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람들의 생각에는 명령이란 것에 대해 어떤 숙명적인 굴종의 정신이 보입니다.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 수행하는 행위자는 그 명령의 선악과 관련하여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어떠한 관련성도 없는 별개의 사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요? 수행 행위와 행위자를 구분할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생각해보면 이러한 텅 빈 자아, 진정한 사유가 불가능한 이들의 개념 없음과 망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우선 한국사회에는 이와 관련한 아주 뚜렷한 오래되지 않은 사례가 있습니다.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과 그의 심복인 장세동은 이를테면 명령자와 수행자의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수없는 증인들과 증거에도 불구하고 수행자는 자신이 저지른 범행을 결코 자인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짓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는 한나 아렌트가 전범 재판에서 나치의 유태인 처형 운반 책임자였던 아이히만의 태도로부터 발견한 것, 즉 명령 수행자가 지니는 인간 실존성을 결여한 사유의 전적인 부재, 즉 사유의 진정한 불가능성의 지대인 악의 평범성과 동일한 선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이히만은 어떠한 죄책감도 없으며, 단지 명령을 성실하게 수행했을 뿐이라고 합니다. 나는 유태인을 저주하는 사악하고 악의 가득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이죠. 자신은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명령과 명령 수행자의 관계에서 그 책임에 대한 짧지만 위대한 기술(記述)이 있습니다. 불가리아 태생의 스페인계 유대인인 20세기의 위대한 사상가인 엘리아스 카네티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이죠,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내가 그랬을 리 없다.’며 자신들이 한 짓의 흔적을 마음속에서 찾으려 하지만 그것을 찾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명령 수행자가 자신들의 행동으로부터 이처럼 놀라울 정도로 영향을 받지 않으며, 심지어 죄의식을 전혀 느끼지 않을 뿐 아니라 후회도 마음속에 새김도 없는 이유입니다. 왜 인간의 마음에 이런 양상이 나타나는 것일까요? 명령의 본질 때문이랍니다. 명령은 그 명령을 받아들이고 수행해야 하는 사람에게 가시를 남깁니다. 이 낯선 이물질인 가시가 마음속에 새겨집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낯선 것, 가시로부터 벗어나려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가시에게 명령이 지닌 죄책감을 떠맡깁니다. 즉 자신이 아니라 가시에게 명령이 지닌 불의나 부당함을 넘기는 것이지요, 결국 가시야말로 진짜 범죄 행위자가 되는 것입니다. 카네티는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낯설고 이질적인 명령일수록 죄책감은 자아와 분리, 더욱 독자적인 된 가시의 것이 되는 것이라고 말이죠. 이렇게 죄의식과 자아가 분리되어 있기에 악으로서의 명령을 수행한 자들은 한결같이 행위와 자신을 일체화 시키지 못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명령에 따라 행동했던 사람들은 스스로 죄가 없다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건 공동생활을 하는 인간들에게 심히 위험한 요소입니다.

 

인간에게는 진정 부당하거나 불의한 명령과 대결하고 그 횡포를 뿌리칠 수 있는 용기가 없는 것일까요? 단지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것만이 유일한 것일까요? 아마 어느 누구도 이처럼 명령의 무조건적 수행만 하게 된다면 그런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요? 공포와 죽음만이 휩쓰는 독재 권력이 지배하는 지옥 아니겠어요?

 

한국 작가 천운영생강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고문경관 이라는 인물이 등장하지요. 이 자는 권력의 시녀가 되어 대공수사기관에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고문기술을 발휘하여 민주투쟁을 하는 학생들, 노동자들을 짐승처럼 다루는 독보적인 백정이 됩니다. 그런데 이 자는 대통령과 국가의 안위를 위한 충성스런 명령 수행자였을 뿐이라며 자신은 정의를 수호한 일꾼이라고 주장합니다. 특히 무고한 청년, 시민들을 무심하고 죄의식 없이 고문, 살해하며 자신과 자기 가족의 안위에 대해서는 끔찍한 인간인 것이죠.  고문기술자 이라는 인간은 카네티가 말하는 가시에 죄의식을 저당 잡힌 것이죠. 아마 자신의 생존을 위한 인간의 무의식적 처분이었을 거예요.

 

그들은 모두 똑같은 목소리로 항변합니다. 알지 못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조직에서 시키는 일, 권력이 명령한 일을 수행하는 것, 그것이 설혹 불의이고 위법이며 반인륜적일지언정 그런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 알려 하지 않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아니 그러한 구분에 대한 인식조차 이 사회는 요구치 않았고, 권력을 향해 달려가도록 채찍질하는 것이 이 사회 아니었느냐고 말입니다.

 

아이히만도, 고문기술자 안도, 장세동도, 이들 모두 그의 가족들과 친지들에게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친절하기까지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단지 명령권자의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수행이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핍박하며 심지어 죽음에 내몰기까지 했습니다.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은 그 어떠한 범죄행위도 스스럼없이 저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천운영의 소설에서 명령의 맹목적 수행자는 천박하기는 하지만 결코 어리석은 인물이 아닙니다. 아이히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한결같이 사유하는 인간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타인에 공감하지 못하는 무능력은 오히려 두 번째일 만큼 사유의 진정한 불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변질되는 것입니다. 명령은 결코 숙명이 아닙니다. 결코 복종하여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역사는 인간을 명령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저항의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명령이 주어졌으니 안 할 수 없는 것이라는, 더구나 자신의 삶의 지속성을 위해 이행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로는 이 세상을 결코 지탱 할 수 없습니다.

 

마치 지금의 한국사회가 누리는 민주주의가 당연한 것처럼 인식될지 모르겠지만 당대의 많은 젊은이들과 노동자 시민들의 피와 죽음이라는 명령의 거부, 저항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굴종을 요구하는 명령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가시는 한 번 슬쩍 치면 떨어져 나가는 그러한 것이 되는 명령이 되어야 합니다. ‘()과 사고(思考)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한나 아렌트의 말은 결코 반박될 수 없는 진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맹목적 추종은 모든 것을 퇴행시키는 전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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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2-07-06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중과 권력이 새단장해서 나왔군요!

필리아 2022-07-06 09:48   좋아요 0 | URL
지금 판매되는 책이 2010.10 개정판이네요. 훌륭한 저작이지요. ^*