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네지릭
기 드보르 지음, 이채영 옮김 / 필로소픽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대적 생산조건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모든 삶은 스펙타클의 거대한 집적으로 나타난다. 직접 경험했던 모든 것이 표상 속으로 멀어진다. "

- 기 드보르 스펙타클의 사회; La Societe du Spectacle1 테제에서

강신주구경꾼 VS 주체오월의 봄 , 102쪽 재인용

 

마르크스의 자본론첫 문장을 강력하고 예리하게 벼려낸 이 패기만만한 '기 드보르(1931~1994)'의 현대 세계에 대한 표상 비판은 자본주의와 대의민주주의를 표적으로 한 세기의 명문장으로 회자되고 있다. 1952'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을 만들고 1972년 자진 해체할 때까지 주도했던, 세계를 대상으로 투쟁했던 20세기 유일의 저항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욕망은 그의 회고록으로 이끌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기 드보르의 일생은 세상과의 지속적인 불화, 아니 적대감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충분하고도 넘칠 만큼 타당한 이유를 지니고서 말이다. 스펙타클이라는 온실 속에 갇혀 지내며 자신이 갇힌 줄 모르는 현대사회의 구성원들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상처를 내 돌아보게 하려는 시도로 점철된 삶이었다하면 왜곡된 이해가 될까?


 



회고록의 제목 '파네지릭(Panegyrique)' "비판과 비난을 배제하지 않는 찬사"라는 사전적 의미를 지닌 듯하다. 설혹 비난이 가해질지언정 기 드보르는 관심조차 없겠지만, 그는 그야말로 솔직해 지는 것이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사람이다. "동시대 사람들이 받아들인 가치를 단 한 번도 믿은 적이 없(17)" 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회고록은 여느 회고록과는 판이한 내용과 구성을 하고 있다. '페터 바이스'저항의 미학을 연상시킨다는 측면에서 기 드보르가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 글과 낙서, 지도와 포스터들, 그리고 사진들을 통해 최선을 다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모든 전략 비평의 본질은 정확히 행위자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라는 '클라우제비츠'의 말을 빌어, 섣부른 공상이나 몽상과 같은 비평으로는 본질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음을 시사하며 자신이 경험한 인생이란 정확히 무엇인지를 냉정하게 서술해나간다. 빈털터리 집안, 물려받을 유산은 없었으며 실제로도 그러했다. 아르투르 크라방과 로트레아몽을 존경하는 인물로 새기며, "부르주아들이 일하는 천박함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하고(25)" 산 덕 분에 인생의 중요한 것을, 즉 부재와 결핍의 현상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나는 길거리에서 자랐단 말이다!" -아리스토파네스 기사들

 

그리고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극단적 허무주의가 지배하는 아주 매력적인 집단에 접근하게 됨으로써 "평범한 존재로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가능성(27)"이 사라지고 말았음을, 그러나 어떠한 후회도 없는 삶이었다고 술회한다. 이렇게 이끈 것은 현대사이지 세상이 부정적으로 규정한 사람들이 아님을 확인한다. 결국 "파괴는 나의 베아트리체가 되었노라."라는 외침처럼 기존의 사회, 사회가 앞으로 되겠다고 선언했던 모든 것에 대한 적대적 입장이 1989년 이 회고록이 집필되던 시기에도 여전함을 밝힌다.

 

그의 주저(主著)스펙타클의 사회1테제를 모두(冒頭)에 인용한 까닭은 그가 지향했던, 또한 그가 세계와 불화했던 이유를 상징하기위해 인용했다. 따라서 그가 세상을 그토록 잘 꿰뚫어 보던 "내 가난한 동지들을 생생히 기억하며 파리의 밤, 모두 함께 모여 있던 그 때를" 되뇔 때면 알지 못하는 한 존재에 대한 종()의 우애를 느끼게 된다.

