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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선택의 재검토 - 최상을 꿈꾸던 일은 어떻게 최악이 되었는가
말콤 글래드웰 지음, 이영래 옮김 / 김영사 / 2022년 4월
평점 :
“모든 전쟁은 부조리하다. 인간은 수 천 년 동안 서로를 없앰으로써 불화를 해결하는 방법을 선택해왔다. (...) 그들은 부조리하되 익숙한 방식으로 부조리했다.” - 147쪽
무고한 사람들을 대량 살상하고 그들의 오랜 역량들인 축조물들을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전쟁을 도덕적으로 옳다고 하지 않는다. 이 말은 사실 지극히 뻔하고 상투적인 의미 없는 말이기도 하다. 이 지구촌에서 크고 작은 전쟁이 그친 적이 있긴 하던가? 그럼에도 이 부조리한 전쟁을 피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 세계의 현실이다. 아마 이 책은 이러한 관점, 즉 전쟁 억지의 방법적 논의가 아니라 당면한 전쟁 상황에서 어떻게 윤리적 책임을 달성할 수 있는가의 검토라 할 수 있다.
2부로 구성된 각 부의 제목이 ‘꿈’ 과 ‘유혹’이라는 이율배반적인 낭만적 표현이긴 하지만 어쩌면 인간 행위의 부조리함을 더욱 명료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기도 하다. 1부 ‘꿈’의 경우 전쟁 기계, 즉 핵심 목표물만 제거한다는 데 목적을 둔 폭격조준기의 나름 도덕적 이상을 지닌 살상과 파괴라는 기술적 추구가 현실과 얼마나 괴리된 공허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면, 2부 ‘유혹’에서는 인간의 창의성과 과학의 이단적 사용이라는 비극적 파괴에 내재된 윤리적 책임의 문제로부터 다분히 공리적 판단을 요구하는 선을 위한 악의 실현이라는 전쟁의 도덕적 딜레마를 다루고 있다.
아마 결론은 모두(冒頭)에 인용한 문장처럼 ‘익숙한 방식으로 부조리했다.’는 것이라고 간결하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 얼마나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데 교활한 가를 새삼스레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겠는가? ‘어떤 선택의 재검토’는 바로 이 부조리함, 그 도덕적 정당화라는 인간의 고질적인 심리적 질병을 확인하고 윤리적 책임을 지닌 인간으로서 인식을 재검토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2/0426/pimg_7290341033392388.jpg)
■ 폭격조준기
1부 ‘꿈’은 ‘칼 노든’이라는 천재 과학자와 미국 공군의 모태였던 ‘항공단 전술학교’ 일명 ‘폭격기 마피아’ 사람들의 도덕적 이상으로서 무고한 민간인 살상이라는 광범위한 무차별적 폭격을 지양하고 적의 핵심 군사 역량만을 파괴하는 ‘폭격조준기’라는 정밀 타격 장치로 시작된다.
이것은 목표물이 보여야 조준할 수 있는 기계이다. 당시 영국 공군(RAF)은 이러한 기계에 관심이 없었다. 적국인 독일의 공습에 있어서 런던 주재 미국 폭격기 사령관인 ‘아이라 에이커’와 영국 공군 사령관인 ‘아서 해리스’는 상반된 폭격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미군은 폭격조준기를 이용한 적국의 주요 군수산업 시설만의 정밀 타격을 위한 주간 비행을, 영국군은 적국의 사기를 꺾을 수 있다는 일종의 지역폭격인 야간 무차별 공습을 감행한다. 전쟁 수행에 대한 도덕적 논거를 발전시키던 미군은 독일의 항공 전략을 약화시킬 대상으로 ‘슈바인푸르트’에 위치한 볼베어링 공장을 주간 공습한다. 그러나 적의 대공포화를 피하기 위한 회피기동과 고도, 엄청난 속도로 인해 폭격조준기에 의존한 폭격은 실패를 거듭할 뿐 아니라 폭격기와 승무원의 피해만 폭증한다.
이 공중폭격에 맥스웰필드, 즉 폭격기 마피아 출신의 ‘헤이우드 핸셀’장군과 이와 이상을 교류한 바 없는 ‘커티스 르메이’ 장군의 전투 실행 방법은 군사적 책임과 도덕적 의무와의 미묘한 물음을 제기한다. 거듭된 실패에도 폭격조준기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던 핸셀과 달리 르메이는 적의 대공포를 피하기 위한 회피기동을 하지 않는, 즉 폭격수에게 폭격조준기의 조정 시간을 충분히 주기위한 7분간의 직선 고정비행을 감행한다. 폭격기 승무원의 생명을 담보로 한 무모한 실행이다. 이러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2,000개의 폭탄 투하에 80개만 표적에 근접했다니, 이들의 도덕적 이상은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말콤 글래드웰은 인간의 케케묵은 자기 정당화 심리를 확인한다. 믿었던 게 모두 거짓으로 판명되지만 자신의 믿음에 부합되는(정당화하는) 인식만을 받아들이는 심리적 한계이다. 다시 말해 “신념을 위해 희생한 것이 많을수록 사람은 실수라고 말하는 증거에 강하게 저항한다. 포기하지 않으며 오히려 더 몰두(128쪽)”한다는 것이다. 폭격조준기에 대한 그릇된 신화적 믿음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끈질긴 자기 합리화의 무책임성과 영국군의 무차별 공습에 내재된 인명 경시의 도덕적 무감각 증상은 전쟁에 도사린 인간 심리와 윤리 의식의 민낯을 보여준다.
