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쿠로스의 네 가지 처방 - 불안과 고통에 대처하는 철학의 지혜
존 셀라스 지음, 신소희 옮김 / 복복서가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삶의 고통에 대한 철학적 지혜 -

 


이 책이 눈에 띈 가장 근원적 계기는 철학자 강신주의 철학 vs 실천에서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들의 우연한 마주침에 대한 언급이었고, 이어서 피터 존스의 저서 복스 포풀리10장의 스토아주의와 에피쿠로스주의에 대한 고대 그리스 철학에 대한 비평으로 촉발된 호감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존 셀라스의 이 작은 소책자는 양적 빈곤과 인간 보편에 대한 삶의 고통 처방이라는 내용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에피쿠로스는 물론 그와 사상을 같이하는 철학 저술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측면에서 실로 소중한 참고 저작이 아닐 수 없다.

 

 

독서의 동기에서 이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서구 정신문명을 오랫동안 장악했던 기독교가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무신론, 부도덕, 감각적 탐닉'을 추구하는 저열한 사상으로 매도하여 인류 사상사에서 지워버리려 했다는 학문적 반감도 에피쿠로스 사상에 대한 연민을 강화한 것이 사실이다. 원자론이라는 유물론적 세계관에 기초한 사물의 우연적 결합과 출현, 죽음의 감각 부재 해석, 고통의 해방으로서 쾌락(정적인 정신적 쾌락, 평정을 의미)과 같은 에피쿠로스 철학의 주장은 기독교 교리와 융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인류의 중요한 사상적 줄기를 소멸시키려 했다는 점은 정말 무서운 폭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도 않았으며감각적 쾌락을 추구하기는커녕 금욕주의 사상에 가깝기까지 하다더구나 부도덕하다는 누명은 무엇에 씌운 것인지조차 알 길이 없는 왜곡이다

 

 

어쨌든 이 책에서 에피쿠로스의 쾌락의 본질을 읽을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쾌락은 정신적 쾌락, 고통을 벗어남으로써 얻게 되는 '마음의 평정(ataraxia)'이다. 배고픔, 추위, 아픔과 같은 피하고 싶어 하는 조건에서 벗어난 상태를 추구하여 만족한 상태를 목표로 하는 소박한 상태이다. 육체적 쾌락의 탐닉과는 멀어도 한참이나 먼 관념이다.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 정신적 동요에 의한 염려와 불안을 덜어내고 삶의 행복을 증진시키려는 실천적 노력의 일환이랄 수도 있다. 특히 대부분의 정신적 염려가 야기하는 근심과 고통이란 당사자 자신이 자초한 내적 고통이라고 판단했기에 그는 쇼펜하우어의 통제 불가능한 의지와 달리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했음을 이해 할 수 있다.

 

 

사물과 현상을 실재케 하는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맹목성의 의지이기에 이로부터 발생하는 고통은 인간의 지성이 통제할 수 없는 무엇이지만, 에피쿠로스의 고통은 개선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 본질을 달리한다. 이 개선의 가능성이 불가능하다고 했다면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존재할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이러한 출발점에서 고통에 대처하여 평정심을 갖는 에피쿠로스의 철학적 지혜를 풀어 놓는다. 즉 평정(ataraxia)에 이르는 길을 필요에 의한 만족’, ‘우정의 중요성’, ‘자연 탐구의 필요’, ‘죽음에 대한 인식’, 그리고 원자론을 통해 안내한다.

 

"충분함이 모자란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것도 충분하지 못하다."  -52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 '만족하는 건 불가능해. 가진 게 많을수록 욕구가 높아지거든', 많은 돈과 재산을 쌓았음에도 그 욕망은 만족할 줄 모르고, 더 많이 가진 자를 시샘하고 질투하며 불쾌를 멈추지 않는다. 이 부단한 결핍감, 얼마나 가져야 만족할 수 있을까? 그는 필요에 의한 만족을 자연스러운 필요자연스러운 불필요로 구분하여, 이를테면 잘 차려진 고급 음식과 와인, 해외 명품 브랜드의 의상과 악세사리, 고가 주택 과 같은 자연스러운 삶의 필요를 넘어서는 불필요의 영역을 손에 넣지 못했다고 짜증내며 불만족의 고통을 호소하는 부단한 욕망을 지적한다.

 

 

에피쿠로스가 이렇듯 불필요한 욕망에 쉽게 사로잡히는 대다수의 운 좋은 사람들의 향유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출근길 손에 든 커피처럼 익숙함과 습관적 아이템으로 여기도록 된 것들을 돌아보면 우리 욕망의 방향을 변화시키는 것, 절제의 요구가 가능함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소유하기 보다는 보다 큰 자족의 곳간을 발견하는 데 주의를 돌리면 보다 큰 만족을 얻으리라 주장한다.

