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사와 비난이 엇갈리는 비평이 공존하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작품, Ada, or Ardor: A Family Chronicle(에이다, 또는 열정: 어느 가족 연대기), 이후 에이다로 표기함의 국내 번역판이 존재하지 않는 아쉬움, 혹은 미련 때문에 이 조잡한 잡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나보코프 작품에 대한 대중적 몰이해는 소아성애의 소재로만 읽히는, 다시 말해 오독만 난무 하는 Lolita;롤리타정도로만 기억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다만 다행스럽게도 Pale Fire(창백한 불꽃이 번역 출간되면서 독자들의 나보코프 작품에 대한 지적 모험심을 한 단계 상승시켜주기도 했습니다. 사실 Pale Fire(창백한 불꽃은 문학적 단어 놀이랄 수 있는 애너그램(anagram)에서부터 다층적 서사, 극도의 조밀한 암시 등 매우 복잡한 글쓰기로 독자를 좌절의 지점에 내몰기까지 하는 아주 도발적인 복잡한 소설이었습니다. 롤리타 또한 단순한 비극적 사랑과 집착으로만 읽을 수 있는 작품이 아닙니다.

 

성애에 대한 묘사를 읽는 사람들은 위선적 이중성을 보이곤 합니다. 즉 대상화해서 소비하려는 욕망에만 매몰되어 알고 있는 편협성에 기초한 말만 중얼거리죠. 나보코프는 대중들의 Lolita;롤리타를 소비하는, 즉 독해하는 방식을 보고 고통스러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에이다; AdaLolita;롤리타를 오해한 사람들의 무지를 조롱하기 위해 집필되었다고 하기까지 한답니다. ‘에이다근친상간이라는 위반된 금기를 소재로 하고 있거든요. 에이다의 묘사는 대중적 표현으로 하자면 수위가 높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에이다; Ada는 그 감상을 단순 명쾌하게 기술할 수 없을 만큼 독해의 장애물이 무척이나 많은 소설입니다. 일단 연대기 자체도 구조의 혼란을 정리 할 수 있어야 하고, 호흡이 긴 문장을 따라가며 집중을 놓지 않을 것이 강요됩니다. 역시 애너그램, 대체 역사, 다층적 내러티브와 소설의 배경인 ‘Anti-Tera(안티 테라)’ 등 우주 해설까지 그야말로 환각과 공상 아닌 공상을 오가는 상상으로 한 마디로 녹초가 되게 하는 난해하다고 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그럼에도 프랑스 작가 에릭 오르세나두 해 여름;Deux E'te's에서 나보코프의 에이다;Ada번역의 열기로 채워진 섬의 분위기를 묘사하며, 섬의 어디에나 색정의 기운이 감돌고 있음을 느낌으로 알고 있었다. (中略) 향긋한 냄새로 미루어 근처 어디에선가 교접이 한바탕 벌어지고 있으려니 짐작하고 있었다.”고 전하기도 하듯이, 에이다;Ada는 아름답고 어떤 만족감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기술한다면 테라와 안티-테라로 불리는 쌍둥이 행성을 배경으로 한 천재 남매 사이의 뜨거운 사랑에 얽힌 해설사라 할 수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이 거주하는 세계는 안티-테라이지만 이들은 테라에 대한 환상을 지니고 있죠. 에이다와 밴 빈이 주역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역사적 연대는 대략 19세기 후반인 1884년이 소설적 사건의 시기이고, 이들 주인공은 안티-테라라는 세계에서 극도의 부를 축적한 귀족의 신분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사실 두 남녀의 사랑의 불꽃을 위한 시간을 초월한 투쟁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한편, 우주의 다차원 공간을 설명하는 물리학의 브레인(brane; )이론을 토대로 한 4차원의 갇힌 브레인의 상상을 통해 새로운 관찰자적 시점을 생각하게 하며, 무수한 학문적, 정치적, 과학적 제재들로 인해 복잡다단하게 설계된 퍼즐처럼 산개(散開된 장면들과 대사들을 맞추는 작업을 요구합니다. 어쩌면 제임스 조이스의 반향(反響)인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달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19세기의 러시아 소설도 떠올리게 하는 정말 기이한 감응에 빠져들게 하는 소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러시아어, 프랑스어, 영어가 혼용되어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단어 놀음까지 더해져 어학 역량이 천박한 사람인 저에게 이 작품의 이해는 한계를 가지게 합니다. 나보코프 문학의 관문이기도 한 문학적 언어 놀음과 퍼즐로 가득 찬 이 작품의 국내 번역을 기대하는 바람이 간절해집니다. 나보코프의 공식 완전판으로 불리는 단편 전집의 발간에 즈음한 독자의 아쉬움의 변()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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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닉
아니 에르노 지음, 조용희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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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온통 불안정, 불균형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소란스러운 충동이 끊임없이 폭발을 부른다. 그러나 끊임없는 폭발에도 불구하고

