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 이야기 3 : 건국의 진통 1780~1789 - 각자의 최선보다 모두의 차선 미국인 이야기 3
로버트 미들코프 지음, 이종인 옮김 / 사회평론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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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미국인 이야기 1~3권 통합 리뷰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미국 독립전쟁기간(1775~1783)을 전후한 13개 식민지민의 정체성 형성의 과정을 기술하고 있는 세 권의 역사서의 마지막 권이다. 남부지역 공략으로 전장을 옮긴 영국군과 아메리카 민병대- 대륙군과의 주요 전투의 전황들, 그리고 영국군의 식민지 아메리카에서의 철수를 야기한 아메리카-프랑스 연합군의 승리에 이르는 전쟁사와 연방정부의 구상 및 연방 헌법의 제정에 얽힌 13개 식민지 대표들의 신념을 구성하는 이해관계, 이념의 이상(理想)을 통해 아메리카 식민지민의 영광스러운 대의(大義)’의 실체를 추적한다.

 

1. 아메리카 독립혁명의 이질성

 

우선 영국령으로 존속하고 있던 13개 식민지의 독립 전쟁이 여느 역사적 전쟁과 차별되는 점을 눈 여겨 보아야 할 것 같다. 아메리카 식민지민은 소수의 이민족을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영국인이었다는 점이며, 국가라고 부를만한 이렇다 할 통합된 중앙 조직이 없었으며, 또한 영국과 이질적인 문화적 기반을 지니고 있는 곳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나라가 국가적 정체성을 지닌 이민족의 국가인 조선을 침입하여 종속시켜 이의 부당한 노예화로부터 독립하겠다는 것과는 아주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적, 민족적 동일성을 지닌 인민들이 모국으로부터 분리하여 별개의 독립된 국가를 새로이 수립하겠다는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다만 17세기부터 시작된 신대륙으로 이주 정착한 청교도 세대의 종교적 정신과 시간적 결과가 만들어낸 문화적 이질화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던 과정에 발생한 사건이라 이해된다.

 

이것의 발단은 수입 물품 과세라는 모국 의회의 정책에 대한 반발이라 하겠지만 이 반발은 다분히 대농장, 거대 상업(무역)상으로 대표되는 당시 지배계층 이해관계의 갈등에서 연원한 것이다. 여기에 제퍼슨이나 페인과 같은 정치 이론가들의 노예화, 독립, 자유 등을 화두로 하는 담론이 이러한 갈등에 이념적 권위를 부여했으며, 이러한 권위적 이념이 기독교 개신교 세계인 식민지민에게 독립의 당위성으로 인식, 확산된 것으로 이해된다. 특히 존재하지도 않는 국가에 대한 애국심을 강요하며, 전쟁 반대자에 대한 가혹한 처형과 재산 몰수 행위 등은 이들이 대의라고 불렀던 자유, 평등의 가치와는 동떨어진 모순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들이 자명한 천부적 권리란 부른 재산의 자유는 그래서 이들이 외쳤던 자유의 본질이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 자유는 인간 평등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전쟁 기간 중에도 대토지주의 소작농 착취는 지속되었으며, 노예무역과 인신 매매행위가 성행하였음은 결코 자유가 인정되지 않는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었으며, 투표권 역시 토지 등 일정한 재산을 소유한 백인 남성에게만 부여되었다는 점은 엘리트 지배계층의 평등에 대한 이념적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전쟁은 누가했나? 인민 대중의 大義라는 것은 정말 실재한 것일까?

 

2권에는 아메리카 민중은 대표들과 마찬가지로 분열되어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독립 전쟁에 반대했다.(2-196)”1775년의 아메리카 인민들의 독립전쟁에 대한 회의적 분위기를 전하는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메리카인들은 왜 영국군과 싸웠을까? 목숨을 잃게 될 수 있는 전장에 참여하여 눈앞의 공포에 맞서게 한 원천은 무엇이었을까는 미국인의 정신을 이해하는 데 중요 질문이라 할 수 있다.

