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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킬레우스의 노래 (리커버 특별판)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이봄 / 2021년 7월
평점 :
품절
“분노보다 더 강한 것이 그에 대한 그리움이다. 죽은 자가 아닌 산 자의 이야기,
신이 아닌 인간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싶다.” -425쪽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되어 폭력적 힘의 충동들이 넘실대는 피비린내 나는 전장(戰場)의 묘사로 가득하다. 파멸적 죽음들, 무참한 살해의 힘만이 위세를 지닌, 그 어느 곳에서도 생명의 미덕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내려앉아 있다.
작가 ‘매들린 밀러’는 이처럼 눈먼 힘의 영광에 도취된 전쟁의 신(神) 아킬레우스에게 인간 냄새 물씬한 생명의 에너지를 불어넣음으로써 분노와 증오 대신에 관용과 사랑의 미덕을 지닌 인간적 존재로 복원해 내고 있다. 아마도 다음의 문장은 서사시 『일리아스』의 유일하다싶은 애절한 장면일 것이다. 아킬레우스의 투구와 갑옷을 입고 전장을 누비다 ‘헥토르’에게 살해당한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비통해하는 아킬레우스의 슬픔이 그것이다.
“다른 어떤 벗보다 소중히 여기고 제 몸과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던 친구를 죽게 한....”
- 『일리아스』 제18권 「아킬레우스의 슬픔」中에서
이 인용 문장은 아킬레우스가 어머니인 여신 ‘테티스’에게 자신의 슬픔을 하소연하는 구절이다. 매들린의 소설은 이 장면이야말로 힘과 사물화라는 전장의 단조로운 서사시에 사랑과 관용이라는 숨을 불어 넣을 수 있는 단서라 여겼을 것이다. ‘아킬레우스의 분노’라고도 할 수 있는 『일리아스』를 “비에 젖은 흙냄새처럼 피어오르는 추억(425)”의 노래, 샘물처럼 솟아나는 사랑의 노래가 되어 힘에 대한 욕망과 타자의 물질화라는 죽음의 세계로부터 인간 영혼의 미덕들을 풍부하게 되살려 놓는다.
『일리아스』에는 ‘파트로클로스’를 ‘아킬레우스’가 자신의 몸과 마찬가지로 소중히 생각할 수 있는 존재, 어느 벗보다 더 귀한 존재라고 여기게 된 단서가 존재하지 않지만, 소설은 두 사람의 관계가 형성되는 어린 시절의 일화로 시작하여 자괴감으로 위축되고 작은 분노로 주변 인간들을 경계하는 파트로클로스에게 프티아의 왕자이자 여신 테티스의 아들인 아킬레우스가 손을 내밀고, 우정과 믿음의 관계를 키워나가는 연인으로 그려낸다.
특히 소설은 파트로클로스에게 화자(話者)의 임무를 부여함으로써 아킬레우스를 체온이 있는 인간적 존재로 친밀하게 다가오게 한다. 이 작품의 흥미로움은 ‘아리스토스 아카이오이’, 무적의 전쟁 신, 그리스 최고의 위대한 전사(戰士)로서 트로이 전쟁에 참여하기 전의 아킬레우스를 그려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아손등 무수한 영웅을 가르친 켄타우로스(半人半馬)인 ‘케이론’으로부터 관용의 미덕을, 여신 테티스의 파트로크로스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아들과의 관계를 방해하는 어머니로서의 이기심을, 더구나 신들의 예언된 죽음으로부터 아들을 구하기 위해 여장을 시켜 피신시키는 행위나, 후일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를 살해하여 전쟁을 종식시키는 아킬레우스의 아들 피로스의 출생 비화를 그려주기도 한다.
테티스의 파트로클로스에 대한 증오에 가까운 부정은 트로이 전쟁의 참여가 곧 아들의 죽음을 의미하는 까닭에 그와 아들의 친밀감과 유대감 강화는 그녀를 괴롭히는 관계였을 것이다. 아마 이 작품 중 가장 시선을 끈 인물 중의 하나라면 단연 ‘브리세이스’를 꼽을 수 있다. 트로이 제후국 기습 전쟁의 전리품 분배에서 아킬레우스가 선택한 여인이다. 브리세이스는 그리스 연합군의 분열을 초래하는, 바로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야기케 하는 발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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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획된 여인들이 아가멤논의 수중에 들어갈 경우의 처참한 처우를 사전에 차단하여 그녀들에게 사람으로서의 삶의 영위라는 안위를 제공하기 위한 파트로클로스의 부탁이기에 아킬레우스가 기꺼이 선택한, 즉 아리스토스 아카이오로서 아킬레우스가 우선 선택권을 주장해서 취한 여인이다. 아킬레우스의 명예를 건 전리품의 성격을 지닌 여인이란 의미이다.
후일 아가멤논은 아폴론의 사제 여식을 취함으로 빚어진 신들의 징벌을 피하기 위해 사제의 여식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아킬레우스의 주장에 보복하기 위해 브리세이스를 빼앗아 그를 모욕하는 사건이 된다. 트로이 전쟁의 명분이 헬레네였다면, 브리세이스는 그리스 연합군의 패배까지 몰고 올 분열의 이유라 할 수 있다. 브리세이스의 파트로클로스를 향한 사랑은 아킬레우스를 향한 파트로클로스의 사랑과 대비되어 생명과 불모의 기묘한 해결책을 넌지시 암시한다. 이를 동성애에 대한 작가의 긍정적이고 우호적인 대안이라고 보아도 되지 않을까?
“아이도 낳고 싶지 않아요? (...) 나는 그녀의 본심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나의 무심함에 당황스러워 얼굴이 화끈 거렸다.” -311쪽
이 소설이 독자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고 우리들의 메마른 욕망이 상실한 것을 일깨우는 사자(死者)인 파트로클로스의 영혼이 여신 테티스에게 들려주는 말을 빼놓을 수 없다. 그녀의 냉정함이 아들을 망쳐 놓았음을, 아킬레우스의 죽음이 진정 무엇을 남겨 놓았는지 제대로 들여다 볼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헥토르를 죽이고 트로이를 멸망시키는 것이 잔인함과 죽음의 자취 말고 무엇이 있는가하고. 남의 목숨을 빼앗는 절제되지 않는 힘의 충동이 과연 영광이고 명예인가라는 물음이다.
파트로클로스의 영혼은 말한다. 아킬레우스가 프리아모스에게 그의 아들 헥토르의 시신을 관대하게 넘겨주었음을 테티스에게 지적하면서, 삶의 열망을 지워버림으로써 죽음을 무릅쓴 전사의 명예를 초월했었음을. 인간에 대한 사랑, 생명의 존중을 그 무엇으로 부정할 수 있겠는가라고. 타인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야만적 폭력성, 그 힘의 찬양이 어느 따사로운 햇빛 아래 리라를 켜는 소년의 사랑스런 몸짓의 추억보다 영원한 것인가라는 물음에 우리는 무어라 답할 수 있을까?
모욕의 분노로 몸서리치는 아킬레우스를 대신하여 그의 명예를 위해, 연인으로서 그를 보호하기 위해, 사랑을 위해, 기꺼이 출전하는 파트로클로스의 노래가 아름다운 추억의 노래가 되어 들려진다. 일리아스의 21세기 버전인 이 작품은 우리들이 잊고 있는 것들의 가치가 무엇인지, 갖추어야 할 미덕이란 무엇인지를 나지막하게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