충동은 진정되지 않는다.” - 조르주 바타유 , 에로티즘267, 민음사

 

번역된 제목 탐닉은 드러난 욕망의 실현인 적나라한 섹스의 묘사, 다시 말해 비본질적인 표면에 불과하다. 어쩌면 원제인 ‘se perdre'(상실)이 이 책 집필의 진정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작품의 시작에 앞서 아니 에르노는 이 책은 일종의 내적 필요에 의해 이 일기장을 공개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13)”고 밝히고 있으며, 아직 정확하게 밝혀내지 못한 동일한 상실, 오직 글을 통해서만 그것을 진정으로 밝혀낼 수 있을 것(160)”이라고 쓰고 있듯이 욕망을 향한 끊임없는 기다림, 그 공허의 불안과 고통의 문제를 들여다보려는 글쓰기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다보면 이 내적 필요에 의해 써진 일기, 이야기의 충동은 우리 존재가 육체와 시간 속에 있다는 인간적 진실에 대응하기 위한 본능적 시도라는 피터 브룩스가 지적한 성애(性愛)와 앎을 향한 충동으로서 글쓰기의 밀접성의 전형적 실례로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이 책은 꿈을 꾸고, 욕망을 그대로 옮기며, 해석하여 자신을 인간 주체로 구성하여 인식의 변화와 확장을 통해 단절된 욕망을 대신하여 삶의 충일함을 지속시키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보여 지기 때문이다.

 

이 지극히 사적인 일기의 내용은 프랑스 주재 소련 외교관인 35세의 매끈한 남성 S와의 14개월 남짓에 걸친 광적이기까지 한 성적 탐닉의 시간들과 이 기다림의 시간이 가져오는 질투와 불신을 오가는 고통, 그리고 관계 중단의 걱정, 욕망하는 사람이 더 이상 자신을 찾지 않게 될 때 다가올 예견된 열정의 단절에 대한 불안의 반복된 날것의 기록일 뿐이다. 그래서 이 단순하고 지루하게 반복된 내용의 연속, 그 어떠한 조작도 보탬도 없는 일기는 인간의 적나라한 내적 삶, 욕구와 열정과의 싸움이라 할 수 있는 어떤 종교적이기까지 한 양상을 발견케 한다.

 

48세의 여자는 S와의 섹스를 끊임없이 갈망한다. S와 격렬한 육체적 결합의 시간은 오직 S'아니(Annie)'를 찾을 때 이루어진다. 그와 사랑을 나누는 함께하는 몇 시간이 지나면 다시금 그의 방문을 예고하는 전화를 기다리는 공허한 시간만이 지속된다. 이 기다림의 시간은 여자에게 끔찍함, 심리적으로 텅비고 울고 싶을 정도의 충족되지 않는 열정이 가져오는 고통이다. 이 욕망에 사로잡힌 여자는 자기 일을 할 수 없을 정도의 불안, 그가 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방황한다.

 

여자의 모든 행위는 S로 하여금 계속하여 자신을 욕망케 하기 위한 것들로 채워져 있다. 고급 원피스, 명품 백, 화장과 미장원 그리고 남자를 위한 고가의 선물, 그가 좋아하는 담배와 위스키, 대통령과의 만찬 참여와 같은 자신의 명예를 통한 S의 허영심 충족에 이르기까지 여자의 모든 몸짓은 다른 육체와의 결합 속에 나타났다가 곧바로 사라져버리는 굉장한 어떤 것에 대한 복종(또는 추구)(203)”이다. 그러나 이 충동과 끊임없는 폭발에도 불구하고 욕망은 진정되지 않는다. 다시금 반복되는 불안정과 불균형의 시달림, 이 열병은 그저 휩쓸리고 짓밟히는 것 이외에 어떠한 대안도 불가능하게 한다.


