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 이야기 3 : 건국의 진통 1780~1789 - 각자의 최선보다 모두의 차선 미국인 이야기 3
로버트 미들코프 지음, 이종인 옮김 / 사회평론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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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미국인 이야기 1~3권 통합 리뷰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미국 독립전쟁기간(1775~1783)을 전후한 13개 식민지민의 정체성 형성의 과정을 기술하고 있는 세 권의 역사서의 마지막 권이다. 남부지역 공략으로 전장을 옮긴 영국군과 아메리카 민병대- 대륙군과의 주요 전투의 전황들, 그리고 영국군의 식민지 아메리카에서의 철수를 야기한 아메리카-프랑스 연합군의 승리에 이르는 전쟁사와 연방정부의 구상 및 연방 헌법의 제정에 얽힌 13개 식민지 대표들의 신념을 구성하는 이해관계, 이념의 이상(理想)을 통해 아메리카 식민지민의 영광스러운 대의(大義)’의 실체를 추적한다.

 

1. 아메리카 독립혁명의 이질성

 

우선 영국령으로 존속하고 있던 13개 식민지의 독립 전쟁이 여느 역사적 전쟁과 차별되는 점을 눈 여겨 보아야 할 것 같다. 아메리카 식민지민은 소수의 이민족을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영국인이었다는 점이며, 국가라고 부를만한 이렇다 할 통합된 중앙 조직이 없었으며, 또한 영국과 이질적인 문화적 기반을 지니고 있는 곳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나라가 국가적 정체성을 지닌 이민족의 국가인 조선을 침입하여 종속시켜 이의 부당한 노예화로부터 독립하겠다는 것과는 아주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적, 민족적 동일성을 지닌 인민들이 모국으로부터 분리하여 별개의 독립된 국가를 새로이 수립하겠다는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다만 17세기부터 시작된 신대륙으로 이주 정착한 청교도 세대의 종교적 정신과 시간적 결과가 만들어낸 문화적 이질화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던 과정에 발생한 사건이라 이해된다.

 

이것의 발단은 수입 물품 과세라는 모국 의회의 정책에 대한 반발이라 하겠지만 이 반발은 다분히 대농장, 거대 상업(무역)상으로 대표되는 당시 지배계층 이해관계의 갈등에서 연원한 것이다. 여기에 제퍼슨이나 페인과 같은 정치 이론가들의 노예화, 독립, 자유 등을 화두로 하는 담론이 이러한 갈등에 이념적 권위를 부여했으며, 이러한 권위적 이념이 기독교 개신교 세계인 식민지민에게 독립의 당위성으로 인식, 확산된 것으로 이해된다. 특히 존재하지도 않는 국가에 대한 애국심을 강요하며, 전쟁 반대자에 대한 가혹한 처형과 재산 몰수 행위 등은 이들이 대의라고 불렀던 자유, 평등의 가치와는 동떨어진 모순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들이 자명한 천부적 권리란 부른 재산의 자유는 그래서 이들이 외쳤던 자유의 본질이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 자유는 인간 평등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전쟁 기간 중에도 대토지주의 소작농 착취는 지속되었으며, 노예무역과 인신 매매행위가 성행하였음은 결코 자유가 인정되지 않는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었으며, 투표권 역시 토지 등 일정한 재산을 소유한 백인 남성에게만 부여되었다는 점은 엘리트 지배계층의 평등에 대한 이념적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전쟁은 누가했나? 인민 대중의 大義라는 것은 정말 실재한 것일까?

 

2권에는 아메리카 민중은 대표들과 마찬가지로 분열되어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독립 전쟁에 반대했다.(2-196)”1775년의 아메리카 인민들의 독립전쟁에 대한 회의적 분위기를 전하는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메리카인들은 왜 영국군과 싸웠을까? 목숨을 잃게 될 수 있는 전장에 참여하여 눈앞의 공포에 맞서게 한 원천은 무엇이었을까는 미국인의 정신을 이해하는 데 중요 질문이라 할 수 있다.

 

전쟁기간 동원된 아메리카군 식민지 민병대 및 대륙군의 누적 병력 수는 대략 20만 명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이들 중 정규군이라 할 수 있는 대륙군의 경우 대다수는 돈을 내고 군복무를 면제받은 상류층을 대신해 입대한 사람들이었(3-97)”으며, 민병대원은 3개월의 짧은 복무기간이었다고 한다. 전쟁 중 민병대 조직을 관리하는 것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총사령관 조지 워싱턴의 탄식이나 혐오가 수시로 등장하듯이 아메리카인들의 개인적 자유와 평등에 대한 믿음은 군대라는 지배집단과 태생적 적대관계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인민 대중의 자유와 지배계층의 자유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발견케 된다. 인민 대중의 자유는 인신의 자유를 포함하는 광의의 자유이지만 지배 계층의 자유는 재산의 자유에 중점을 둔 것이다. 물론 이들이 인민 대중을 향해 식민지의 노예화라는 모국의 음모로부터 해방이라는 폭넓은 자유를 말하지만 이것은 단지 인민의 심리적 봉기를 선동하는 언어로 활용될 뿐이라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자유를 위해 모국 영국과 싸우는 병사가 되는 것은 이와는 결이 다른 문제이다.

 

자신의 생명을 요구하는 전쟁에 참여한다는 공적 요구에 부응하는 것과 개인의 자유라는 사적 욕구의 충돌, 나아가 자신의 목숨을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결코 수월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상류층을 대신해 입대보상금 10달러와 독립을 성취했을 경우 미개척지 토지 분배의 약속을 믿고 입대한 사람들이 어떤 계층이었는지를 쉽게 헤아릴 수 있다. 어쨌든 식민지 군 병력은 사회 하층 계급 및 지극히 평범한 일반 인민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미국 독립의 필연성을 주장했던 토머스 페인조차도 전투는 병사들의 성품과 영혼을 시험(2-103)”하는 도덕적 미덕의 실천장() 이었다고 했듯이 군 입대는 인민들에게 아메리카인이 된다는 것의 잔인한 고통을 의미했다는 것이다. 지역의 징병관들이 할당된 병력을 전부 대체자로 채우기도(3-106)” 했을 정도로 복무자들은 가난한자, 재산이 없는 자들로 구성하였음은 주목할 지점이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전쟁을 선언, 독려했던 당시 식민지 연합 의회의 성격을 지녔던 대륙회의 대표자들이나 주 의회 대표라는 상류 지배계층은 자신들의 이익, 즉 영국으로부터의 간섭을 배제한 독립적 이익의 추구라는 재산의 자유를 위해 이해관계 없는 인민들을 도구로 이용했다는 의미를 부정할 수 없다.

 

자유와 평등, 어떠한 속박의 강제가 없는 독립이라는 대의가 인민의 참전 의지라 설명하고 있으나, 이 영광스럽다는 독립 전쟁의 대의가 인민 대중의 의지였다고는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다만 전투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쌓아올려진 전우애와 청교도, 즉 성령에 대한 믿음 등이 전장에서 병사들의 열정과 광기의 저변이었다고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해가 될 것 같다. 사실 독립혁명전쟁을 이끌었던 지배 계층이 내건 영광스러운 대의는 그 귀결이 승리가 되었기에 가능한 언어이지 이것이 인민 대중의 그것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반()역사적 관점인 것만 같다. 영국의 일방적인 과세 부과 등 식민지민에 대한 과도한 복종의 요구가 저항의 요인이었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혁명전쟁을 결정하고 전개했던 지배계급의 실체와 인민대중의 인식과의 괴리, 그리고 이러한 양상을 낳는 당대 식민지의 사회 계급의 모순을 얘기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위대하다고 믿었기에 영광스러운이라는 수사가 가능했으며, 그럼으로써 공동의 대의였다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아메리카 백인 총인구의 19퍼센트 정도가 국왕파로 공동의 대의에 반대했으니 절대 다수의 인민이 대의에 동의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프레임으로의 이분법은 진실을 호도하기 쉽다. 어떤 다양한 이념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의 언어에 가두어 단일성으로 범주화하면 왜곡이 발생한다. 국왕파가 아니거나 이러한 파당에 대한 관념이 없는 많은 사람들의 진의는 사라지고 만다. 실제로 전쟁 중 대지주의 악착스런 착취에 소작농들의 저항, 반란 시위는 계속되고 있었으며, 이를 제압하는 것이 민병대(3-193)”의 일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일례로 소작농의 자유에 반대하면서 독립전쟁은 찬성하는 올버니 카운티의 대지주 리빙스턴가문처럼 식민지 지배계급의 평등과 자유는 그 언어의 표면과 실체적 내용과는 다른 것이었다고 해도 결코 그릇된 이해는 아닐 것이다. 소위 게릴라식 치고 빠지는 도망치기 전술과 같은 적군에 대한 피로감의 누적을 도모했던 소수의 식민지군 리더들의 용병술과 살기 힘들어 군에 입대한 인민들의 전쟁 자체에 대한 반감의 확산이 오히려 대중적 인식이었다고 하는 것이 정직한 기술이지 않을까?