 

전쟁기간 동원된 아메리카군 식민지 민병대 및 대륙군의 누적 병력 수는 대략 20만 명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이들 중 정규군이라 할 수 있는 대륙군의 경우 대다수는 돈을 내고 군복무를 면제받은 상류층을 대신해 입대한 사람들이었(3-97)”으며, 민병대원은 3개월의 짧은 복무기간이었다고 한다. 전쟁 중 민병대 조직을 관리하는 것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총사령관 조지 워싱턴의 탄식이나 혐오가 수시로 등장하듯이 아메리카인들의 개인적 자유와 평등에 대한 믿음은 군대라는 지배집단과 태생적 적대관계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인민 대중의 자유와 지배계층의 자유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발견케 된다. 인민 대중의 자유는 인신의 자유를 포함하는 광의의 자유이지만 지배 계층의 자유는 재산의 자유에 중점을 둔 것이다. 물론 이들이 인민 대중을 향해 식민지의 노예화라는 모국의 음모로부터 해방이라는 폭넓은 자유를 말하지만 이것은 단지 인민의 심리적 봉기를 선동하는 언어로 활용될 뿐이라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자유를 위해 모국 영국과 싸우는 병사가 되는 것은 이와는 결이 다른 문제이다.

 

자신의 생명을 요구하는 전쟁에 참여한다는 공적 요구에 부응하는 것과 개인의 자유라는 사적 욕구의 충돌, 나아가 자신의 목숨을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결코 수월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상류층을 대신해 입대보상금 10달러와 독립을 성취했을 경우 미개척지 토지 분배의 약속을 믿고 입대한 사람들이 어떤 계층이었는지를 쉽게 헤아릴 수 있다. 어쨌든 식민지 군 병력은 사회 하층 계급 및 지극히 평범한 일반 인민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미국 독립의 필연성을 주장했던 토머스 페인조차도 전투는 병사들의 성품과 영혼을 시험(2-103)”하는 도덕적 미덕의 실천장() 이었다고 했듯이 군 입대는 인민들에게 아메리카인이 된다는 것의 잔인한 고통을 의미했다는 것이다. 지역의 징병관들이 할당된 병력을 전부 대체자로 채우기도(3-106)” 했을 정도로 복무자들은 가난한자, 재산이 없는 자들로 구성하였음은 주목할 지점이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전쟁을 선언, 독려했던 당시 식민지 연합 의회의 성격을 지녔던 대륙회의 대표자들이나 주 의회 대표라는 상류 지배계층은 자신들의 이익, 즉 영국으로부터의 간섭을 배제한 독립적 이익의 추구라는 재산의 자유를 위해 이해관계 없는 인민들을 도구로 이용했다는 의미를 부정할 수 없다.

 

자유와 평등, 어떠한 속박의 강제가 없는 독립이라는 대의가 인민의 참전 의지라 설명하고 있으나, 이 영광스럽다는 독립 전쟁의 대의가 인민 대중의 의지였다고는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다만 전투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쌓아올려진 전우애와 청교도, 즉 성령에 대한 믿음 등이 전장에서 병사들의 열정과 광기의 저변이었다고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해가 될 것 같다. 사실 독립혁명전쟁을 이끌었던 지배 계층이 내건 영광스러운 대의는 그 귀결이 승리가 되었기에 가능한 언어이지 이것이 인민 대중의 그것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반()역사적 관점인 것만 같다. 영국의 일방적인 과세 부과 등 식민지민에 대한 과도한 복종의 요구가 저항의 요인이었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혁명전쟁을 결정하고 전개했던 지배계급의 실체와 인민대중의 인식과의 괴리, 그리고 이러한 양상을 낳는 당대 식민지의 사회 계급의 모순을 얘기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위대하다고 믿었기에 영광스러운이라는 수사가 가능했으며, 그럼으로써 공동의 대의였다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아메리카 백인 총인구의 19퍼센트 정도가 국왕파로 공동의 대의에 반대했으니 절대 다수의 인민이 대의에 동의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프레임으로의 이분법은 진실을 호도하기 쉽다. 어떤 다양한 이념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의 언어에 가두어 단일성으로 범주화하면 왜곡이 발생한다. 국왕파가 아니거나 이러한 파당에 대한 관념이 없는 많은 사람들의 진의는 사라지고 만다. 실제로 전쟁 중 대지주의 악착스런 착취에 소작농들의 저항, 반란 시위는 계속되고 있었으며, 이를 제압하는 것이 민병대(3-193)”의 일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일례로 소작농의 자유에 반대하면서 독립전쟁은 찬성하는 올버니 카운티의 대지주 리빙스턴가문처럼 식민지 지배계급의 평등과 자유는 그 언어의 표면과 실체적 내용과는 다른 것이었다고 해도 결코 그릇된 이해는 아닐 것이다. 소위 게릴라식 치고 빠지는 도망치기 전술과 같은 적군에 대한 피로감의 누적을 도모했던 소수의 식민지군 리더들의 용병술과 살기 힘들어 군에 입대한 인민들의 전쟁 자체에 대한 반감의 확산이 오히려 대중적 인식이었다고 하는 것이 정직한 기술이지 않을까?

