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도회 이렌 네미롭스키 선집 1
이렌 네미롭스키 지음, 이상해 옮김 / 레모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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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것의 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불유쾌함, 마치 속내를 들킨 것 같은 혐오와 불안한 수용이라는 피할 수 없는 삶의 그러함의 이야기들이란 느낌이다. 사람의 숨길 수 없는 본성들을 바라보게 되는 것은 사실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타인들의 욕망, 혹은 내 것일 수도 있는 이것들을 보려는 유혹을 물리치는 것도 그리 수월한 일이 아니다. 아마 이 소설집은 이러한 측면에서 그 소임을 충분히 다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네 꼭지의 단편 소설로 구성된 이 선집은 유대계 우크라이나 출신의 프랑스 작가인 이렌 네미롭스키(1903.2.11~1942.8.17)’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스윗 프랑세즈: Suite Francaise에 앞서 그녀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전초전이 될 듯싶다. 표제작인 무도회는 그야말로 야생적 본능, 새로운 물질세계로 접어든 인간의 체 정비되지 않은 벌거숭이 욕망들의 충돌이 빚어내는 삶의 우발적이고 유희적인 모습의 적나라함일 것이다.

 

아마 수록된 네 작품에서 무도회는 단연 충동들의 격렬함이 도드라진다. 열네 살 사춘기에 들어 선 소녀 앙투아네트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이 소설은 당대의 내면화된 사회적 욕망이 인간들을 얼마나 거칠게 휩쓸고 있는가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가난한 은행 직원 캉프와 결혼한 로진에게 좁아터진 싸구려 주택에서의 삶은 희망 없는 자기 연민의 고통만을 불러온다. 이런 찌든 삶에 어느 날 갑자기 큰돈이 들어오며 억눌렸던 욕망이 분출하기 시작한다.

 

목욕할 때 빼고는 빼는 법이 없는 다이아몬드 팔찌를 번쩍거리며...” - 17

 

여자는 빈곤했던 과거를 지우고 상류 계층의 일원으로 편입되어 부와 명예를 과시하고픈 욕망으로 가득 차있다. 타인의 욕망에 대한 이해가 들어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여전히 전통적 가치에 매몰되어 있는 소시민의 의식에는 아이의 개성화를 위한 교육적 이해가 들어서지 못한다. 부모의 전통적 권위에 순응하지 못하는 앙투아네트는 로진의 욕망에 위협이 되는 존재에 불과하다. 두 욕망이 충돌하기 시작한다.

 

성인들 세계에 대한 동경, 어린 여자아이의 성적 과시의 욕구는 엄마의 과시 욕구에 의해 거듭 좌절된다. 캉프와 로진 부부는 명망 있는 부자들과 귀족들을 초대하여 자신들이 상류 계층의 일원임을 승인받는 파티를 준비한다. 일면식도 없는 초대 손님들의 명단과 그 주소를 쓰는 장면은 이들의 속물근성과 천박한 욕망의 민낯을 여실히 보여준다. 소설은 앙투아네트의 전혀 우발적 행동에 의해 야기된 파티 당일의 정경에 맞추어진다. 독자는 썩은 미소를 지을 준비가 되었기에 로진의 발작적인 증오심, 자기 연민의 훌쩍거림과 앙투아네트가 짓는 회심의 미소를 보며 인간 삶의 비속함을 다시금 확인케 된다.


 



초기작인 무도회와 달리 작가의 시선이 조금은 넓어진 1940년 작인 로즈 씨 이야기는 내게 인상적으로 남은 작품이다. 자신의 이해(利害)에 의해서만 세상을 보는 데 익숙했던 한 남자의 믿음과 그 전환적 사건을 담고 있는 이 소설은 전통적인 여성적 삶의 행복에서 인생 전반으로 확장되어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시선이 확장된 듯하다. 더는 자기 연민, 욕망의 좌절을 보듬고 핥아대는 나르시시즘에 머물지 않는다.

 

주인공은 오늘의 전형적인 인간 상()과 닮아 있다. 미래를 위해 계획하고 부를 축적하고 보존하는 데 일념(一念)하는, 나이가 쉰이 넘었지만 그의 아름다운 뺨에는 기름기가 흘렀고, 목소리는 날카롭고 권위적(89)”인 그런 남자이다. 젊은 시절 분위기에 이끌려 결혼을 약속했지만 자기 삶에 새로운 사람과의 관계의 번잡함이 끼어드는 것이 두려워 도주하기까지 한 독신자, 전쟁을 예견하고 재산을 지키기 위해 노르웨이에 투자하고, 가장 안전할 것 같은 노르망디 지역으로 가치 있는 재산을 옮겨놓기까지 한다.

 

삶이란 우연의 연속이다. 전쟁은 노르웨이를 강타하고, 노르망디는 전쟁터가 된다. 평온함을 예견했던 노르망디의 삶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가 되고 동쪽을 향한 피난길에 오르지만, 피난 행렬에 막힌 차량은 더디게 움직인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음식과 물을 구하기 위해 기사에게 차량을 맡기고 인가를 찾았지만 아무것도 구하지 못한다. 차량은 그 사이 기사와 함께 사라지고 도보 행렬에 섞인다.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경계로 살아 온 그에게 한 청년이 무람없이 다가와 말을 건다. 모르는 이와 결코 대화하는 법이 없던 남자는 키 크고 건장한 청년이 고된 피난길의 쓸모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상대를 맞이한다. 이기심에서 시작된 이 동행은 군에 입대하겠다는 열여덟 살 청년과의 대화에서 그의 인생에 대한 믿음, 인간에 대한 이해에 작은 균열을 일으킨다. 청년은 피난길에서 약자들을 돕고, 먹을거리를 구해 나누어주기도 하며, 걷기 힘들어하는 그를 부축해 걷기도 한다. 그 와중에 청년은 손목시계를 잃어버린다.

 

저런, (...) 잘 난체하는 늙은 여자를 돕는답시고..., 자전거도 그렇게 도둑맞았겠군. 자네는 살아가면서 늘 도둑맞을거야.” “! 저만 그러지 않을 거예요.” -112

 

폭탄이 떨어질 때 청년은 남자를 감싸 안아 그를 보호한다. 청년은 커다란 부상을 입고 행군은 이어지지만 두 사람은 더는 걷지 못할 만큼의 상처로 주저앉는다. 늙은 남자와 청년은 루아르 강()에 비추는 햇빛을 바라보며 재산이나 목숨까지 초월하는 평온함과 무심함(114)”을 느낀다. 루아르 강을 건너던 한 차량 안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자신과 청년의 탑승을 제안하지만 자리는 남자를 태울 공간에 불과하다. 청년과 동승할 수 없는 탑승을 거절한다. 다리를 건너지 못하면 기다리는 건 죽음, 생의 끝이었다. 그를 변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 생이란 무엇일까? 생이란 정말 우연한 유희에 불과한 것인가?

