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지성, 홍루몽과 만나다 - 무한한 정과 무상한 생의 이야기 감성(감이당 대중지성) 시리즈 2
김희진 지음 / 북드라망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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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대명저중 하나인 홍루몽(紅樓夢)은 그 양적 방대함이 독자에게 부담스런 장벽이기도 하지만 책장을 줄기차게 넘겨도 어떤 변화를 체감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세밀하고 시시콜콜한 일상의 반복이 주는 지루함을 견뎌내기가 쉽지 않은 작품이다. 결국 손에 들었다가 놓기를 반복하지만 이내 책장에 다시 밀어넣고 존재를 잊기 일쑤다.  그럼에도 많은 인문학 저술들과 에세이 이곳저곳에서 홍루몽의 한 구절이나 등장인물의 인용을 발견하면 다시금 아쉬움이 마음을 어지럽히곤 했다.

 

궁여지책 끝에 이 작품이 대체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지, 어떻게 읽어내야 할 지에 대한 일종의 조언을 우선 참고하자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전업주부인 저자 김희진의 3년여에 걸친 지난한 공부 결실인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어쩌면 행운인지도 모르겠다.  바로 읽기를 포기하게 했던 그 지나치게 반복적이어서 무의미해 보이기까지 하였던 일상의 묘사들이 그려내는 10 여년의 시간, 그 축적된 세월을 감지하는 것이 곧 이 작품의 읽기라는 지적에 내 어두운 인지능력이 깨어났다고 해야겠다.

 

홍루몽(紅樓夢)의 원저자인 조설근(趙雪芹)’은 증조부 부터 3대에 걸쳐 청()조 강남의 경제를 주름잡는 관직(강녕직조)을 세습하던 명문가의 자손이다.  달이 차면 이울 듯이 가문의 몰락과 함께 조설근은 빈한한 삶을 살았던 모양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소설은 다분히 자전적 작품이라는 추정을 빗겨갈 수 없다. 그러나 조설근은 이 작품은 가짜(假語) 이야기, 즉 허구라 말했다. 저자 김희진이 설명하듯 조설근의 진심은 가짜 이야기를 통해서만 전달 될 수밖에 없는, 자신에게 납득할만한 서사를 구성하고자 하는 욕망으로서의 글쓰기였다고 독해한다. 허구의 의미에 대한 현학적인 썰까지 푸는 것은 여기서 멈추는 것이 온당할 것 같다.

 

대중지성, 홍루몽과 만나다120회 차에 걸친 장편소설 홍루몽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어떻게 읽어야 할 지에 대한 충분한 동기를 유발할 만큼 원작에 포진한 무진장한 의미들의 세계를 발굴해내어 생각의 길을 보여준다. 아마 이 책을 읽다 보면 절로 홍루몽원작 독서의 욕망이 부푸는 설렘을 물리치기 어려워질 것이라 단언하게 된다.  사랑, 무상성, 시작과 끝을 가진 삶의 필연성, 부귀영화와 몰락, 일상에 드리워진 삶의 그림자, 그리고 세상의 이해를 향한 새로운 삶의 형태의 모색, 인연과 우정에 이르기까지 소설에 박혀있는 그 다채로운 주제들을 꼼꼼하게 읽어내어 안내해주는 까닭이다.

 

소설은 보옥(寶玉)이라는 10대 소년의 성장기를 축으로 그의 성년기까지 10 여년의 시간으로 펼쳐진 일상에서 벌어지는 장면들의 섬세한 기억의 기술이며, 원저자 조설근 자신의 경험처럼 '가부'라는 명문거족(名門巨族)의 흥망성쇠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가부 집안에는 하나의 마을이라 할 만큼 거대한 정원인 대관원이 있으며, 이 정원은 평등한 자매의 공간이며, 남성들의 출입이 제한되어 오직 여자들만이 어울리는,  그 어떠한 가부의 위계질서도 미치지 않는 독립된 장소라는 것이다.  아마 원작자의 여성에 대한 연민, 그 고통에 대한 공감의 정밀성을 위한 필수적인 배경이었을 것이다.

 

그 가운데 유일한 청일점인 이 가문의 장손인 보옥이 있다.  보옥이란 아이는 인간 세상의 즐거움을 맛보고 싶어 조르고 졸라 이 세상에 태어난 신선계를 노닐던 신영지사라는 존재다. 그러하니 이 아이에게 매일의 어떤 일상도 똑같게 느껴질 수 없다.  모든 하루가 그에게는 선물이다.  그런데 주인공인 보옥이는 대관원을 비롯한 무수히 등장하는 여인들의 중심이 결코 아니다.  소녀들 사이를 유영하며 그녀들의 면면을 관찰하는 움직이는 관찰자라는 점이다.


 



그가 바라보는  매일의 작은 차이가 쌓이며 삶의 숫한 굴곡들과 애절한 러브스토리를 만들어낸다.”  그 미세한 시간의 흐름 속에 수많은 사건들이 교차하며 모순같은 삶의 사건들이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급작스레 현재로 드러나는 모습에 독자들은 현기증나는 삶의 역설에 직면하게 된다.  그 지루한 반복의 시간 속에서 문득 새로운 안목이 선사되는 것이다.

 

이 소설은  고전 중에서 가장 여성성이 넘치는 텍스트라고 한다. 하여, 보옥을 중심으로 등장하는 여인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등장한다. 보옥을 따라 이생에 환생한 대옥의 사랑에서부터 기울어가는 가문의 틀을 다시 새우려는 보옥의 아내가 된 보차, 주종(主從)의 위계가 존재치 않는 보옥과 시녀들의 천진난만한 사랑의 이야기 등이 규중 여성들의 일상적 리듬과 함께 그 동선과 시선을 따라가며 섬세한 시간의 이야기 속에 빠져들게 한다.  그리곤 독자들에게 그 리듬 속에서 하나의 선명한 사건이 뚜렷이 솟아 오르게 한다는 것이다.   바로 시간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끝난 다음 돌아보니 그것은 한 가문의 흥망성쇠이고, 생명 존재의 무상성이기도하며, 우주와 연결된 생명의 기운에 대한 알아차림이고,  터럭 한 올의 인연이 맺어 준 우정이라는 값진 보배이다. 또한 움직이는 관찰자의 시선에 포착되는 것들은 닫힌 경계의 삶에서는 알아보지 못하던 것들이 바깥에서는 얼마나 쉬운 해결이 존재할 수 있는 지에 대한 새로운 삶의 탈주라는 단순한 진리의 깨우침이며, 삶이란 어떻게 인식되고 살아야 하는 것인 지에 대한 각성이기도 하다.