 

실제 전투 병력의 동원, 식품 및 군복을 비롯한 군수 물자의 지원, 군 의료시설의 확립 등에서 각 식민지 정부나 대륙회의는 이해의 상충을 비롯해 부패와 부실이 만연했으며, 실제 제대로 된 병참의 공급이 이루어지지 않아 맨발로 전장을 걸어 다녀야 하는 병사들로부터 흐른 피로 그들이 걸은 길에는 피로 적셔져 있었다는 묘사처럼 하류 계층인 병사들에 대한 지배계급인 정부의 지원은 인색한 모습을 보인다. 아마 자신들의 자식이 전장에 참여하고 있었다면 이러한 병참상의 난맥상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비애국자로 낙인찍어 대역죄로 처벌하며 대중의 이익에 반하는 말이나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반역 은닉죄를 씌워 내부 적들을 색출, 처형 및 재산 몰수를 자행했던 것 역시 독립전쟁은 대의라는 등식을 만들기 위한 행위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이러한 아메리카 식민지의 전쟁 이면의 속사정에도 불구하고 1781년 요크타운의 대규모 전투에서 아메리카-프랑스 연합군은 영국군에게 승리함으로써 독립전쟁의 전황은 서서히 영국군의 철수로 이어진다. 8년이나 계속되었던 규율과 격리의 피로감 및 전쟁에 대한 불분명한 목적의식으로 동족과 싸워야 하는 영국군 지휘부의 감정적 이완, 전쟁 내내 지속된 영국 의회와 내각의 산만하고 무능한 전략이 결합한 식민지 반란군 진압이라는 안일한 출병은 영국의 실패로 마무리된다.

 

사실 식민지 아메리카의 승리라기보다는 영국의 자멸에 가까운 전쟁이었다고 정의하는 것이 옳은 진술이랄 수 있겠다. 영국과 아메리카가 178393일 최종 평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길고 지루했던 전쟁을 막을 내린다. 그러나 저마다의 정부조직과 의회를 가진 13개 식민지라는 이합집산의 정치, 경제적 이해관계를 하나의 국가적 기관으로 정립하는 문제는 다시금 이들을 시험 무대로 올린다.

 

3. 자유와 평등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

 

1783년 초에는 대륙군 장교들의 쿠데타 모의 움직임이 발생한다. 몇 달째 봉급 지급도 하지 않으며 전쟁 참여에 대한 약속된 보상은 물론 대륙회의가 연금 지급 반대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쿠데타로 정의하는 것에서 어떤 악의를 느끼게 된다. 이들은 권력을 지향했던 것이 아니라 단지 합당한 돈을 원했으니 이를테면 계약 이행을 요구하는 연대를 구성하는 모임에 불과했다고 여겨진다. 결국 이들에게 위협을 느낀 지역 정부의 요청으로 워싱턴의 조국에 대한 순수한 의도의 신뢰, 신성한 영예(3-262)에 대한 호소로 일단락되었으나, 각 주 정부 권력의 의혹어린 시선이 확대되는 듯 여겨지자 워싱턴은 17831219일 임시정부인 대륙회의가 있는 메릴랜드 아나폴리스에서 군사권을 대륙회의에 무조건 이양하는 상징적 행사를 한다.

 

제게 부여된 일을 끝마친 지금, 저는 위대한 작전의 무대에서 내려오고자 합니다. ....

이 장엄한 기관에 애정을 담아 작별을 고합니다. 여기서 저는 사직서를 제출하고

모든 공직에서 떠나고자 합니다,” - 워싱턴의 사직 연설 중에서, 3-263

 

 

저자는 기술한다. 독립전쟁 기간 동안 대륙회의는 군대를 전적으로 신뢰한 적은 거의 없었다.(3-264)” 워싱턴의 군대 해산에도 불구하고 대륙회의는 참전 용사들이 천하고 인색한 자들에 지니지 않는다.”며 의심스러운 조직이라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막상 인민들의 참담한 희생을 요구했던 전쟁이 승리로 귀결되자 지배계급은 안색을 바꾸기 시작한다.