 



극도의 괴로움도 무릅쓰는 낭비, 견딜 수 없는 극도의 괴로움을 무릅쓴 극한 상황에서의 낭비를 간절히 욕구하는 일기 주인공의 행위들은 마치 죽음의 충동과도 닮아있다. 나의 경이롭고도 무서운 욕망과 죽음, 그리고 글쓰기의 근원이었다는 사실(13)”이었음을 자신에게 확인하는 문장은 이러한 생각을 확신시켜준다. 남자가 언제 자신을 찾을지를, 즉 욕망이 유예된 시간에 일기를 쓰며 여자는 이렇게 표현한다. 이렇게 글을 쓰다보니 다시 기다림과 열망이 가득 넘친다. 글은 욕망을 유지하게 한다.(112)”. 즉 글쓰기는 지체된 육체의 욕망을 대체하는 욕망의 실현이다.

 

이 욕망은 S와의 섹스에서 보다 완벽한 육체의 결합, 쾌락의 경계를 넓혀나가려는 시도들로 나타난다. 포르노 영화를 보고 사랑의 기교를 말하는 책을 읽으며 다양한 체위와 침대, 소파, 서재라는 장소에 이르기까지 에로티즘의 완벽 추구를 위한 삶으로 점철되어 있다. 오직 육체의 탐닉, 쾌락 추구이외에는 여자에게 아무런 의미조차도 지니지 못한다. S와 몸을 섞던 기억이 그녀에게서 떠나지 못하도록 유지하는 혼신을 기울인 노력만으로 삶을 채우고 있다. 사라져버릴 열정. 이 정체된 삶에서 아무것도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160)”라는 문장처럼 글쓰기는 욕망의 열정을 내면에 가두는 작업이다.

 

S의 프랑스 주재 소련 대사관에서 임기를 마치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온다. 이것은 일기의 주인공에게 절박한 공포의 다름 아니다. 그녀의 욕망 추구를 가능케 하던 대상이 사라지는 것이다. 비가 오고 무거운 날씨. 이곳, 피렌체에서 죽을까봐 두려워진다. 더 이상 S를 보지 못할까봐 두렵고, 갑자기 모스크바로 떠났을지도 모른다.(234)” 이 불안은 번민과 눈물이 목구멍에 차오를 만큼의 절망과 광적인 고통을 야기한다. 여자는 이러한 번민의 순간에 브론스키의 사랑에 대한 불안으로 갈등하는 안나 카레니나에 자신을 대입한다.

 

조르주 바타유가 말했던가? 에로티즘은 존재 자체를 문제 삼는 불균형이며, 필연적으로 자신의 상실을 요구한다고 했듯이 이것은 이중의 의미로 여자를 존재적 물음에 빠뜨린다. S의 상실, 삶의 의미로서 사라져버리는 쾌락(욕망), 즉 욕망의 부재인 죽음으로서. 사회적 통념을 박살내는 이 열정적이고 격렬한 사랑의 시간에 대한 기록은 죽음이 있는 것처럼 사랑하고 글을 썼다.’는 작가의 말처럼 결코 천박하고 음란한 노출의 뻔뻔한 기록이 아니라, 스스로를 정의할 수 있도록 하는 욕망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탐구의 글쓰기라 할 것이다.

 

아마 화자로써 써내려갔던 자신의 일기를 이렇게 출간한 것은 자신이 청자(독자)가 되어 화자의 욕망을 들여다 보려는 전이(轉移)의 역동적 상호작용을 의도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육체적 충동에 대한 이야기가 문학적 걸작으로 읽히는 이유는 아마도 감정의 진솔한 드러냄, 그 표현의 순수한 아름다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불연속적 개체인 인간은 항시 연속적 합일을 희구하는지도 모른다. 인간을 지배하는 이 연속적 합일을 향한 충동에 시달리는 것이 또한 인간의 불가피한 삶의 형식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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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위로 - 글 쓰는 사람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곽아람 지음 / 민음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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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분야의 학과목 이수 속에서 인간 삶의 그 풍부한 양태를 접하며 사유의 한계를 넓혀가는 과정을 술회하는 이 기억의 기록물은 진학과 취업, 기성 사회가 요구하는 성공이라는 목적을 위한 편협한 공부에 매몰되었던 한 인간의 자기 성취에 대한 자긍심의 산물이랄 수 있다. 공부에 대한 이해는 사람마다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소위 자기 계발이라는 실용적인 목적 지향성을 공부라 주장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이러한 공부는 일단 성취되면 더 이상 한 인간에게서 멀어지게 된다.

 

이 자긍심 그득한 책에서 말하는 공부는 삶이 계속되는 한 지속되는 영원한 배움이다. 그것은

저자가 술회하는 대학 교양과목을 비롯한 어학과 다방면의 인문학 과정의 공부로서 삶을 이해하는 시선과 인간에 대한 태도, 세계의 혼돈과 질서,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흡수, 해석할 수 있는 기초적 소양의 축적을 위한 배움의 시간이고 노력의 투여다.