 

가부의 딸인 보옥의 누이가 황제의 첩이되어 원춘 귀비라는 귀인으로 친가 방문이 예정되자 꾸며진 것이 대관원이다.  그 화려함과 크기는 황족의 일원을 맞이하기 위한 가부의 기쁨이다.  그런데 저자는 부귀영화가 극대화된 가부의 영예의 장면에서 역전을 읽는다.  밤에 도착한 귀비의 행차를 밝히는 드넓은 대관원 조명의 화려함과 밤이라는 어둠의 대비이다.  화려함은 어둠으로 완성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번영하는 것은 언제나 폭력을 수반하고 그 사이에서 불만이 싹트며, 그 순간에 균열이 함께 존재하는 것이라고.  성대해질 때 쇠락을 염려하여 가득 차는 것을 예방할 수 있는 마음을 우리들은 항상 잊어버린다. 그리곤 결코 역전이란 자신에게 닥치지 않을 것이라는 듯 거들먹거리는 우매한 교만이 세상을 고통에 빠뜨리곤 한다.

 

저자가 알려주는 이 소설의 구조가 지닌 치밀성은 원저자 조설근이 이 작품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즉 총 120회 차로 구성된 소설은 어느 기점부터 접혀서 되돌아오는 대칭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5회 차에 미망(迷妄)이 서술되면 115회 차에는 깨달음의 이야기가 나오고,  101~102회 차에 귀신 쫓는 굿이 등장하면,  17~18회 차에 환희에 찬 대관원 낙성의 성대함이 나오는 것처럼 흥과 망, 모임과 흩어짐, 생과 멸이 순환하는 구조라는 것이다. 소설은 서사의 내용 뿐 아니라 구조적 배치까지, 그리고 현실과 그 경계를 오가며 한낱 꿈같기만 한 인생을 되살피게 한다.

 

소설 한 편에 세상을 다 담을 수 없다는 말이 있지만, 어쩌면 조설근은 한 줌 먼지에 불과한 세계를 허구의 이야기를 통해 모두 담아내려 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인간 세계의 모순과 다양성을 무수히 그려내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엄청난 인간들이 등장하고 저마다의 인간을 연기한다. 이 책을 읽고나면, 끝이라는 것, 무상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삶의 소중함과 즐거움과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한 깊은 깨달음으로 침잠하게 한다. 이 세계의 모든 것은 끝과 함께 시작된다는 소설이 관통하는 역설적 통찰, 이것 하나만으로도 이 책은 그 소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겠다. 아무래도 조설근이 살려낸 그녀들의 세계로, 소설 홍루몽의 세계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못 배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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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지기 2022-07-16 23: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홍루몽! 고등학교 때 공부하기 싫어서 읽었었는데 ㅋㅋㅋ 반갑네요
홍루몽 리뷰도 기대하겠습니다 :)

필리아 2022-07-16 23:30   좋아요 1 | URL
천천히 저자의 독해를 음미하면서 원작을 읽어 나가야겠어요. 지루함을 견디는 도움이 되어줄 것 같네요. 댓글 고맙습니다.~~

꼬마요정 2022-07-16 23: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옥은 사실 물의 성질이라 여성성의 구현으로 보고 읽어야 한다고 들었어요. 필리아님 글 읽으니 과연 그렇군요. 저는 완역본은 못 읽고 축약본만 봤는데 무척이나 허무했어요. 지금 읽으면 또 다를 수도 있겠네요. 리뷰 기대할게요^^

필리아 2022-07-17 10:05   좋아요 1 | URL
네, 보옥에게는 권위주의적 남성적 신체가 없다고 합니다. 보옥은 권위와 폭력의 세계를 싫어하지요. 그래서 그는 깊은 사랑을 하지만 소유와 지배를 알지 못합니다. 당대의 여성성에 코드가 맞추어진 존재랍니다. 이제 1권을 펼치려고 합니다. 전권을 모두 읽게 될지는 알 수가 없네요. 꼬마요정님 댓글 감사드립니다. 즐거운 휴일 되십시요~~
 
관광객의 철학
아즈마 히로키 지음, 안천 옮김 / 리시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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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시대를 표현하는 말이 무수히 생산되고 있다. 기계화 시대라는 표현처럼 생명력을 상실한 인간을 말하는가하면, 공동체주의와 자유지상주의가 서로 질서를 지배하는 패권을 가지려고 다투는 시대이기도 하며, 압도적 불평등의 시대라고도 한다. 이러한 것들은 이 시대가 안고 있는 갈등과 충돌을 상징하는 언어들이다. 결국 세계는 혐오와 적대의 발화가 만연한 곳이 되고, 사랑, 연민, 동정심, 배려 등의 말을 쏟아내며, 타자를 소중히 하라는 이젠 지겹기 짝이 없는 도덕의 가면을 쓴 공허한 문장만이 울려대고 있다.

 

한국사회의 구성원들 뿐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은 이처럼 타자와 함께 하는데 지쳤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타자라는 말 또한 시비꺼리가 된다. 타자관()도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저마다의 이데올로기를 발하며 갈등 촉발의 언어가 될 지경이다. 이 책의 제목에 있는 관광객이란 바로 이 타자라는 이념적 논란을 피하기 위해 채택된 궁여지책의 언어이다. 그러니 이 저술은 이방의 지역을 놀러 다니며 일회적 시선을 즐기는 사람들을 분석 통찰하는 것과는 멀어도 한참이나 먼, 인간과 세계에 대한 철학적 논고이며 비평서라 할 수 있다.

 

저자 아즈마 히로키(東浩紀)’는 게이오, 와세다등지에서 문화비평, 과학철학 교수를 지낸 젊은 학자이다. 그가 개념어까지 바꾸면서 철학을 논하려는 까닭은 오늘의 인간들에게 내면화된 인간관이 새로운 세계를 사는 인간관이나 사회관과는 동떨어진 낡은 것, 많은 한계를 지닌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출발된 것이다. 인간관을 새롭게 갱신하여 연대, 공존할 수 있는 방법론을 찾겠다는 것이다.

 

관광객이란 누구인가?

