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소사(Xosas)족의 자멸
- 집단의 맹목적 광신과 권력의 교활함에 대해서
인류의 위대한 정신, ‘엘리아스 카네티’가 쓴 『군중과 권력』은 군중의 물리학, 권력의 정신분석에 대한 독보적인 역작이다. 이 책의 한 장(章)인 「군중의 역사」에는 1856년에서 1857년에 발생한 남아프리카의 한 부족 전체가 최면에 걸린 듯 자멸을 향했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다. 이 이야기가 내게 준 강인한 암시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현실과 너무도 닮아있는 낯익은 광경이라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적, 혹은 먹잇감을 손에 넣은 권력은 세계가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며, 자신 이외의 그 어떠한 존재도 미물, 벌레, 음식거리 이상이 되지 못하기에 부동의 오만함을 즐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란 군중의 맹목적 추종이라는 우매함과 반대자에 대한 거리낌 없는 죽음의 실행이며, 군중 전체로 권력의 욕망을 확산 주입시킬 반복된 소문을 지속할 매체와의 동거이다.
사실 한국 사회는 조중동 황색 미디어를 비롯한 기득권 박탈에 반감을 가진 매체들이 5년 내내 끈질기게 반복한 흑색선전과 왜곡이 광범위해져 결국 몽매한 군중 전체에게 심리적 진실로 무의식적으로 안착시켜 온 것이 작금의 결과일 것이다. 이야기의 실질적 내용에 앞서 군중에 대해 보수적 관점에서 군중의 심리를 파헤쳤던 ‘귀스타브 르봉’의 정의를 잠시 살피고 가기로 한다.
르봉은 “군중은 예외 없이 정신적으로 무척 열등하다.”고 강력하고도 확신에 찬 어조로 단언했다. 즉, 군중에게는 의식을 지닌 개성은 사라지고 개인의 감정과 생각이 집단화되어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하고, 매우 뚜렷한 집단정신이 형성된 인간의 무리라고 말이다. 군중 구성원은 모두가 지닌 평범성을 공유하며, 독자적 의식이 사라지고 의지력과 분별력을 잃는다. 그리곤 “무의식 활동의 우세, 감정과 생각을 똑같은 방향으로 유도하는 암시와 전염, 암시받은 대로 즉시 행동하려는 경향(1)”을 가진다고 말했다. 이러한 앎을 전제로 이야기로 들어가 본다.
1856년 5월 크소사(Xosas)족의 한 어린 소녀가 물을 깃기위해 집 주변에 흐르는 시냇가에서 마주한 이야기로 시작해보자. 소녀는 낯선 사람들을 발견하고 부족의 예언자인 삼촌 ‘움흘라카자’에게 시냇가의 이야기를 전한다. 움흘라카자는 시냇가에서 낯선 이들로부터 어떤 의식을 수행할 것을 요구받는데, 그것은 죽은 자들을 위한 희생 제물로 황소를 받칠 것이며, 나흘 이후 자신들에게 다시 오라는 명령이다. 이 최초의 명령에는 어떤 목적도 발설되지 않은 맹목적 실행의 완수라는 권위적 명령만이 있는데, 마을의 예언자는 이를 저항 없이 수행한다.
나흘 후, 명령대로 다시 찾은 시냇가에서 움흘라카자는 낫선 이들 중에서 몇 해 전 죽은 형을 발견하고, 나머지 사람들도 부족의 누구였는지를 알아차린다. 죽은 자들의 혼령이다. 죽은 자들은 비로소 목적을 말하는데, 크소사족을 돕기 위해 바다 건너 저편에서 왔으며, 무적의 힘으로 영국인을 몰아내겠으니, 움흘라카자는 부족의 추장들과 그들 사이의 중개자 노릇을 하여야 하며, 이 조언을 받아들일 경우 놀라운 이적들이 발생하리라 말한다.
영매(靈媒)가 되어 움흘라카자는 마을 사람들에게 살 찐 소들을 죽여서 먹어야 한다고 말하고, 영계(靈界)로부터 전해진 이 이야기는 크소사족 사이에 급속하게 퍼진다. 소문을 잽싸게 나르는 것은 인간의 오래된 유별난 특성이다. 마치 자신이 제일 먼저 정보를 손에 넣었음을 과시하려는 듯이. 부족의 대추장 ‘크렐리’는 몹시 기뻐했다. 이것이 크렐리의 공작이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대추장은 지체 없이 혼(魂)들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고, 부족의 각 추장들에게 영계에서 전달된 명령에 조력할 것을 요청한다. 부족의 미래에 대한 예언, 죽은 자들의 입을 빌려 제시된 비전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즉 입증을 요구할 대상이 없기에) 자기 생명의 안전을 위협받는 상태에 몰리게 된다. 군중은 예외 없이 멍청하다는 르봉의 말을 입증하듯 전 부족민들은 광기에 휩싸여 자신들의 가축을 도축하고 한 톨의 곡식마저도 모조리 없애기 시작한다.