 

실제 전투 병력의 동원, 식품 및 군복을 비롯한 군수 물자의 지원, 군 의료시설의 확립 등에서 각 식민지 정부나 대륙회의는 이해의 상충을 비롯해 부패와 부실이 만연했으며, 실제 제대로 된 병참의 공급이 이루어지지 않아 맨발로 전장을 걸어 다녀야 하는 병사들로부터 흐른 피로 그들이 걸은 길에는 피로 적셔져 있었다는 묘사처럼 하류 계층인 병사들에 대한 지배계급인 정부의 지원은 인색한 모습을 보인다. 아마 자신들의 자식이 전장에 참여하고 있었다면 이러한 병참상의 난맥상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비애국자로 낙인찍어 대역죄로 처벌하며 대중의 이익에 반하는 말이나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반역 은닉죄를 씌워 내부 적들을 색출, 처형 및 재산 몰수를 자행했던 것 역시 독립전쟁은 대의라는 등식을 만들기 위한 행위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이러한 아메리카 식민지의 전쟁 이면의 속사정에도 불구하고 1781년 요크타운의 대규모 전투에서 아메리카-프랑스 연합군은 영국군에게 승리함으로써 독립전쟁의 전황은 서서히 영국군의 철수로 이어진다. 8년이나 계속되었던 규율과 격리의 피로감 및 전쟁에 대한 불분명한 목적의식으로 동족과 싸워야 하는 영국군 지휘부의 감정적 이완, 전쟁 내내 지속된 영국 의회와 내각의 산만하고 무능한 전략이 결합한 식민지 반란군 진압이라는 안일한 출병은 영국의 실패로 마무리된다.

 

사실 식민지 아메리카의 승리라기보다는 영국의 자멸에 가까운 전쟁이었다고 정의하는 것이 옳은 진술이랄 수 있겠다. 영국과 아메리카가 178393일 최종 평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길고 지루했던 전쟁을 막을 내린다. 그러나 저마다의 정부조직과 의회를 가진 13개 식민지라는 이합집산의 정치, 경제적 이해관계를 하나의 국가적 기관으로 정립하는 문제는 다시금 이들을 시험 무대로 올린다.

 

3. 자유와 평등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

 

1783년 초에는 대륙군 장교들의 쿠데타 모의 움직임이 발생한다. 몇 달째 봉급 지급도 하지 않으며 전쟁 참여에 대한 약속된 보상은 물론 대륙회의가 연금 지급 반대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쿠데타로 정의하는 것에서 어떤 악의를 느끼게 된다. 이들은 권력을 지향했던 것이 아니라 단지 합당한 돈을 원했으니 이를테면 계약 이행을 요구하는 연대를 구성하는 모임에 불과했다고 여겨진다. 결국 이들에게 위협을 느낀 지역 정부의 요청으로 워싱턴의 조국에 대한 순수한 의도의 신뢰, 신성한 영예(3-262)에 대한 호소로 일단락되었으나, 각 주 정부 권력의 의혹어린 시선이 확대되는 듯 여겨지자 워싱턴은 17831219일 임시정부인 대륙회의가 있는 메릴랜드 아나폴리스에서 군사권을 대륙회의에 무조건 이양하는 상징적 행사를 한다.

 

제게 부여된 일을 끝마친 지금, 저는 위대한 작전의 무대에서 내려오고자 합니다. ....

이 장엄한 기관에 애정을 담아 작별을 고합니다. 여기서 저는 사직서를 제출하고

모든 공직에서 떠나고자 합니다,” - 워싱턴의 사직 연설 중에서, 3-263

 

 

저자는 기술한다. 독립전쟁 기간 동안 대륙회의는 군대를 전적으로 신뢰한 적은 거의 없었다.(3-264)” 워싱턴의 군대 해산에도 불구하고 대륙회의는 참전 용사들이 천하고 인색한 자들에 지니지 않는다.”며 의심스러운 조직이라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막상 인민들의 참담한 희생을 요구했던 전쟁이 승리로 귀결되자 지배계급은 안색을 바꾸기 시작한다.

 

참전 장교들에 대한 연금 지급은 사리분별 없는 낭비 되었으며, 약속되었던 토지는 지급되지 않았다. 소위 대의가 달성되자 자신들의 이익 추구라는 혁명전쟁 이전의 이기심으로 선회하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전쟁으로 인해 대륙회의가 안은 국가 부채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으며, 각 주 정부들은 저마다의 이해관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대륙회의라는 임시 정부는 부채를 갚기 위해서 수입품에 대한 관세 부과를 시도하지만 13개 식민지 정부는 대륙회의 과세권 없음을 이유로 거부한다.

 

한편 미국과 영국의 평화조약을 비롯한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던 스페인은 미시시피강 동쪽 영토와 강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주장하면서 통상조약을 요구하고, 이와 관련된 주정부들의 이해관계 대립으로 조약 체결 의도는 무위로 돌아간다. 저마다의 지역적 이해관계가 다른 주들의 이기심만으로는 재정, 상업, 각종 공공정책의 수립과 실행이 불가능한 상태이며, 셰이즈 반란이라 불리는 농민 무장 봉기가 발생하기 까지 한다. 즉 사익추구에 매몰된 지배계층인 주 정부 대표들의 위기의식은 통합된 중앙 기구의 필요성으로 이어진다.

 

1788년에 최소 7개주가 자체적으로 화폐를 발행했으며, 자체 헌법을 제정하고 전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주 정부들은 자신들의 채무를 중앙 정부에 떠넘기거나, 노예무역의 지속, 농민의 착취 등을 지속하고 이들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통합 조직의 필요가 절실해진 것이다.

 

잠시 각 주의 통치 현상을 들여다보자. 다음은 고유의 주권과 자유, 독립, 권력, 사법권을 가진 각 주의 통치 계급의 전형적 면모라 할 것이다. 13개 식민지 중 가장 큰 주인 버지니아의 경우 해당 지역 인구의 5퍼센트도 되지 않는 약 40개의 주요 가문이 법원, 의회, 정부의 주요 자리를 독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무나 자신과 같은 지위에 들어오는 것을 환영하지 않았다.(3-303)” 고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통치 계급은 인민대중에 결코 개방적인 곳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주의 자유에 대한 일면을 보면 구역질나게 역설적인 실상을 접하게 된다.


 



4. 제정 헌법의 구성과 인민에 대한 이해 - 미국인의 정체성이란?

 

전쟁 후에는 더욱 극렬하게 노예무역을 하고, 노예제를 영속화하는 정책을 확립하곤 노예에 대한 잔혹성과 참상의 현시(現示)로 백인 인민 대중이 상대적 자유에 감사케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들이 이룬 독립의 현실이다. 독립 전쟁의 도발은 어쩌면 실패하면 그만이고, 성공하면 자신들 몫의 증가라는 탐욕이 아니었을까 라는 의심을 저버릴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유에 대한 정신, 인권의 존중이란 개념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천부적 인권으로서 개인의 자유를 생각하는 인민과 재산권의 자유, 그들만의 자유를 생각하는 엘리트 지배계급의 자유의 개념에 대한 괴리는 연방 헌법 제정을 위한 논쟁에서 다시금 뚜렷한 갈등의 양상으로 표면화된다. 노예제는 재산의 중요성에 지배계급이 얼마나 집착하였는지에 대한 반증이자 자유의 조건이 무엇인가에 대한 입증이기도 하다. 즉 노예제는 재산 있는 백인의 평등, 자유민의 조건이었음을 의미한다.