 

관광객을 정의하기 전에 관광이란 무엇인가부터 알아야 할 터이다. UN세계관광기구는 일상 생활권 밖에서 여행을 하거하거나 체류하는 사람의 활동으로, 방문지에서 보수를 받는 활동을 하는 것과는 무관한 모든 활동이라 정의하고 있다. 한편 관광학 교과서들은 즐기기 위한 여행이라고 어떠한 사유도 자극하지 못하는 문장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대다수의 사회학자들이 행락같은 쓸데없는 현상이라는 인식처럼 관광에 대한 지적 경시를 암시한다. 이렇듯 관광이란 말에 대한 경시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불필요성의 관점이 내재되어 있다. 저자는 바로 이러한 관점이 이 세계가 필요로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부터 사유를 시작한다.

 

관광은 원래 갈 필요가 없는 장소에 기분에 따라, 볼 필요가 없는 것을 보고, 만날 필요가 없는 사람을 만나는 행위다.” -36

 

발터 벤야민이 주목한 19세기 파리의 파사주를 거니는 산책자의 시선이나, 18세기 영국 런던 만국박람회의 유리와 철골로 만들어진 수정궁을 들뜬(우연성) 마음으로 산책하는 관광객의 역사를 반복하지는 않겠다. 다만, 관광객이란 이처럼 산업과 기술 지원을 받은 새로운 계급이 모이는 새로운 소비공간을 산책하는 들뜬 기분의 사람들이라는 점에 착안하면 바로 이점에 그 한계와 가능성을 인식할 수 있다. 이들에게는 진지함과 경박함의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오늘의 첨예한 구분선을 불식시키는 그러한 존재들이라는 점이다. 이의 대척점으로 테러리스트를 예시하고 있는데, 마치 이들은 진지함을 대표하는 존재들로 보인다. 그러나 오늘의 테러리스트가 어떤 명료한 정치적 분파의 이데올로기를 지녔는가라는 물음에 우리는 선뜻 대답을 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오늘의 테러리스트라는 존재는 조직적 배경 없이 고독하게 범죄를 준비하는 외로운 늑대((lone wolf), 혹은 홈그로운 테러리스트(homegrown terrorist)’에 가깝다. 사실 이들의 동기를 진지하게고찰하면 헛돌 수밖에 없다는 지적처럼, 동기를 파고들면 그 천박함과 진지함 없음에 당혹케 될 것이라는 것이다.

 

테러리스트는 어쩌면 관광객에 가까워진 것이라는 점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소비하고 가는 무책임함, 방문 장소의 모든 사물이 단지 상품이고 전시물이며, 중립적이고 무위적인, 즉 우연히 시선에 들어 온 대상일 뿐이다. 즉 관광객은 벤야민의 산책자와 많이 닮아있다. 여기서 중요하게 들어오는 하나의 요소가 있다. 관광지(공간, 장소).

 

관광객은 관광지의 실재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자신들이 좋아하는 이미지만을 오려 담는다. 관광지의 주인인 본래의 주민들은 처음에는 관광객의 무책임성에 화를 내고 미워하지만 어느 새 그들이 없으면 삶의 영위가 곤란해지는 경우에 처해지게 되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된다. 관광객과 주민들은 본래 교류하려는 의지도 없으며, 영향을 끼치려는 의도도 없었지만 두 영역은 상호교호하는 관계에 이미 빠져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경박함이 진지함과 그 경계도 없이 이루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전례없는 메커니즘을 보이는 SNS의 특정 피드에 좋아요가 폭증하는 현상과 유사하다. 이제 개발되는 모든 장소는 SNS의 피드처럼 관광객의 시선을 내면화한 개발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제 타자가 있는 사회를 생각해 보자.

 

근대적(20세기) 인간관

 

설혹 고통과 슬픔이 있더라도 모두 의미가 있다며, 삶의 현실 그자체야말로 최선(가장 좋은 것)이라 주장했던 라이프니츠를 비판하기 위해 집필된, , 인간, 이성, 문명에 대한 유럽의 상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 최초의 상상적 여행을 통해 사고(思考) 실험을 감행한 볼테르의 캉디드로부터 시작하여,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경유하여 헤겔과 코제브, 칼 슈미트, 한나 아렌트가 주장한 근대의 인간관을 성찰한다.

 

여기서 대립되는 두 유형의 인간을 만나게 되는데, 하나는 인간의 동물화를 지적한 코제브의 성찰이다. 그는 1970년대 이후, 소위 포스트 역사의 시대라는 오늘의 세계를 사는 현대인에 내재된 인간관으로 정크 푸드와 오락에 둘러싸여 정치도 예술도 필요로 하지 않고 쉼 없이 제공되는 신상품이 주는 쾌락에 자족하는 소비자라는 인간의 동물화를 설명한다. 이와 대척으로 인간의 당위를 설명하는 인물들로 슈미트와 아렌트가 각각 내세운 인간의 조건을 살펴본다. 슈미트는 정치적 인간을 친구와 적으로 이항 대립관계로 바라보았으며, 이는 헤겔의 인간관을 계승하는 것으로, 다시 말해 사람은 국가에 속해 국민이 되었을 때 비로소 특수성과 보편성을 통합하는 정신사적 존재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 성숙은 공동체에 속할 때 타자와의 일원이 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에는 성숙과 미성숙이라는 구별이 있고, 곧 배제가 있다는 의미이다. 칸트의 영구평화론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 또한 타자에 대한 관용은 중요하나 그 관용의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태도도 성숙해야 한다는 타자론을 주장했기에 나와 너라는 포함과 배제의 명료한 구별짓기와 다른 것이 아니다. 아렌트 역시 인간의 조건에서 행위자의 고유성이 사라진 노동으로 인간의 활동이 대체됨으로써 활동의 본질인 공공의식, 타자를 상실한 인간으로 현대인을 바라본다. 우익의 슈미트나 좌익의 아렌트 모두 대립의 이데올로기를 말한 듯했지만 이 둘이 궁극에는 놀랍게도 같은 인간관을 말했음에 우리는 놀라게 된다. 이것이 20세기의 인문학, 오늘의 우리들에 내재한 인간관이다. 문제는 이들의 인간관은 항상 내부와 외부로 분할하는 이항 대립이 해체되지 못했고, 여전히 인간의 삶과 의식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는 것에 있다.

 

새로운 인간관에 대해서

 

칸트와 헤겔은 정치적 의식이 경제적 의식을 억제하며 질서를 형성하는 것이 인류의 삶에 옳은 모습이라 했다. 다시 말해 글로벌리즘, 경제적 교류와 욕망의 이동은 억압되어야 하는 것(물론 조건적으로 관용을 내세우긴 했지만 말이다.)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시민의 욕망이 국경을 넘어 연결되어 있지 않은가? 저자는 이 지점에서 오늘의 세계를 동물적 욕망이 들끓는 탈정치화된 지구화의 욕망과 사유의 장소, 성숙한 인간의 공동체인 국가로서의 내셔널리즘이 반목하는 두 이질적인 원리가 공존하는 갈등의 세계로 이해하고 있다.