 

삶을 꿰뚫는 인문학자 고미숙의 문장이 떠오른다. (1)‘생명 차원에서의 연대, 세상을 향해 나가도록 힘차게 응원해주는 관계, 길을 나서는 베이스캠프, 생명의 플랫폼으로 변환하는 길을 모색하라는 제안이었다. 손가락이 타인, 세상을 향할 때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늙은 남자 로즈가 변했을 때 세계는 그를 응원하는 구원이 되어 줄지도.


이 작품과 같은 시기에 발표된 다른 젊은 여자는 제목처럼 두 여자가 등장한다. 주제는 다르지만 늙은 여자와 젊은 여자라는 구조는 마치 로즈 씨 이야기의 쌍둥이 작품 같다. 촌구석의 물건도 별반 없는 가게를 찾은 열여섯 살 질베르트는 자신이 찾는 물건이 없음을 이내 알아차리지만 밖에는 눈이 내리고 그녀는 주인 마들렌의 제안으로 가게에 머무르며 대화를 이어간다. 무언가 회상하기에 딱 그만인 배경 속에서 마들렌은 1차 대전 중 겪었던 강렬한 기억을 술회한다.

 

폭격으로 부상당한 한 프랑스군을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숨겨주고 간호하며, 그의 생명 연장을 위해 매 순간 기도하던, 어떤 한 마디의 문장으로 표현 할 수 없는 애틋함의 기억이다. 독일군 점령지역에서 프랑스군을 보호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한 행위이다. 아마도 마들렌에게 그 나흘이란 짧은 순간은 그녀에게 천국으로 들어선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홀로 살 수 있다는 것은 그 찰나의 시간이 한 인간에겐 영원한 삶을 의미했을 것이다. 질베르트가 이 얘기 속에서 느끼는 부드럽고 복잡한 자존감의 확인은 역시 어렴풋한 사랑의 불멸성을 확신했기 때문일 것이리라.

 

Irene Nemirovsky (1903.2~1942.8



작가 이렌 네미롭스키가 아우슈비츠에서 비참하게 살해되던 해인 1942년에 쓰인 작품인 그날 밤 또한 삶의 선택에 직면한 그 순간, 영겁(永劫)같은 찰나에 마주하는 환희, 다른 젊은 여자의 마들렌의 술회와 그 궤를 같이하는 작품으로 읽힌다. 다만 작가가 다가 올 운명을 예견했던 것 아니었을까 하는 마음에서 주인공 카미유에게 동생 알베르트가  외치는 마지막 문장이 예사롭지만은 않다.

 

언니가 가엾다고? ! 천만에! 가여운 건 언니가 아니야.” -141

 

물론 이 문장은 사랑하던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후 어린 딸 니콜과 함께 외롭게 혼자 살며 교사 생활을 하고 있는 여동생 알베르트의 집을 찾아 자신의 슬픈 처지의 한탄에 대한 반응이다. 카미유는 왜 난 너처럼 남자 없이, 홀로, 조용히 지내지 못했을까? 넌 네가 얼마나 행복하지 알기나 하니?(125)” 라며 사랑은 끔찍한 거짓놀음에 불과함을 토로한다.

 

이때 동석한 알베르트의 친구인 블랑슈는 말한다. 모든 결혼은 불행한 것이 아니라고, 단지 삶이 끔찍한 것이라고. 그런데 또 다른 친구 마르셀이 말한다. 삶이란 우연이 아니라 본능의 문제라고. 우리는 늘 이 세상에서 가장 격렬하게 욕망하는 걸 얻게 되는 것일 뿐, 바로 이것이 우리가 받는 가장 큰 벌이라는 것이다. 이 소설은 돌고 돌아 처음의 소설 무도회의 주제로 다시 회귀한다. 비록 역겹고 혐오스러운 욕망일지언정 우린 그 욕망의 사랑을 회피할 수 없다는 것을. 감히 우리가 삶의 진면목을 어찌 알 수 있으리




(1)인용출처: 고미숙 , 기생충과 가족, 북튜브 2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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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선택의 재검토 - 최상을 꿈꾸던 일은 어떻게 최악이 되었는가
말콤 글래드웰 지음, 이영래 옮김 / 김영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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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전쟁은 부조리하다. 인간은 수 천 년 동안 서로를 없앰으로써 불화를 해결하는 방법을 선택해왔다. (...) 그들은 부조리하되 익숙한 방식으로 부조리했다.”  - 147

 

 

무고한 사람들을 대량 살상하고 그들의 오랜 역량들인 축조물들을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전쟁을 도덕적으로 옳다고 하지 않는다. 이 말은 사실 지극히 뻔하고 상투적인 의미 없는 말이기도 하다. 이 지구촌에서 크고 작은 전쟁이 그친 적이 있긴 하던가? 그럼에도 이 부조리한 전쟁을 피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 세계의 현실이다. 아마 이 책은 이러한 관점, 즉 전쟁 억지의 방법적 논의가 아니라 당면한 전쟁 상황에서 어떻게 윤리적 책임을 달성할 수 있는가의 검토라 할 수 있다.

 

2부로 구성된 각 부의 제목이 유혹이라는 이율배반적인 낭만적 표현이긴 하지만 어쩌면 인간 행위의 부조리함을 더욱 명료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기도 하다. 1의 경우 전쟁 기계, 핵심 목표물만 제거한다는 데 목적을 둔 폭격조준기의 나름 도덕적 이상을 지닌 살상과 파괴라는 기술적 추구가 현실과 얼마나 괴리된 공허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면, 2유혹에서는 인간의 창의성과 과학의 이단적 사용이라는 비극적 파괴에 내재된 윤리적 책임의 문제로부터 다분히 공리적 판단을 요구하는 선을 위한 악의 실현이라는 전쟁의 도덕적 딜레마를 다루고 있다.

