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전, 10권 131



에피쿠로스 철학에 대해 전해져오는 문헌이 워낙 적을 뿐 아니라, 그마저도 그의 철학을 접할 수 있는 우리 말 번역 자료도 극히 미미하다보니 일반적 곡해가 진실로 둔갑해 정설처럼 회자되고 있는 형편이다. 왜 그의 사상에 성적 문란과 방탕함이란 꼬리표가 붙었는지, 육체적 쾌락을 좇는 음울한 변경 조직의 쓰레기 사상이 되었는지를 확인하고픈 충동을 물리칠 수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그가 썼다고 전해오는 세 편의 편지 내용과 함께 당대 에피쿠로스를 음해, 매도하던 스토아주의자들의 거짓 소문의 진상을 말하고 있는 2세기 말 3세기 초에 써진 것으로 추정되는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철학자전혹은 그리스 철학자 열전이란 이름으로 옮겨지고 있는 책이 부분적으로 이 충동을 해소해주고 있다.

 

중세 유력 사본(寫本)중 하나는 철학자들의 생애와 학설의 집성 10으로 책이름을 가지고 있고, 책의 수록 내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철학자들 가운데 저명한 사람들의 생애와 의견 및 각 학파 학설의 요약적 집성이란 표제를 붙이고 있기도 하다고 한다. 국내 한글 번역본 또한 이들의 제목을 각기 따르고 있는데, 나남 출판에서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을 제목으로 2권으로 출간한 것이 있으며, 동서문화사에서는 영문번역 대본의 제목을 따라 그리스 철학자 열전이란 이름으로 출간되어 있다.

 

이 책은 철학 학파별로 구분하여 총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기원전 3세기 전후에 활동한 에피쿠로스는 마지막 권을 차지하고 있다. 책의 저자인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에피쿠로스에 대해 악의를 품고 있던 스토아파 인물들의 저열한 비난을 먼저 소개하고 있다.

 

1. 누가 에피쿠로스를 왜곡했나? - 스토아파의 비난

 

103절에서 8절까지 소개되고 있는 스토아파의 비난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합창가무단 무용수 출신의 냉소주의의 회의파 철학자로 불리는 티몬이란 자의 사악한 주장으로 시작된다. 이 자는 에피쿠로스를 자연 철학자들 가운데 가장 뒤처지고 창피함도 모르는 개 같은 사내(10-3)”라며 가장 환경이 나쁜 자라고 폄훼한다. 그런데 에피쿠로스는 명문 필라이다이 가문의 일원이었으며, 실제 데모크리토스를 비롯한 그 어떤 자연 철학자들보다 뛰어나며 독창적인 학문을 열었음이 입증되고 있다.

 

이러한 악의는 스토아파들에 의해 무수한 거짓말로 왜곡되어 매도된다. 마치 한국의 추한 공작 정치배들과 빼닮은 모습이다. 스토아파의 디오티모스란 자는 자신의 동료인 크리시포스(스토아파)’의 편지를 에피쿠로스의 것으로 편집(*무려 50통을 위조하였단다)하여 기만적 비난을 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창녀 레온티온에게 나의 구세주이고 주인인 분이여, (...) 나의 사랑스런 티온이여라고 편지를 썼다든가, 유부녀인 테미스타에게 만일 당신이 나에게 와주시지 않는다면 나 자신은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으므로 (...) 어디라도 달려 갈 준비가 되어있습니다.(10-5)”라며 외설스런 사내라고 조작하여 매도하는 식이다. 이에 가세하여 포세이도이오스, 니콜라오스, 소티온, 테오도로스 등 스토아파 인물들은 에피쿠로스의 쾌락과 원자(아톰)에 대한 사상은 남의 것을 훔쳐 쓴 것에 불과한 아무런 사상도 없는 것이라 비난하곤 매춘부 뚜쟁이란 낙인까지 찍어댔다고 한다. 또한 에피쿠로스의 철학 정원에는 역겨운 비밀 의식(秘儀)을 행하는 곳이라는 누명까지 씌워댔다는 것이다.