 

참전 장교들에 대한 연금 지급은 사리분별 없는 낭비 되었으며, 약속되었던 토지는 지급되지 않았다. 소위 대의가 달성되자 자신들의 이익 추구라는 혁명전쟁 이전의 이기심으로 선회하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전쟁으로 인해 대륙회의가 안은 국가 부채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으며, 각 주 정부들은 저마다의 이해관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대륙회의라는 임시 정부는 부채를 갚기 위해서 수입품에 대한 관세 부과를 시도하지만 13개 식민지 정부는 대륙회의 과세권 없음을 이유로 거부한다.

 

한편 미국과 영국의 평화조약을 비롯한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던 스페인은 미시시피강 동쪽 영토와 강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주장하면서 통상조약을 요구하고, 이와 관련된 주정부들의 이해관계 대립으로 조약 체결 의도는 무위로 돌아간다. 저마다의 지역적 이해관계가 다른 주들의 이기심만으로는 재정, 상업, 각종 공공정책의 수립과 실행이 불가능한 상태이며, 셰이즈 반란이라 불리는 농민 무장 봉기가 발생하기 까지 한다. 즉 사익추구에 매몰된 지배계층인 주 정부 대표들의 위기의식은 통합된 중앙 기구의 필요성으로 이어진다.

 

1788년에 최소 7개주가 자체적으로 화폐를 발행했으며, 자체 헌법을 제정하고 전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주 정부들은 자신들의 채무를 중앙 정부에 떠넘기거나, 노예무역의 지속, 농민의 착취 등을 지속하고 이들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통합 조직의 필요가 절실해진 것이다.

 

잠시 각 주의 통치 현상을 들여다보자. 다음은 고유의 주권과 자유, 독립, 권력, 사법권을 가진 각 주의 통치 계급의 전형적 면모라 할 것이다. 13개 식민지 중 가장 큰 주인 버지니아의 경우 해당 지역 인구의 5퍼센트도 되지 않는 약 40개의 주요 가문이 법원, 의회, 정부의 주요 자리를 독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무나 자신과 같은 지위에 들어오는 것을 환영하지 않았다.(3-303)” 고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통치 계급은 인민대중에 결코 개방적인 곳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주의 자유에 대한 일면을 보면 구역질나게 역설적인 실상을 접하게 된다.


 



4. 제정 헌법의 구성과 인민에 대한 이해 - 미국인의 정체성이란?

 

전쟁 후에는 더욱 극렬하게 노예무역을 하고, 노예제를 영속화하는 정책을 확립하곤 노예에 대한 잔혹성과 참상의 현시(現示)로 백인 인민 대중이 상대적 자유에 감사케 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들이 이룬 독립의 현실이다. 독립 전쟁의 도발은 어쩌면 실패하면 그만이고, 성공하면 자신들 몫의 증가라는 탐욕이 아니었을까 라는 의심을 저버릴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유에 대한 정신, 인권의 존중이란 개념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천부적 인권으로서 개인의 자유를 생각하는 인민과 재산권의 자유, 그들만의 자유를 생각하는 엘리트 지배계급의 자유의 개념에 대한 괴리는 연방 헌법 제정을 위한 논쟁에서 다시금 뚜렷한 갈등의 양상으로 표면화된다. 노예제는 재산의 중요성에 지배계급이 얼마나 집착하였는지에 대한 반증이자 자유의 조건이 무엇인가에 대한 입증이기도 하다. 즉 노예제는 재산 있는 백인의 평등, 자유민의 조건이었음을 의미한다.

 

버지니아 제헌의회의 권리장전을 보면 그들의 자유와 평등의 의미가 더욱 명료해진다. 재산을 획득하고 소유하며 행복과 안전을 추구해 획득하는 삶과 자유를 누리는 것(3-306)” 이는 주권이 제아무리 인민에게 있고, 천부적으로 동등하다고 할지언정, 재산의 획득과 소유를 하지 못한 인간은 동등할 수도 없으며, 자유도 없다는 선언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이러한 권리장전과 헌법에 대한 비준이나 거부의 기회가 인민에게 주어지지도 않았으며, 자신들끼리 결정하고, 그들만의 리그인 의회에서 그들끼리 주지사를 선출했다.