■ 도쿄 야간 공습
2부 ‘유혹’의 5개 장(章)은 유럽의 전장에서 태평양 전쟁으로 옮겨와 일본 열도의 공습에 얽힌 인간 도덕성에 대한 오래된 딜레마를 검토한다. 이 어렵고 난해한 도덕적 질문은 유럽의 하늘에서 이미 대조적인 지휘관의 모습을 보였던 헤이우드 핸셀과 커티스 르메이를 다시금 소환한다. 당시 주력기인 B-17 폭격기의 항속 거리는 2,000킬로미터도 되지 못했다. 미국 본토와 일본 열도는 무려 6,400킬로미터이니 날아갈 수 있는 폭격기가 없었던 셈이다.
미국이 선택한 것은 일본군이 차지하고 있던 도쿄로부터 2,400킬로미터에 위치한 서태평양의 마리아나 제도(괌, 사이판, 티니언 3개 섬으로 이루어짐)를 점령하여 항공 활주로를 건설하고, 항속거리를 늘린 새로운 기종을 조속히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핸셀과 르메이는 각기 마리아나제도의 제20폭격기 사령관과 인도 콜카타의 제21폭격기 사령관을 맡고 있었으며, 두 사람은 공히 일본 공격을 시도한다.
촉박하게 개발된 B-29, 일명 슈퍼포트리스는 당시 빈번한 고장과 과열로 인한 화재를 안은 불안한 기체였다는 것이다. 괌에서 출발한 5차례의 일본 출격을 한 핸셀의 공격은 실제 목표물을 거의 건드리지도 못했으며, 인도에서 일본으로 향한 르메이의 항로는 8,848미터의 에베레스트 고봉을 넘어 중국의 청두를 경유하여 일본 규슈에 도달하는 험난한 여정이었다는 것이다. 실제 콜카타에서 출격한 92대 중 규슈에 도착한 것은 47대였으며, 목표물을 본 것은 15대, 표적 타격 폭탄은 단 한발이었다는 것이다. 정말 미친 짓이었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말이다. 핸셀의 실패는 그들이 도쿄 상공에서 마주한 낯선 바람이었다. 그 때에는 ‘제트기류(약 6킬로미터 상공에서 시작되어 상층부 대기 내에서 지구 전체를 도는 빠른 공기 흐름)’에 대해 어느 누구도 그 존재를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 가질 수 있다, 신념을 버리기만 하면 된다.” - 169쪽
폭격 조준기에 대한 믿음을 버리면 된다. 인간의 도덕 기준이란 것이 얼마나 탄력적이고 융통성 넘치는 것인가! 폭격조준기의 개발은 그야말로 살상과 파괴의 범위를 극소화하며 전쟁의 승기를 잡으려는 도덕성에 기초한 도덕적 진보의 표상이었다. 이것이 실패하자 무차별 폭격으로 이행한다. 화학회사가 개발한 필름의 자체 과열로 인한 화재에 착안한 일련의 똑똑이들(하버드, 예일대 교수들)이 네이팜(Napam)이라는 소이탄을 만들어낸다. 가연 범위가 약 65제곱킬로미터에 이르는, 오사카 중심부의 80퍼센트를 전소시켜 날려버릴 수 있는 폭탄이다. 가히 이단적이라 할 수 있는 이 야만적 폭탄에 대한 합리화 과정이 이 미국인들에게 자리 잡는다.
