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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닉
아니 에르노 지음, 조용희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3월
평점 :
“생명은 온통 불안정, 불균형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소란스러운 충동이 끊임없이 폭발을 부른다. 그러나 끊임없는 폭발에도 불구하고
충동은 진정되지 않는다.” - 조르주 바타유 著, 『에로티즘』2판 67쪽, 민음사刊
번역된 제목 ‘탐닉’은 드러난 욕망의 실현인 적나라한 섹스의 묘사, 다시 말해 비본질적인 표면에 불과하다. 어쩌면 원제인 ‘se perdre'(상실)이 이 책 집필의 진정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작품의 시작에 앞서 아니 에르노는 이 책은 “일종의 내적 필요에 의해 이 일기장을 공개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13쪽)”고 밝히고 있으며, “아직 정확하게 밝혀내지 못한 동일한 상실, 오직 글을 통해서만 그것을 진정으로 밝혀낼 수 있을 것(160쪽)”이라고 쓰고 있듯이 욕망을 향한 끊임없는 기다림, 그 공허의 불안과 고통의 문제를 들여다보려는 글쓰기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다보면 이 내적 필요에 의해 써진 일기, 즉 ‘이야기의 충동은 우리 존재가 육체와 시간 속에 있다는 인간적 진실에 대응하기 위한 본능적 시도’라는 ‘피터 브룩스’가 지적한 성애(性愛)와 앎을 향한 충동으로서 글쓰기의 밀접성의 전형적 실례로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이 책은 꿈을 꾸고, 욕망을 그대로 옮기며, 해석하여 자신을 인간 주체로 구성하여 인식의 변화와 확장을 통해 단절된 욕망을 대신하여 삶의 충일함을 지속시키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보여 지기 때문이다.
이 지극히 사적인 일기의 내용은 프랑스 주재 소련 외교관인 35세의 매끈한 남성 S와의 1년 4개월 남짓에 걸친 광적이기까지 한 성적 탐닉의 시간들과 이 기다림의 시간이 가져오는 질투와 불신을 오가는 고통, 그리고 관계 중단의 걱정, 욕망하는 사람이 더 이상 자신을 찾지 않게 될 때 다가올 예견된 열정의 단절에 대한 불안의 반복된 날것의 기록일 뿐이다. 그래서 이 단순하고 지루하게 반복된 내용의 연속, 그 어떠한 조작도 보탬도 없는 일기는 인간의 적나라한 내적 삶, 욕구와 열정과의 싸움이라 할 수 있는 어떤 종교적이기까지 한 양상을 발견케 한다.
48세의 여자는 S와의 섹스를 끊임없이 갈망한다. S와 격렬한 육체적 결합의 시간은 오직 S가 '아니(Annie)'를 찾을 때 이루어진다. 그와 사랑을 나누는 함께하는 몇 시간이 지나면 다시금 그의 방문을 예고하는 전화를 기다리는 공허한 시간만이 지속된다. 이 기다림의 시간은 여자에게 끔찍함, 심리적으로 텅비고 울고 싶을 정도의 충족되지 않는 열정이 가져오는 고통이다. 이 욕망에 사로잡힌 여자는 자기 일을 할 수 없을 정도의 불안, 그가 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방황한다.
여자의 모든 행위는 S로 하여금 계속하여 자신을 욕망케 하기 위한 것들로 채워져 있다. 고급 원피스, 명품 백, 화장과 미장원 그리고 남자를 위한 고가의 선물, 그가 좋아하는 담배와 위스키, 대통령과의 만찬 참여와 같은 자신의 명예를 통한 S의 허영심 충족에 이르기까지 여자의 모든 몸짓은 “다른 육체와의 결합 속에 나타났다가 곧바로 사라져버리는 굉장한 어떤 것에 대한 복종(또는 추구)(203쪽)”이다. 그러나 이 충동과 끊임없는 폭발에도 불구하고 욕망은 진정되지 않는다. 다시금 반복되는 불안정과 불균형의 시달림, 이 열병은 그저 휩쓸리고 짓밟히는 것 이외에 어떠한 대안도 불가능하게 한다.