 

버지니아 제헌의회의 권리장전을 보면 그들의 자유와 평등의 의미가 더욱 명료해진다. 재산을 획득하고 소유하며 행복과 안전을 추구해 획득하는 삶과 자유를 누리는 것(3-306)” 이는 주권이 제아무리 인민에게 있고, 천부적으로 동등하다고 할지언정, 재산의 획득과 소유를 하지 못한 인간은 동등할 수도 없으며, 자유도 없다는 선언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이러한 권리장전과 헌법에 대한 비준이나 거부의 기회가 인민에게 주어지지도 않았으며, 자신들끼리 결정하고, 그들만의 리그인 의회에서 그들끼리 주지사를 선출했다.

 

 

1787년 이러한 사람들이 각 주의 대표로 514일 필라델피아에 모이기로 하였으나, 버지니아 대표인 제임스 매디슨을 비롯한 5개 주의 대표만이 도착했을 뿐이었다. 즉 중앙정부 구성과 연방 헌법 제정에 많은 주가 회의적이었다는 의미이다. 매디슨이란 인물은 다수의 폭정 우려라는 이유로 인민을 신뢰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늘의 입헌 민주주의를 당연한 듯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인민을 배제한 헌법을 상상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버지니아 대표들의 면모를 보면, 판사 존 블레어, 의사 존 매클러그, 두 사람 모두 엄청난 규모의 농지를 소유한 농장주였다.((3-336)” 펜실베니아 대표인 제임스 윌슨의 면모를 볼까. 그 역시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고 금전적 수입에 욕심(3-338)”이 많았던 사람이다.

 

물론 이러한 재산가들만 헌법 제정을 위한 대표 모임에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다시 말해 중앙 정부의 권한 부여정도, 헌법의 조항 정리에 자신들에게 불이익한 내용이 끼어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중앙정부를 강력하게 하는 것이 내게 유익한가, 아니면 약한 것이 유리한가, 연방의회의 하원 선출에 있어 인구 비례로 하는 것이 유익한가, 주의 크기와 상관없이 동등하게 배분하는 것이 유익한가, 노예무역의 합법성을 적시케 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 노예를 투표인구에 포함시켜야 하는가, 그렇다면 노예 몇 명이 백인 한 명과 같은 것이어야 하는가, 투표권은 누구에게 부여해야 하는가, 상원은 누가 선출해야 하는가, 인민이 직접 선출해야 하는가, 아니면 하원이 선출할 것인가, 상원의 권리는 어디까지여야 하나, 행정부 수반은 1인이어야 하나 다수여야 하나, 수반의 권한은 무엇이어야 하나, 의회의 권리는 어디까지여야 하나 등등 모든 것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전의 양상을 띤다.

 

인구비례와 대표성으로 압축되는 논의의 쟁점은 쉽사리 합의를 이뤄내지 못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중앙정부도 없는 무정부 상태의 미국이란 이합집산의 식민지가 몰락하겠다는 위기를 감지했던 모양이다. 재정적 부담이나 선거인을 결정할 때 인구 다섯 명의 노예를 세 명의 자유인으로 본다는 각 주 평등성에 대한 논의의 예는 이들이 인민을 재산적 가치와 그 등가물로 여기고 있음을 증명하는 전형적인 일례라 할 것이다.

 

평등의 정신에 대한 메사추세츠 주의 대표인 엘브리지 게이먼의 주장을 살펴보자. 우리가 경험하는 여러 폐해는 민주주의 과도함에서 나온다.(3-349)” 이처럼 평등을 매도하는 주장이 그대로 제정 헌법에 반영되는 것은 아니지만, 인민에 대한 강한 반감은 코네티컷, 뉴욕 주등 여러 대표들의 입에서 다양한 표현으로 발설되었다. 로져 셔먼은 보통 선거에 반대(3-348)”하면서, “그들에게는 정부에 관해 알아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들은 정보를 원하지만 지속적으로 현혹된다.(3-349)”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물며 연방 하원 의원도 인민이 아닌 주 의회에서 선출해야 한다고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표인 찰스 코츠워스 핑크니는 주장했다.

 

미국의 제정 헌법이란 그들의 정체성, 이른바 그들이 얻고, 되고 싶은 얼굴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추하기 이를 데 없었다. 5월에 시작된 이들 대표들의 헌법 제정 논의는 4개월여의 논쟁 끝에 98일 종료된다. 거창한 대의를 말하며, 자유와 평등, 위대한 국가를 만들겠다는 이들이 입안한 헌법 초안을 보며 불편함과 죄책감을 느낀 이들이 물론 있었다. 이와 달리 노예 무역 보호 조항이 누락되면 헌법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사우스캐롤라이이나와 조지아 대표같은 남부 지역 주들도 있었다.

 

이러한 헌법에 대해 혐오감을 강력하게 드러낸 대표의 발언은 당시 헌법 제정 위원회 대표들이 어떤 이들의 이익을 위해 굴러가고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농장주의 비위를 맞추는 일....그런 부류의 재산을 보호하는 것은 부당하며, 노예 소유주의 이해관계를 충족시켜 주는 것은 큰 죄악(3-369)”이라며, “소유주를 비열한 폭군이라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표들 거의 대부분이 노예 소유주였으니 그네들이 말하는 대의를 꺾기에는 너무 미약했던 모양이다. 어쨌든 대표들은 917일 모두 서명을 완료하고 비준을 행위에 들어갔다.

 

1787년 이 헌법에 대한 비판은 그치지 않았던 모양이다. 독립혁명의 원칙에 헌신하지 않았다는 회의 대표자들에 대한 비난에서부터, 공공안보를 장악한 인물들에 의한 음모의 산물, 자신이 속한 계층의 주머니를 채우는데 열중한 결과물 등등 이었다. 저자 로버트 미들코프는 이러한 비난에 대해 반역사적인 편협한 시각이라고 주장한다. 현재의 기준에 놓고 맞지 않는 역사적 실재를 논의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는 것이다. 독립을 성취하고 평화가 성립되면 독립과 연관된 문제들도 변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혁명전쟁 시에 중요했던 것이 평화시에는 결코 중요한 맥락을 같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자유나 평등의 이념이 전쟁 기간과 평화의 기간에 달라져야 한다는 것은 정말 궤변이 아닐 수 없다. 독립전쟁을 왜 해야 했나? 그리고 인민 대중이 왜 이 전쟁의 중요 병력으로 참전해야 했나?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인민 대중은 문자 그대로 지배계급이 이끄는 사회를 위해 그저 소용된 한낱 도구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들 대중은 지배계급, 엘리트 담론가들이 주창했던 자유, 평등, 민주주의를 획득하기 위한 전쟁에 참여한 것이기에 평화 시에 이 시초의 목적은 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은 지배계급의 욕망, 위대한 미국이라는 대의에 끼워 맞추려는 비열한 해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당대 헌법을 거부했던 사람들의 주장에 오히려 귀를 기울이게 된다. 양원제 연방의회에 대한 지적인 듯한 헌법 뒤에 숨은 전제적인 귀족정 또는 가면을 쓴 귀족정이라거나, 권위주의적인 목표를 은폐하려는 열망에서 나온 산물(3-386)”에 가깝다는 말에 공감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석연찮은 제정 헌법은 어떻게 비준되었을까? 주 의회에서 자기들끼리 비준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인민 대중은 자신들의 권리 행사를 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야만적인 귀족 정치가 민주주의 외피를 뒤집어 쓴 것이 미국의 제정 헌법, 그네들의 정체성이라 해도 되지 않을까? 미국의 대통령 선거가 인민대중의 직접 선거가 아닌 선거인단 선출 투표가 되어 인민의 직접적인 대표자 선출을 막았던 것 역시 이 제정헌법의 소산이다.