 

이러한 시간들은 한 인간의 정신적 깊이와 폭의 정도를 심화, 확장시켜주었을 것이다. 물론 이 집중과 열정의 노력이 투여된 시간의 효과가 영 문장 한줄, 선형 계획이나 회귀분석과 같은 수학, 통계에 대한 자기 계발 따위의 지식처럼 목적 지향적 성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다분히 교양이라 총칭하여 부를 수 있는 이들 인문학적 소양의 축적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안목과 그 이해를 높여준다. 바로 이러한 공부는 책의 제목처럼 삶의 경계, 그 지평을 넓혀 마주칠 수밖에 없는 세상의 온갖 형태의 다름과 차이에 대한 관용과 위로의 지혜가 되어 줄 것이다.

 

어쩌면 저자가 흔쾌히 학년을 달리 할 때마다 선택하여 수강하고 체험하였던 학과목 각 과정들의 소개 내용에 귀 기울여 그 과정들에서 취할 수 있는 나름의 지적 성장을 위한 유용한 인문적 가이드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인연(因緣)의 책이라 소개하고 있는 곰브리치의 서양 미술사의 발견처럼 나아갈 인생길의 등불처럼 등장하는 한 권의 책을 발견하는 것이 될 수도 있고, 고고미술사학과 학생이 듣는 민법총칙등 예견되는 법규의 선택처럼 다가 올 직업적 성취와 관련한 지식의 확장을 위한 관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공부란 미술사 전공의 3학년 학생이 독문과 개설의 독일 명작 이해의 강좌에 앉아 있을 때의 그 충만해지는 감성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토론과 책읽기로 이루어진 강좌에서 절로 체화되는 자유로운 의견의 개진과 글쓰기 연습, 문해력의 확장 등은 그대로 한 인간의 지성적 성숙함으로 스며들 것이다. 쓸데없는 공부란 없을 것이다.

 

내가 즐겨 사용하는 말이 있다. 개미처럼 늘 쓸모 있는 일만 하는 것은 저급한 동물의 특징이다. 설혹 하는 공부가 돈과 지위와 성공을 주는 것이 아닐지라도 삶의 의미를 공급해 줄 것이다. 공부란 실천적 삶의 예술(art)이다. 그 자체로만 목적이 있는, 달리 표현하자면 목적의 독재로부터 해방된 강제성 없는 자기실현으로서의 작업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발적 동기를 지닌 행복으로서의 공부는 그대로 위로요 위안이 되어 줄 것이다. 저자의 대학 공부 과정을 따라가며 계속 생각하게 만드는 힘, 지식의 터전을 마련하는 여정, 또 다른 세계의 문을 열게 되는 기쁨 등 다양한 공부의 길을 만끽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이 책을 든 독자들, 특히 학업을 이어가고 있는 청년들에게 소중한 귀감의 시간이 되어 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공부)의 중요함을 사람들에게 전하고자하는 충직한 성의가 깃든 이 책의 저자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시간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 리뷰는 민음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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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 - 맑스 박사 학위 논문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2
칼 마르크스 지음, 고병권 옮김 / 그린비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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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마르크스의 박사학위 논문으로 쓰여진 에피쿠로스(B.C.342~B.C.270)’의 자연철학에 대한 이 글은 그의 말처럼 이들에 대한 조금의 선행적 연구도 없었을(저자서문)”만큼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을 비롯한 우연성의 철학은 주류의 관심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더구나 “‘키케로플루타르크’, ‘클레멘스 알렉산드리누스와 같은 일부 인간들이 재잘거린 것을 반복, 변주한 것들만이 있을 뿐이다. 청년 마르크스가 주변의 경계로 내몰려 소외된 사상에 숨을 불어넣은 것은 그의 성품에서 나온 어쩌면 필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마르크스의 학위 논문, 해당 논문의 주석, 논문에 인용한 저술들의 내용과 그 비판으로 구성되어, 남아있는 저술이 거의 없는 에피쿠로스 철학의 면모를 거의 샅샅이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문헌적 가치까지 지니고 있다 해야 할 것 같다. 사실 이 논문에 대한 갈증은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에 대한 보다 진실한 앎을 비롯해서 알튀세르와 강신주가 지적한 마르크스의 마주침의 유물론, 그 본질을 이해하고자 함이었다. 한편 이를 곡해한 뿌리 깊은 몰이해와 악의의 그릇됨을 드러내고 싶은 증오 또한 한 몫 했다고 할 수 있다.