 

이를 ‘2층 구조의 시대라 부른다. 인간의 층과 인간 아닌 것의 층, 두 층이 적대적으로 공존하는 세계로서. 인간으로서 독립성을 잃고 하나로 연결된 신체위에 다른 얼굴만 있는 기이한 신체를 지닌 존재로서, 욕망은 연결되어 있으나 사고는 분리된 시대로 말이다. 자유지상주의는 헤겔과 슈미트의 이데올로기에 가깝다. 이는 대단히 모순적인 것이 하나의 신체 속에서 공존하는 것이다. 내셔널리즘이라는 내 편과 네 편을 갈라치기하며, 동물적 욕망의 소비자가 하나의 몸체를 이룬 괴물로서 자유지상주의를 바라보게 된다.

 

이러한 모순적 기형아들의 평행적 갈등과 적대를 통합하려는 사유를 아즈마 히로키가 처음으로 시도하는 것은 아니다. ‘안토니오 네그리제국을 통해 다중이라는 새로운 인간관을 생각했다. 그러나 저자는 네그리가 다중의 활동을 직접 주권과 접목시킬 메커니즘을 고작 에테르라는 신비로운 요인에 맡겨버렸다고 비판한다. 아름답지만 아무런 전략도 없는 낭만주의적 타령에 불과하다고. 그러면서 비판 계승한다. 우편적 다중!’, 우편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다중이다. 배달의 실패라는 예기치 않은 소통이 일어날 가능성을 함축한 어떤 물건의 지정한 곳을 향한 배달시스템으로서의 의미를 통해 연대없이 소통하고 사적인 욕망에서 공적인 공간을 연결, 변화시킬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서 인간을 상정하는 것이다.

 

오늘, 현대인을 통찰하는 저자의 시선은 신선하고 다각적이다. 정보산업이라는 새로운 프론티어로서 자본주의 플랫폼을 바라보는데, 사이버 스페이스(Cyber Space)의 정치적 함의를 읽어내고, 이것이 인간 주체를 분열시키는 현대 사회의 본질임을 지적한다. 인간이 가상공간으로 분신(分身; 아바타)이 되어 들어가서 가상의 공간에 독을 쏟아낸다. 그리곤 섬뜩한 존재가 되어 본인에게 달라붙고 소통의 본질까지 변질 시켜 혐오와 가짜가 일상의 경험이 되는 것을 통제하지 못한다. 오늘의 정보사회의 주체는 이처럼 섬뜩함에 둘러싸인 주체라는 것이다. 새롭게 이중화된 현대적 주체인 오늘의 사람들은 어떻게 이 세계와 관계를 맺어야 하겠는가?

 

공동체주의와 자유지상주의, 개인과 사회의 연결 - 상상적 가족

 

장 자크 루소의 일반의지에 대한 역설적 독해는 왜 관광객을 사유해야 하는지를 발견케 한다. 인간은 인간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간은 현실에서 사회를 만든다. 달리 말해 누구도 공공성 따위를 갖고 싶지 않지만 누구나 공공성을 갖는다.” 루소의 이 역설은 모든 인문학의 근저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할 결정적으로 중요한 인식이다. 이는 관광객은 사회 따위를 만들 생각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를 만들고 마는 존재라는 저자의 이해를 관통한다.

 

항상 심각한 정치적 문제가 가로놓여 있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갈등이, 오가는 수많은 관광객으로 관계의 악화가 억제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실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과 사회의 성숙과도 무관하며 외교적 의지와도 무관하게 단지 관광객 자신의 이기심과 여행업자의 상업정신에 이끌려 오가는 것, 이것이 당사자들의 평화조건이 되는 것이다. 관광객의 일반의지, 우편적 연대라는 우연적 소통이 빚어내는 평화와 약한 연결의 모습이다.

 

아마 저자가 인유(引喩)하는 도스토엡스키의 작품을 통한 상상적 가족, 일종의 의사(擬似)가족(결사)을 새로운 인간관과 인간사회로 그리고 있는 것은 이 분열된 인간 정신을 연결하고 연대를 사고하는 출발지점이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인간이어야 하는지, 어떤 사회를 꿈꾸는지 이해하여야 한다. 이러한 상상력, 반성적 사유(성찰)를 하지 않는다면 결코 좋은 사회를 자식들에게 물려 줄 수 없을 것이다. 지하생활자의 수기속 화자는 세계의 위선을 끊임없이 지적하며 자기 학대의 쾌락에서 빠져나올 생각이 없는 마조히스트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악령의 지시를 내리지만 정작 혁명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사람들의 욕망을 조정하는 테러리스트 스타브로긴은 자기가 없는 전형적인 사디스트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자기를 뛰어넘는 세계의 필연밖에 없는 텅 빈 자아의 존재들이다. 그들에겐 타자가 없다.

 

