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 - 맑스 박사 학위 논문 ㅣ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2
칼 마르크스 지음, 고병권 옮김 / 그린비 / 2001년 6월
평점 :
칼 마르크스의 박사학위 논문으로 쓰여진 ‘에피쿠로스(B.C.342~B.C.270)’의 자연철학에 대한 이 글은 그의 말처럼 “이들에 대한 조금의 선행적 연구도 없었을(저자서문)”만큼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을 비롯한 우연성의 철학은 주류의 관심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더구나 “‘키케로’나 ‘플루타르크’, ‘클레멘스 알렉산드리누스’와 같은 일부 인간들이 재잘거린 것을 반복”, 변주한 것들만이 있을 뿐이다. 청년 마르크스가 주변의 경계로 내몰려 소외된 사상에 숨을 불어넣은 것은 그의 성품에서 나온 어쩌면 필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마르크스의 학위 논문, 해당 논문의 주석, 논문에 인용한 저술들의 내용과 그 비판으로 구성되어, 남아있는 저술이 거의 없는 에피쿠로스 철학의 면모를 거의 샅샅이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문헌적 가치까지 지니고 있다 해야 할 것 같다. 사실 이 논문에 대한 갈증은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에 대한 보다 진실한 앎을 비롯해서 알튀세르와 강신주가 지적한 마르크스의 마주침의 유물론, 그 본질을 이해하고자 함이었다. 한편 이를 곡해한 뿌리 깊은 몰이해와 악의의 그릇됨을 드러내고 싶은 증오 또한 한 몫 했다고 할 수 있다.
아카데미학파인 키케로(B.C.106~B.C.43)는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다음과 같이 멸시, 폄훼하였으며, 이후 주류 학계는 이를 그대로 베끼는 것을 자신들의 학문적 소양으로 삼았으니, 이러한 무지가 인류의 지성을 얼마나 퇴행시켰는지는 정말 신만이 알 일이다.
“그가 가장 뽐내는 자연학에서 완전한 문외한이었다. 그가 세운 자연학은 대부분 데모크리토스의 것들이다. (...) 더 나쁘게 되었고 망쳐졌을 뿐이다.”
“에피쿠로스는 거짓말을 했다. 그는 원자가 아주 작은 이탈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말했는데, 물론 이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것이다.”
-출처: 키케로, 『신의 본성에 관하여』 I.6 and I.26
이에 대해 ‘스피노자’는 “무지는 어떤 논증도 아니(『에티카』제1부,명제36)”라고 말했다. 무지가 증명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뿐이라는 얘기이다.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면 불가능이니, 망쳤다느니, 거짓말이라며 지워버리려 한다면 아마 오늘 인류의 지식은 백지상태이기 십상일 것이다. 이 곡해된 해석들을 벗어나 에피쿠로스가 데모크리토스를 흉내 낸 엉터리 철학이었는지, 아닌지를 마르크스의 걸음을 따라가 규명해 본다.
학위 논문의 핵심은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가 무엇이며, 그 차이가 얼마나 엄중한 것인가를 밝히는 것이다. 한편 학위 논문의 부록으로 첨언된 에피쿠로스의 신학에 대한 플루타르코스 논쟁의 비판을 비롯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루크레티우스’, ‘키케로’ 등 일곱 편의 에피쿠로스 관련 저술들에 대한 비평적 해석은 빛나는 지성의 전시장이라 해도 될 것이다.
1. 일반적 차이
마르크스는 두 철학자의 차이를 일반적 차이에서 세부적 차이로 그 궁극적 다름을 파헤쳐 들어간다. 그는 학위 논문의 1부(이하 1,2부 구분 없이 모두 ‘논문’이라 표기함)를 시작하면서 두 사람의 자연학의 동일성은 ‘원자와 허공’이라는 원리의 논의 언어만 동일할 뿐, “진리성과 확실성 및 그 적용, 사상과 현실과의 관계 모두에서 대립적 관계(36쪽)”라며 바로 이를 입증하는 단계로 접어든다. 그 첫째는 세계에 대한 인식의 차이이며, 둘째는 세계 창조에 대한 필연성과 우연성만큼이나 양극단의 대립성을 지닌 차이이다.