 

아카데미학파인 키케로(B.C.106~B.C.43)는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다음과 같이 멸시, 폄훼하였으며, 이후 주류 학계는 이를 그대로 베끼는 것을 자신들의 학문적 소양으로 삼았으니, 이러한 무지가 인류의 지성을 얼마나 퇴행시켰는지는 정말 신만이 알 일이다.

 

그가 가장 뽐내는 자연학에서 완전한 문외한이었다. 그가 세운 자연학은 대부분 데모크리토스의 것들이다. (...) 더 나쁘게 되었고 망쳐졌을 뿐이다.”

에피쿠로스는 거짓말을 했다. 그는 원자가 아주 작은 이탈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말했는데, 물론 이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것이다.”

-출처: 키케로, 신의 본성에 관하여I.6 and I.26

 

이에 대해 스피노자 무지는 어떤 논증도 아니(에티카1,명제36)”라고 말했다. 무지가 증명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뿐이라는 얘기이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면 불가능이니, 망쳤다느니, 거짓말이라며 지워버리려 한다면 아마 오늘 인류의 지식은 백지상태이기 십상일 것이다. 이 곡해된 해석들을 벗어나 에피쿠로스가 데모크리토스를 흉내 낸 엉터리 철학이었는지, 아닌지를 마르크스의 걸음을 따라가 규명해 본다.

 

학위 논문의 핵심은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가 무엇이며, 그 차이가 얼마나 엄중한 것인가를 밝히는 것이다. 한편 학위 논문의 부록으로 첨언된 에피쿠로스의 신학에 대한 플루타르코스 논쟁의 비판을 비롯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루크레티우스’, ‘키케로등 일곱 편의 에피쿠로스 관련 저술들에 대한 비평적 해석은 빛나는 지성의 전시장이라 해도 될 것이다.

 

1. 일반적 차이

 

마르크스는 두 철학자의 차이를 일반적 차이에서 세부적 차이로 그 궁극적 다름을 파헤쳐 들어간다. 그는 학위 논문의 1(이하 1,2부 구분 없이 모두 논문이라 표기함)를 시작하면서 두 사람의 자연학의 동일성은 원자와 허공이라는 원리의 논의 언어만 동일할 뿐, 진리성과 확실성 및 그 적용, 사상과 현실과의 관계 모두에서 대립적 관계(36)”라며 바로 이를 입증하는 단계로 접어든다. 그 첫째는 세계에 대한 인식의 차이이며, 둘째는 세계 창조에 대한 필연성과 우연성만큼이나 양극단의 대립성을 지닌 차이이다.

 

데모크리토스는 현상은 참된(실재) 것이며, 변동하는 불안전한 현상으로 나타나는 실재와의 모순을 피하기 위해 감각적 현실을 주관적 가상으로 만든다. 반면에 에피쿠로스는 감각적 지각을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감각의 세계를 객관적 현상으로 파악한다. 결국 에피쿠로스는 진리의 기준은 감각적 지각이고, 이것에 객관적 현상이 조응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차이는 두 사람의 철학하는 방법에서도 커다란 차이로 발생한다.

 

데모크리토스에게 세계는 주관적 가상이기에 실재로 가득한 세계는 별개의 독립적 현실로 존재하게 된다. 데모크리토스가 경험적 관찰, 즉 실증적 지식의 세계를 찾아 당대의 세계를 돌아다니며 진리를 구하러 다닌 이유이다. 이러한 방랑적 여정이 물론 탐구의 열정이긴 하지만 제아무리 멀리 여행을 다녀본들 결코 진리와 그 내용을 찾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을 것이다. 반면에 에피쿠로스는 철학 안에서 만족과 지복을 누렸다.”, 그는 지혜의 완성을 위해서 자신의 정원을 거니는 것으로 족했다.

 

이것은 존재와 존재 상호관계의 반성형식의 차이로 드러난다. 데모크리토스는 필연성이 세계창조자이며 운명이자 법이라 여겼다. 반면에 에피쿠로스는 만물의 지배자로 받아들이는 필연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학자들의 에이마르메네(heimarmene;숙명적인 것)에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신들에 관한 신화를 따르는 것이 낫다.”고 하기까지 했다.