 

아마 결론은 모두(冒頭)에 인용한 문장처럼 익숙한 방식으로 부조리했다.’는 것이라고 간결하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 얼마나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데 교활한 가를 새삼스레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겠는가? ‘어떤 선택의 재검토는 바로 이 부조리함, 그 도덕적 정당화라는 인간의 고질적인 심리적 질병을 확인하고 윤리적 책임을 지닌 인간으로서 인식을 재검토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폭격조준기

 

1 칼 노든이라는 천재 과학자와 미국 공군의 모태였던 항공단 전술학교일명 폭격기 마피아사람들의 도덕적 이상으로서 무고한 민간인 살상이라는 광범위한 무차별적 폭격을 지양하고 적의 핵심 군사 역량만을 파괴하는 폭격조준기라는 정밀 타격 장치로 시작된다.

이것은 목표물이 보여야 조준할 수 있는 기계이다. 당시 영국 공군(RAF)은 이러한 기계에 관심이 없었다. 적국인 독일의 공습에 있어서 런던 주재 미국 폭격기 사령관인 아이라 에이커와 영국 공군 사령관인 아서 해리스는 상반된 폭격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미군은 폭격조준기를 이용한 적국의 주요 군수산업 시설만의 정밀 타격을 위한 주간 비행을, 영국군은 적국의 사기를 꺾을 수 있다는 일종의 지역폭격인 야간 무차별 공습을 감행한다. 전쟁 수행에 대한 도덕적 논거를 발전시키던 미군은 독일의 항공 전략을 약화시킬 대상으로 슈바인푸르트에 위치한 볼베어링 공장을 주간 공습한다. 그러나 적의 대공포화를 피하기 위한 회피기동과 고도, 엄청난 속도로 인해 폭격조준기에 의존한 폭격은 실패를 거듭할 뿐 아니라 폭격기와 승무원의 피해만 폭증한다.

 

이 공중폭격에 맥스웰필드, 즉 폭격기 마피아 출신의 헤이우드 핸셀장군과 이와 이상을 교류한 바 없는 커티스 르메이장군의 전투 실행 방법은 군사적 책임과 도덕적 의무와의 미묘한 물음을 제기한다. 거듭된 실패에도 폭격조준기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던 핸셀과 달리 르메이는 적의 대공포를 피하기 위한 회피기동을 하지 않는, 즉 폭격수에게 폭격조준기의 조정 시간을 충분히 주기위한 7분간의 직선 고정비행을 감행한다. 폭격기 승무원의 생명을 담보로 한 무모한 실행이다. 이러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2,000개의 폭탄 투하에 80개만 표적에 근접했다니, 이들의 도덕적 이상은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말콤 글래드웰은 인간의 케케묵은 자기 정당화 심리를 확인한다. 믿었던 게 모두 거짓으로 판명되지만 자신의 믿음에 부합되는(정당화하는) 인식만을 받아들이는 심리적 한계이다. 다시 말해 신념을 위해 희생한 것이 많을수록 사람은 실수라고 말하는 증거에 강하게 저항한다. 포기하지 않으며 오히려 더 몰두(128)”한다는 것이다. 폭격조준기에 대한 그릇된 신화적 믿음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끈질긴 자기 합리화의 무책임성과 영국군의 무차별 공습에 내재된 인명 경시의 도덕적 무감각 증상은 전쟁에 도사린 인간 심리와 윤리 의식의 민낯을 보여준다.

 

도쿄 야간 공습

 

2유혹5개 장()은 유럽의 전장에서 태평양 전쟁으로 옮겨와 일본 열도의 공습에 얽힌 인간 도덕성에 대한 오래된 딜레마를 검토한다. 이 어렵고 난해한 도덕적 질문은 유럽의 하늘에서 이미 대조적인 지휘관의 모습을 보였던 헤이우드 핸셀과 커티스 르메이를 다시금 소환한다. 당시 주력기인 B-17 폭격기의 항속 거리는 2,000킬로미터도 되지 못했다. 미국 본토와 일본 열도는 무려 6,400킬로미터이니 날아갈 수 있는 폭격기가 없었던 셈이다.

 

미국이 선택한 것은 일본군이 차지하고 있던 도쿄로부터 2,400킬로미터에 위치한 서태평양의 마리아나 제도(, 사이판, 티니언 3개 섬으로 이루어짐)를 점령하여 항공 활주로를 건설하고, 항속거리를 늘린 새로운 기종을 조속히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핸셀과 르메이는 각기 마리아나제도의 제20폭격기 사령관과 인도 콜카타의 제21폭격기 사령관을 맡고 있었으며, 두 사람은 공히 일본 공격을 시도한다.

 

촉박하게 개발된 B-29, 일명 슈퍼포트리스는 당시 빈번한 고장과 과열로 인한 화재를 안은 불안한 기체였다는 것이다. 괌에서 출발한 5차례의 일본 출격을 한 핸셀의 공격은 실제 목표물을 거의 건드리지도 못했으며, 인도에서 일본으로 향한 르메이의 항로는 8,848미터의 에베레스트 고봉을 넘어 중국의 청두를 경유하여 일본 규슈에 도달하는 험난한 여정이었다는 것이다. 실제 콜카타에서 출격한 92대 중 규슈에 도착한 것은 47대였으며, 목표물을 본 것은 15, 표적 타격 폭탄은 단 한발이었다는 것이다. 정말 미친 짓이었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말이다. 핸셀의 실패는 그들이 도쿄 상공에서 마주한 낯선 바람이었다. 그 때에는 제트기류(6킬로미터 상공에서 시작되어 상층부 대기 내에서 지구 전체를 도는 빠른 공기 흐름)’에 대해 어느 누구도 그 존재를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 가질 수 있다신념을 버리기만 하면 된다.”  - 169

 

폭격 조준기에 대한 믿음을 버리면 된다. 인간의 도덕 기준이란 것이 얼마나 탄력적이고 융통성 넘치는 것인가! 폭격조준기의 개발은 그야말로 살상과 파괴의 범위를 극소화하며 전쟁의 승기를 잡으려는 도덕성에 기초한 도덕적 진보의 표상이었다. 이것이 실패하자 무차별 폭격으로 이행한다. 화학회사가 개발한 필름의 자체 과열로 인한 화재에 착안한 일련의 똑똑이들(하버드, 예일대 교수들)이 네이팜(Napam)이라는 소이탄을 만들어낸다. 가연 범위가 약 65제곱킬로미터에 이르는, 오사카 중심부의 80퍼센트를 전소시켜 날려버릴 수 있는 폭탄이다. 가히 이단적이라 할 수 있는 이 야만적 폭탄에 대한 합리화 과정이 이 미국인들에게 자리 잡는다.