 




"우정은 온 세상을 에워싸고 춤추며 우리 모두가 그 축복을 깨닫도록 일깨운다."

- 에피쿠로스바티칸 금언52, 본 책 72

 

 

속된 표현이 되겠지만 행복의 증진을 위해 우정을 강조한 에피쿠로스의 사유에 이르면 그의 열정을 느끼게 된다. 함께 함으로써 즐거워지는 단순한 기쁨, 그 자체로 소중한 정신적 쾌락이 주는 만족감의 철학은 건전한 공동체의 토대로서 공적 규칙과 규제를 넘어서는 사회적 유대감의 확산이라는 삶의 긍정성과 함께 우정의 축복이 삶의 평정을 위한 귀중한 요소임을 긍정하게 된다. 무언의 확신을 지닌 배려와 도움의 관계, 의지가 되는 친구 사이란 미래의 염려를 철수시키는 진정 귀중한 관계의 철학이라 할 것이다.

 

평정에 이르고 싶다면 만물의 진정한 원리를 알아야

단순한 가정이나 편견에 빠지지 않게 된다.” - 78

 

아마 이 소박한 저술에서 특히 주목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에피쿠로스 철학의 정수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전부 소실되어 그의 후학들의 저작으로만 확인되는 그의 대표작  자연에 관하여를 엿보는 자연 탐구의 필요성 역설에 대한 장이다. 기원전 3세기의 그리스 철학자나 시인들은 번개는 제우스가 쏘는 것이라 주장하던 시대이다. 자연 철학자인 에피쿠로스가 이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다. "나는 미신을 끝내고 싶을 뿐이다!(80)"라는 그의 선언적 문장처럼 허황된 설명에 의한 인간의 정신적 동요, 그 근심을 떨쳐내기를 원했다는 점에서 그의 자연 탐구에 대한 역설은 사람들에게 평정을, 즉 정신적 쾌락의 위안을 주고자 하는 의지이다.

 

이러한 자연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요구는 그의 철학을 무신론이라 낙인찍는 데 이용되었던 모양이다. 그는 이에 대해 일침을 가한다. "불경한 사람이란 대중이 생각하는 신들의 모습을 파괴하는 자가 아니라대중의 관념을 신들에게 부과하려는 자다.(82)", 만물의 원리에 대한 피상적이고 혼란스러운 지식, 즉 그에게 자연 탐구는 속임수로 인간에게 염려와 공포를 주입하는 나쁜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자유의 수단이었던 셈이다. 이는 루크레티우스와 필로데모스의 저술로 전해지는 그의 원자론으로 이어지는데, 사물의 실재계와 현상계를 설명하는 물자체나 의지와 표상을 선취하고 있다고 여겨질 만큼 세계와 개체의 존재를 설명하는 자연 철학의 위대한 정신세계라 할 것이다. 에피쿠로스의 사상을 라틴어 시로 풀어 쓴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5권의 문장은 현대 철학과 견주어도 어떤 뒤짐도 없다.

 

무수한 원자들이 무한한 시간에 걸쳐 공허 속을 떠돌며, 각각의 질량에 의해 무수한 방식으로 충돌한다. 그렇게 원자들이 온갖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함에 따라 만들어 질 수 있는 온갖 사물이 형성된다.” -105,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5.187-90)

 

 

인간에게 가장 큰 부조리이자 가장 적대적인 불쾌가 죽음일 것이다. 우리들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죽음이 현재의 삶과 함께 이에 따르는 모든 가능성을 앗아간다고 생각하기 때문 일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죽은 뒤의 비()존재를 두려워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라고 반문한다. 사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그 어떤 불치병의 고통을 능가한다. 그런데 죽음을 생각해보면 사실 그것은 감각의 부재. 다시 말해서 쾌락도 고통도 존재하지 않으니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다는 것이다.

 

비존재 상태를 인식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비존재라 말할 수도 없는데 대체 무얼 두려워한다는 것이냐는 주장이다. 한편 생의 양적 연장에 대해 "무한한 시간이 유한한 시간보다 더 큰 쾌락을 주는 것도 아니다.(98)"라며, 단 하루에도 영원에서와 똑같은 쾌락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포스트 휴먼, 불멸의 존재가 될 것을 주장하는 기술자들과 그 윤리적 논쟁의 하나의 화두가 되어도 손색이 없는 사유라 할 것이다.

 

이성적 이해와 감정적 거부감이 충돌하는 인간의 인식으로서는 이는 결코 쉽지 않은 문제이다. 어쩌면 무의미한 걱정과 근심, 염려와 두려움으로 삶을 낭비하며, 평정을 잃고 고통스러워하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에피쿠로스의 이 철학적 처방들은 삶의 정상성을 회복하는 데 어떤 돌파구를 마련하는 단초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작고 짧은 철학적 지혜는 에피쿠로스의 철학적 맥락들을 더욱 알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