이때 가세하는 상황의 묘사가 있다. “예언자를 통한 계시들이 신속하게 늘어갔다.”는 것이다. 오늘로 말하자면 황색 미디어들의 줄기찬 반복적 주입이다. 신들린 수많은 사람들은 시냇가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를 인간사를 주관하는 혼령들의 목소리라 선언하며, 점점 많은 소들이 살육되고 희생물은 계속 늘어난다. 이러한 여론 몰이의 숨겨진 의도를 간파하거나, 이에 동조하기를 주저하는 이들은 어디에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깨달은 자들은 탈출하거나 마지못해 동조하거나를 선택하여야 한다.
이 요구는 살상과 죽음의 요구라는 자기 실존의 위협이라는 실체를 띠고 있음에도 부족민에게는 “위대한 인물들과 현명한 인물들이 부활하여 성실한 후손들의 기쁨과 함께 하리라(2)”는 낙관적 희망의 기대로 인식될 뿐이다. 의지력과 분별력을 상실한 군중의 정신은 자신의 오염을 지각하지 못한다. 바로 광기이다. “문명을 떠받치던 도덕적 세력이 영향력을 상실하면 분별력 없고 난폭한 군중이 등장해서 그 문명을 해체한 것이 인류 역사(3)”라고 했다.
권력은 이러한 역사적, 심리적 인식을 꿰뚫고 있다. 혼령들이 약속한 예언의 날이 다가올 때까지 공식 자료는 “1857년 한 해 동안 크소사 지역의 인구가 10만 5,000명에서 3만 7,000명으로 줄어들어, 대략 6만 8,000명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사건 기록에는 권력을 손에 넣은 자의 잔혹, 오만, 경멸(시), 탐욕, 교활함이 모두 담겨있으며, 군중의 특성, 즉 군중이라는 다수가 지니는 힘의 과신과 그로인한 본능의 억제로 풀려난 야만성, 그리고 소문의 무지막지한 전염성과 파급력, 피암시성과 최면성이라는 맹목적 믿음의 상호작용이 불러오는 상승작용으로서의 자기 파멸성이다.
르봉이 『군중 심리』에서 열거한 군중의 감정과 도덕성중 몇 가지만 더듬어 보자. 군중은 “순간에 일시적으로 받는 자극의 영향 아래 있을 뿐이며. 비판적 사고능력을 상실하고 모든 것을 무작정 맹신한다.” 이러한 군중의 상상력으로 사건이 왜곡되기 시작하면 전설이 만들어지고, 사소한 사건조차 곧 커다란 사건으로 변형된다. 논리적으로 아무런 관련 없는 일련의 새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군중은 일관성을 따질 줄 모르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반복되는 이러한 집단 환각 메커니즘이란 항상 이런 식이다.
이 이야기에는 많은 정치적 앎에 대한 교훈이 있다. 화려한 언어적 수사로 꾸며진 명령에는 음흉한 목적이 있다는 것, 군중의 반목과 사회적 갈등을 조작하는 것, 그래서 자신들의 증가와 승리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 자신들의 예언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군중을 조작하는 군중결집체로서 작동하는 폐쇄된 군중집단(검찰, 황색언론기업, 등등-이야기에서는 시냇가 낯선 사람들)을 이용한다는 것, 그리고 그 명령을 악착같이 반복하며 재촉하여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군중의 살상, 죽음의 전가라는 것이다. 파멸로 이끄는 무책임한 권력인지를 판단 할 수 있는 것은 군중 개체이다. 군중에 휘말리면 사고(思考)는 흔적없이 사라진다.
사실 권력은 시냇가 낯선 사람들, 죽은 자의 욕망이다. 때문에 이 욕망의 주체인 권력은 교만과 무지를 그 태생적 본성으로 하고 있다. 지금 한국의 새로운 권력에게 국민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미 손에 넣은 것은 단지 언제든 씹어 삼킬 먹잇감에 불과하니까. 그들이 아무런 계획도 없이 그저 자기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타자에 대한 무심과 거들먹거리는 걸음은 모두 타당한 이해를 가지고 하는 것이다. 외적 유사관계만 보이면 성급하게 일반화하는 터무니없고 맹랑한 추론방식, 허망한 환상일수록 꼬이는 군중의 맹목적 열정이라는 토대, 이 단순한 무지가 대중을 휩쓸면 그것은 곧 퇴행과 자멸의 길일 것이다. 크소사족을 닮은 한국의 군중사회와 권력의 실상을 생각게 한 오래된 그러나 너무도 현실을 자극하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 出 處 :
(1) 귀스타브 르봉 著. 『군중 심리』 2022.1, 현대지성 刊, 39쪽
(2) 엘리아스 카네티 著, 『군중과 권력』 2012. 바다출판사 刊, 255~265쪽
(3) 귀스타브 르봉, 위와 동일, 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