이것은 지금의 공동체주의와 자유지상주의에 타자 원리가 없는 것과 동일한 선상에 있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오늘의 세계에는 타자에게 관용을 지탱할 철학이 없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문자그대로의 관광객이 되자는 것이 아니라 관광객의 본질을 우리의 인식적 주체로 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미완의 작품으로 남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도스토엡스키가 완결로서 속편를 말한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제시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인 알료샤 만세를 외치는 어린 콜랴의 외침이 상징하는 것이다. 이들의 가족으로서의 결합, 그 우연성과 확장성을 내재한 우편적 연대, 관광객인 가족, 아이들로 둘러싸인 불능적 주체만이 세계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자신들의 정체성을 돌아보아야 한다. 가족의 이념성과 그 가능성을 철학이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저자의 제언은 기나긴 근대의 인간관을 해체하고 새로운 인간과 사회는 어떠해야 할지를 숙고하게 한다. 물론 이 저작의 주장에 모두 동의 할 수 없는 지점도 있을 것이다. 아렌트, 네그리의 비판이나, 헤겔 철학에 대한 시선은 많은 반박 가능한 여지를 지니고 있다. 또한 주체에 대한 이원화를 통합하려는 철학적 야망이 저자가 처음 시도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즈마 히로키의 인류 연대와 평화를 향한 사상적 연결의 시도는 탁월한 지적 성찰과 탐구의 노력이 배어있는 역작임을 폄하할 수 없다. 인간사회는 어쩌면 들뢰즈의 지적처럼 두 개의 상이한 권력체제를 항시적으로 생성하는 불평등의 체계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 불평등의 체계를 당위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저 방치한다면 극단적 불평등의 세계로 이행되고 말 것이며, 그것은 곧 인류 자멸의 길일지도 모른다. 난삽한 철학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쓰며, 익히 잘 알려진 문학 작품들을 통해 독자 대중에게 함께 사유할 것을 제안하듯이 친근한 글로 쓰인 노작임을 다시금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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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람들의 생각에는 명령이란 것에 대해 어떤 숙명적인 굴종의 정신이 보입니다.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 수행하는 행위자는 그 명령의 선악과 관련하여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어떠한 관련성도 없는 별개의 사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요? 수행 행위와 행위자를 구분할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생각해보면 이러한 텅 빈 자아, 진정한 사유가 불가능한 이들의 개념 없음과 망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우선 한국사회에는 이와 관련한 아주 뚜렷한 오래되지 않은 사례가 있습니다.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과 그의 심복인 장세동은 이를테면 명령자와 수행자의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수없는 증인들과 증거에도 불구하고 수행자는 자신이 저지른 범행을 결코 자인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짓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는 한나 아렌트가 전범 재판에서 나치의 유태인 처형 운반 책임자였던 아이히만의 태도로부터 발견한 것, 즉 명령 수행자가 지니는 인간 실존성을 결여한 사유의 전적인 부재, 즉 사유의 진정한 불가능성의 지대인 악의 평범성과 동일한 선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이히만은 어떠한 죄책감도 없으며, 단지 명령을 성실하게 수행했을 뿐이라고 합니다. 나는 유태인을 저주하는 사악하고 악의 가득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이죠. 자신은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명령과 명령 수행자의 관계에서 그 책임에 대한 짧지만 위대한 기술(記述)이 있습니다. 불가리아 태생의 스페인계 유대인인 20세기의 위대한 사상가인 엘리아스 카네티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이죠,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내가 그랬을 리 없다.’며 자신들이 한 짓의 흔적을 마음속에서 찾으려 하지만 그것을 찾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명령 수행자가 자신들의 행동으로부터 이처럼 놀라울 정도로 영향을 받지 않으며, 심지어 죄의식을 전혀 느끼지 않을 뿐 아니라 후회도 마음속에 새김도 없는 이유입니다. 왜 인간의 마음에 이런 양상이 나타나는 것일까요? 명령의 본질 때문이랍니다. 명령은 그 명령을 받아들이고 수행해야 하는 사람에게 가시를 남깁니다. 이 낯선 이물질인 가시가 마음속에 새겨집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낯선 것, 가시로부터 벗어나려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가시에게 명령이 지닌 죄책감을 떠맡깁니다. 즉 자신이 아니라 가시에게 명령이 지닌 불의나 부당함을 넘기는 것이지요, 결국 가시야말로 진짜 범죄 행위자가 되는 것입니다. 카네티는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낯설고 이질적인 명령일수록 죄책감은 자아와 분리, 더욱 독자적인 된 가시의 것이 되는 것이라고 말이죠. 이렇게 죄의식과 자아가 분리되어 있기에 악으로서의 명령을 수행한 자들은 한결같이 행위와 자신을 일체화 시키지 못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명령에 따라 행동했던 사람들은 스스로 죄가 없다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건 공동생활을 하는 인간들에게 심히 위험한 요소입니다.

 

인간에게는 진정 부당하거나 불의한 명령과 대결하고 그 횡포를 뿌리칠 수 있는 용기가 없는 것일까요? 단지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것만이 유일한 것일까요? 아마 어느 누구도 이처럼 명령의 무조건적 수행만 하게 된다면 그런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요? 공포와 죽음만이 휩쓰는 독재 권력이 지배하는 지옥 아니겠어요?

 

한국 작가 천운영생강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고문경관 이라는 인물이 등장하지요. 이 자는 권력의 시녀가 되어 대공수사기관에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고문기술을 발휘하여 민주투쟁을 하는 학생들, 노동자들을 짐승처럼 다루는 독보적인 백정이 됩니다. 그런데 이 자는 대통령과 국가의 안위를 위한 충성스런 명령 수행자였을 뿐이라며 자신은 정의를 수호한 일꾼이라고 주장합니다. 특히 무고한 청년, 시민들을 무심하고 죄의식 없이 고문, 살해하며 자신과 자기 가족의 안위에 대해서는 끔찍한 인간인 것이죠.  고문기술자 이라는 인간은 카네티가 말하는 가시에 죄의식을 저당 잡힌 것이죠. 아마 자신의 생존을 위한 인간의 무의식적 처분이었을 거예요.

 

그들은 모두 똑같은 목소리로 항변합니다. 알지 못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조직에서 시키는 일, 권력이 명령한 일을 수행하는 것, 그것이 설혹 불의이고 위법이며 반인륜적일지언정 그런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 알려 하지 않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아니 그러한 구분에 대한 인식조차 이 사회는 요구치 않았고, 권력을 향해 달려가도록 채찍질하는 것이 이 사회 아니었느냐고 말입니다.

 

아이히만도, 고문기술자 안도, 장세동도, 이들 모두 그의 가족들과 친지들에게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친절하기까지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단지 명령권자의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수행이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핍박하며 심지어 죽음에 내몰기까지 했습니다.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은 그 어떠한 범죄행위도 스스럼없이 저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천운영의 소설에서 명령의 맹목적 수행자는 천박하기는 하지만 결코 어리석은 인물이 아닙니다. 아이히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한결같이 사유하는 인간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타인에 공감하지 못하는 무능력은 오히려 두 번째일 만큼 사유의 진정한 불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변질되는 것입니다. 명령은 결코 숙명이 아닙니다. 결코 복종하여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역사는 인간을 명령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저항의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명령이 주어졌으니 안 할 수 없는 것이라는, 더구나 자신의 삶의 지속성을 위해 이행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로는 이 세상을 결코 지탱 할 수 없습니다.

 

마치 지금의 한국사회가 누리는 민주주의가 당연한 것처럼 인식될지 모르겠지만 당대의 많은 젊은이들과 노동자 시민들의 피와 죽음이라는 명령의 거부, 저항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굴종을 요구하는 명령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시는 한 번 슬쩍 치면 떨어져 나가는 그러한 것이 되는 명령이 되어야 합니다. ‘()과 사고(思考)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한나 아렌트의 말은 결코 반박될 수 없는 진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맹목적 추종은 모든 것을 퇴행시키는 전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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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2-07-06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중과 권력이 새단장해서 나왔군요!

