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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의 인문학 - 삶의 예술로서의 인문학
도정일 지음 / 사무사책방 / 2021년 3월
평점 :
“우리는 매일 먹고, 마시고, 자고, 이야기하고, 포옹하고, 요리하고, 함께 침대로 간다.
이런 반복된 동형성과 일상적 제식(制式)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충만한 삶에 속한다.”
【출처: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著, 『사냥꾼, 목동, 비평가』, 187쪽, 열린책들刊】
인간으로 불리는 ‘나’란 존재는 대체 무엇인가? 나는 왜 사는가? 이런 근원적 물음을 하는 까닭은 내 삶의 ‘의미’를 찾고,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 즉 자기 규정적 관심이 있기 때문일 것이며, 삶의 행복감을 높이려는 성찰적 노력일 것이다. 위에 인용한 문장은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중요하다고 인정되고 목표 달성에 도움이 되는 활동만 가치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시켜준다. 이를테면 축구를 하고, 카드놀이를 하며, 개를 키우고, 벗들과 술 한 잔을 마시는 것은 생존을 위한 것도, 경제적 부를 늘려주는 일도 아니지만, 이러한 행위를 하는 것을 우리들은 결코 아까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처럼 삶이란 특별한 ‘외적 목표’를 지니지 않는 것, 칸트가 예술의 본질을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라 말한 그 자체로만 목적이 있는, 달리 표현하자면 목적의 독재로부터 해방된 강제성 없는 자기실현으로서의 작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들은 이같이 그 자체로만 목적이 있는 일을 할 때, 즉 자발적 동기를 지닌 일을 할 때 가장 행복해 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삶의 기술(art)’이 아닐까? 이 책 『만인의 인문학』 부제의 표현처럼 인문학을 ‘삶의 예술(The Art of Living)’이라 한 것 또한 이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매일 쓸모 있는 일만 하는 개미처럼 늘 쓸모 있는 일만 하는 것은 저급한 동물의 특징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포기할 수 있는 것들의 수많은 다양성이다. 그래서 인문학은 묻는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고. 우리는 여기에 답 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 동물이면서 동물과 구별되는 그 차별성이 무엇인지, 고대 그리스와 중국의 철학자, 시인들로부터 셰익스피어, 빅토르 위고, 도스토예프스키, 마르크스, 프로이드, 데리다, 라캉, 푸코, 들뢰즈, 지젝에 이르는 현대의 무수한 이론과 문학작품, 담론들에 이르는 이 모든 것들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변별성을 규정하고 이해하려는 노력(311쪽)” 인 이유이다. 바로 인문학은 근원적 질문을 함으로써 우리 인간에게 존재 의미를, 살아갈 의미를 공급해 주는 원천이란 것이다.
책은 이러한 노력, 즉 인문학을 연결 기술로서의 이야기(narrative)를 통해 인간 이해의 경험 확장, 나아가 존재의 관용으로서 문학(시학)을 풀어가는 〈만인의 시학〉, 그리고 시각의 확대를 통한 무한 소유의 가능성을 대중화하는 현대 문명에서부터 이분법이라는 타자 불관용의 배제 이데올로기의 비판에 이르는 〈만인의 인문학〉, 그리고 인간 욕망이란 특수한 역사적 현상임을 지적함으로써 인식 지평의 확장을 격려하는 〈다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3개의 장으로 구성하여 설명하고 있다.
“인간은 실로 (...) 연결로부터 생존의 기술을 발전시켜온 동물이다.
그런데 이 연결을 가능케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야기’다.” - 27쪽에서
연결의 능력, “인간에 불이 있듯, 나무에도 불이 있다. 비벼 보자.” (그러면 불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처럼 인간은 자신을 비롯한 만물과 그 현상들을 연결 짓는 능력을 변별성으로 지닌다고 이해한다. 이 연결성이 곧 서사(narrative; 라틴어로 이야기를 뜻하는 narrare), 이야기이고, “인생살이란 예외 없이 무언가를 얻거나 성취하고자 하는 추구의 서사(31쪽)”라는 것이다. 이야기에는 이같이 이미 추상적 정신을 자극하는 연결의 기술을 내재하고 있다. 그것을 ‘상상력’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여기서 에둘러 말하는 의미의 간접화가 즐거움의 한 생산방식임을 보여준다. 그 대표적인 표현이 ‘은유(metaphore)'일 것이다. ’사랑은 장미‘와 같은 문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랑‘과 ’장미‘라는 아무 관련도 없는 두 단어의 결합이 어째서 성립하는지를 알기 위해 우리는 정신 에너지를 투입해야 한다. 이 관계없는 두 지점을 연결하는 것이 상상력이다. 문학 작품, 특히 시(詩)의 문장들은 결코 수월치 않다. 왜 이런 독해 능력을 많은 이들이 지니지 못하는 것일까? “언어능력의 고도화는 현실 인식의 가장 중요한 방법이고 수단(60쪽)”임을 우리의 교육이 도외시한 데 원인이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해 본다. 결국 인문학적 소양을 양성하는데, 우리의 교육 현실이 실패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사실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지적 게으름으로 인한 편협성, 다시 말해 알량하게 알고 있는 정해진 관념의 변죽만 울려대다 보니 그 범위를 조금만 벗어나도 혐오와 분노의 소리를 지르게 되는 현상에 도사린 본질의 하나일 것이다. 현실의 복잡성, 은폐성, 기만성을 꿰뚫는 인식의 수단으로서 역설이나, 모순되는 진술들이 충돌하면서 일으키는 진리의 순간을 포착하게 하는 아이러니 등 인간의 진실을, 그 자체를 이해하기 위한 진솔한 경험의 확장을 지원할 도구인 인문학으로서의 시학(문학)을 이 사회가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 사회를 만들고 지탱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일 하나는 우리가 사는 사회가 ‘어떤 이야기’로 지탱되는 사회인가를 읽어내는 일(92쪽)”이라 했다. 문학에는 인간의 약함과 강함, 허영과 꿈과 욕망, 패배와 고통, 사랑과 배반이라는 차이에 대한 존중, 인간에 대한 이해를 확장하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연결의 능력, 그 상상력은 곧 언어 능력의 고도화이며, 문학이고, 존재 관용의 윤리인 것이다.