 

도덕적이었던 사람들이 이렇게 바뀌기 위해서는 자신의 행동과 스스로의 원칙을 조화시키기 위해 옳다고 스스로 설득할 수 있는 언어와 개념을 찾아(187)”낸다는 것이다. 인간의 창의성과 과학이 지독하고 무차별한 살상과 파괴를 야기하는 소이탄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것이다. 철학적이며 사상가에 가까운 도덕적 이상주의자인 헤이우드 핸셀은 이 비극적이고 파괴적인 폭격 명령을 회피하고 실행을 미룬다. 상부는 사령관을 커티스 르메이로 교체한다.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실행부터 하는 르메이는 결과론적으로 적임자였다. 날씨와 구름과 같은 기상 조건으로 폭격기의 발이 묶이는 것, 대공 포화를 회피하기 위한 높은 고도에서 하는 폭격의 불확실성을 피하며 적의 도시를 무참하게 파괴할 수 있는 공격 방법으로 그는 1.5킬로미터의 야간 저고도비행을 결정한다. 이 저고도 비행 명령을 들은 폭격기 승무원들 대부분은 자살 작전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무모한 작전이라는 것이었다. 이는 목적을 위해 인간 생명은 단지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고가 터 잡고 있다. 생명에 대한 존중은 사라지고 없다. 인간이 목적이 아니고 수단이 되면 도덕이 자리 잡을 여지가 없어지는 것이다.

 

르메이의 정당화 변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전쟁을 가능한 빨리 끝내는 것이 지휘관의 책임이며, 고통을 야기하는 것은 전쟁의 기법이 아니라 전쟁의 지속 기간이다. (...) 가차 없고 단호하고 파괴적인 것이 2년 동안 지속될 전쟁을 1년에 끝낸다면, 그게 가장 바람직한 결과가 아닌가?(204)”

이 말에 담긴 도덕 해석은 끔찍한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지휘관의 책임이며, 이 최소화를 실천하는 최선의 방법은 전쟁을 가능한 빨리 끝내는 것이 도덕적이라는 것이다. 194539일 밤 네이팜을 실은 B-29폭격기 300대가 넘는 대규모 첫 공습이 시작된다. 수천 개의 밝은 녹색 단검이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는 깜짝 놀랄 만큼 아름다운 순간, 그리고 쾅!(209)”, 이 비현실적인 모습은 마치 신을 맞이하는 광란의 지옥도 같지 않은가?


 

138쪽 사진 부분 발췌



1945814일까지 67곳 도시의 무차별 파괴와 함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 투하로 전쟁은 종료된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의 의문이 제기된다. 이 광란의 막후에 어떠한 공식적인 계획도, 상관으로부터의 지시도 없었다는 것(222)”이다. 이렇게 중대한 윤리적, 정치적 결과를 초래하는 결정을 젊은 야전 사령관의 손에 맡겼다는 것은 사실 터무니없다고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말콤의 탄식처럼 인간의 이었다는 폭격조준기가 상징하는 전쟁의 도덕성, 인간의 정체성은 어디로 사라졌다는 것인가?” 라는 물음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맺 음 말

 

도덕을 대가로 승리를 취하는 것,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 파우스트의 거래를 할 만큼 인간은 타락했다는 것일까? 사실 이처럼 순진한 도덕적 이상주의의 낙심에 머물 수도 있다. 하필 이 도덕적 딜레마의 대상이 우리의 독립을 가져온 역사적 반성 없는 일본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몰염치한 야만적 대상에 도덕적 연민을 가져야 한다는 것인가라는 회의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도덕적 책임을 겨냥했던 폭격기 마피아의 이상을 향했던, 인간 독창성의 산물이었던 폭격조준기가 가졌던 윤리적 믿음마저 부정할 수만은 없는 것이며, 말콤의 지적처럼 양심과 의지를 적용해야만 해결할 수 있는 일련의 도덕적 문제(233)”를 외면해서도 안 될 것이다.

 

전쟁기간의 단축을 위한 행위는 공리주의적 잣대로 선()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의도적으로 행하는 무고한 인간의 대량 살상과 참혹한 파괴를 수반하는 악()에 기초했을 경우에도 선인가 하는 것이다. ‘어떤 선택의 재검토는 바로 인간의 도덕적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다. 인간 세계는 전쟁을 그친 적이 없다. 오늘날의 군사기술은 1940년대의 그것과 비할 바 없이 고도로 정밀해졌다. 고고도 정밀 유도탄은 물론 놀랄 정도의 시계(視界)와 상관없이 목표물에 폭격을 가할 수 있는 정확성을 가진 항법장치를 탑재한 폭격기, 전투기가 즐비하다. 핵심 표적물만 타격할 수 있는 것이 현대 기술이다.

 

정밀해질수록 사용하고 싶은 유혹이 커진다고 한다. 이 땅에도 감히 선제 타격을 부르짖는 망나니가 설쳐대는 형국이다. 무고한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이 같은 도덕적 책임을 상실한 망언에 나는 모욕을 느끼고 수치스러움에 몸을 떤다. 전쟁 그 자체도 인간에 대한 모멸이지만 전쟁 수행 방식 또한 부조리 덩어리다. 전쟁은 불법성을 정당화하라는 유혹,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을 행하라는 유혹으로 인간을 도덕적 실험에 들게 한다. 과연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인가? 회의적 물음만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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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네지릭
기 드보르 지음, 이채영 옮김 / 필로소픽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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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적 생산조건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모든 삶은 스펙타클의 거대한 집적으로 나타난다. 직접 경험했던 모든 것이 표상 속으로 멀어진다. "

- 기 드보르 스펙타클의 사회; La Societe du Spectacle1 테제에서

강신주구경꾼 VS 주체오월의 봄 , 102쪽 재인용

 

마르크스의 자본론첫 문장을 강력하고 예리하게 벼려낸 이 패기만만한 '기 드보르(1931~1994)'의 현대 세계에 대한 표상 비판은 자본주의와 대의민주주의를 표적으로 한 세기의 명문장으로 회자되고 있다. 1952'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을 만들고 1972년 자진 해체할 때까지 주도했던, 세계를 대상으로 투쟁했던 20세기 유일의 저항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은 그의 회고록으로 이끌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기 드보르의 일생은 세상과의 지속적인 불화, 아니 적대감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충분하고도 넘칠 만큼 타당한 이유를 지니고서 말이다. 스펙타클이라는 온실 속에 갇혀 지내며 자신이 갇힌 줄 모르는 현대사회의 구성원들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상처를 내 돌아보게 하려는 시도로 점철된 삶이었다하면 왜곡된 이해가 될까?