 

선거인단은 일반 인민보다 지적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라는 인식이다. 이것을 화려한 수사로 최선보다 차선을 선택한 미국인의 슬기로움이라고 자찬한다. 오늘의 미국인, 그들의 정체성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개인주의는 사유 재산 보호의 자유와 맞물려 있으며, 인종 차별의 현재 진행형은 뿌리 깊은 백인 중심주의의 그네들의 헌법적 정신이다. 또한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권한을 독립적으로 각 주가 소유하고 있는 지역 분리적 정신은 중앙 정부인 연방과의 이해관계라는 애초의 손익판단에 의거한 당대 타협의 산물이다. 이렇듯 정치 기구의 조직 구성에 있어서 조차 그들의 실용주의는 아주 깊게 스며있다. 조지 부시, 도널드 트럼프 같은 막대한 부를 소유한 가문의 자식들이 행정권의 수반이 될 수 있는 정체성의 토대를 수긍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책은 무분별하게 미국의 정치 제도에 대한 무조건적 숭배와 도입이 지닌 결함들의 이해는 물론 오늘의 미국이라는 국가를 이해하는 귀중한 참조 문헌이라 하는데 주저치 않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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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전, 10권 131



에피쿠로스 철학에 대해 전해져오는 문헌이 워낙 적을 뿐 아니라, 그마저도 그의 철학을 접할 수 있는 우리 말 번역 자료도 극히 미미하다보니 일반적 곡해가 진실로 둔갑해 정설처럼 회자되고 있는 형편이다. 왜 그의 사상에 성적 문란과 방탕함이란 꼬리표가 붙었는지, 육체적 쾌락을 좇는 음울한 변경 조직의 쓰레기 사상이 되었는지를 확인하고픈 충동을 물리칠 수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그가 썼다고 전해오는 세 편의 편지 내용과 함께 당대 에피쿠로스를 음해, 매도하던 스토아주의자들의 거짓 소문의 진상을 말하고 있는 2세기 말 3세기 초에 써진 것으로 추정되는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철학자전혹은 그리스 철학자 열전이란 이름으로 옮겨지고 있는 책이 부분적으로 이 충동을 해소해주고 있다.

 

중세 유력 사본(寫本)중 하나는 철학자들의 생애와 학설의 집성 10으로 책이름을 가지고 있고, 책의 수록 내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철학자들 가운데 저명한 사람들의 생애와 의견 및 각 학파 학설의 요약적 집성이란 표제를 붙이고 있기도 하다고 한다. 국내 한글 번역본 또한 이들의 제목을 각기 따르고 있는데, 나남 출판에서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을 제목으로 2권으로 출간한 것이 있으며, 동서문화사에서는 영문번역 대본의 제목을 따라 그리스 철학자 열전이란 이름으로 출간되어 있다.

 

이 책은 철학 학파별로 구분하여 총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기원전 3세기 전후에 활동한 에피쿠로스는 마지막 권을 차지하고 있다. 책의 저자인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에피쿠로스에 대해 악의를 품고 있던 스토아파 인물들의 저열한 비난을 먼저 소개하고 있다.

 

1. 누가 에피쿠로스를 왜곡했나? - 스토아파의 비난

 

103절에서 8절까지 소개되고 있는 스토아파의 비난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합창가무단 무용수 출신의 냉소주의의 회의파 철학자로 불리는 티몬이란 자의 사악한 주장으로 시작된다. 이 자는 에피쿠로스를 자연 철학자들 가운데 가장 뒤처지고 창피함도 모르는 개 같은 사내(10-3)”라며 가장 환경이 나쁜 자라고 폄훼한다. 그런데 에피쿠로스는 명문 필라이다이 가문의 일원이었으며, 실제 데모크리토스를 비롯한 그 어떤 자연 철학자들보다 뛰어나며 독창적인 학문을 열었음이 입증되고 있다.

 

이러한 악의는 스토아파들에 의해 무수한 거짓말로 왜곡되어 매도된다. 마치 한국의 추한 공작 정치배들과 빼닮은 모습이다. 스토아파의 디오티모스란 자는 자신의 동료인 크리시포스(스토아파)’의 편지를 에피쿠로스의 것으로 편집(*무려 50통을 위조하였단다)하여 기만적 비난을 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창녀 레온티온에게 나의 구세주이고 주인인 분이여, (...) 나의 사랑스런 티온이여라고 편지를 썼다든가, 유부녀인 테미스타에게 만일 당신이 나에게 와주시지 않는다면 나 자신은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으므로 (...) 어디라도 달려 갈 준비가 되어있습니다.(10-5)”라며 외설스런 사내라고 조작하여 매도하는 식이다. 이에 가세하여 포세이도이오스, 니콜라오스, 소티온, 테오도로스 등 스토아파 인물들은 에피쿠로스의 쾌락과 원자(아톰)에 대한 사상은 남의 것을 훔쳐 쓴 것에 불과한 아무런 사상도 없는 것이라 비난하곤 매춘부 뚜쟁이란 낙인까지 찍어댔다고 한다. 또한 에피쿠로스의 철학 정원에는 역겨운 비밀 의식(秘儀)을 행하는 곳이라는 누명까지 씌워댔다는 것이다.

 

이 책이 써진 연대를 서기 2세기 말에서 3세기 중엽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는데, 당시는 기독교가 스토아 철학과 융합하여 자신들의 사상적 토대를 구축하던 시기이다. 원자론을 말하는 자연철학인 에피쿠로스에 대한 탄압이 극에 이를 때였다는 점에서 스토아파 인물들의 왜곡된 비난이 얼마나 억척스럽게 가해졌는지를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저자 디오게네스는 이들의 비난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에피쿠로스를 비방하고 있는 사람들은 상도(常道)를 벗어나고(10-9)”있으며, 그 어느 누구도 미치지 못할 친절과 고귀한 학문적 성취를 이룬 인물이었음을 당대의 증거들을 통해 반박 지적하고 있다. 그를 찬양하여 아테네에 세워진 동상, 다른 모든 학파의 학통이 끊어졌으나 여전히 많은 제자들에 의해 이어지는 학통과 헤아릴 수 없는 학두(學頭)의 배출을 사실로 들고 있다.

 

남 몰래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이 1 만 번이나 발견되지 않고 있다고

앞으로도 발견되지 않을 것이라 믿는 것은 불가능하다.

발견 되지 않고 있을 수 있는지의 여부는 삶을 마칠 때까지 모르기 때문이다.” (10-35)

 

특히 에피쿠로스의 편지글은 시작될 때 사용하는 인사말의 특이성을 예로 들며, 스토아파들을 비롯한 에피쿠로스 철학의 적대자들이 저지른 위선을 비판한다. 이러한 거짓은 반드시 드러나고 말 것이라는 에피쿠로스의 문장만이 한 위대한 철학자의 고귀한 정신을 드러낼 뿐이다. 부정과 기만을 밥 처먹듯 하는 오늘 한국 사회의 수구 정치배들에게 들려주고픈 대목이다.

 

 

2. 에피쿠로스가 직접 쓴 쾌락의 의미

 

에피쿠로스가 남긴 편지는 감각과 선취관념이 진리기준임을 설명하는 헤로도토스에게 보내는 편지, 자연의 탐구에 대해 말하는 피토클레스에게 보내는 편지, 그리고 윤리학을 말하는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세 통이 전부이다. 이 중에서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낸 편지가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삶의 목적으로서 평정심(아타락시아), 즉 쾌락에 대한 에피쿠로스 사상의 정수(精髓)를 이해토록 돕는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첫째의 선()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사람은 쾌락을 출발점으로 해서 모든 선택과 기피를 행하기 때문(10-129)”이라고 주장한다. 이 쾌락은 J.S.밀의 공리주의자들의 쾌락과 흡사하다. 쾌락이라고 무조건 선택하는 것은 아니라며 불유쾌를 초래할 쾌락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회피한다고 한다. 또한 고통(괴로움)의 인내도 보다 큰 쾌락을 얻을 수 있다면 감수한다는 것이다. 결국 쾌락과 괴로움을 상호 비교 측정하여 판단하는 것이 적절한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자신의 쾌락에 대한 개념은 방탕자들이나 성적 향락 속의 쾌락이 아니라 몸의 고통과 정신()의 동요가 없는 건강과 평정임을 거듭 역설한다. 이 말은 공복 일 때 빵 한 덩이가 최고의 쾌락이듯 불유쾌, 고통을 벗어나는 검소와 절제로서의 자연스러운 필요로서의 즐거움, 행복이다.