 



2. 세부적 차이

 

두 철학자의 근본적 차이는 에피쿠로스 원자의 우연적 마주침에 대한 비난으로서 데모크리토스를 변호한 키케로의 글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에피쿠로스는 만약 원자들이 (...) 그 운동은 확정적이며

필연적으로 될 것이므로 어떤 것도 우리의 지배 아래 있지 않게 될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필연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수단을 창안했는데,

이것은 데모크리토스에게는 없는 것이었다.”

-출처: 키케로 신의 본성에 관하여』 I.26

 

 

키케로의 이러한 몰인식에서 비판한 원자의 필연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수단이란, 원자들의 직선 낙하에서 미세하게 발생한 편위라 말한 에피쿠로스의 주장에서 비롯된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원자들이 모두 직선으로 아래를 향해 같은 속도로 움직인다면 원자들의 만남을 설명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들의 만남에 대한 설명 불가능성과 함께 세계 창조 설명의 불가능성을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편위를 추정한 것이다. 이 위대한 우연성에 대한 발상이 2000년을 뛰어넘어 청년 마르크스의 비결정론적 유물론의 과학적 토대가 되었다.

 

편위하는 원자에 대한 발상은 원자의 순수한 규정 형식에 있어 아주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정말 너무도 중대한 대목이어서 주의력을 집중하고 사고해야 한다. 낙하하는 모든 물체는 단지 움직이는 점일 뿐이다. 이것들은 아무런 자율성도 지니고 있지 못한 현존재일 뿐이다. 즉 이 현존재 안에서 점은 개별성을 잃는다. 직선으로 낙하하는 원자는 그 직선상에 사실 실존하지 않으며, 고체성을 나타내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허공이 공간적으로 비어버린 것이게 된다. 여기서 천재성이 빛을 발한다.

 

공간의 상호 외재성(外在性)에 맞서 자신을 주장하는 고체성, 내포성은 마치 현실적인 자연 속에서 시간이 그런 것처럼 그 전 영역에 걸쳐서 공간을 부정하는 원리에서만 원자에 부가 될 수 있다.” - 본문 75

 

이 말은 원자와 대립하는 상대적 실존, 다시 말해서 그것이 부정해야만 하는 현존재는 직선이다. 이 운동의 직접적 부정은 하나의 다른 운동. 바로 공간적으로 자신을 표상하는 직선으로부터의 편위라는 것임을 역설하는 것이다. 원자의 편위는 결정론적, 필연적, 숙명론적 믿음을 깨뜨리는 것이다. 이것은 에피쿠로스의 자연 철학을 관통하는 핵심 사유이다. 이제 스토아주의자들과 기독교인들이 에피쿠로스를 맹렬하게 왜곡하고 비난한 직접적 이유를 알게 된다.

 

원자와 허공이라는 총체성 안에서 자율과 자유를 지닌 개별성의 현존재가 출현한다는 우연성의 철학은 곧 신은 세계로부터 벗어나 관여치 않는 것이며, 설사 신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신은 세계의 바깥에 있게 된다는 의미이다.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데모크리토스를 맹목적으로 베낀 거짓의 엉터리 철학으로 매도한 키케로를 비롯한 무수한 스토아주의자들은 사실 무지하기도 했지만, 혹여 어렴풋이 알았더라도 이 사상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이란 단지 현상계를 설명하기 위한 가설적 규정에 불과하지만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은 세계 원리 자체의 결과들을 사유할 수 있는 데까지 나간 철학이다.

 

에피쿠로스는 그의 자연학에서 현상의 절대적 형식으로서 시간을 설명했으며, 천체들에 대한 종교적 태도를 주장하는 그리스 철학자들의 의견을 반박하였다. 마르크스의 학위 논문 중 이 두 챕터에 대해서는 후일 소회를 기술하게되는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하며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철학의 차이에 대한 마르크스 관점에 대한 소감은 여기서 맺기로 한다.

 

3. 결어: 마주침의 유물론

 

마르크스의 사후에 그의 사상, 즉 변증법적 법칙에 따라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화가 정치나 법률 등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변증법적 유물론은 옛 소련의 철학자 플레하노프가 만든 신조어이다. 이를 엥겔스가 마르크스에게 철학을 부여하려는 시도로서 마르크스의 사상인 것처럼 굳어져왔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철학을 변증법적 유물론이라 생각한 적이 없었으며, 더구나 마르크스는 물질적 조건이나 환경이 압도적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은 그것을 헤쳐 나갈 능동성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것을 대상적 활동이라(출처: 강신주 , 철학VS실천, 561)”고 부르기까지 했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결정론적 사유이다. 비결정론적 유물론자인 마르크스에게 멍청한 (1)엥겔스가 한 대표적인 무지의 소치 중 하나이다. 다시 마르크스의 박사학위 논문으로 돌아가면 에피쿠로스의 기본적인 테제가 명료하게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우연성, 즉 비선재성(非先在性)의 사유와 평행 낙하하는 원자의 극히 미세한 빗나감, 클리나멘(clinamen;편위)의 철학적 중대성을 재발견하게 된다.