 



회고록의 제목 '파네지릭(Panegyrique)' "비판과 비난을 배제하지 않는 찬사"라는 사전적 의미를 지닌 듯하다. 설혹 비난이 가해질지언정 기 드보르는 관심조차 없겠지만, 그는 그야말로 솔직해 지는 것이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사람이다. "동시대 사람들이 받아들인 가치를 단 한 번도 믿은 적이 없(17)" 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회고록은 여느 회고록과는 판이한 내용과 구성을 하고 있다. '페터 바이스'저항의 미학을 연상시킨다는 측면에서 기 드보르가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 글과 낙서, 지도와 포스터들, 그리고 사진들을 통해 최선을 다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모든 전략 비평의 본질은 정확히 행위자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라는 '클라우제비츠'의 말을 빌어, 섣부른 공상이나 몽상과 같은 비평으로는 본질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음을 시사하며 자신이 경험한 인생이란 정확히 무엇인지를 냉정하게 서술해나간다. 빈털터리 집안, 물려받을 유산은 없었으며 실제로도 그러했다. 아르투르 크라방과 로트레아몽을 존경하는 인물로 새기며, "부르주아들이 일하는 천박함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하고(25)" 산 덕 분에 인생의 중요한 것을, 즉 부재와 결핍의 현상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나는 길거리에서 자랐단 말이다!" -아리스토파네스 기사들

 

그리고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극단적 허무주의가 지배하는 아주 매력적인 집단에 접근하게 됨으로써 "평범한 존재로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가능성(27)"이 사라지고 말았음을, 그러나 어떠한 후회도 없는 삶이었다고 술회한다. 이렇게 이끈 것은 현대사이지 세상이 부정적으로 규정한 사람들이 아님을 확인한다. 결국 "파괴는 나의 베아트리체가 되었노라."라는 외침처럼 기존의 사회, 사회가 앞으로 되겠다고 선언했던 모든 것에 대한 적대적 입장이 1989년 이 회고록이 집필되던 시기에도 여전함을 밝힌다.

 

그의 주저(主著)스펙타클의 사회1테제를 모두(冒頭)에 인용한 까닭은 그가 지향했던, 또한 그가 세계와 불화했던 이유를 상징하기위해 인용했다. 따라서 그가 세상을 그토록 잘 꿰뚫어 보던 "내 가난한 동지들을 생생히 기억하며 파리의 밤, 모두 함께 모여 있던 그 때를" 되뇔 때면 알지 못하는 한 존재에 대한 종()의 우애를 느끼게 된다.

 

 

그림 속 낙서의 내용은 무엇일까? 기 드보르의 자본주의에 대한 혐오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154쪽 부분 발췌

 


한편 자신의 삶 전체에 의심할 여지없이 영향을 끼친 것이 일찍이 터득한 술 마시는 버릇이었음을, 글쓰기란 흔치않은 행위로 남아야 했기에 "최고의 글을 발견해내기까지 오랫동안 술을 마셔야 했기 때문(48)"이라고 능청스런 변명을 담백하게 쏟아내기도 한다. 또한 그가 사회적 약자들, - 직업, 기술, 학문적 결핍을 지닌 자들, 인종적 소외자들, 성적 약자들 등 - 경계 밖에 선 자들과 함께 위선 가득한 세계의 안녕을 끊임없이 방해하는 자로서 행위 할 수밖에 없었던 당위성을 발견하게도 된다. 일례로 시인 '뮈세'를 경멸하며 그의 경솔하기 짝이 없는 "바르셀로나에서 보았는가/ 가슴이 까무잡잡한 안달루시아 여인을."이라 쓴 시에 "내가 어떻게 오는지 보세요.( Mira camo venggo yo)"라며 답한다. 아마도 바로 너희들 같은 추악한 위선자들이 만들어낸 것이지 않는가? 라는 혐오와 적대의 변이었을 것이다.

 

"전쟁을 지휘하면서 감당해야 했던 고통과 좌절은 계산으로 따질 수 없는 정도다." - 80

 

유독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귀감으로 한 소회가 상대적으로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는데, 68혁명을 비롯한 크고 작은 봉기에서의 실패와 좌절에 대한 복기가 마음을 어지럽혔던 것 같다. 체포와 감금을 피해 상황 인터내셔널의 주역인 '라울 바네겜'의 오베르뉴 숲 깊숙한 집에서 머물던 풍경의 묘사에는 혁명 전선의 향수가 물씬 배어난다.

 

폭풍우 몰아치는 가운데 어디로 내려쳤는지 볼 수도 없는 번개 빛의 경이로운 순간을 '영원한 섬광'의 인상으로 기억한다. 자신들의 혁명에 대한 자부심의 찬사 아니었을까? 바람의 충격을 맨 앞에서 막아내는 나무들, 서로 의지하며 바람에 맞서는 나무들의 전경은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동지들의 끈끈한 연대와 함께 기분 좋고 인상적인 고독의 나날을 형상화한다.

 

1972522일자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는 기 드보르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기도 한다. "스펙타클의 사회저자는 늘 이목을 끌지 않으면서 반박할 수 없는 우두머리의 모습으로 대중 앞에 나서왔다....체제의 전복을 준비하는...(70)", 상황주의란 소비자본주의적 일상공간을 진정한 혁명적 실천의 장으로 만들어내려는 운동이라 할 수 있다. 표상과 관조의 세계에 매몰된 자본주의 물신세계가 빚어내는 항구적인 경제적 속박에서 휘청거리는 세계에 맞섰던 인간의 꾸밈없는 기록을 읽고 세월과 함께 변해가는 그의 사진들, 자료들을 읽다보면 왜 나는 행동하지 못하는가라는 느닷없는 자문을 하게 된다. 천천히 그의 관련 저서인 스펙타클의 사회를 떠올리며, 혹은 철학자 '강신주의 정치철학에서 발견하고 해석한 기 드보르를 염두에 두고 읽어나가면 훨씬 밀도 높은 감응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회고록은 1권과 2권으로 구성되어있다. 1권은 문자 그대로 서술로 된 회고록이며, 2권은 도상으로 된 증거 기록이라 할 수 있다. 3권도 있었으나 그가 불태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94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참 고 1 '스펙타클'이란 문자 그대로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 볼거리, 쇼를 의미한다. 그런데 오늘의 강력해진 자본주의는 볼 수도 있고 보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를 사람들에게 허용하지 않는다. 사람이라면 반드시 볼 수밖에 없도록 하는 마력, 혹은 마력을 가진 것이다. 이를테면 사막이 아니더라도 사막이라 믿을 수 있게만 한다면 물 없이 살아 갈 수 없다는 갈증을 만들어내 생수를 사도록 만드는 것이 곧 스펙타클이다. 출처: 강신주 구경꾼 VS 주체'정치철학 1' 102~151쪽 내용 중 변조작성