 

나아가 그는 덕을 선택하는 것도 건강을 위해 의술을 택하듯 쾌락 때문이지 결코 덕 그 자체를 위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한편 정신은 삶에 관한 두려움을 몰아낼 때 완전한 삶으로 이행될 수 있으므로 정신적 동요를 가져오는 대상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며, 이는 그의 자연 철학으로 이어진다. 자연에 대한 탐구는 인간의 욕망을 투여한 신에 대한 자의적 믿음이 아니라 관찰과 경험을 통한 자연의 이치를 밝힘으로서 이를 극복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3. 에피쿠로스의 자연 탐구

 

에피쿠로스의 자연 탐구는 사람의 정신을 동요시키는 왜곡된 신의 상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는 신이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라고 지적하며, 사람들이 믿고 있는 신들을 부인하는 불경신(不敬神)인 사람은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고(思考)를 신에게 밀어 붙이고 있는 자들이 오히려 불경신의 사람인 것(10-123)”이라고 힐난한다. 그러면서 신의 불멸성과 지복성을 유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신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그의 사상에 신을 부정하는 무신론이란 이미지를 뒤집어씌운 이유도 바로 이러한 주장의 곡해일 것이다.

 

아마 그의 자연 철학의 중심이 되는 원자(Atom), 즉 유물론적 사상의 기독교 교리와의 상충을 합리화하기 위한 스토아파들의 의도적 왜곡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다음의 문장은 기독교를 자극하는 주장이었을 것이다. ()에서는 아무것도 출현하지 않는다.(10-38)”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무엇이든 어디서나 생기고 사물이 생기기 위한 원인은 아무것도 필요치 않기 때문이라고 선언한다.

 

그는 만유는 언제나 지금 존재하는 것이었으며, 물체와 공허로 이루어져 있다.(10-39)”고 주장했다. 특히 물체와 공허 외에는 완전한 실재로서 파악되는 것이고, 이것의 우유성(偶有性)이나 속성으로 일컬어지는 것으로서 파악되는 것이 아닌 것은 상상에 의해서건, 상상되는 것과의 비교에 의해서건 아무것도 생각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만유의 구성인 물체의 근본이라 한 원자가 출현한다. 물체의 시원(始原)은 불가분한 본성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므로 공허가 장소를 양보한 영원히 운동하는 불가분으로 충실한 것으로서 원자를 말한다. 원자의 운동에 관한 두 가지 형태로서 상호 일정한 거리를 둔 운동과 진동을 계속하는 운동으로 구분하고 있다. 물론 현대 물리학에는 한참이나 미치지 못하지만 2,300년 전의 고대 학자의 사유로는 가히 빼어난 지적 사유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사람이 인식하는 사물의 표상을 사물 자체의 일종의 모방이 우리에게 와서 제각기 상응한 크기에 따라 시각이나 정신에 잠입하는 것이라는 이해는 쇼펜하우어나 칸트 철학에서 말하는 물자체인 실재와 표상의 인식과 한참이나 거리가 먼 저급한 수준의 성찰이라 할 수 있지만, 인식론이라 할 수 있는 사유를 시도했다는 측면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빼어난 인식을 발견 할 수도 있는데, 원자의 어떤 합성물인 집합체 가운데서 끊임없이 상호 충돌하는 아톰 운동의 연속성을 감각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라든가, 소리의 지각 성립에서도 소리를 구성하는 입자인 유체의 운반에 따른 것과 같은 사유이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죽음은 존재하지 않고 있는 것이고,

죽은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산 자나 죽어버린 자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10-125)

 

이것(원자 이론)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정신의 동요가 빚어내는 사람의 고통이 근원 없는 것이라는 데로 이어진다. 사람의 육체라는 물체란 원자의 우연한 결합이라는 점이다. 또한 선이나 악은 감각에 속하는 것이고 죽음이란 이 감각을 잃는 것, 결합 원자의 해체일 뿐이라는 인식이다. 감각의 부재는 곧 두려움의 부재이기도 하다. 죽음의 본질인 이 감각 부재를 이해한다면 삶에서 두려움, 정신의 동요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원자론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과 함께 별도의 감상으로 미루어두어야 할 것 같다.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즉 고통을 벗어나 평정심이라는 행복의 영속을 위한 방법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철학은 자연에 대한 철저한 탐구를 통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향한 치유(治癒)적 사유이다. 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유물론적 사유가 싹 텄으며, 후일 그의 사상이 마르크스라는 인간을 통해 비결정론적 원자론, 마주침의 유물론의 토대가 되었음을 안다면 꽤나 기뻐하지 않았을까? 박해 속에서 살아남은 한 저작으로나마 고귀한 사유의 모퉁이를 읽을 수 있도록 한 인류의 지성들에게 보내는 경외는 항상 미흡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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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나룻배 2022-03-18 18: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필리아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우연히 본 리뷰글을 감명깊게읽었습니다!

필리아 2022-03-18 18:1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꿈꾸는나룻배‘님~,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은 우주의 시원성에 대한 사유, 특히 ‘클리나멘‘이 오늘의 사람들에게 주는 영감이 무엇보다 소중하죠. 원자들의 미세한 빗겨남으로 마주치는 그 우발성의 결합, 이것은 정말 인간 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이라 할 수 있답니다. 지금 우발적 마주침의 유물론을 성찰한 마르크스의 박사학위 논문을 읽고 있어요. 즐겁고 평안한 시간 되십시요 :)
 
아킬레우스의 노래 (리커버 특별판)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이봄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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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분노보다 더 강한 것이 그에 대한 그리움이다. 죽은 자가 아닌 산 자의 이야기,

신이 아닌 인간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싶다.” -425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되어 폭력적 힘의 충동들이 넘실대는 피비린내 나는 전장(戰場)의 묘사로 가득하다. 파멸적 죽음들, 무참한 살해의 힘만이 위세를 지닌, 그 어느 곳에서도 생명의 미덕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내려앉아 있다.

 

작가 매들린 밀러는 이처럼 눈먼 힘의 영광에 도취된 전쟁의 신() 아킬레우스에게 인간 냄새 물씬한 생명의 에너지를 불어넣음으로써 분노와 증오 대신에 관용과 사랑의 미덕을 지닌 인간적 존재로 복원해 내고 있다. 아마도 다음의 문장은 서사시 일리아스의 유일하다싶은 애절한 장면일 것이다. 아킬레우스의 투구와 갑옷을 입고 전장을 누비다 헥토르에게 살해당한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비통해하는 아킬레우스의 슬픔이 그것이다.

 

다른 어떤 벗보다 소중히 여기고 제 몸과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던 친구를 죽게 한....”

- 일리아스18아킬레우스의 슬픔에서

 

이 인용 문장은 아킬레우스가 어머니인 여신 테티스에게 자신의 슬픔을 하소연하는 구절이다. 매들린의 소설은 이 장면이야말로 힘과 사물화라는 전장의 단조로운 서사시에 사랑과 관용이라는 숨을 불어 넣을 수 있는 단서라 여겼을 것이다. ‘아킬레우스의 분노라고도 할 수 있는 일리아스 비에 젖은 흙냄새처럼 피어오르는 추억(425)”의 노래, 샘물처럼 솟아나는 사랑의 노래가 되어 힘에 대한 욕망과 타자의 물질화라는 죽음의 세계로부터 인간 영혼의 미덕들을 풍부하게 되살려 놓는다.

 

일리아스에는 파트로클로스아킬레우스가 자신의 몸과 마찬가지로 소중히 생각할 수 있는 존재, 어느 벗보다 더 귀한 존재라고 여기게 된 단서가 존재하지 않지만, 소설은 두 사람의 관계가 형성되는 어린 시절의 일화로 시작하여 자괴감으로 위축되고 작은 분노로 주변 인간들을 경계하는 파트로클로스에게 프티아의 왕자이자 여신 테티스의 아들인 아킬레우스가 손을 내밀고, 우정과 믿음의 관계를 키워나가는 연인으로 그려낸다.

 

특히 소설은 파트로클로스에게 화자(話者)의 임무를 부여함으로써 아킬레우스를 체온이 있는 인간적 존재로 친밀하게 다가오게 한다. 이 작품의 흥미로움은 아리스토스 아카이오이, 무적의 전쟁 신, 그리스 최고의 위대한 전사(戰士)로서 트로이 전쟁에 참여하기 전의 아킬레우스를 그려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아손등 무수한 영웅을 가르친 켄타우로스(半人半馬)케이론으로부터 관용의 미덕을, 여신 테티스의 파트로크로스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아들과의 관계를 방해하는 어머니로서의 이기심을, 더구나 신들의 예언된 죽음으로부터 아들을 구하기 위해 여장을 시켜 피신시키는 행위나, 후일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를 살해하여 전쟁을 종식시키는 아킬레우스의 아들 피로스의 출생 비화를 그려주기도 한다.