필리아 2022-07-06 09:48   좋아요 0 | URL
지금 판매되는 책이 2010.10 개정판이네요. 훌륭한 저작이지요. ^*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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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 신기한 기적처럼 작동하지만 이해하는 사람은 산 자와 죽은 자를 막론하고 단 한 명도 없다. 우리 정신은 양자 역학의 역설과 모순을 감당할 수 없다. (...) 만지작거리고 노리개로 쓸 뿐 결코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 253

 

알지 못하며 이용하는 것이 어디 위의 문장처럼 양자역학 뿐 이겠는가? 리볼버 권총을 손에 쥔 세 살 아이 같은 아찔한 위기의 장면들이 인간의 역사를 가로지른다. 책은 화학, 물리학, 수학이 문학적 예술의 언어로 버무려져 그 주체였던 인물들을 통해 욕망의 우연적 과실(果實), 이 세계에 대한 이해를 묘사해보려는 집요한 탐구의 역사를 빚어내고 있다. 그것은 인간 정신의 한계, 지적 파열의 순간에 대한 성찰이다.

 

다섯 편의 픽션+논픽션으로 구성되어 바로 오늘의 인간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정신, 그 거대한 전환적 이정표가 되었던 과학적 사건과 인물들을 중심으로 천재와 광기의 영역을 파고든다. 그 시작은 나치의 강제수용소 벽돌을 물들인 프러시안 블루로 불렸던 고운 파란색, 치명적 독가스인 치클론 AB가 남긴 흔적이다.

 

이것은 18세기 고급의 화려한 안료를 얻으려는 실험의 부산물이다, 극미량의 황산을 입힌 스푼으로 프러시안 블루를 휘저어 탄생한 비소계 안료, ‘에메랄드 그린은 나폴레옹 숙소에 칠해짐으로써 성분의 유해성을 알지 못했던 황제와 그의 가솔들이 서서히 초토화되었음은 물론이다. 분명 창조적 노력의 결실이지만 알지 못하는 사용이 무엇을 초래하는지에 한 사례일 것이다. 첫 편인 프러시안 블루는 이처럼 화학 물질의 발견과 추출을 둘러싼 영광과 분노의 역사이다.

 

오늘날 인류의 먹거리 증산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 공기 중 질소 채취에 성공한 유대인 화학자 프리츠 하버는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이다. 천연 비료를 대체케 한 이 연구는 그에게 노벨상을 선사했지만, 1차 대전 최초의 독가스 공격이었던 이프르 전투에서 화학전을 지휘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 2세로부터 전과를 인정받아 전쟁부 화학부서 책임자가 되기도 했으며, 2차 대전에는 자신의 활약으로 탄생한 시안화물 살충제, 즉 치클론 가스가 동족을 살해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인간을 산업적 규모로 몰살할 수단을 고안하고 우쭐대던 과학 맹신자의 뒤늦은 죄책감을 읽는 것은 안타까움이다.

 




슈바르츠실트 특이점, 심장의 심장, 우리가 이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이들 세 편은 인간 지성의 한계, 그 지적 파열의 지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공통의 주제를 살필 수 있을 것 같다. 슈바르츠실트 특이점은 독일의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인 카를 슈바르츠실트 무한한 중력으로 공간이 휘어져 스스로를 감싸고 우주의 나머지 부분과 영원히 단절되는 맹점, 불가지(不可知)”의 발견에 대한 이야기다.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 원리를 발표하고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은 시점인 19151222, 전쟁의 참호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든다. 일반 상대성 방정식의 정확한 해()를 기록한 흙먼지 묻은 편지의 주인공, 이 천재 수학자 슈바르츠실트는 특이점’,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억누를 수 없는 힘으로 그의 모든 생각에 어둠을 드리우는, 형태도 차원도 없는 공허를 본 것이다. 그것은 한번 넘으면 무지막지하게 끌려들어갈 수밖에 없는, 어떤 표시도 경계도 없는 찰나의 지점이다. 빠져나갈 수 없는 심연, 훗날 학계는 이를 슈바르츠실트 특이점이라 명명한다. 이것은 저자 벵하민 라바투트에 의해 이러한 물음을 낳는다.

 

물질이 이런 종류의 괴물을 낳는다면 그것은 인간 정신과도 상관관계가 있을까?

인간 의지가 충분히 집중되면, 수백만 명의 정신이 하나의 정신 공간에 압축되어

하나의 목적에 동원되면 특이점에 비길만한 일이 벌어질까?” -71

 

메타버스, 인공지능, 오늘의 세계는 자신들이 지향하는 것이 도달했을 때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 못함에도 마치 천상의 낙원이 열릴 것처럼 질주한다. 인간 정신이 이렇듯 압축 동원되면, 그 선, 특이점을 넘어섰을 때 바라던 인간의 희망이 성취될까? 특이점 너머의 세계는 암흑, 공허, 영혼의 그림자만 있을 뿐이라고 그토록 신봉하는 수학, 물리학이 가리키고 있지 않은가? 인간의 이 무모한 질주의 동력인 이기적 욕망, 자본이란 신의 추구는 분명히 바른 길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심장의 심장역시 슈바르츠실트의 심연과 그리 멀지 않다. 아마도 1958~1973 세대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명석한 수학자였던 모양이다. 수학의 거성으로 불리는 알렉산더 그로텐디크의 탁월한 추상 능력이 발견한 수학적 우주의 핵심에 자리 잡은 기이한 실체, ‘심장의 심장에 대한 문학적 단편이랄 수 있다. 희미하디 희미한 미광 말고는 아는 것이 없는, 서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무수한 이론들을 묶을 수 있는 은밀한 뿌리를 밝혀내려 했던 인간의 돌연한 도피와 은둔의 삶을 지펴내고 있다. 그는 대체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소외된 자들에 대한 아낌없는 베풂과 단식과 헐벗음의 길을 걸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슈바르츠실트와 같이 그 공허의 심연을 보았기에 동료 인간에게, 인류에게 보내려했던 연민 아니었을까?

 

우리가 이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는 이 책의 하이라이트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이젠베르크슈뢰딩거의 우주 입자, 원자 내부 현상을 지배하는 규칙을 둘러싼 갈등과 마침내 배타와 적대와 동시에 상보적인 그 불가해의 세계에 대한 선언, 우연을 가지고 노는 천수(千手)여신의 변덕에서 탄생한 놀랍고도 희한한 이 세상이라는 결론에 이르는 결정론 종말의 이야기다.