 

참 고 2 사진 속 낙서 내용 : "최후의 관료가 최후의 자본가의 창자로 목을 매 죽는 날에야 비로소 인류는 행복해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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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인가 헀더니 한 낮에는 마치 여름 날씨 같은 4, 어느 순간 여름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러한 외부 세계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책에 대한 욕망은 다시금 자기 축적을 계속한다. '아니 에르노'가 욕망을 잠재우며 읽던 '시몬 드 보부아르'레 망다랭을 뒤적이다, 부재(不在)에 대한 치열한 응시를 담은 사진의 용도를 주어담는다.

 



사진은 쾌락을 위해 빠져나간 육체의 허물처럼, 그 잔존물인 옷가지, 구두, 악세사리의 자연스런 흐트러짐의 보존물이다. 유방암 치료 중이던 예순의 여인 '아니 에르노'와 연하의 연인 '마크 마리'의 공동의 작업물이다. 육체의 부재, 죽음의 징후들, 그 흔적물같은 사진을 찍고, 그를 확인하며 삶의 열정과 죽음의 공포에 대한 치열한 사유와 각축을 벌인다. 아마 리뷰로 남기게 될 것 같다.

 

이렇게 느닷없는 연상 작용으로 주어 모은 책들이 다시금 탑을 쌓아 올리기 시작한다. 치 쌓아 오르기 시작한 책의 제목을 보면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그렇게 무관한 것들의 집합인 것은 아니란 생각이다. 이것들은 분명 무언가의 자극들, 그 영향이 빚어낸 결과물들일 것이다. 물론 미디어 매체들이 뿜어내는 선전에 힘입은 것들도 있지만 어쨌거나 내 욕망의 산물들임에는 틀림없다.

 

'어빙 고프먼'자아 연출의 사회학은 벼르고 벼르던 책이다. 인간 관계의 다종 다양의 의례적 행위들에서 나타나는 선민의식의 치졸함이 내내 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탓일 것이다. 상호작용 의례』를 읽고 난 후 한동안 잊었던 기억이 한 평범한 심리학 자기 계발서로 촉발되었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의 이 연극적 행위들, 인간 일상사에 내재된 미묘하고 흥미로운 탐사가 될 것 같다.

 

이 촉발은 여러 책으로 거듭 이어졌는데, 니체와 루소의 사유 중추에 대한 어떤 총체적 줄기를 내 독서의 중심 잡기를 위한 도움을 위해서 였다. '레지날드 J. 홀링데일'이 펴낸 니체'츠베탕 토도로프'덧없는 행복은 도덕성이라는 것을 다시금 살펴보는 기회가 되어주리라 믿으면서.


 



'대니얼 카너먼'의 생각에 관한 생각은 진리에 대한 내 믿음, 제한적 상대주의의 믿음을 확인하는 읽기라 할 수 있다. 단지 이성의 실패를 확인하는 읽기. 카너먼의 설득력있는 입증과 확인, 그리고 대중적 지지로 이어진 진실 추론에 직관의 영향을 더한 탐색을 아무튼 확인하고픈 마음에서 선택했다. 이렇게 정리하다보니 어떤 사유의 목소리들이 지닌 거대한 줄기를 정리하고 싶었던 소망의 실행이었던 것 같다


 '버넌 홀 2'서양문학 비평사또한 서구문학의 중추적 정신의 지향들을 정리한 책이다. 실재와 모방에 대한 문학 비평의 길고 긴, 그리고 공허하기까지 한 오만한 지성들의 싸움을 보며 자신들만의 건축물을 지으려는 어떤 힘을 향한 욕망에 대한 씁쓸함까지 느끼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시학은 이에 대한 참고 도서로, 그리고 플라톤의 실재와의 다름을 발견하기 위한 대조용 읽기였다.


구입한 소설 작품은 순전히 연상이 빚은 호기심의 이어짐일 뿐이다. '베르길리우스'아이네이스,' 매들린 밀러' 아킬레우스의 노래는 호머의 일리아드의 파생, 그 아류 작들이다. '어슐러 K. 르귄' 라비니아는 여성주의, 즉 배제된 진리의 복원 작업 일 것이다


알지 못했던 '이렌 네미롭스키'의 선집으로 기획된 6권 중 그 첫 번째 출간 작품인 무도회도 여성주의 작업과 그리 멀리 있는 소설이 아닐 것이다. 작가 사후에 수여된 르노도 상 유일의 수상작인 스윗 프랑세즈에 앞서 선보이는 맛보기에 가까운 네 편의 단편집이다. 표제작인 단편 무도회는 경박하기 그지없는 속물근성과 순수 욕망의 교차가 빛난다. 아마 오늘 중에 모두 읽어낼 듯 싶다. 요사이 시간이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흐른다고 느껴진다. 어떤 생각의 중추를 건설해 내야 할텐데, 그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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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2022-04-18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리아님이 남기신 <식인 자본주의>를 읽어보다가 이 글에 인사를 남깁니다.

이 포스트 속 책 두께들 속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시선이 멈추네요. 무대로 연결되는 사회. 앞과 뒤, 그리고 무대 위까지, 이제 자기에 대한 탐구의 시대는 저물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 읽었습니다.

필리아 2022-04-18 18:42   좋아요 0 | URL
댓글 감사드립니다, 저는 외려 그 어느 때보다 자기 비판적 성찰의 요구를 느낀답니다...
 