 

테티스의 파트로클로스에 대한 증오에 가까운 부정은 트로이 전쟁의 참여가 곧 아들의 죽음을 의미하는 까닭에 그와 아들의 친밀감과 유대감 강화는 그녀를 괴롭히는 관계였을 것이다. 아마 이 작품 중 가장 시선을 끈 인물 중의 하나라면 단연 브리세이스를 꼽을 수 있다. 트로이 제후국 기습 전쟁의 전리품 분배에서 아킬레우스가 선택한 여인이다. 브리세이스는 그리스 연합군의 분열을 초래하는, 바로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야기케 하는 발단이다.


 



포획된 여인들이 아가멤논의 수중에 들어갈 경우의 처참한 처우를 사전에 차단하여 그녀들에게 사람으로서의 삶의 영위라는 안위를 제공하기 위한 파트로클로스의 부탁이기에 아킬레우스가 기꺼이 선택한, 즉 아리스토스 아카이오로서 아킬레우스가 우선 선택권을 주장해서 취한 여인이다. 아킬레우스의 명예를 건 전리품의 성격을 지닌 여인이란 의미이다.

 

후일 아가멤논은 아폴론의 사제 여식을 취함으로 빚어진 신들의 징벌을 피하기 위해 사제의 여식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아킬레우스의 주장에 보복하기 위해 브리세이스를 빼앗아 그를 모욕하는 사건이 된다. 트로이 전쟁의 명분이 헬레네였다면, 브리세이스는 그리스 연합군의 패배까지 몰고 올 분열의 이유라 할 수 있다. 브리세이스의 파트로클로스를 향한 사랑은 아킬레우스를 향한 파트로클로스의 사랑과 대비되어 생명과 불모의 기묘한 해결책을 넌지시 암시한다. 이를 동성애에 대한 작가의 긍정적이고 우호적인 대안이라고 보아도 되지 않을까?

 

아이도 낳고 싶지 않아요? (...) 나는 그녀의 본심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나의 무심함에 당황스러워 얼굴이 화끈 거렸다.” -311

 

이 소설이 독자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고 우리들의 메마른 욕망이 상실한 것을 일깨우는 사자(死者)인 파트로클로스의 영혼이 여신 테티스에게 들려주는 말을 빼놓을 수 없다. 그녀의 냉정함이 아들을 망쳐 놓았음을, 아킬레우스의 죽음이 진정 무엇을 남겨 놓았는지 제대로 들여다 볼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헥토르를 죽이고 트로이를 멸망시키는 것이 잔인함과 죽음의 자취 말고 무엇이 있는가하고. 남의 목숨을 빼앗는 절제되지 않는 힘의 충동이 과연 영광이고 명예인가라는 물음이다.

 

파트로클로스의 영혼은 말한다. 아킬레우스가 프리아모스에게 그의 아들 헥토르의 시신을 관대하게 넘겨주었음을 테티스에게 지적하면서, 삶의 열망을 지워버림으로써 죽음을 무릅쓴 전사의 명예를 초월했었음을. 인간에 대한 사랑, 생명의 존중을 그 무엇으로 부정할 수 있겠는가라고. 타인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야만적 폭력성, 그 힘의 찬양이 어느 따사로운 햇빛 아래 리라를 켜는 소년의 사랑스런 몸짓의 추억보다 영원한 것인가라는 물음에 우리는 무어라 답할 수 있을까?

 

모욕의 분노로 몸서리치는 아킬레우스를 대신하여 그의 명예를 위해, 연인으로서 그를 보호하기 위해, 사랑을 위해, 기꺼이 출전하는 파트로클로스의 노래가 아름다운 추억의 노래가 되어 들려진다. 일리아스의 21세기 버전인 이 작품은 우리들이 잊고 있는 것들의 가치가 무엇인지, 갖추어야 할 미덕이란 무엇인지를 나지막하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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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2-03-15 2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일리아스 다시 읽기 하는데 메들린 밀러 작가가 묘사한 아킬레우스가 궁금해집니다~~

필리아 2024-09-05 10:09   좋아요 1 | URL
예고된 죽음은 타자의 생명에 대해 무심하게 하죠, 분노와 예정된 죽음은 자신을 돌아보는 역량을 손상시킬거예요, 이를 기억시키려는 이가 파트로클로스랍니다, 사랑의 힘으로서..., 아름다운 연가이자 슬픈 추억의 노래이기도 하답니다.
 
에피쿠로스의 네 가지 처방 - 불안과 고통에 대처하는 철학의 지혜
존 셀라스 지음, 신소희 옮김 / 복복서가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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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고통에 대한 철학적 지혜 -

 


이 책이 눈에 띈 가장 근원적 계기는 철학자 강신주의 철학 vs 실천에서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들의 우연한 마주침에 대한 언급이었고, 이어서 피터 존스의 저서 복스 포풀리10장의 스토아주의와 에피쿠로스주의에 대한 고대 그리스 철학에 대한 비평으로 촉발된 호감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존 셀라스의 이 작은 소책자는 양적 빈곤과 인간 보편에 대한 삶의 고통 처방이라는 내용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에피쿠로스는 물론 그와 사상을 같이하는 철학 저술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측면에서 실로 소중한 참고 저작이 아닐 수 없다.

 

 

독서의 동기에서 이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서구 정신문명을 오랫동안 장악했던 기독교가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무신론, 부도덕, 감각적 탐닉'을 추구하는 저열한 사상으로 매도하여 인류 사상사에서 지워버리려 했다는 학문적 반감도 에피쿠로스 사상에 대한 연민을 강화한 것이 사실이다. 원자론이라는 유물론적 세계관에 기초한 사물의 우연적 결합과 출현, 죽음의 감각 부재 해석, 고통의 해방으로서 쾌락(정적인 정신적 쾌락, 평정을 의미)과 같은 에피쿠로스 철학의 주장은 기독교 교리와 융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인류의 중요한 사상적 줄기를 소멸시키려 했다는 점은 정말 무서운 폭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도 않았으며감각적 쾌락을 추구하기는커녕 금욕주의 사상에 가깝기까지 하다더구나 부도덕하다는 누명은 무엇에 씌운 것인지조차 알 길이 없는 왜곡이다

 

 

어쨌든 이 책에서 에피쿠로스의 쾌락의 본질을 읽을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쾌락은 정신적 쾌락, 고통을 벗어남으로써 얻게 되는 '마음의 평정(ataraxia)'이다. 배고픔, 추위, 아픔과 같은 피하고 싶어 하는 조건에서 벗어난 상태를 추구하여 만족한 상태를 목표로 하는 소박한 상태이다. 육체적 쾌락의 탐닉과는 멀어도 한참이나 먼 관념이다.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 정신적 동요에 의한 염려와 불안을 덜어내고 삶의 행복을 증진시키려는 실천적 노력의 일환이랄 수도 있다. 특히 대부분의 정신적 염려가 야기하는 근심과 고통이란 당사자 자신이 자초한 내적 고통이라고 판단했기에 그는 쇼펜하우어의 통제 불가능한 의지와 달리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음을 이해 할 수 있다.

 

 

사물과 현상을 실재케 하는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맹목성의 의지이기에 이로부터 발생하는 고통은 인간의 지성이 통제할 수 없는 무엇이지만, 에피쿠로스의 고통은 개선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 본질을 달리한다. 이 개선의 가능성이 불가능하다고 했다면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존재할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이러한 출발점에서 고통에 대처하여 평정심을 갖는 에피쿠로스의 철학적 지혜를 풀어 놓는다. 즉 평정(ataraxia)에 이르는 길을 필요에 의한 만족’, ‘우정의 중요성’, ‘자연 탐구의 필요’, ‘죽음에 대한 인식’, 그리고 원자론을 통해 안내한다.

 

"충분함이 모자란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것도 충분하지 못하다."  -52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 '만족하는 건 불가능해. 가진 게 많을수록 욕구가 높아지거든', 많은 돈과 재산을 쌓았음에도 그 욕망은 만족할 줄 모르고, 더 많이 가진 자를 시샘하고 질투하며 불쾌를 멈추지 않는다. 이 부단한 결핍감, 얼마나 가져야 만족할 수 있을까? 그는 필요에 의한 만족을 자연스러운 필요자연스러운 불필요로 구분하여, 이를테면 잘 차려진 고급 음식과 와인, 해외 명품 브랜드의 의상과 악세사리, 고가 주택 과 같은 자연스러운 삶의 필요를 넘어서는 불필요의 영역을 손에 넣지 못했다고 짜증내며 불만족의 고통을 호소하는 부단한 욕망을 지적한다.