 

 

1787년 이러한 사람들이 각 주의 대표로 514일 필라델피아에 모이기로 하였으나, 버지니아 대표인 제임스 매디슨을 비롯한 5개 주의 대표만이 도착했을 뿐이었다. 즉 중앙정부 구성과 연방 헌법 제정에 많은 주가 회의적이었다는 의미이다. 매디슨이란 인물은 다수의 폭정 우려라는 이유로 인민을 신뢰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늘의 입헌 민주주의를 당연한 듯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인민을 배제한 헌법을 상상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버지니아 대표들의 면모를 보면, 판사 존 블레어, 의사 존 매클러그, 두 사람 모두 엄청난 규모의 농지를 소유한 농장주였다.((3-336)” 펜실베니아 대표인 제임스 윌슨의 면모를 볼까. 그 역시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고 금전적 수입에 욕심(3-338)”이 많았던 사람이다.

 

물론 이러한 재산가들만 헌법 제정을 위한 대표 모임에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다시 말해 중앙 정부의 권한 부여정도, 헌법의 조항 정리에 자신들에게 불이익한 내용이 끼어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중앙정부를 강력하게 하는 것이 내게 유익한가, 아니면 약한 것이 유리한가, 연방의회의 하원 선출에 있어 인구 비례로 하는 것이 유익한가, 주의 크기와 상관없이 동등하게 배분하는 것이 유익한가, 노예무역의 합법성을 적시케 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 노예를 투표인구에 포함시켜야 하는가, 그렇다면 노예 몇 명이 백인 한 명과 같은 것이어야 하는가, 투표권은 누구에게 부여해야 하는가, 상원은 누가 선출해야 하는가, 인민이 직접 선출해야 하는가, 아니면 하원이 선출할 것인가, 상원의 권리는 어디까지여야 하나, 행정부 수반은 1인이어야 하나 다수여야 하나, 수반의 권한은 무엇이어야 하나, 의회의 권리는 어디까지여야 하나 등등 모든 것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전의 양상을 띤다.

 

인구비례와 대표성으로 압축되는 논의의 쟁점은 쉽사리 합의를 이뤄내지 못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중앙정부도 없는 무정부 상태의 미국이란 이합집산의 식민지가 몰락하겠다는 위기를 감지했던 모양이다. 재정적 부담이나 선거인을 결정할 때 인구 다섯 명의 노예를 세 명의 자유인으로 본다는 각 주 평등성에 대한 논의의 예는 이들이 인민을 재산적 가치와 그 등가물로 여기고 있음을 증명하는 전형적인 일례라 할 것이다.

 

평등의 정신에 대한 메사추세츠 주의 대표인 엘브리지 게이먼의 주장을 살펴보자. 우리가 경험하는 여러 폐해는 민주주의 과도함에서 나온다.(3-349)” 이처럼 평등을 매도하는 주장이 그대로 제정 헌법에 반영되는 것은 아니지만, 인민에 대한 강한 반감은 코네티컷, 뉴욕 주등 여러 대표들의 입에서 다양한 표현으로 발설되었다. 로져 셔먼은 보통 선거에 반대(3-348)”하면서, “그들에게는 정부에 관해 알아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들은 정보를 원하지만 지속적으로 현혹된다.(3-349)”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물며 연방 하원 의원도 인민이 아닌 주 의회에서 선출해야 한다고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표인 찰스 코츠워스 핑크니는 주장했다.

 

미국의 제정 헌법이란 그들의 정체성, 이른바 그들이 얻고, 되고 싶은 얼굴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추하기 이를 데 없었다. 5월에 시작된 이들 대표들의 헌법 제정 논의는 4개월여의 논쟁 끝에 98일 종료된다. 거창한 대의를 말하며, 자유와 평등, 위대한 국가를 만들겠다는 이들이 입안한 헌법 초안을 보며 불편함과 죄책감을 느낀 이들이 물론 있었다. 이와 달리 노예 무역 보호 조항이 누락되면 헌법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사우스캐롤라이이나와 조지아 대표같은 남부 지역 주들도 있었다.