 

세계의 기원인 마주침의 유물론’, 편위가 없었더라면 밀도도 실존도 없던 추상적 요소에 불과했을 원자들의 현실성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루이 알튀세르 ”, 철학과 맑스주의, 39)“이라는 점이다. 원자들의 마주침은 오늘 인간을 비롯한 자연과 세계, 우주의 실존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이 우발성의 철학이야말로 돈 많은 사람과 벌거벗은 노동력의 마주침을 고착화하려는 자본주의 응고(凝固)의 결의란 허위에 불과한 것임을 밝혀준다. 원자화된 개인들은 스스로 자유를 쟁취한 개인들이고, 이런 자유로운 개인들에게만 새로운 클리나멘과 새로운 마주침을 희망할 수(강신주 , 철학VS실천,577)”있는 이유 있음의 근거이다.

 

에피쿠로스 원자의 편위는 이 세계를 이해하고 인간 개체가 자본주의라는 거시 세계에 새로운 가능성으로 이전 시킬 수 있다는 해체와 새로운 응고의 기회라는 실현의 여지를 꿈꾸게 해준다. 이 세계에는 무수한 가짜들이 무진장 설쳐댄다. 진리의 추구는 외면하고 권력과 영예의 차지를 위해 왜곡과 거짓, 위선을 밥 처먹듯 해대는 인간들 무리 말이다. 지금 이 시각에도 새로운 클리나멘으로 인한 마주침을 생성하며 불의한 귄위에 마주서는 원자들, 개인들이 작은 촛불을 들어 올리고 있을 것이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그 마주침에 응원을 보내며 감상을 맺는다.

 


(1) : 엥겔스는 마르크스 사후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을 출간하면서 이 책에서 유물론적 변증법을 마르크스 철학이라 규정한다. 영원한 2인자였던 엥겔스의 자기 권위 확보라는 명예를 위한 그야말로 멍청한 행위의 소산물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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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이야기 쓰는 법 - 이야기에 강력한 긴장감을 불어넣는 스토리 창작법 예비 작가를 전업 작가로 만드는 작법서 시리즈 1
조단 E. 로젠펠드 지음, 정미화 옮김 / 아날로그(글담)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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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나면, 아니 읽어나가면서 이 책이 항상 곁에 머무는 이야기 창작의 안내서로 책장의 눈에 잘 띄는 고정된 장소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대감으로 독자를 매혹시키는 이야기 만들기에 머무는 기교적 방법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체에서부터 장면 구성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하물며 이야기에 새로운 정보가 추가되는 중요한 사건이나 상황을 가리키는 플롯 포인트의 구체적 설정까지 저자의 세심함이 미치지 않는 영역이 없을 정도이다.

 

시중에 널린 또 하나의 흔한 글쓰기 책이 아니다. 사랑하는 제자에게 이야기 창작의 모든 요소를 알려주려는, 그래서 진정 완성도 높은 작품을 쓸 수 있도록 100 여 작품이 넘는 인용을 통해 해당 설명이 어떻게 실제 쓰여 졌는지를 확인케 하고 그것이 어떤 정서적 효과와 의미를 지니는지 까지 알려준다.

 

418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그야말로 글쓰기의 비기(秘記)들을 무한 방출한다. 어떻게 독자에게 작품에 흥미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책장을 넘기게 할 수 있는지, 이야기 속 인물들의 성격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지, 이야기의 장면들, 여정을 구성하는 플롯의 설정과 그 전환 지점들을 어떻게 흡입력 있게 만들어 낼 수 있는지, 그리고 문장의 표현 방법들의 다양성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저자가 기술한 글쓰기 정보들을 섭렵할 수만 있다면 멋진 이야기 한 편을 창작해낼 수 있을 정도라 할 수 있다.