 

 

에피쿠로스가 이렇듯 불필요한 욕망에 쉽게 사로잡히는 대다수의 운 좋은 사람들의 향유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출근길 손에 든 커피처럼 익숙함과 습관적 아이템으로 여기도록 된 것들을 돌아보면 우리 욕망의 방향을 변화시키는 것, 절제의 요구가 가능함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소유하기 보다는 보다 큰 자족의 곳간을 발견하는 데 주의를 돌리면 보다 큰 만족을 얻으리라 주장한다.

 




"우정은 온 세상을 에워싸고 춤추며 우리 모두가 그 축복을 깨닫도록 일깨운다."

- 에피쿠로스바티칸 금언52, 본 책 72

 

 

속된 표현이 되겠지만 행복의 증진을 위해 우정을 강조한 에피쿠로스의 사유에 이르면 그의 열정을 느끼게 된다. 함께 함으로써 즐거워지는 단순한 기쁨, 그 자체로 소중한 정신적 쾌락이 주는 만족감의 철학은 건전한 공동체의 토대로서 공적 규칙과 규제를 넘어서는 사회적 유대감의 확산이라는 삶의 긍정성과 함께 우정의 축복이 삶의 평정을 위한 귀중한 요소임을 긍정하게 된다. 무언의 확신을 지닌 배려와 도움의 관계, 의지가 되는 친구 사이란 미래의 염려를 철수시키는 진정 귀중한 관계의 철학이라 할 것이다.

 

평정에 이르고 싶다면 만물의 진정한 원리를 알아야

단순한 가정이나 편견에 빠지지 않게 된다.” - 78

 

아마 이 소박한 저술에서 특히 주목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에피쿠로스 철학의 정수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전부 소실되어 그의 후학들의 저작으로만 확인되는 그의 대표작  자연에 관하여를 엿보는 자연 탐구의 필요성 역설에 대한 장이다. 기원전 3세기의 그리스 철학자나 시인들은 번개는 제우스가 쏘는 것이라 주장하던 시대이다. 자연 철학자인 에피쿠로스가 이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다. "나는 미신을 끝내고 싶을 뿐이다!(80)"라는 그의 선언적 문장처럼 허황된 설명에 의한 인간의 정신적 동요, 그 근심을 떨쳐내기를 원했다는 점에서 그의 자연 탐구에 대한 역설은 사람들에게 평정을, 즉 정신적 쾌락의 위안을 주고자 하는 의지이다.

 

이러한 자연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요구는 그의 철학을 무신론이라 낙인찍는 데 이용되었던 모양이다. 그는 이에 대해 일침을 가한다. "불경한 사람이란 대중이 생각하는 신들의 모습을 파괴하는 자가 아니라대중의 관념을 신들에게 부과하려는 자다.(82)", 만물의 원리에 대한 피상적이고 혼란스러운 지식, 즉 그에게 자연 탐구는 속임수로 인간에게 염려와 공포를 주입하는 나쁜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자유의 수단이었던 셈이다. 이는 루크레티우스와 필로데모스의 저술로 전해지는 그의 원자론으로 이어지는데, 사물의 실재계와 현상계를 설명하는 물자체나 의지와 표상을 선취하고 있다고 여겨질 만큼 세계와 개체의 존재를 설명하는 자연 철학의 위대한 정신세계라 할 것이다. 에피쿠로스의 사상을 라틴어 시로 풀어 쓴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5권의 문장은 현대 철학과 견주어도 어떤 뒤짐도 없다.

 

무수한 원자들이 무한한 시간에 걸쳐 공허 속을 떠돌며, 각각의 질량에 의해 무수한 방식으로 충돌한다. 그렇게 원자들이 온갖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함에 따라 만들어 질 수 있는 온갖 사물이 형성된다.” -105,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5.187-90)

 

 

인간에게 가장 큰 부조리이자 가장 적대적인 불쾌가 죽음일 것이다. 우리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음이 현재의 삶과 함께 이에 따르는 모든 가능성을 앗아간다고 생각하기 때문 일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죽은 뒤의 비()존재를 두려워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라고 반문한다. 사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그 어떤 불치병의 고통을 능가한다. 그런데 죽음을 생각해보면 사실 그것은 감각의 부재. 다시 말해서 쾌락도 고통도 존재하지 않으니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다는 것이다.

 

비존재 상태를 인식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비존재라 말할 수도 없는데 대체 무얼 두려워한다는 것이냐는 주장이다. 한편 생의 양적 연장에 대해 "무한한 시간이 유한한 시간보다 더 큰 쾌락을 주는 것도 아니다.(98)"라며, 단 하루에도 영원에서와 똑같은 쾌락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포스트 휴먼, 불멸의 존재가 될 것을 주장하는 기술자들과 그 윤리적 논쟁의 하나의 화두가 되어도 손색이 없는 사유라 할 것이다.

 

이성적 이해와 감정적 거부감이 충돌하는 인간의 인식으로서는 이는 결코 쉽지 않은 문제이다. 어쩌면 무의미한 걱정과 근심, 염려와 두려움으로 삶을 낭비하며, 평정을 잃고 고통스러워하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에피쿠로스의 이 철학적 처방들은 삶의 정상성을 회복하는 데 어떤 돌파구를 마련하는 단초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작고 짧은 철학적 지혜는 에피쿠로스의 철학적 맥락들을 더욱 알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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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의 인문학 - 삶의 예술로서의 인문학
도정일 지음 / 사무사책방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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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매일 먹고, 마시고, 자고, 이야기하고, 포옹하고, 요리하고, 함께 침대로 간다.

이런 반복된 동형성과 일상적 제식(制式)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충만한 삶에 속한다.”

출처: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 사냥꾼, 목동, 비평가, 187, 열린책들

 

 

인간으로 불리는 란 존재는 대체 무엇인가? 나는 왜 사는가? 이런 근원적 물음을 하는 까닭은 내 삶의 의미를 찾고,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 즉 자기 규정적 관심이 있기 때문일 것이며, 삶의 행복감을 높이려는 성찰적 노력일 것이다. 위에 인용한 문장은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중요하다고 인정되고 목표 달성에 도움이 되는 활동만 가치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시켜준다. 이를테면 축구를 하고, 카드놀이를 하며, 개를 키우고, 벗들과 술 한 잔을 마시는 것은 생존을 위한 것도, 경제적 부를 늘려주는 일도 아니지만, 이러한 행위를 하는 것을 우리들은 결코 아까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처럼 삶이란 특별한 외적 목표를 지니지 않는 것, 칸트가 예술의 본질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라 말한 그 자체로만 목적이 있는, 달리 표현하자면 목적의 독재로부터 해방된 강제성 없는 자기실현으로서의 작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들은 이같이 그 자체로만 목적이 있는 일을 할 때, 즉 자발적 동기를 지닌 일을 할 때 가장 행복해 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삶의 기술(art)’이 아닐까? 이 책 만인의 인문학부제의 표현처럼 인문학을 삶의 예술(The Art of Living)’이라 한 것 또한 이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매일 쓸모 있는 일만 하는 개미처럼 늘 쓸모 있는 일만 하는 것은 저급한 동물의 특징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포기할 수 있는 것들의 수많은 다양성이다. 그래서 인문학은 묻는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고. 우리는 여기에 답 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 동물이면서 동물과 구별되는 그 차별성이 무엇인지, 고대 그리스와 중국의 철학자, 시인들로부터 셰익스피어, 빅토르 위고, 도스토예프스키, 마르크스, 프로이드, 데리다, 라캉, 푸코, 들뢰즈, 지젝에 이르는 현대의 무수한 이론과 문학작품, 담론들에 이르는 이 모든 것들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변별성을 규정하고 이해하려는 노력(311) 인 이유이다. 바로 인문학은 근원적 질문을 함으로써 우리 인간에게 존재 의미를, 살아갈 의미를 공급해 주는 원천이란 것이다.

