명민함을 사랑한다. "엄마 꽃이 비쳤어."라며 말 할 수 있도록 시인에게 연대와 보호와 축복의 느낌을 준 시인의 엄마와 가족들의 긍정과 사랑의 힘을 공유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그리고 시인 백석의 '눈알만한 잔()'의 탐미적 감각을 "치열하고 눈물겨운 생의 뒤안길이면서 최전방(150)"이라 말 하는 시인의 미학을 사랑한다.

 




그런데 시인에게 시비를 걸고 싶은 하나의 글이 있다. 부채, 집 속에 든 날개에서 "다채로우며 풍부한 감성의 맛"이라며 부채의 바람을 예찬한다. 도시 속 서늘한 냉방의 욕구를 "악순환의 폐쇄성", "이기적 속물성"이라고 힐난한다. "더위에 대한 냉방의 요구는 견딜만한 수준의 것이 아닌가."라고. 도심의 뜨거운 공기는 누군가에게는 잠깐의 불편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생사를 가르는 열기로 작용한다.

 

닭장같은 좁은 공간에 갇혀 꼼짝없이 24시간을 머물러야하는 경비노동자에게 에어컨은 생사의 장비이다. 텍배기사와 건설노동자의 체험온도는 관측기온보다 평균 20도가 높다고 한다. 열스트레스가 정치적 과제가 되고 있는 현실이다. 가슴 아픈 일이다. 부채를 부치며 한가로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은 세상이다. 이기적 속물성이라고 편협하게 정의할 수만은 없는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지 않은가? 숨 쉬는 곳이 다름을 느끼게 하는 것은 곧 차별의 언어가 된다. 시인의 숨이 여기에도 다가가기를.

 

눈시울이 붉어지고 가슴 설레기도 하며, 사람으로서의 동질감으로 감응의 깊은 심연으로 매 글마다 끌려 내려가곤 했다. 그래 당연시하는 사회, 평균화되는 사회는 폭력적이다. 그 폭력성이 넘어설 수 없는 저 너머에 가닿는 징검다리를 놓는 시인의 마음, 그 가득한 사랑을 느낀다. 이 책은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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