 

혹여 소홀히 할 만 한 부분까지 지적하면서 진정성 있는 글쓰기를 놓치지 않도록 가르쳐 준다. 사실 순간순간 염두에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너무 많은 정보로 쌓여 체화(體化)되기에 벅찰 정도이다. 때문에 이야기 구성 단계마다 필요한 부분들을 발췌하여 두기도 한다. 일례로 작품의 어떤 한 장면도 주인공의 목표와 의도를 지니고 있어야(321)” 한다는 조언과 함께 어떻게 생동감 있게 쓰고 있는지를 행동, 갈등의 기미, 감정적 혼란, 긴장감의 축적 등에 해당하는 기성 작가의 글을 인용하여 그 이해를 세밀하게 집어주는 식이다.


 



국내 독자에게도 잘 알려진 리안 모리아티정말 지독한 오후의 한 장면은 주인공의 행동이 어떻게 즉각 생동감을 조성하고 독자를 끌어들이는지를 보여준다.

 

“‘놀라서 죽을 뻔 했어클레멘타인이 가슴에 손을 대며 말했다. ‘왜 이렇게 빨리 온 거야?’ 그녀는 자신의 말이 비난처럼 들린다는 것을 알았다.” -321

 

이 같은 세밀한 글쓰기 정보를 접하고 있다 보면, 문득 지금까지 읽었던 소설 작품들에서 작가가 왜 그 장면을 넣었는지, 소설의 시작 문장들이 무엇을 암시하고자 했던 것인지, 전체적인 구조와 함께 주인공의 심적 변화와 지향하고자 하는 목적의 접근을 위해 어떻게 점진적으로 표현되었는지를 떠올려보게 된다. 이야기 만들기의 세밀한 조언이기도 하지만 이렇듯 작품을 대하는 독자로서 작가가 마련한 장치들의 의미를 이해하는 길잡이가 되어주기도 한다.

 

만일 지극히 평범한 일상적 삶의 지리멸렬한 이야기라면 대체 누가 관심을 가지고 읽거나 들으려 할까? 저자는 이야기 창작, 즉 스토리텔링의 핵심은 극적 상황을 흥미롭게 간추리고 날카롭고 강렬하게 정미한 버전의 현실이라 하고 있다. 그렇다면 평범한 이야기가 비범한 이야기가 되도록 하는 절대적 요소는 무엇일까?

 

위험은 긴장감을 조성하는 최상의 도구다.” -15

 

아무리 잘 꿰어진 흥미진진한 플롯으로 구성된 이야기라도 긴장감이라는 정서적 중추가 없다면 김빠진 맥주처럼 밋밋해져 이내 흥미를 잃어버릴 것이라는 점이다. 결국 누군가의 주목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이야기란 이 긴장감을 인물, 장면, 대사, 하다못해 지문이나 보완적 설명인 뒷이야기에 조차 내재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긴장감이란 스릴러와 같은 장르 소설뿐 아니라 순수문학까지 포함하는 모든 스토리텔링의 절대적 요소라는 점이다. 그것은 위험, 갈등, 불확실성, 그리고 지연(보류)과 같은 형태로 부여되는데, 책은 바로 이러한 형태들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용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것은 인물의 감정을 설명하는 대신에 신체 감각과 은유를 이용해 감정을 전달하는 글쓰기, 주인공을 압박하는 외부의 힘, 통제력을 빼앗긴 무기력해진 주인공을 표현하는 것들로 구체화된다.

 

모든 대화에는 다 이유가 있다.” - 216

 

이처럼 하나의 필요 요소를 실현하기 위해 그 하위 요소들과 실제적 표현 방법에 이르는 예화까지 알려주는 책을 나는 알지 못한다. 이야기 속에 어떤 대화의 장면이 있어야 할 경우 인물에 대한 정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면 너절한 이야기가 되고 만다고 알려주듯이 대화의 긴장감을 팽팽하게 유지하는 글쓰기의 내용들로부터 플롯의 핵심 요소인 전환점의 네 가지 핵심 단계의 구체화에 이르기까지 이야기 전() 단계에서 긴장의 실타래를 놓치지 않는 글쓰기 방식을 터득할 수 있도록 조언하고 있다.

 

이 책은 정말 이야기 창작의 야전(野戰)지침서이다. 인물의 내적 갈등 조성, 배경의 형상화, 문장의 근육이자 에너지인 문체의 능동적 생동감 만들기까지 이 한 권의 책은 창작을 준비하는 이들이나 작품을 더욱 알차게 이해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무한한 영감과 앎을 가져다 줄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기대치 못한 알짜배기 책을 읽게 된 우연의 선택에 감사하게 되는 몇 안 되는 스토리텔링 작법의 수작이라 하고 싶다. 인용된 수많은 작품들의 유혹을 견뎌내는 것은 이 책이 야기한 쉽지 않은 고난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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