 

책은 이러한 노력, 즉 인문학을 연결 기술로서의 이야기(narrative)를 통해 인간 이해의 경험 확장, 나아가 존재의 관용으로서 문학(시학)을 풀어가는 만인의 시학, 그리고 시각의 확대를 통한 무한 소유의 가능성을 대중화하는 현대 문명에서부터 이분법이라는 타자 불관용의 배제 이데올로기의 비판에 이르는 만인의 인문학, 그리고 인간 욕망이란 특수한 역사적 현상임을 지적함으로써 인식 지평의 확장을 격려하는 다시 인간이란 무엇인가?3개의 장으로 구성하여 설명하고 있다.

 

인간은 실로 (...) 연결로부터 생존의 기술을 발전시켜온 동물이다.

그런데 이 연결을 가능케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야기.” - 27쪽에서


연결의 능력, 인간에 불이 있듯, 나무에도 불이 있다. 비벼 보자.” (그러면 불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처럼 인간은 자신을 비롯한 만물과 그 현상들을 연결 짓는 능력을 변별성으로 지닌다고 이해한다. 이 연결성이 곧 서사(narrative; 라틴어로 이야기를 뜻하는 narrare), 이야기이고, 인생살이란 예외 없이 무언가를 얻거나 성취하고자 하는 추구의 서사(31)라는 것이다. 이야기에는 이같이 이미 추상적 정신을 자극하는 연결의 기술을 내재하고 있다. 그것을 상상력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여기서 에둘러 말하는 의미의 간접화가 즐거움의 한 생산방식임을 보여준다. 그 대표적인 표현이 은유(metaphore)'일 것이다. ’사랑은 장미와 같은 문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랑장미라는 아무 관련도 없는 두 단어의 결합이 어째서 성립하는지를 알기 위해 우리는 정신 에너지를 투입해야 한다. 관계없는 두 지점을 연결하는 것이 상상력이다. 문학 작품, 특히 시()의 문장들은 결코 수월치 않다. 왜 이런 독해 능력을 많은 이들이 지니지 못하는 것일까? 언어능력의 고도화는 현실 인식의 가장 중요한 방법이고 수단(60)임을 우리의 교육이 도외시한 데 원인이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해 본다. 결국 인문학적 소양을 양성하는데, 우리의 교육 현실이 실패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사실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지적 게으름으로 인한 편협성, 다시 말해 알량하게 알고 있는 정해진 관념의 변죽만 울려대다 보니 그 범위를 조금만 벗어나도 혐오와 분노의 소리를 지르게 되는 현상에 도사린 본질의 하나일 것이다. 현실의 복잡성, 은폐성, 기만성을 꿰뚫는 인식의 수단으로서 역설이나, 모순되는 진술들이 충돌하면서 일으키는 진리의 순간을 포착하게 하는 아이러니 등 인간의 진실을, 그 자체를 이해하기 위한 진솔한 경험의 확장을 지원할 도구인 인문학으로서의 시학(문학)을 이 사회가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 사회를 만들고 지탱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일 하나는 우리가 사는 사회가 어떤 이야기로 지탱되는 사회인가를 읽어내는 일(92)이라 했다. 문학에는 인간의 약함과 강함, 허영과 꿈과 욕망, 패배와 고통, 사랑과 배반이라는 차이에 대한 존중, 인간에 대한 이해를 확장하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연결의 능력, 그 상상력은 곧 언어 능력의 고도화이며, 문학이고, 존재 관용의 윤리인 것이다.

 

 



인간은 자기 아닌 것의 위치로 자리를 이동시켜 생각할 줄 알고...” -133쪽에서


‘J.S.은 사회적 자유를 말하는 자유론에서 어떤 문제에 대해 자기 관점으로만 아는 사람은 아는 것이 별로 없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결국 어떤 문제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자신과 관점이 다른 사람의 위치로 이동하는, 위치 교환, 관점 이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에 요구되는 것 또한 상상력이다. 그러니 상상력을 삶의 영구 자본이라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마 인간의 한계 조건인 유한성에 오류 가능성유약성을 더해 세 가지라 하는 이유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 일 것이다. 삶에서 실질적으로 중요한 진리는 서로 상충하는 의견들을 화해시키고 결합해야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다른 의견에 대한 관용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불관용이 지배하는 팽팽한 갈등과 배척의 사회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이러한 현실에 대해 몇 가지 현상을 지적하고 있다, 그 첫째는 다니엘 디포의 소설 몰 플란더즈( Moll Flanders)자기모순에 대한 신비로울 정도의 도덕 불감증을 지닌 여주인공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공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실 성공만이 최고의 도덕률이 된 오늘의 우리 사회와 그 구성원의 이야기라 하여도 지나친 비유는 아닐 것이다. 사기, 위장결혼, 절도를 서슴지 않는 몰 플란더즈은 거짓말과 복화술에 능수능란하다. 이것은 소리와 의미를 철저히 분리한다는 뜻이다. 우리 사회의 정치배들이 하는 말과 닮아 있지 않은가? 그네들이 뱉어 낸 소리에는 시민들이 아는 의미가 결코 담겨 있지 않다.

 

둘째는 언론 매체의 단순한 현상 표피적 진단이라는 선정성과 자기 탐욕적 이기심에 매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사회사적 변동의 현실을 읽어낼 능력이 없기도 하며 보지 않으려하는 지적 나태함(150), 즉 무지라는 인문학적 통찰력의 결여를 지적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고작 거짓이나 의도적 악의로 그득한, 아무런 사회적 성찰도 없는 그래서 문제적 사회 현상을 보는 눈이 없는 매체를 보게 된다. 거기에는 오직 갈등의 촉발과 심화, 혐오와 증오의 확산을 통해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불의만 넘실댄다.

 

셋째는 문화적 지연, 즉 변화의 속도와 관성 사이의 현저한 간극이 발생시키는 한국사회의 부정적 행태들이다. 아마 한국사회의 관념적 계급 사회에 대한 명저로 꼽히는 미야지마 히로시가 쓴 양반(兩班)에서 지적한 한국사회의 수구화된 지역과 집단의 특성으로 시대착오적인 권위적 망상이 횡행하는 것은 가열된 학력 경쟁, 혈연과 연고주의라는 뿌리 깊은 사회적 폐해의 근인이라 한 것과 상통한다. 이들 집단 구성원은 집단주의, 혈연주의, 가부장 이데올로기, 권력 추수주의, 배타성, 권위주의...등으로 표출되어 사적 이해관계와 공적 가치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공영역적 문제들 앞에서 놀랄 정도로 무관심과 냉담, 마비증세(156)를 보인다고 토로하고 있다.

 

자기가 믿는 것에만 열심히 머리를 파묻는, 정신의 가두리 양식장에서 맴도는 이러한 편협성이란 문화의 비판적 자기성찰이 부재(158)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단순화된 일면의 지적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을 왜소하게 만드는 질투의 감정이 뿜어내는 공연한 갈등(고통)의 야기, 감동 죽이기 연습을 강요하는 감동 포기 종용의 사회 양상, 사람 밑에 사람 있고, 돈 밑에 사람 있고, 권력 밑에 사람 있는 인식의 부패와 이를 당연시 여기는 의식의 부패가 만연한, 환대 윤리를 알지 못하는 무지의 오만이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음을 통찰하고 있기도 하다. 끊임없이 경비원에 대한 갑질 폭언과 폭력이 근절되지 않고 반복되어 뉴스를 장식하는 것은 우리 사회 전반의 인식부패라 자성해야 함을 확인케 하고 있다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당연시하고 있는 것들에 의문을 가져야 한다. 모든 사회적 문제, 사회적 실수는 여기서 비롯된다고 한다. 명백한 것에 질문함으로써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고, 너와 나, 우리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펼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이 책은 우리들에게 인문학적 소양의 범주를 확장시킬 수 있는 틀을 제공한다. 저자는 인문학을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창조해내는 인간, 자기 존재의 확장을 부단히 시도하는 인간, 공생의 윤리 위에 만물을 서로 연결하는 인간을 만날 수 있게 하는 시학(詩學)(책머리, 5)이라 정의한다. 삶에 대한 사유, 표현, 실천 총합으로서의 인문학으로, 우리들이 의미의 위기를 겪을 때 의미 공급원을 만들어 내는 귀중한 지혜의 보고가 되어 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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