도덕적이었던 사람들이 이렇게 바뀌기 위해서는 “자신의 행동과 스스로의 원칙을 조화시키기 위해 옳다고 스스로 설득할 수 있는 언어와 개념을 찾아(187쪽)”낸다는 것이다. 인간의 창의성과 과학이 지독하고 무차별한 살상과 파괴를 야기하는 소이탄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것이다. 철학적이며 사상가에 가까운 도덕적 이상주의자인 헤이우드 핸셀은 이 비극적이고 파괴적인 폭격 명령을 회피하고 실행을 미룬다. 상부는 사령관을 커티스 르메이로 교체한다.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실행부터 하는 르메이는 결과론적으로 적임자였다. 날씨와 구름과 같은 기상 조건으로 폭격기의 발이 묶이는 것, 대공 포화를 회피하기 위한 높은 고도에서 하는 폭격의 불확실성을 피하며 적의 도시를 무참하게 파괴할 수 있는 공격 방법으로 그는 1.5킬로미터의 ‘야간 저고도’ 비행을 결정한다. 이 저고도 비행 명령을 들은 폭격기 승무원들 대부분은 자살 작전으로 이해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무모한 작전이라는 것이었다. 이는 목적을 위해 인간 생명은 단지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고가 터 잡고 있다. 생명에 대한 존중은 사라지고 없다. 인간이 목적이 아니고 수단이 되면 도덕이 자리 잡을 여지가 없어지는 것이다.
르메이의 정당화 변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전쟁을 가능한 빨리 끝내는 것이 지휘관의 책임이며, 고통을 야기하는 것은 전쟁의 기법이 아니라 전쟁의 지속 기간이다. (...) 가차 없고 단호하고 파괴적인 것이 2년 동안 지속될 전쟁을 1년에 끝낸다면, 그게 가장 바람직한 결과가 아닌가?(204쪽)”
이 말에 담긴 도덕 해석은 끔찍한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지휘관의 책임이며, 이 최소화를 실천하는 최선의 방법은 전쟁을 가능한 빨리 끝내는 것이 도덕적이라는 것이다. 1945년 3월 9일 밤 네이팜을 실은 B-29폭격기 300대가 넘는 대규모 첫 공습이 시작된다. “수천 개의 밝은 녹색 단검이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는 깜짝 놀랄 만큼 아름다운 순간, 그리고 쾅!(209쪽)”, 이 비현실적인 모습은 마치 신을 맞이하는 광란의 지옥도 같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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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쪽 사진 부분 발췌】
1945년 8월 14일까지 67곳 도시의 무차별 파괴와 함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 투하로 전쟁은 종료된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의 의문이 제기된다. “이 광란의 막후에 어떠한 공식적인 계획도, 상관으로부터의 지시도 없었다는 것(222쪽)”이다. 이렇게 중대한 윤리적, 정치적 결과를 초래하는 결정을 젊은 야전 사령관의 손에 맡겼다는 것은 사실 터무니없다고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말콤의 탄식처럼 인간의 ‘꿈’이었다는 폭격조준기가 상징하는 “전쟁의 도덕성, 인간의 정체성은 어디로 사라졌다는 것인가?” 라는 물음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 맺 음 말
도덕을 대가로 승리를 취하는 것,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 파우스트의 거래를 할 만큼 인간은 타락했다는 것일까? 사실 이처럼 순진한 도덕적 이상주의의 낙심에 머물 수도 있다. 하필 이 도덕적 딜레마의 대상이 우리의 독립을 가져온 역사적 반성 없는 일본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몰염치한 야만적 대상에 도덕적 연민을 가져야 한다는 것인가라는 회의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도덕적 책임을 겨냥했던 폭격기 마피아의 이상을 향했던, 인간 독창성의 산물이었던 폭격조준기가 가졌던 윤리적 믿음마저 부정할 수만은 없는 것이며, 말콤의 지적처럼 “양심과 의지를 적용해야만 해결할 수 있는 일련의 도덕적 문제(233쪽)”를 외면해서도 안 될 것이다.
전쟁기간의 단축을 위한 행위는 공리주의적 잣대로 선(善)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의도적으로 행하는 무고한 인간의 대량 살상과 참혹한 파괴를 수반하는 악(惡)에 기초했을 경우에도 선인가 하는 것이다. ‘어떤 선택의 재검토’는 바로 인간의 도덕적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다. 인간 세계는 전쟁을 그친 적이 없다. 오늘날의 군사기술은 1940년대의 그것과 비할 바 없이 고도로 정밀해졌다. 고고도 정밀 유도탄은 물론 놀랄 정도의 시계(視界)와 상관없이 목표물에 폭격을 가할 수 있는 정확성을 가진 항법장치를 탑재한 폭격기, 전투기가 즐비하다. 핵심 표적물만 타격할 수 있는 것이 현대 기술이다.
정밀해질수록 사용하고 싶은 유혹이 커진다고 한다. 이 땅에도 감히 선제 타격을 부르짖는 망나니가 설쳐대는 형국이다. 무고한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이 같은 도덕적 책임을 상실한 망언에 나는 모욕을 느끼고 수치스러움에 몸을 떤다. 전쟁 그 자체도 인간에 대한 모멸이지만 전쟁 수행 방식 또한 부조리 덩어리다. 전쟁은 불법성을 정당화하라는 유혹,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을 행하라는 유혹으로 인간을 도덕적 실험에 들게 한다. 과연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인가? 회의적 물음만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