 

이러한 헌법에 대해 혐오감을 강력하게 드러낸 대표의 발언은 당시 헌법 제정 위원회 대표들이 어떤 이들의 이익을 위해 굴러가고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농장주의 비위를 맞추는 일....그런 부류의 재산을 보호하는 것은 부당하며, 노예 소유주의 이해관계를 충족시켜 주는 것은 큰 죄악(3-369)”이라며, “소유주를 비열한 폭군이라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표들 거의 대부분이 노예 소유주였으니 그네들이 말하는 대의를 꺾기에는 너무 미약했던 모양이다. 어쨌든 대표들은 917일 모두 서명을 완료하고 비준을 행위에 들어갔다.

 

1787년 이 헌법에 대한 비판은 그치지 않았던 모양이다. 독립혁명의 원칙에 헌신하지 않았다는 회의 대표자들에 대한 비난에서부터, 공공안보를 장악한 인물들에 의한 음모의 산물, 자신이 속한 계층의 주머니를 채우는데 열중한 결과물 등등 이었다. 저자 로버트 미들코프는 이러한 비난에 대해 반역사적인 편협한 시각이라고 주장한다. 현재의 기준에 놓고 맞지 않는 역사적 실재를 논의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는 것이다. 독립을 성취하고 평화가 성립되면 독립과 연관된 문제들도 변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혁명전쟁 시에 중요했던 것이 평화시에는 결코 중요한 맥락을 같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자유나 평등의 이념이 전쟁 기간과 평화의 기간에 달라져야 한다는 것은 정말 궤변이 아닐 수 없다. 독립전쟁을 왜 해야 했나? 그리고 인민 대중이 왜 이 전쟁의 중요 병력으로 참전해야 했나?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인민 대중은 문자 그대로 지배계급이 이끄는 사회를 위해 그저 소용된 한낱 도구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들 대중은 지배계급, 엘리트 담론가들이 주창했던 자유, 평등, 민주주의를 획득하기 위한 전쟁에 참여한 것이기에 평화 시에 이 시초의 목적은 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은 지배계급의 욕망, 위대한 미국이라는 대의에 끼워 맞추려는 비열한 해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당대 헌법을 거부했던 사람들의 주장에 오히려 귀를 기울이게 된다. 양원제 연방의회에 대한 지적인 듯한 헌법 뒤에 숨은 전제적인 귀족정 또는 가면을 쓴 귀족정이라거나, 권위주의적인 목표를 은폐하려는 열망에서 나온 산물(3-386)”에 가깝다는 말에 공감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석연찮은 제정 헌법은 어떻게 비준되었을까? 주 의회에서 자기들끼리 비준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인민 대중은 자신들의 권리 행사를 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야만적인 귀족 정치가 민주주의 외피를 뒤집어 쓴 것이 미국의 제정 헌법, 그네들의 정체성이라 해도 되지 않을까? 미국의 대통령 선거가 인민대중의 직접 선거가 아닌 선거인단 선출 투표가 되어 인민의 직접적인 대표자 선출을 막았던 것 역시 이 제정헌법의 소산이다.

 

선거인단은 일반 인민보다 지적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라는 인식이다. 이것을 화려한 수사로 최선보다 차선을 선택한 미국인의 슬기로움이라고 자찬한다. 오늘의 미국인, 그들의 정체성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개인주의는 사유 재산 보호의 자유와 맞물려 있으며, 인종 차별의 현재 진행형은 뿌리 깊은 백인 중심주의의 그네들의 헌법적 정신이다. 또한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권한을 독립적으로 각 주가 소유하고 있는 지역 분리적 정신은 중앙 정부인 연방과의 이해관계라는 애초의 손익판단에 의거한 당대 타협의 산물이다. 이렇듯 정치 기구의 조직 구성에 있어서 조차 그들의 실용주의는 아주 깊게 스며있다. 조지 부시, 도널드 트럼프 같은 막대한 부를 소유한 가문의 자식들이 행정권의 수반이 될 수 있는 정체성의 토대를 수긍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책은 무분별하게 미국의 정치 제도에 대한 무조건적 숭배와 도입이 지닌 결함들의 이해는 물론 오늘의 미국이라는 국가를 이해하는 귀중한 참조 문헌이라 하는데 주저치 않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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