심리학이 불안에 답하다 - 감정을 다스리는 심리 수업
황양밍.장린린 지음, 권소현 옮김 / 미디어숲 / 202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살이가 매양 안녕하지만은 않다. 한결같이 아무 탈 없이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하지만은 않다는 얘기다. 이 안녕(安寧)하지 못한 감정의 표현을 아마 뭉뚱그려 불안(不安)이라 부르곤 한다. 편치 않고 조마조마하며 뒤숭숭한 감정에 휩싸이게 하여 삶의 정상성이 흔들리게 하는 감정이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여러 형태의 감정적 충돌, 직업적 회의와 무기력이 불러오는 앞날의 불투명성, 어떤 학과를 전공해야 할지 또는 어떤 일을 진정 좋아하는지 알 수 없는 정체감의 혼란이 야기하는 불안감, 선택의 후회로 인한 상실감 등 우리들의 삶에서 안정감을 빼앗는 양상들로 세상이 꽉 차 있는 듯 여겨지기까지 한다. 이 책은 이렇듯 삶에서 우리들의 내면을 괴롭히는 불안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 감정, 선택, 성장, 직업, 관계’, 5개의 장(lesson)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조언한다.

 

이 세상에 생존하기 위해 우리는 불안해야 한다.” - 하이데거, 본문 20

 

그런데 하이데거의 말처럼 불안의 감정은 꼭 부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만일 매일이 안녕한 안정 상태라면 이 지대로부터 뛰쳐나갈 기회를 상실하게 될지도 모른다. 즉 성장의 기회가 없는 안일의 건조함이 될지도 모른다. 결국 불안을 우리가 이해하는 내적 태도와 이것을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곧 삶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불안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내면, 감정적 태도이다. 망치를 든 사람에게는 온 세상이 못으로 보인다.’고 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느낌으로 세상을 식별한다는 얘기다. 사실 감정의 발생이란 자신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것이지 외부적 요인이 아니기에 자신이 관리할 여지를 갖게 된다는 점이다.

 

우선 감정 관리의 전제는 감정을 판별하고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57)”고 말한다. 판별, 표현 할 수 있으려면 감정의 언어(어휘)가 자신에게 있어야 한다. 실제 감정 능력이 높은 사람은 감정 개념을 많이 파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언제 어떤 개념을 사용해야 하는지도 안다고 한다. 감정을 표현할 다양한 어휘를 모르는데 어떻게 표현 할 수 있겠는가. 일례로 즐겁다는 느낌을 표현하는 어휘도 무궁무진하다. ‘미치도록 기쁘다’, ‘희열을 느낀다’, ‘고무적이다등등. 감정의 어휘를 더 많이 알수록 대뇌는 더 유연하게 행동을 예견하고 판단하여 삶의 문제에 더 잘 대처한다니 소홀히 취급할 조언이 아니다.

 

프랑스에는 라펠 두 비드(L'appelduvide)’라는 어휘가 있다고 한다. 갑자기 대뇌가 통제당하는 느낌, 어디에서부터 시작됐는지 알 수 없는 충동에 휘청거릴 정도로 힘이 빠지는 기분을 표현한 단어라 한다. 이 감정을 명쾌하게 표현하는 사람은 원인을 통제할 수 있지만 모르는 이에게는 관리 가능한 감정이 아닐 것이다. 물론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이 감정 어휘 소유의 증가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자기 의심의 혼란스러움과 같이 다양한 원인이 있으며 이러한 다종의 요인들에 따른 감정 조절 능력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고 있지만 내게 어휘의 문제는 감정관리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었다고 할 수 있다.





뷔리당의 당나귀(Buridan's ass)

 

우리의 의지력에는 스스로는 결코 넘어설 수 없는 한계가 있다고 한다. 우리들의 많은 계획이 금세 흐지부지 되기 일쑤다. 눈앞의 즐거움과 편함, 익숙함에 장기적 이익을 포기하곤 낙담하는 일이 반복되곤 한다. 또는 욕망을 유혹하는 두 갈래의 선택에서 이도 저도 선택지 못하다가 모두 놓치고 씁쓸한 후회에 휩싸이기도 한다. ‘뷔리당의 당나귀 이 같이 선택과 결정에 장애를 보이다 낭패를 보는 현상을 건초더미와 물통을 두고 오도 가도 못하다 죽은 당나귀의 우화를 빌린 심리 법칙의 이름이다.

 

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우리 마음에는 자신의 행위를 결정할 수 있는 결정권자가 없(94)”다고 말한다. 때문에 혼자 꿍꿍 앓지 말라는 것이다. 친구, 선배, 전문가등 외부의 도움을 활용하여 결정 장애 등 자신의 감정 통제력을 높이도록 하라고 조언한다. 더불어 일종의 습관화 전략을 통해 자신의 실행의도를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도록 강제하는 방법도 실행 해 볼 수 있다고 조언한다.

 

반사실적 사고(Counterfactual thinking)와 사회적 시계(Social clock)

 

무릇 삶이란 선택 과정의 연속이다. 때문에 선택을 후회하는 일로 지난 일에 대한 회한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때 그곳에 입학()지원서를 낼 것을, 또는 그(그녀)와 계속 만나서 결실을 이루었다면, 조금만 더 버텼더라면 성과를 낼 수 있었을 텐데, 등등 상실의 후회가 만만치 않다. 이처럼 발생 가능성은 있었거나 있지만, 사실 발생하지 않았던 사실에 대해 머릿속으로 가설의 상황을 만들고 현실과 비교하는 것을 반사실적 사고라 한다.

 

만일 이러한 사고를 하고 있다면 당장 그치라는 것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사실에 연연하며 감정을 소모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더구나 세상과 비교하기는 자존감을 훼손할 뿐 결코 상실감을 보상해주지 않는다. 상황을 이해할 수 있으면 이러한 느낌은 누구든 통제, 관리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우리의 성장 감정을 해치는 것으로 사회적 시계라는 것이 있다. 문화 체제 안에서 사람들에게 관습이 된 인생의 주기에 따라, 나이 대마다 무엇을 해야 한다고 강요하거나 강요당함에 따라 발생하는 심리적 불편함이다. ‘네 나이면 이미 사회적 안정을 이루었어. 대체 무슨 생각이냐?’, ‘도대체 그 나이에 연애도 못하고, 결혼은 할 거야?’, 이러한 사회적 시계에 맞춘 외부의 소음들이 우리를 불편하고 불안하게 한다. 다시 말해 시차의 발생을 마치 무슨 큰 문제라도 되는 양 구속하려 드는 것에 덩달아 초조해지고 울화가 치밀게 된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다음의 정보에 위안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겠다. 우리 인간 저마다는 작은 시계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조금 늦거나 이를 수도 있는. 더구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다양한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지 보라는 것이다. 불혹이 되어 영국 유학을 하여 학위를 따내곤 대학교 교수가 되기도 하며, 육십 살 이순(耳順)이 되어서 불후의 소설을 써낸 문호로 각광받기도 하는 것이다. 대학 동기들 모두 취업 등 사회에 진출하여 작은 성취를 이뤘을 때 열패감을 안고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이가 이 경험을 토대로 늦었지만 걸출한 사업을 일궈내기도 한다. 자기만의 적절한 시기를 가지면 된다. 사회적 시계에 맞추어 초조해 할 것 없다는 얘기다. 결코 나이가 심리적 관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만을 기억하자. 그러나 여기에는 전제가 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한다. 자기 정체감을 빨리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146쪽 부분 발췌