“인간은 자기 아닌 것의 위치로 자리를 이동시켜 생각할 줄 알고...” -133쪽에서
‘J.S.밀’은 사회적 자유를 말하는 『자유론』에서 “어떤 문제에 대해 자기 관점으로만 아는 사람은 아는 것이 별로 없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결국 어떤 문제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자신과 관점이 다른 사람의 위치로 이동하는, 위치 교환, 관점 이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에 요구되는 것 또한 상상력이다. 그러니 상상력을 “삶의 영구 자본”이라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마 인간의 한계 조건인 유한성에 ‘오류 가능성’과 ‘유약성’을 더해 세 가지라 하는 이유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 일 것이다. 삶에서 실질적으로 중요한 진리는 서로 상충하는 의견들을 화해시키고 결합해야 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다른 의견에 대한 관용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불관용이 지배하는 팽팽한 갈등과 배척의 사회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이러한 현실에 대해 몇 가지 현상을 지적하고 있다, 그 첫째는 ‘다니엘 디포’의 소설 『몰 플란더즈( Moll Flanders)』의 ‘자기모순에 대한 신비로울 정도의 도덕 불감증’을 지닌 여주인공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공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실 성공만이 최고의 도덕률이 된 오늘의 우리 사회와 그 구성원의 이야기라 하여도 지나친 비유는 아닐 것이다. 사기, 위장결혼, 절도를 서슴지 않는 ‘몰 플란더즈’은 거짓말과 복화술에 능수능란하다. 이것은 “소리와 의미를 철저히 분리”한다는 뜻이다. 우리 사회의 정치배들이 하는 말과 닮아 있지 않은가? 그네들이 뱉어 낸 소리에는 시민들이 아는 의미가 결코 담겨 있지 않다.
둘째는 언론 매체의 단순한 현상 표피적 진단이라는 선정성과 자기 탐욕적 이기심에 매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사회사적 변동의 현실을 읽어낼 능력이 없기도 하며 보지 않으려하는 지적 나태함(150쪽)”, 즉 무지라는 인문학적 통찰력의 결여를 지적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고작 거짓이나 의도적 악의로 그득한, 아무런 사회적 성찰도 없는 그래서 문제적 사회 현상을 보는 눈이 없는 매체를 보게 된다. 거기에는 오직 갈등의 촉발과 심화, 혐오와 증오의 확산을 통해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불의만 넘실댄다.
셋째는 문화적 지연, 즉 변화의 속도와 관성 사이의 현저한 간극이 발생시키는 한국사회의 부정적 행태들이다. 아마 한국사회의 관념적 계급 사회에 대한 명저로 꼽히는 ‘미야지마 히로시’가 쓴 『양반(兩班)』에서 지적한 “한국사회의 수구화된 지역과 집단의 특성”으로 “시대착오적인 권위적 망상이 횡행하는 것은 가열된 학력 경쟁, 혈연과 연고주의라는 뿌리 깊은 사회적 폐해의 근인”이라 한 것과 상통한다. 이들 집단 구성원은 “집단주의, 혈연주의, 가부장 이데올로기, 권력 추수주의, 배타성, 권위주의...등으로 표출되어 사적 이해관계와 공적 가치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공영역적 문제들 앞에서 놀랄 정도로 무관심과 냉담, 마비증세(156쪽)”를 보인다고 토로하고 있다.
자기가 믿는 것에만 열심히 머리를 파묻는, ‘정신의 가두리 양식장’에서 맴도는 이러한 편협성이란 ‘문화의 비판적 자기성찰이 부재(158쪽)’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단순화된 일면의 지적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을 왜소하게 만드는 질투의 감정이 뿜어내는 공연한 갈등(고통)의 야기, 감동 죽이기 연습을 강요하는 감동 포기 종용의 사회 양상, “사람 밑에 사람 있고, 돈 밑에 사람 있고, 권력 밑에 사람 있는” ‘인식의 부패’와 이를 당연시 여기는 ‘의식의 부패’가 만연한, 환대 윤리를 알지 못하는 무지의 오만이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음을 통찰하고 있기도 하다. 끊임없이 경비원에 대한 갑질 폭언과 폭력이 근절되지 않고 반복되어 뉴스를 장식하는 것은 우리 사회 전반의 인식부패라 자성해야 함을 확인케 하고 있다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당연시하고 있는 것들에 의문을 가져야 한다. 모든 사회적 문제, 사회적 실수는 여기서 비롯된다고 한다. 명백한 것에 질문함으로써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고, 너와 나, 우리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펼칠 수 있는 장(場)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이 책은 우리들에게 인문학적 소양의 범주를 확장시킬 수 있는 틀을 제공한다. 저자는 인문학을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창조해내는 인간, 자기 존재의 확장을 부단히 시도하는 인간, 공생의 윤리 위에 만물을 서로 연결하는 인간을 만날 수 있게 하는 시학(詩學)(책머리, 5쪽)”이라 정의한다. 삶에 대한 사유, 표현, 실천 총합으로서의 인문학으로, 우리들이 의미의 위기를 겪을 때 의미 공급원을 만들어 내는 귀중한 지혜의 보고가 되어 줄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