데모크리토스는 현상은 참된(실재) 것이며, 변동하는 불안전한 현상으로 나타나는 실재와의 모순을 피하기 위해 감각적 현실을 ‘주관적 가상’으로 만든다. 반면에 에피쿠로스는 “감각적 지각을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감각의 세계를 ‘객관적 현상’으로 파악한다. 결국 에피쿠로스는 진리의 기준은 감각적 지각이고, 이것에 객관적 현상이 조응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차이는 두 사람의 철학하는 방법에서도 커다란 차이로 발생한다.
데모크리토스에게 세계는 주관적 가상이기에 실재로 가득한 세계는 별개의 독립적 현실로 존재하게 된다. 데모크리토스가 경험적 관찰, 즉 실증적 지식의 세계를 찾아 당대의 세계를 돌아다니며 진리를 구하러 다닌 이유이다. 이러한 방랑적 여정이 물론 탐구의 열정이긴 하지만 제아무리 멀리 여행을 다녀본들 결코 진리와 그 내용을 찾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을 것이다. 반면에 에피쿠로스는 “철학 안에서 만족과 지복을 누렸다.”, 그는 지혜의 완성을 위해서 자신의 정원을 거니는 것으로 족했다.
이것은 존재와 존재 상호관계의 반성형식의 차이로 드러난다. 데모크리토스는 필연성이 세계창조자이며 운명이자 법이라 여겼다. 반면에 에피쿠로스는 “만물의 지배자로 받아들이는 필연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며, “자연학자들의 에이마르메네(heimarmene;숙명적인 것)에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신들에 관한 신화를 따르는 것이 낫다.”고 하기까지 했다.
2. 세부적 차이
두 철학자의 근본적 차이는 에피쿠로스 원자의 ‘우연적 마주침’에 대한 비난으로서 데모크리토스를 변호한 키케로의 글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에피쿠로스는 만약 원자들이 (...) 그 운동은 확정적이며
필연적으로 될 것이므로 어떤 것도 우리의 지배 아래 있지 않게 될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필연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수단’을 창안했는데,
이것은 데모크리토스에게는 없는 것이었다.”
-출처: 키케로 『신의 본성에 관하여』 I.26
키케로의 이러한 몰인식에서 비판한 원자의 ‘필연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수단’이란, ‘원자들의 직선 낙하에서 미세하게 발생한 편위’라 말한 에피쿠로스의 주장에서 비롯된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원자들이 모두 직선으로 아래를 향해 같은 속도로 움직인다면 원자들의 만남을 설명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들의 만남에 대한 설명 불가능성과 함께 세계 창조 설명의 불가능성을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편위를 추정한 것이다. 이 위대한 우연성에 대한 발상이 2000년을 뛰어넘어 청년 마르크스의 비결정론적 유물론의 과학적 토대가 되었다.
편위하는 원자에 대한 발상은 원자의 순수한 규정 형식에 있어 아주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정말 너무도 중대한 대목이어서 주의력을 집중하고 사고해야 한다. 낙하하는 모든 물체는 단지 움직이는 점일 뿐이다. 이것들은 아무런 자율성도 지니고 있지 못한 현존재일 뿐이다. 즉 이 현존재 안에서 점은 개별성을 잃는다. 직선으로 낙하하는 원자는 그 직선상에 사실 실존하지 않으며, 고체성을 나타내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허공이 공간적으로 비어버린 것이게 된다. 여기서 천재성이 빛을 발한다.
“공간의 상호 외재성(外在性)에 맞서 자신을 주장하는 고체성, 내포성은 마치 현실적인 자연 속에서 시간이 그런 것처럼 그 전 영역에 걸쳐서 공간을 부정하는 원리에서만 원자에 부가 될 수 있다.” - 본문 75쪽
이 말은 원자와 대립하는 상대적 실존, 다시 말해서 그것이 부정해야만 하는 현존재는 직선이다. 이 운동의 직접적 부정은 하나의 다른 운동. 바로 공간적으로 자신을 표상하는 직선으로부터의 편위라는 것임을 역설하는 것이다. 원자의 편위는 결정론적, 필연적, 숙명론적 믿음을 깨뜨리는 것이다. 이것은 에피쿠로스의 자연 철학을 관통하는 핵심 사유이다. 이제 스토아주의자들과 기독교인들이 에피쿠로스를 맹렬하게 왜곡하고 비난한 직접적 이유를 알게 된다.