극도의 괴로움도 무릅쓰는 낭비, 견딜 수 없는 극도의 괴로움을 무릅쓴 극한 상황에서의 낭비를 간절히 욕구하는 일기 주인공의 행위들은 마치 죽음의 충동과도 닮아있다. “나의 경이롭고도 무서운 욕망과 죽음, 그리고 글쓰기의 근원이었다는 사실(13쪽)”이었음을 자신에게 확인하는 문장은 이러한 생각을 확신시켜준다. 남자가 언제 자신을 찾을지를, 즉 욕망이 유예된 시간에 일기를 쓰며 여자는 이렇게 표현한다. “이렇게 글을 쓰다보니 다시 기다림과 열망이 가득 넘친다. 글은 욕망을 유지하게 한다.(112쪽)”고. 즉 글쓰기는 지체된 육체의 욕망을 대체하는 욕망의 실현이다.
이 욕망은 S와의 섹스에서 보다 완벽한 육체의 결합, 쾌락의 경계를 넓혀나가려는 시도들로 나타난다. 포르노 영화를 보고 사랑의 기교를 말하는 책을 읽으며 다양한 체위와 침대, 소파, 서재라는 장소에 이르기까지 에로티즘의 완벽 추구를 위한 삶으로 점철되어 있다. 오직 육체의 탐닉, 쾌락 추구이외에는 여자에게 아무런 의미조차도 지니지 못한다. S와 몸을 섞던 기억이 그녀에게서 떠나지 못하도록 유지하는 혼신을 기울인 노력만으로 삶을 채우고 있다. “사라져버릴 열정. 이 정체된 삶에서 아무것도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160쪽)”라는 문장처럼 글쓰기는 욕망의 열정을 내면에 가두는 작업이다.
S의 프랑스 주재 소련 대사관에서 임기를 마치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온다. 이것은 일기의 주인공에게 절박한 공포의 다름 아니다. 그녀의 욕망 추구를 가능케 하던 대상이 사라지는 것이다. “비가 오고 무거운 날씨. 이곳, 피렌체에서 죽을까봐 두려워진다. 더 이상 S를 보지 못할까봐 두렵고, 갑자기 모스크바로 떠났을지도 모른다.(234쪽)” 이 불안은 번민과 눈물이 목구멍에 차오를 만큼의 절망과 광적인 고통을 야기한다. 여자는 이러한 번민의 순간에 ‘브론스키’의 사랑에 대한 불안으로 갈등하는 ‘안나 카레니나’에 자신을 대입한다.
‘조르주 바타유’가 말했던가? ‘에로티즘은 존재 자체를 문제 삼는 불균형’이며, 필연적으로 자신의 상실을 요구한다고 했듯이 이것은 이중의 의미로 여자를 존재적 물음에 빠뜨린다. S의 상실, 삶의 의미로서 사라져버리는 쾌락(욕망), 즉 욕망의 부재인 죽음으로서. 사회적 통념을 박살내는 이 열정적이고 격렬한 사랑의 시간에 대한 기록은 ‘죽음이 있는 것처럼 사랑하고 글을 썼다.’는 작가의 말처럼 결코 천박하고 음란한 노출의 뻔뻔한 기록이 아니라, 스스로를 정의할 수 있도록 하는 욕망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탐구의 글쓰기라 할 것이다.
아마 화자로써 써내려갔던 자신의 일기를 이렇게 출간한 것은 자신이 청자(독자)가 되어 화자의 욕망을 들여다 보려는 전이(轉移)의 역동적 상호작용을 의도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육체적 충동에 대한 이야기가 문학적 걸작으로 읽히는 이유는 아마도 감정의 진솔한 드러냄, 그 표현의 순수한 아름다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불연속적 개체인 인간은 항시 연속적 합일을 희구하는지도 모른다. 인간을 지배하는 이 연속적 합일을 향한 충동에 시달리는 것이 또한 인간의 불가피한 삶의 형식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