 

양자 물체에는 본질적 성질이 전혀 없다. (...) 측정되기 전에는 어떤 성질도 없다.

(...)입자를 실재하는 대상으로 만드는 것은 측정 행위다. - 223~224

 

어느 시인의 말처럼 과학과 문학의 언어가, 우리 의식의 뿌리에 질긴 방식으로 얽혀있다고 느꼈듯이 이 단편은 행렬과 파동의 방정식이 두 천재 물리학자의 감성적 직관, 그 원초적 삶의 감각들과 조우하며 아름다운 문학의 언어들로 번역되어 세계의 근원, ‘실재라는 모호하고 불가해한 인간 한계에 대한 겸허한 이해로 안내한다. 19271024일은 어쩌면 인류의 사상적 거대한 전환점이라 할 것이다.

 

이날, 폴 디랙, 볼프강 파울리, 막스 플랑크, 마리 퀴리. 헨드릭 로런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 닐스보어... 최고의 천재들이 한 자리에 모여, 물리학은 실재가 아니라 우리가 실재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에만 관여해야 한다며 전통과의 가차 없는 결별을 선언했던, 훗날 코펜하겐 해석으로 불리는 인간 사고의 대혁명이 있었던 날이기 때문이다. 하이젠베르크는 말한다. 과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객관적이고 초연한 관찰자로서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과 맺는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오늘의 과학이 치달으려하는 곳이 어디인가를 윤리적으로 성찰토록, 우주 자연, 인간이라는 자연과의 관계를 잊지 말라는 주문 아니겠는가?

 

책을 마지막으로 장식하는 단편 밤의 정원사는 아름다운 한 편의 에세이에 가깝다. 앞 선 네 편의 글들을 포괄적으로 정리하는, 그러면서 오래되어 썩어가는 할머니가 아끼던 한 그루의 나무와 훼손되지 않고 듬성듬성 남아있는 작은 숲과 호수가 있는 자신의 정원, 한 때 수학자였던 밤의 정원사와의 나지막한 대화를 들려준다. 밤의 정원사는 수학이 우리 세상을 무시무시하게 변화시키리라는 돌연한 깨달음과 함께 은거하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우리 안에 있는 인간성의 진짜 의미를 점차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악화되는 세상에 대해서.

 

하이젠베르크도, 슈뢰딩거도 아인슈타인도, 그 어느 누구도 인류 삶을 지배하는 많은 수식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세계를 이해하는 인간 존재가 더는 없다는 말이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 가뭄, 질병, 역병의 공격에서 살아남은 레몬 나무가 어떻게 죽는지 아느냐는 물음이 등장한다. 마지막 봄이 되면 거대한 꽃송이가 대기에 향기를 가득 채우고, 엄청난 열매를 맺고는 그 과잉의 결실로 쓰러져 죽는다는 것이다. 이 메타포는 우리에게 심원한 울림을 전달한다.

 

죽음을 앞둔 풍요, 이 야릇한 광경, 과숙(過熟)의 과시는 오늘의 인류를 개체들을 향한 자문의 요구이기도 할 것이다. 이 책은 과학 천재들,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자기 욕망의 집요한 추구와 결실로서의 파괴와 죽음, 낙천적 희망과 무지의 그림자 지대를 거닐며 인간 인식의 한계를 가히 최고의 미적 언어로 그려낸 물질계의 승화된 문학예술이요, 정신사의 걸작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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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소사(Xosas)족의 자멸

-   집단의 맹목적 광신과 권력의 교활함에 대해서



인류의 위대한 정신, ‘엘리아스 카네티가 쓴 군중과 권력은 군중의 물리학, 권력의 정신분석에 대한 독보적인 역작이다. 이 책의 한 장()군중의 역사에는 1856년에서 1857년에 발생한 남아프리카의 한 부족 전체가 최면에 걸린 듯 자멸을 향했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이 이야기가 내게 준 강인한 암시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현실과 너무도 닮아있는 낯익은 광경이라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적, 혹은 먹잇감을 손에 넣은 권력은 세계가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며, 자신 이외의 그 어떠한 존재도 미물, 벌레, 음식거리 이상이 되지 못하기에 부동의 오만함을 즐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란 군중의 맹목적 추종이라는 우매함과 반대자에 대한 거리낌 없는 죽음의 실행이며, 군중 전체로 권력의 욕망을 확산 주입시킬 반복된 소문을 지속할 매체와의 동거이다.

 

사실 한국 사회는 조중동 황색 미디어를 비롯한 기득권 박탈에 반감을 가진 매체들이 5년 내내 끈질기게 반복한 흑색선전과 왜곡이 광범위해져 결국 몽매한 군중 전체에게 심리적 진실로 무의식적으로 안착시켜 온 것이 작금의 결과일 것이다. 이야기의 실질적 내용에 앞서 군중에 대해 보수적 관점에서 군중의 심리를 파헤쳤던 귀스타브 르봉의 정의를 잠시 살피고 가기로 한다.

 

르봉은 군중은 예외 없이 정신적으로 무척 열등하다.”고 강력하고도 확신에 찬 어조로 단언했다. , 군중에게는 의식을 지닌 개성은 사라지고 개인의 감정과 생각이 집단화되어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하고, 매우 뚜렷한 집단정신이 형성된 인간의 무리라고 말이다. 군중 구성원은 모두가 지닌 평범성을 공유하며, 독자적 의식이 사라지고 의지력과 분별력을 잃는다. 그리곤 무의식 활동의 우세, 감정과 생각을 똑같은 방향으로 유도하는 암시와 전염, 암시받은 대로 즉시 행동하려는 경향(1)을 가진다고 말했다. 이러한 앎을 전제로 이야기로 들어가 본다.

 

18565월 크소사(Xosas)족의 한 어린 소녀가 물을 깃기위해 집 주변에 흐르는 시냇가에서 마주한 이야기로 시작해보자. 소녀는 낯선 사람들을 발견하고 부족의 예언자인 삼촌 움흘라카자에게 시냇가의 이야기를 전한다. 움흘라카자는 시냇가에서 낯선 이들로부터 어떤 의식을 수행할 것을 요구받는데, 그것은 죽은 자들을 위한 희생 제물로 황소를 받칠 것이며, 나흘 이후 자신들에게 다시 오라는 명령이다. 이 최초의 명령에는 어떤 목적도 발설되지 않은 맹목적 실행의 완수라는 권위적 명령만이 있는데, 마을의 예언자는 이를 저항 없이 수행한다.