원자와 허공이라는 총체성 안에서 자율과 자유를 지닌 개별성의 현존재가 출현한다는 우연성의 철학은 곧 신은 세계로부터 벗어나 관여치 않는 것이며, 설사 신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신은 세계의 바깥에 있게 된다는 의미이다.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데모크리토스를 맹목적으로 베낀 거짓의 엉터리 철학으로 매도한 키케로를 비롯한 무수한 스토아주의자들은 사실 무지하기도 했지만, 혹여 어렴풋이 알았더라도 이 사상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이란 단지 현상계를 설명하기 위한 가설적 규정에 불과하지만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은 세계 원리 자체의 결과들을 사유할 수 있는 데까지 나간 철학이다.
에피쿠로스는 그의 자연학에서 현상의 절대적 형식으로서 ‘시간’을 설명했으며, 천체들에 대한 종교적 태도를 주장하는 그리스 철학자들의 의견을 반박하였다. 마르크스의 학위 논문 중 이 두 챕터에 대해서는 후일 소회를 기술하게되는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하며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철학의 차이에 대한 마르크스 관점에 대한 소감은 여기서 맺기로 한다.
3. 결어: 마주침의 유물론
마르크스의 사후에 그의 사상, 즉 변증법적 법칙에 따라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화가 정치나 법률 등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변증법적 유물론’은 옛 소련의 철학자 플레하노프가 만든 신조어이다. 이를 엥겔스가 마르크스에게 철학을 부여하려는 시도로서 마르크스의 사상인 것처럼 굳어져왔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철학을 변증법적 유물론이라 생각한 적이 없었으며, 더구나 마르크스는 “물질적 조건이나 환경이 압도적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은 그것을 헤쳐 나갈 능동성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것을 ‘대상적 활동’이라(출처: 강신주 著, 『철학VS실천』, 561쪽)”고 부르기까지 했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결정론적 사유이다. 비결정론적 유물론자인 마르크스에게 멍청한 (1)엥겔스가 한 대표적인 무지의 소치 중 하나이다. 다시 마르크스의 박사학위 논문으로 돌아가면 에피쿠로스의 기본적인 테제가 명료하게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우연성, 즉 비선재성(非先在性)의 사유와 평행 낙하하는 원자의 극히 미세한 빗나감, 클리나멘(clinamen;편위)의 철학적 중대성을 재발견하게 된다.
세계의 기원인 ‘마주침의 유물론’, 이 “편위가 없었더라면 밀도도 실존도 없던 추상적 요소에 불과했을 원자들의 현실성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루이 알튀세르 著”, 『철학과 맑스주의』, 39쪽)“이라는 점이다. 원자들의 마주침은 오늘 인간을 비롯한 자연과 세계, 우주의 실존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이 우발성의 철학이야말로 돈 많은 사람과 벌거벗은 노동력의 마주침을 고착화하려는 자본주의 응고(凝固)의 결의란 허위에 불과한 것임을 밝혀준다. “원자화된 개인들은 스스로 자유를 쟁취한 개인들이고, 이런 자유로운 개인들에게만 새로운 클리나멘과 새로운 마주침을 희망할 수(강신주 著, 『철학VS실천』,577쪽)”있는 이유 있음의 근거이다.
에피쿠로스 원자의 편위는 이 세계를 이해하고 인간 개체가 자본주의라는 거시 세계에 새로운 가능성으로 이전 시킬 수 있다는 해체와 새로운 응고의 기회라는 실현의 여지를 꿈꾸게 해준다. 이 세계에는 무수한 가짜들이 무진장 설쳐댄다. 진리의 추구는 외면하고 권력과 영예의 차지를 위해 왜곡과 거짓, 위선을 밥 처먹듯 해대는 인간들 무리 말이다. 지금 이 시각에도 새로운 클리나멘으로 인한 마주침을 생성하며 불의한 귄위에 마주서는 원자들, 개인들이 작은 촛불을 들어 올리고 있을 것이다. 자유로운 개인들의 그 마주침에 응원을 보내며 감상을 맺는다.
注(1) : 엥겔스는 마르크스 사후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을 출간하면서 이 책에서 ‘유물론적 변증법’을 마르크스 철학이라 규정한다. 영원한 2인자였던 엥겔스의 자기 권위 확보라는 명예를 위한 그야말로 멍청한 행위의 소산물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