 

이 책이 써진 연대를 서기 2세기 말에서 3세기 중엽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는데, 당시는 기독교가 스토아 철학과 융합하여 자신들의 사상적 토대를 구축하던 시기이다. 원자론을 말하는 자연철학인 에피쿠로스에 대한 탄압이 극에 이를 때였다는 점에서 스토아파 인물들의 왜곡된 비난이 얼마나 억척스럽게 가해졌는지를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저자 디오게네스는 이들의 비난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에피쿠로스를 비방하고 있는 사람들은 상도(常道)를 벗어나고(10-9)”있으며, 그 어느 누구도 미치지 못할 친절과 고귀한 학문적 성취를 이룬 인물이었음을 당대의 증거들을 통해 반박 지적하고 있다. 그를 찬양하여 아테네에 세워진 동상, 다른 모든 학파의 학통이 끊어졌으나 여전히 많은 제자들에 의해 이어지는 학통과 헤아릴 수 없는 학두(學頭)의 배출을 사실로 들고 있다.

 

남 몰래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이 1 만 번이나 발견되지 않고 있다고

앞으로도 발견되지 않을 것이라 믿는 것은 불가능하다.

발견 되지 않고 있을 수 있는지의 여부는 삶을 마칠 때까지 모르기 때문이다.” (10-35)

 

특히 에피쿠로스의 편지글은 시작될 때 사용하는 인사말의 특이성을 예로 들며, 스토아파들을 비롯한 에피쿠로스 철학의 적대자들이 저지른 위선을 비판한다. 이러한 거짓은 반드시 드러나고 말 것이라는 에피쿠로스의 문장만이 한 위대한 철학자의 고귀한 정신을 드러낼 뿐이다. 부정과 기만을 밥 처먹듯 하는 오늘 한국 사회의 수구 정치배들에게 들려주고픈 대목이다.

 

 

2. 에피쿠로스가 직접 쓴 쾌락의 의미

 

에피쿠로스가 남긴 편지는 감각과 선취관념이 진리기준임을 설명하는 헤로도토스에게 보내는 편지, 자연의 탐구에 대해 말하는 피토클레스에게 보내는 편지, 그리고 윤리학을 말하는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세 통이 전부이다. 이 중에서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낸 편지가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삶의 목적으로서 평정심(아타락시아), 즉 쾌락에 대한 에피쿠로스 사상의 정수(精髓)를 이해토록 돕는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첫째의 선()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사람은 쾌락을 출발점으로 해서 모든 선택과 기피를 행하기 때문(10-129)”이라고 주장한다. 이 쾌락은 J.S.밀의 공리주의자들의 쾌락과 흡사하다. 쾌락이라고 무조건 선택하는 것은 아니라며 불유쾌를 초래할 쾌락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회피한다고 한다. 또한 고통(괴로움)의 인내도 보다 큰 쾌락을 얻을 수 있다면 감수한다는 것이다. 결국 쾌락과 괴로움을 상호 비교 측정하여 판단하는 것이 적절한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자신의 쾌락에 대한 개념은 방탕자들이나 성적 향락 속의 쾌락이 아니라 몸의 고통과 정신()의 동요가 없는 건강과 평정임을 거듭 역설한다. 이 말은 공복 일 때 빵 한 덩이가 최고의 쾌락이듯 불유쾌, 고통을 벗어나는 검소와 절제로서의 자연스러운 필요로서의 즐거움, 행복이다.

 

나아가 그는 덕을 선택하는 것도 건강을 위해 의술을 택하듯 쾌락 때문이지 결코 덕 그 자체를 위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한편 정신은 삶에 관한 두려움을 몰아낼 때 완전한 삶으로 이행될 수 있으므로 정신적 동요를 가져오는 대상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며, 이는 그의 자연 철학으로 이어진다. 자연에 대한 탐구는 인간의 욕망을 투여한 신에 대한 자의적 믿음이 아니라 관찰과 경험을 통한 자연의 이치를 밝힘으로서 이를 극복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3. 에피쿠로스의 자연 탐구

 

에피쿠로스의 자연 탐구는 사람의 정신을 동요시키는 왜곡된 신의 상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는 신이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라고 지적하며, 사람들이 믿고 있는 신들을 부인하는 불경신(不敬神)인 사람은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고(思考)를 신에게 밀어 붙이고 있는 자들이 오히려 불경신의 사람인 것(10-123)”이라고 힐난한다. 그러면서 신의 불멸성과 지복성을 유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신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그의 사상에 신을 부정하는 무신론이란 이미지를 뒤집어씌운 이유도 바로 이러한 주장의 곡해일 것이다.