 

부딪쳐야 한다. 세상과 부딪치는 경험이라는 다양한 시도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준다. 무얼 좋아하는지, 무얼 싫어하는지, 무얼 잘하는지, 무엇에는 서툰지, 이것은 우리에게 변화나 갈등에 대처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마주하고 재배치할 능력의 저변이 되어준다. 정체감의 혼미나 유예 상태를 벗어나 정체감의 성취를 확인하는 자아인지는 삶에서 아주 중대한 우리네 밑천이다.

 

낙인찍기((Effect of labelling), 그리고 생각의 게으름

 

요즘 부쩍 혐오의 언어가 난폭하게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사람에게 꼬리표를 붙여 이에 따라다니는 속성에 타자를 종속시켜 함부로 하려는 나쁜 의도이다. 사람을 대략적으로 판단하여 그에 걸 맞는 프레임을 씌워 범주(카테고리)화 하는 것을 꼬리표 붙이기, 일명 낙인찍기라 한다. 간혹 가까운 친구들끼리 친밀도를 높이는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은 긍정적 꼬리표라 할 수 있겠지만 꼬리표 붙이기는 대부분이 부정적 성향을 갖는다.

 

특히 MTBI라는 성격 규정짓기 놀음이 유행하며 타자를 마구 범주화하여 통제하려 든다. 혐오의 세상이 되다보니 너나할 것 없이 생각 없는 프레임 씌우기로 고통을 겪는 청년들이 발생한다. 결국 꼬리표는 대개 타인이 붙이기에 내가 통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통제 밖에 있는 것은 심리적 결단을 내려야한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단호히 거절하고 무시하는 것이다. 마음속으로 외쳐라. ‘It's not your business.(상관없어, 꺼져)'라고.

 

어쩌면 이렇게 일반화하면 항의의 목소리가 많겠지만 이렇듯 타인을 카테고리화 하려는 사람들, 꼬리표를 붙여 낙인을 찍으려는 자들은 대부분 생각의 게으름을 감추는 위선의 수단으로 이들을 활용하곤 한다. 타인을 진심으로 알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또한 알기 위해서는 많은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가 소용되는 데 이것을 하기가 싫은 것이고, 그래서 이러한 사람들은 직장이나 조직 사회에서 가짜 부지런함으로 분주함을 보이곤 한다.


173쪽 부분 발췌


분주하지만 성과가 없는, 가짜의 부지런한 자신에 도취되어 스스로 노력하는 자라고 감동한다. 부자들, 기득권에 붙어 논리를 제공하는 말콤 그래드웰같은 이의 1만 시간 전문가 성공 법칙 같은 음모론적 허위의 말들은 거짓임이 판명되었듯이 늦은 시간 야근하며 마치 일 중독자처럼 보이려는 자들은 자신의 생각 게으름을 은폐하려는 교활함 이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생각의 게으름을 떨쳐내야 한다. 단지 오랜 시간 일을 한다고 전문가가 되는 것도, 유능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노력과 성실이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창의적 사유가 따르는 성실, 부지런함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평생 셔터만 누른다고 사진 작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번 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 인간관계

 

꼭 직장에서만의 일이 아니다. 우리는 어떤 것에 오랜 세월 매달려 있을 때, 불현듯 몰려오는 의미의 상실과 허탈감, 무기력과 피로감으로 낙망하게 되곤 한다. 이러한 심리적 현상을 직업적 탈진 상태인 번 아웃이라 부른다. 다가 올 미래의 삶이 온통 흐리멍덩하고 불안하게 여겨진다. 감정적 쇠진으로 동료들, 친구들, 가족들과 친화성이 상실되어 느닷없는 짜증에 온통 사로잡힌다. 이것은 하는 일의 성과에도 영향을 미치고 끝없이 삶의 에너지를 고갈시킨다.

 

감정과 싸우지 말라고 한다. 소명과 가치의식을 찾지 못하면 이렇게 소진되는 감정적 에너지를 관리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매일의 일상에 조금씩 변화를 주기 위한 작은 계획들을 세우고 변화를 주거나, 불가피하게 행하여야 할 참을 수 없는 것이 있는 경우, 이것과 좋아하는 것을 샌드위치 만들 듯 교대로 해보라는 것이다. 점진적인 탈출을 도모하며 궁극의 전환적 목표에 도전하라고 한다. 사실 말처럼 손쉽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벗어나야 하지 않는가? 아주 조그마한 변화가 분명 우리를 다른 시선, 새로운 성장의 길로 이끌 것이다.

 

이처럼 이 책은 삶에서 마주하는 무수한 불안의 요소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벗어나며, 건강하고 유쾌한 긍정적 삶의 세계로 이행할 수 있는가에 대한 어떤 진심의 목소리가 느껴지는 심리학적 도움의 언어로 채워져 있다고 해야겠다. 우리들 관계의 갈등은 타인의 무시와 감정을 격화시키는 언어로 출발한다. 경청하지 않거나 마음대로 상대를 정의하는 덮어씌우기식 언어처럼 타인에 대한 존중의 결여이다. 세대 간 충돌이라고 다르지 않다. 문화와 가치관에 대한 부인이란 존중의 상실이다. 우리의 내부가 아닌 외부인 사회와 정치적 불쾌함이 야기하는 불안적 요소를 도외시 할 수는 없지만 많은 감정들이 내적 통제로 이겨낼 수 있음을 우리들은 또한 알고 있다. 때문에 우리 인간의 사회적 성장에서부터 직업과 관계에 도사린 불안의 감정을 극복하고 대처 방법을 제시하는 이 진지한 심리적 조언서는 분명 삶의 길을 선택하는 데 귀중한 좌표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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