 

 

그림 속 낙서의 내용은 무엇일까? 기 드보르의 자본주의에 대한 혐오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154쪽 부분 발췌

 


한편 자신의 삶 전체에 의심할 여지없이 영향을 끼친 것이 일찍이 터득한 술 마시는 버릇이었음을, 글쓰기란 흔치않은 행위로 남아야 했기에 "최고의 글을 발견해내기까지 오랫동안 술을 마셔야 했기 때문(48)"이라고 능청스런 변명을 담백하게 쏟아내기도 한다. 또한 그가 사회적 약자들, - 직업, 기술, 학문적 결핍을 지닌 자들, 인종적 소외자들, 성적 약자들 등 - 경계 밖에 선 자들과 함께 위선 가득한 세계의 안녕을 끊임없이 방해하는 자로서 행위 할 수밖에 없었던 당위성을 발견하게도 된다. 일례로 시인 '뮈세'를 경멸하며 그의 경솔하기 짝이 없는 "바르셀로나에서 보았는가/ 가슴이 까무잡잡한 안달루시아 여인을."이라 쓴 시에 "내가 어떻게 오는지 보세요.( Mira camo venggo yo)"라며 답한다. 아마도 바로 너희들 같은 추악한 위선자들이 만들어낸 것이지 않는가? 라는 혐오와 적대의 변이었을 것이다.

 

"전쟁을 지휘하면서 감당해야 했던 고통과 좌절은 계산으로 따질 수 없는 정도다." - 80

 

유독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귀감으로 한 소회가 상대적으로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는데, 68혁명을 비롯한 크고 작은 봉기에서의 실패와 좌절에 대한 복기가 마음을 어지럽혔던 것 같다. 체포와 감금을 피해 상황 인터내셔널의 주역인 '라울 바네겜'의 오베르뉴 숲 깊숙한 집에서 머물던 풍경의 묘사에는 혁명 전선의 향수가 물씬 배어난다.

 

폭풍우 몰아치는 가운데 어디로 내려쳤는지 볼 수도 없는 번개 빛의 경이로운 순간을 '영원한 섬광'의 인상으로 기억한다. 자신들의 혁명에 대한 자부심의 찬사 아니었을까? 바람의 충격을 맨 앞에서 막아내는 나무들, 서로 의지하며 바람에 맞서는 나무들의 전경은 상황주의 인터내셔널 동지들의 끈끈한 연대와 함께 기분 좋고 인상적인 고독의 나날을 형상화한다.

 

1972522일자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는 기 드보르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기도 한다. "스펙타클의 사회저자는 늘 이목을 끌지 않으면서 반박할 수 없는 우두머리의 모습으로 대중 앞에 나서왔다....체제의 전복을 준비하는...(70)", 상황주의란 소비자본주의적 일상공간을 진정한 혁명적 실천의 장으로 만들어내려는 운동이라 할 수 있다. 표상과 관조의 세계에 매몰된 자본주의 물신세계가 빚어내는 항구적인 경제적 속박에서 휘청거리는 세계에 맞섰던 인간의 꾸밈없는 기록을 읽고 세월과 함께 변해가는 그의 사진들, 자료들을 읽다보면 왜 나는 행동하지 못하는가라는 느닷없는 자문을 하게 된다. 천천히 그의 관련 저서인 스펙타클의 사회를 떠올리며, 혹은 철학자 '강신주의 정치철학에서 발견하고 해석한 기 드보르를 염두에 두고 읽어나가면 훨씬 밀도 높은 감응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회고록은 1권과 2권으로 구성되어있다. 1권은 문자 그대로 서술로 된 회고록이며, 2권은 도상으로 된 증거 기록이라 할 수 있다. 3권도 있었으나 그가 불태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94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참 고 1 '스펙타클'이란 문자 그대로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 볼거리, 쇼를 의미한다. 그런데 오늘의 강력해진 자본주의는 볼 수도 있고 보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를 사람들에게 허용하지 않는다. 사람이라면 반드시 볼 수밖에 없도록 하는 마력, 혹은 마력을 가진 것이다. 이를테면 사막이 아니더라도 사막이라 믿을 수 있게만 한다면 물 없이 살아 갈 수 없다는 갈증을 만들어내 생수를 사도록 만드는 것이 곧 스펙타클이다. 출처: 강신주 구경꾼 VS 주체'정치철학 1' 102~151쪽 내용 중 변조작성

 

참 고 2 사진 속 낙서 내용 : "최후의 관료가 최후의 자본가의 창자로 목을 매 죽는 날에야 비로소 인류는 행복해 질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