 

나흘 후, 명령대로 다시 찾은 시냇가에서 움흘라카자는 낫선 이들 중에서 몇 해 전 죽은 형을 발견하고, 나머지 사람들도 부족의 누구였는지를 알아차린다. 죽은 자들의 혼령이다. 죽은 자들은 비로소 목적을 말하는데, 크소사족을 돕기 위해 바다 건너 저편에서 왔으며, 무적의 힘으로 영국인을 몰아내겠으니, 움흘라카자는 부족의 추장들과 그들 사이의 중개자 노릇을 하여야 하며, 이 조언을 받아들일 경우 놀라운 이적들이 발생하리라 말한다.

 

영매(靈媒)가 되어 움흘라카자는 마을 사람들에게 살 찐 소들을 죽여서 먹어야 한다고 말하고, 영계(靈界)로부터 전해진 이 이야기는 크소사족 사이에 급속하게 퍼진다. 소문을 잽싸게 나르는 것은 인간의 오래된 유별난 특성이다. 마치 자신이 제일 먼저 정보를 손에 넣었음을 과시하려는 듯이. 부족의 대추장 크렐리는 몹시 기뻐했다. 이것이 크렐리의 공작이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대추장은 지체 없이 혼()들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고, 부족의 각 추장들에게 영계에서 전달된 명령에 조력할 것을 요청한다. 부족의 미래에 대한 예언, 죽은 자들의 입을 빌려 제시된 비전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즉 입증을 요구할 대상이 없기에) 자기 생명의 안전을 위협받는 상태에 몰리게 된다. 군중은 예외 없이 멍청하다는 르봉의 말을 입증하듯 전 부족민들은 광기에 휩싸여 자신들의 가축을 도축하고 한 톨의 곡식마저도 모조리 없애기 시작한다.

 

이때 가세하는 상황의 묘사가 있다. 예언자를 통한 계시들이 신속하게 늘어갔다.”는 것이다. 오늘로 말하자면 황색 미디어들의 줄기찬 반복적 주입이다. 신들린 수많은 사람들은 시냇가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를 인간사를 주관하는 혼령들의 목소리라 선언하며, 점점 많은 소들이 살육되고 희생물은 계속 늘어난다. 이러한 여론 몰이의 숨겨진 의도를 간파하거나, 이에 동조하기를 주저하는 이들은 어디에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깨달은 자들은 탈출하거나 마지못해 동조하거나를 선택하여야 한다.

 

이 요구는 살상과 죽음의 요구라는 자기 실존의 위협이라는 실체를 띠고 있음에도 부족민에게는 위대한 인물들과 현명한 인물들이 부활하여 성실한 후손들의 기쁨과 함께 하리라(2)는 낙관적 희망의 기대로 인식될 뿐이다. 의지력과 분별력을 상실한 군중의 정신은 자신의 오염을 지각하지 못한다. 바로 광기이다. 문명을 떠받치던 도덕적 세력이 영향력을 상실하면 분별력 없고 난폭한 군중이 등장해서 그 문명을 해체한 것이 인류 역사(3)라고 했다.


 



권력은 이러한 역사적, 심리적 인식을 꿰뚫고 있다. 혼령들이 약속한 예언의 날이 다가올 때까지 공식 자료는 “1857년 한 해 동안 크소사 지역의 인구가 105,000명에서 37,000명으로 줄어들어, 대략 68,000명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사건 기록에는 권력을 손에 넣은 자의 잔혹, 오만, 경멸(), 탐욕, 교활함이 모두 담겨있으며, 군중의 특성, 즉 군중이라는 다수가 지니는 힘의 과신과 그로인한 본능의 억제로 풀려난 야만성, 그리고 소문의 무지막지한 전염성과 파급력, 피암시성과 최면성이라는 맹목적 믿음의 상호작용이 불러오는 상승작용으로서의 자기 파멸성이다.

르봉이 군중 심리에서 열거한 군중의 감정과 도덕성중 몇 가지만 더듬어 보자. 군중은 순간에 일시적으로 받는 자극의 영향 아래 있을 뿐이며. 비판적 사고능력을 상실하고 모든 것을 무작정 맹신한다.” 이러한 군중의 상상력으로 사건이 왜곡되기 시작하면 전설이 만들어지고, 사소한 사건조차 곧 커다란 사건으로 변형된다. 논리적으로 아무런 관련 없는 일련의 새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군중은 일관성을 따질 줄 모르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반복되는 이러한 집단 환각 메커니즘이란 항상 이런 식이다.

 

이 이야기에는 많은 정치적 앎에 대한 교훈이 있다. 화려한 언어적 수사로 꾸며진 명령에는 음흉한 목적이 있다는 것, 군중의 반목과 사회적 갈등을 조작하는 것, 그래서 자신들의 증가와 승리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 자신들의 예언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군중을 조작하는 군중결집체로서 작동하는 폐쇄된 군중집단(검찰, 황색언론기업, 등등-이야기에서는 시냇가 낯선 사람들)을 이용한다는 것, 그리고 그 명령을 악착같이 반복하며 재촉하여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군중의 살상, 죽음의 전가라는 것이다. 파멸로 이끄는 무책임한 권력인지를 판단 할 수 있는 것은 군중 개체이다. 군중에 휘말리면 사고(思考)는 흔적없이 사라진다.

 

사실 권력은 시냇가 낯선 사람들, 죽은 자의 욕망이다. 때문에 이 욕망의 주체인 권력은 교만과 무지를 그 태생적 본성으로 하고 있다. 지금 한국의 새로운 권력에게 국민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미 손에 넣은 것은 단지 언제든 씹어 삼킬 먹잇감에 불과하니까. 그들이 아무런 계획도 없이 그저 자기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타자에 대한 무심과 거들먹거리는 걸음은 모두 타당한 이해를 가지고 하는 것이다. 외적 유사관계만 보이면 성급하게 일반화하는 터무니없고 맹랑한 추론방식, 허망한 환상일수록 꼬이는 군중의 맹목적 열정이라는 토대, 이 단순한 무지가 대중을 휩쓸면 그것은 곧 퇴행과 자멸의 길일 것이다. 크소사족을 닮은 한국의 군중사회와 권력의 실상을 생각게 한 오래된 그러나 너무도 현실을 자극하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出 處 :

(1) 귀스타브 르봉 . 군중 심리2022.1, 현대지성 , 39

(2) 엘리아스 카네티 , 군중과 권력2012. 바다출판사 , 255~265

(3) 귀스타브 르봉, 위와 동일,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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