 

아마 그의 자연 철학의 중심이 되는 원자(Atom), 즉 유물론적 사상의 기독교 교리와의 상충을 합리화하기 위한 스토아파들의 의도적 왜곡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다음의 문장은 기독교를 자극하는 주장이었을 것이다. ()에서는 아무것도 출현하지 않는다.(10-38)”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무엇이든 어디서나 생기고 사물이 생기기 위한 원인은 아무것도 필요치 않기 때문이라고 선언한다.

 

그는 만유는 언제나 지금 존재하는 것이었으며, 물체와 공허로 이루어져 있다.(10-39)”고 주장했다. 특히 물체와 공허 외에는 완전한 실재로서 파악되는 것이고, 이것의 우유성(偶有性)이나 속성으로 일컬어지는 것으로서 파악되는 것이 아닌 것은 상상에 의해서건, 상상되는 것과의 비교에 의해서건 아무것도 생각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만유의 구성인 물체의 근본이라 한 원자가 출현한다. 물체의 시원(始原)은 불가분한 본성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이므로 공허가 장소를 양보한 영원히 운동하는 불가분으로 충실한 것으로서 원자를 말한다. 원자의 운동에 관한 두 가지 형태로서 상호 일정한 거리를 둔 운동과 진동을 계속하는 운동으로 구분하고 있다. 물론 현대 물리학에는 한참이나 미치지 못하지만 2,300년 전의 고대 학자의 사유로는 가히 빼어난 지적 사유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사람이 인식하는 사물의 표상을 사물 자체의 일종의 모방이 우리에게 와서 제각기 상응한 크기에 따라 시각이나 정신에 잠입하는 것이라는 이해는 쇼펜하우어나 칸트 철학에서 말하는 물자체인 실재와 표상의 인식과 한참이나 거리가 먼 저급한 수준의 성찰이라 할 수 있지만, 인식론이라 할 수 있는 사유를 시도했다는 측면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빼어난 인식을 발견 할 수도 있는데, 원자의 어떤 합성물인 집합체 가운데서 끊임없이 상호 충돌하는 아톰 운동의 연속성을 감각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라든가, 소리의 지각 성립에서도 소리를 구성하는 입자인 유체의 운반에 따른 것과 같은 사유이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죽음은 존재하지 않고 있는 것이고,

죽은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산 자나 죽어버린 자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10-125)

 

이것(원자 이론)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정신의 동요가 빚어내는 사람의 고통이 근원 없는 것이라는 데로 이어진다. 사람의 육체라는 물체란 원자의 우연한 결합이라는 점이다. 또한 선이나 악은 감각에 속하는 것이고 죽음이란 이 감각을 잃는 것, 결합 원자의 해체일 뿐이라는 인식이다. 감각의 부재는 곧 두려움의 부재이기도 하다. 죽음의 본질인 이 감각 부재를 이해한다면 삶에서 두려움, 정신의 동요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원자론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과 함께 별도의 감상으로 미루어두어야 할 것 같다.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즉 고통을 벗어나 평정심이라는 행복의 영속을 위한 방법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철학은 자연에 대한 철저한 탐구를 통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향한 치유(治癒)적 사유이다. 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유물론적 사유가 싹 텄으며, 후일 그의 사상이 마르크스라는 인간을 통해 비결정론적 원자론, 마주침의 유물론의 토대가 되었음을 안다면 꽤나 기뻐하지 않았을까? 박해 속에서 살아남은 한 저작으로나마 고귀한 사유의 모퉁이를 읽을 수 있도록 한 인류의 지성들에게 보내는 경외는 항상 미흡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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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나룻배 2022-03-18 18: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필리아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우연히 본 리뷰글을 감명깊게읽었습니다!

필리아 2022-03-18 18:1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꿈꾸는나룻배‘님~,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은 우주의 시원성에 대한 사유, 특히 ‘클리나멘‘이 오늘의 사람들에게 주는 영감이 무엇보다 소중하죠. 원자들의 미세한 빗겨남으로 마주치는 그 우발성의 결합, 이것은 정말 인간 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이라 할 수 있답니다. 지금 우발적 마주침의 유물론을 성찰한 마르크스의 박사학위 논문을 읽고 있어요. 즐겁고 평안한 시간 되십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